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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nnel: 워싱턴메시야장로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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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의 죄인가?(삼하 13:3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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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감기로 인하여 지난 한 주간을 쉬었는데요, 앞으로는 제가 강해설교를 하고 있으니까요, 부목사님들이 새벽설교를 하실 때는 제 설교본문을 이어서 하시도록 하겠습니다.

    

지난 시간은 어디까지 살펴보았죠? 암논이 압살롬의 누이 다말을 강간하고도 박대한 일로 인하여 압살롬이 보복하는 장면을 살펴보았습니다.

    

압살롬은 2년 동안을 준비하여 복수를 하였는데, 양털깎는 날, 먼저 다윗 왕을 초청하고, 그러나 다윗이 바뻐서 가지 못한다고 하자, 암논를 보내달라고 요청함으로 암논이 그 양털 깎는 축제에 참가함으로 그에게 술을 잔뜩 먹이고 취하게 한 후에, 종들로 죽이게 하였던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소문은 어떻게 났습니까? 압살롬이 모든 왕자들을 다 죽였다고 났고, 이것이 다윗의 귀에 들어갔다고 했죠?

    

다만 암논에게 다말을 겁탈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던 요나답이 다윗에게 암논만 죽였을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상황은 어떻게 진전될 것인가? 다같이 34절을 읽겠습니다.

    

이에 압살롬은 도망하니라. 파수하는 소년이 눈을 들어 보니 뒷산 언덕길로 여러 사람이 오더라.”

    

어떻게 되고 있습니까? 압살롬이 도망하고 있죠? 이것은 다윗에게 압살롬이 모든 왕자들을 다 죽였다는 소문이 들어가지 않았더라도, 그가 암논을 죽인 것은 확실하기 때문에 도망을 갈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원문을 보면, 서둘러 달아나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압살롬은 다윗을 피하여 도망을 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다음 파수하는 소년이 보니, 언덕길로 여러 사람이 오더라는 말은, 도망을 갔던 왕자들이 나타나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여기는 어디일까요?

    

여기는 예루살렘입니다. 왕자들은 암논을 죽이던 압살롬으로부터 위기를 느끼고 도망을 쳐서 예루살렘으로 달려왔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앞에 구절과 비교해 보았을 때, 희망을 주는 상황의 전환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앞에서는 다윗 왕이 악한 소문으로 인하여 그의 왕자들이 다 죽은 줄로만 생각했는데, 이들이 이렇게 살아서 왕궁으로 돌아오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기쁜 소식이겠습니까? 여기 뒷산 언덕길로라는 말은, 그 왕자들이 얼마나 숨어서 노심초사하며 도망을 왔는지를 잘 보여준다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이 소식이 왕에게 전달이 되는데, 여기 또 지난 번 암논의 죄를 조장했던 요나답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다같이 읽겠습니다.

    

요나답이 왕께 고하되 왕자들이 오나이다. 종의 말한 대로 되었나이다.”

    

원문을 보면, ‘보십시오라는 감탄사가 쓰여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얼마나 요나답이 자랑스럽게 말하고 있습니까?

    

왜 그럴까요? 그는 지금 아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모든 일의 원인이 자기에게 있었음에도 그는 지금 자기가 방금 전에 왕에게 말한 사실이 확인되게 되니까, 누구보다도 먼저 왕에게 달려가 이 소식을 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죽었다고 생각했던 왕자들이 살아서 돌아왔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이들은 뭐라고 할까요? 다같이 36절을 읽겠습니다.

    

말을 마치자 왕자들이 이르러 대성통곡하니 왕과 그 모든 신복도 심히 통곡하니라.”

    

왜 왕자들이 대성통곡했을까요? 아마도 그들은 정말 죽는 줄로 알았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들은 압살롬이 암논을 죽일 때 자기들도 죽이는 줄 알고 도망을 갔고, 그래서 거기서 달음박질하여 여기 예루살렘까지 왔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진실을 알리는 만무하였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들은 형제가 형제를 죽인 참상과 더불어 자신들 또한 그런 위험 가운데 있었다는 사실과 그럼에도 거기서 피하여 이제는 안전한 곳에 이르렀다는 안도감에서 눈물이 와락 쏟아져 나왔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다윗은 왜 심히 통곡했을까요?

    

다윗의 경우는 아비니까, 당연히 통곡할 수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그는 암논에게 다말을 보냈고, 또 그래서 그 다말을 강간하여 복수심을 불태인 압살롬에게 그 암논을 보낸 장본인이었습니다.

    

따라서 그는 이 모든 일을 깊이 후회하며 찢어지는 듯한 가슴을 부여잡고 울고 또 울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이 더 후회하고 있었던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밧세바와 우리아에게 행한 간음죄와 살인죄이겠죠?

    

다윗은 지금 밧세바와 우리아에게 행한 자신의 악을 떠올리면서 범죄의 대가가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인가를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을 것입니다.

    

범죄를 저지를 때는 달콤한 잔을 마셨을지 몰라도, 저지르고 난 후에는 쓰디쓴 징계의 잔을 마시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우리는 죄를 저지르고 난 다음 후회하는 자가 아니라, 죄를 짓지 않도록 늘 성령으로 깨어 있는 자들이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압살롬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37절을 읽겠습니다.

압살롬은 도망하여 그술 왕 암미홀의 아들 달매에게로 갔고, 다윗은 날마다 그 아들을 인하여 슬퍼하니라.”

