지난 11장에서는 다윗이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범하고 또 그 밧세바가 임신을 하자 그것을 은폐하기 위해, 전쟁터에 있는 그의 남편 우리아를 불러들여 잠을 자게 하고, 그러나 두 번의 시도 끝에도 우리아가 거절을 하자, 이제는 전쟁터에 있는 요압을 시켜 우리아를 전쟁터 가운데서도 사지라고 할 수 있는, 최일선으로 내몰아 싸우게 함으로 그를 그 전쟁에서 죽게 하였던 장면을 살펴보았습니다. 다윗은 태만하여 짓게 된 범죄를 시작으로 점점 더 큰 범죄의 수렁속으로 들어가게 되었던 것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죠? 지금까지 그렇게 지혜롭고 신실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던 다윗이 어떻게 이번에는 이리도 전혀 사악할 수 밖에 없었느냐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하나님은 어떻게 할 것인가?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에 나오고 있습니다.
다같이 1절을 읽겠습니다.
"여호와께서 나단을 다윗에게 보내시니 와서 저에게 이르되 한 성에 두 사람이 있는데, 하나는 부하고 하나는 가난하니"
하나님은 범죄한 다윗에게 나단선지자를 보내셨다고 했습니다. 다윗이 인간적으로는 자신의 범죄로 걸림돌이 될 만한 것은 완벽하게 없애버렸다고 하나, 그러나 결코 없애버릴 수 없는 심판자가 기다리시고 계셨던 것입니다.
흥미로운 사실은 여기 하나님이 다윗에게 나단 선지자를 보낸 시점이 언제 였느냐 하는 사실입니다. 언제였을 것 같습니까?
14절을 보면, 밧세바가 다윗과 간음하여 임신한 아이를 이미 낳았다는 사실을 볼 수 있는데, 그러므로 지금 이 시점은 다윗이 밧세바를 범한 후 약 1년이 경과된 시점이 아닌가 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이리도 늦게 다윗을 찾아가셨는가? 어떻게 해석해야 하겠습니까? 그것은 아무래도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회개할 시간을 길게 주셨다고 밖에는 말할 수 없겠죠?
그러나 그럼에도 다윗은 회개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끝내는 하나님이 나타나셨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나님이 나타나시게 된 동기를 생각한다면, 그리 좋지 않은 예감이 들죠?
우리 삶도 이와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죄를 짓고 얼마간 아무런 일이 없는 것은, 하나님이 회개할 시간을 주신 것이기 때문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우리가 회개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하신다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간섭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날마다 회개하고 돌이키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렇게 하지 않았고, 이에 인내하시던 하나님은 이제 드디어 나단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한 성에 두 사람이 있는데, 하나는 부하고 하나는 가난하니, 그 부한 자는 양과 소가 심히 많으나," 다같이 3절을 읽겠습니다.
"가난한 자는 아무 것도 없고 자기가 사서 기르는 작은 암양 새끼 하나뿐이라. 그 암양 새끼는 저와 저의 자식과 함께 있어 자라며 저의 먹는 것을 먹으며 저의 잔에서 마시며 저의 품에 누우므로 저에게는 딸처럼 되었거늘,"
부자는 누구이고 양과 소가 심히 많다는 말은 무엇입니까? 부자는 다윗이고, 그런 다윗에게는 아내와 신복들이 심히 많았다는 것이죠?
그런데 가난한 자는 아무 것도 없고 라고 했습니다. 누구입니까? 여기 가난한 자는 우리아이겠죠? 그에게는 그저 자기가 사서 기르는 작은 암양 새끼 하나뿐이라... 누구입니까? 밧세바인 것이죠? 그런데 그가 우리아와 그의 자식과 함께 먹고 마시며 자라며 그의 품에서 딸과 같이 되었는데, 어찌되었다는 것입니까?
4절을 읽겠습니다. "어떤 행인이 그 부자에게 오매 부자가 자기의 양과 소를 아껴 자기에게 온 행인을 위하여 잡지 아니하고 가난한 사람의 양 새끼를 빼앗아다가 자기에게 온 사람을 위하여 잡았나이다."
손님이 오니까, 부자가 자기 양과 소는 잡지 않고 가난한 자의 그 암양 새끼를 빼앗아 잡았다는 것이죠? 이것이 간음했다는 말과도 좀 다르지만, 뭘 이야기하고 있습니까? 지금 다윗의 죄는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가난한 자의 재산을 탐냈고, 또 강압적으로 그것을 탈취했다는 것이죠? 따라서 그 죄는 더 무겁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 빼앗았다는 말을 나타내는 히브리 단어는 11장 4절에서 다윗이 우리아를 강제적으로 범했을 때도 사용하였었습니다. 그렇다면, 다윗은 지금 왜 이런 말을 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었을까요?
5절을 읽겠습니다. "다윗이 그 사람을 크게 노하여 나단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이 일을 행한 사람은 마땅히 죽을 자라."