    

압살롬은 그술이란 곳으로 도망을 갔는데, 그 곳 왕자에게로 갔다는 것이죠? 얼마나 먼곳으로 갔을까요? ‘그술이란 나라는 이스라엘 북쪽 지역인 바산의 북동쪽에 위치해서 시리아와 접경을 이루고 있던 작은 나라였습니다.

그런데 왜 압살롬이 이 먼 곳으로 도망을 갔을 까요? 물론 다윗의 눈을 피해 멀리 멀리 가다보니까, 이 먼 곳까지 오게 되었다고도 볼 수도 있지만, 그러나 그술은 바로 압살롬의 외할버지 땅이었습니다.

    

따라서 압살롬은 이미 사고를 치고 난 후에, 그곳 자기 외할아버지 집으로 도망갈 계획을 사전에 다 수립해 놓았던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에 다윗은 날마다 그 아들을 인하여 슬퍼했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 그 아들은 누구일까요?

    

압살롬일 것 같죠? 그러나 이것은 압살롬이라고 보는 학자들도 있고, ‘암논이라고 보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대체적으로는 암논으로 보고 있습니다.

    

다윗은 외할아버지 집으로 도망을 가서 안전하게 거할 압살롬 보다는는 압살롬에게 처참하게 살해당한 암논을 위해 날마다 애곡하며 슬퍼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시간이 흐르고 있습니다. 다같이 38절을 읽겠습니다.

    

압살롬이 도망하여 그술로 가서 거한 지 삼년이라.” 얼마가 흘렀습니까?

    

삼년이란 세월이 흘렀죠? 저자가 본절에서 이렇게 3년이란 체류기간을 밝히는 것은 37절과 39절 사이에 시간적 간격이 있음을 명확히 나타내기 위함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뭘 나타내는 것입니까? 이것은 다윗이 암논의 죽음을 점차 현실로 받아들이는 시간이 되었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것이고, 용서할 수 없었을 것 같았던 압살롬에 대해서는 부자간의 정이 커져서 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지게 되었음을 암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암논을 향하던 그의 마음이 압살롬을 향하고 있습니다. 다같이 39절을 읽겠습니다.

다윗 왕의 마음이 압살롬에게 향하여 간절하니, 암논은 이미 죽었으므로 왕이 위로를 받았음이더라.”

공동번역을 보면, “왕은 암논이 죽었을 때, 받은 아픔이 차츰 가시면서 압살롬에게 품었던 노기도 풀렸다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원문도 문자적으로 번역하면, ‘그리고 다윗 왕이 압살롬을 향하여 분출했던 것이 다 끝마쳐졌다.’고 되어 있습니다.

    

3년이라는 시간이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패역무도한 짓을 한 압살롬에 대한 다윗의 분노를 가라앉히고 있었던 것입니다.

    

역시 시간이 약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그가 죽은 자신과 밧세바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를 다시 되돌릴 수 없었음을 깨닫고 금식하던 자리에서 일어났던 것처럼, 여기서도 이미 죽어버린 암논 역시도 되살릴 수 없음을 인정하면서 암논의 죽음을 현실로 받아들이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본문을 통해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교훈들은 어떤 것들이 있겠습니까?

    

첫째, 인생의 많은 문제들은 시간이라는 것이 해결해 줄 수 있음을 기억하고, 인내하는 일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만일 다윗이 인내하지 못하고 압살롬을 잡으러 갔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인내하였고, 결국 3년이라는 세월이 흐르긴 했어도 그를 용서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둘째,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모든 현실을 빨리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일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왜냐? 우리의 삶은 빨리 회복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다윗에게는 3년이 걸렸습니다. 그렇다면, 3년 동안 그의 삶이 얼마나 엉망이 되었겠습니까?

    

마찬가지로 우리도 시간을 끌면 끌수록 우리의 삶만 엉망이 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돌이킬 수 없는 현실 앞에서 그 현실을 빨리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일이 필요한 것입니다.

    

셋째,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현실이 누구로 인해 온다는 것을 바로 알아야 하겠습니까? 물론 하나님이시지만, 그러나 욥의 경우가 아니라면, 대부분은 우리 때문에 옴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내가 내 현실을 만든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암논이 죽은 것은 누구 때문이었습니까? 암논의 범죄 때문이었습니까? 물론 그럴 수 있죠?

    

그러나 여기 주인공은 누구입니까? 역시 다윗이라는 것입니다. 암논의 범죄와 압살롬의 범죄는 모두 다윗의 죄악으로 인해 생긴 일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마지막절에 다윗이 위로를 받았다는 말은, 그에게 닥친 비참한 현실이 바로 누구도 아닌 자신으로 인해 온 것임을 인정하였다는 의미가 전제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주인공이 되는 여러분의 인생 이야기는 어떻게 흘러가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만일 여러분의 삶이 하나님 앞에서 점검해야 할 것이 있다면, 반드시 점검하십시오. 그래서 빨리 그 길에서 돌이켜 하나님의 길로 행하시기를 바랍니다.

    

역대하 714절은,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겸비하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구하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 죄를 사하고 그 땅을 고칠찌라.”고 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오직 회개하고 돌이키는 방법 외에는 나의 죄로 인한 나의 삶을 돌이킬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삶이 언제나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삶이 되심으로 늘 주 안에서 회복되고 형통하는 삶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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