여기 크게 분노했다는 말은, 막 뜨거운 김이 나올 정도로 씩씩거리고 얼굴이 욹으락 붉으락 했다는 말입니다. 가난한 자의 암양새끼를 강탈해 나그네를 대접한 부자에 대한 다윗의 분노는, 왕으로써 충분히 보일 수 있는 당연한 반응이라 할 수 있습니다. 특히 나단이라는 하나님의 선지자 앞이었기 때문에 더 그럴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맹세까지 하고 있죠? "이 일을 행한 사람은 마땅히 죽을 자라." 자신의 죄에 대해서는 합리화하고 너그러이 용서하면서도 다른 사람의 범죄에 대해서는 목에 핏대를 올리면서까지 정죄를 하는 타락한 인간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마도 나단선지자가 이와 같이 다윗의 죄를 비유로 돌려서 말하지 않고, 먼저 다윗의 죄를 책망하였다면, 분명 다윗은 핑계를 하였거나 죄를 합리화 하려는 마음을 가졌을 수도 있었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다음 6절은, 그 양 새끼를 사배나 갚아 주어야 하리라 고 했는데, 이는 출애굽기 22장을 보면, 이웃의 소를 훔친 경우는 다섯 배, 양을 훔친 경우는 네 배로 갚을 것을 기준으로 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학자는 이 ‘사배’에 근거해서 다윗의 범죄로 다윗의 네 아들이 이 죄의 결과로 죽임을 당했다 라고 주장을 하기도 합니다. 다윗의 둘째 아들 길르압, 이복누이다말을 강간하여 압살롬에게 살해된 첫아들 암논, 또 반역으로 죽임을 당한 압살롬, 그리고 솔로몬과 왕위경쟁을 벌이다가 처형당한 넷째 아들 아도니야 등입니다.
그러므로 나단 선지자는 다윗이 나단 선지자가 말한 비유에 대해 격노하는 반응을 보이자, 이제는 직접적으로 다윗의 범죄를 책망하고 있습니다. 다같이 7절을 읽겠습니다. “나단이 다윗에게 이르되 당신이 그 사람이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처럼 이르시기를 내가 너로 이스라엘 왕을 삼기 위하여 네게 기름을 붓고 너를 사울의 손에서 구원하고”
나단 선지자가 비열하고 사악한 행동을 한 부자에 대해 분노하는 다윗을 향하여 말한 첫마디가 무엇입니까? ‘당신이 바로 그 사람이라.’ 단호한 선포입니다. 다윗이 이 이야기를 듣는 순간 마음이 어떠했겠습니까? 갑자기 큰 충격에 휩싸였을 것입니다. 눈앞이 캄캄하고 두려움이 엄습해 왔을 것입니다. 나단을 통한 하나님의 책망은 간단합니다. 하나님은 네게 은혜를 베푸셔서 너를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워주셨을 뿐만 아니라, 부족한 것이 하나도 없게 하셨는데, 너는 어찌하여 여호와의 말씀을 업신여기고 악을 행하였느냐? 그리고 맨 마지막에 구체적으로 너는 칼로 우리아를 죽이되 암몬 자손의 칼로 죽이고 그 처를 빼앗아 네 처를 삼았도다. 라고 지적하며 책망하셨습니다.
이것을 듣는 다윗의 심정이 어떠했겠습니까? 과연 그는 온전한 정신으로 이 말을 들을 수 있었을까요? 그렇다면, 이런 다윗의 범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무엇일까요? 10절로 12절을 읽습니다.
“이제 네가 나를 업신여기고 헷 사람 우리아의 처를 빼앗아 네 처를 삼았은즉 칼이 네 집에 영영히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고, 여호와께서 또 이처럼 이르시기를 내가 네 집에 재화를 일으키고 내가 네 처들을 가져 네 눈 앞에서 다른 사람에게 주리니 그 사람이 네 처들로 더불어 백주에 동침하리라. 너는 은밀히 행하였으나 나는 이스라엘 무리 앞 백주에 이 일을 행하리라 하셨나이다.”
16장 22절을 보면, 압살롬이 온 이스라엘 무리의 눈 앞에서 그 부친의 후궁들로 더불어 동침하였다고 했습니다. 언약의 하나님은 그의 백성이 그에 말씀에 따라 온전히 행할 때는 이전의 다윗과 같이 엄청난 축복도 주시지만, 순종하지 않으면 그런 엄청난 축복을 받은 자라도 한 순간에 이런 엄청난 저주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도 하나님 앞에서 자만하거나 태만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다윗은 어찌할까요?
13절에서 다윗은 자신의 죄를 인정하죠? 그럴 때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나단이 다윗에게 대답하되 ‘여호와께서도 당신의 죄를 사하셨나니, 당신이 죽지 아니하려니와’ 14절입니다. ‘이 일로 인하여 여호와의 원수로 크게 훼방할 거리를 얻게 하였으니 당신의 낳은 아이가 정녕 죽으리이다 하고 나단이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라.’
이 말은 무슨 뜻이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회개하는 죄인은 용서하시되, 죄는 반드시 징벌하셔야 하기 때문에, 그 벌로 그 낳은 아이가 죽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악의 씨앗으로 맺은 열매를 방관하지 않고 제거해 버림으로써 거룩한 당신의 공의를 나타내신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결코 죄악으로 거두어들인 열매를 가만 놔두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그렇다면, 오늘 여러분에게 주시는 교훈은 무엇이겠습니까?
먼저 우리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두려워함으로 늘 범죄하기를 두려워해야 할 줄 믿습니다. 인간은 덮고 넘어가도 하나님은 덮고 넘어가시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왜냐? 죄인은 용서하시지만, 죄는 미워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는 예수의 피로 다시 하나님 앞에 회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둘째, 우리는 즉시로 회개하는 자가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거기서 나단선지자는 즉시로 징계를 낮추어 그의 낳은 아이만을 죽게 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즉시로 회개하고 또 회개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회개의 시가 시편 51편에 나오고 있죠? 그러나 하나님이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이 상한 심령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때, 하나님은 분명 여러분을 불쌍히 여겨 주실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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