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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살롬의 귀환을 위한 요압의 계략(삼하 14: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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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압살롬이 암논을 죽일 때 도망을 갔던 왕자들이 예루살렘으로 귀환한 장면과 그리고 압살롬의 도망, 그리고 그 사건이 3년이 지나감에 따라 다윗이 위로받고 회복되었던 점을 살펴보며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오늘은 압살롬을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하려는 계책과 실행이 담겨져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계책되어지고, 실행되는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인지를 함께 살펴보며 은혜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다같이 1절을 읽겠습니다. “스루야의 아들 요압이 왕의 마음이 압살롬에게로 향하는 줄 알고

    

요압은 다윗의 군대의 수장이자, 다윗의 충실한 신복이었죠? 그래서 그는 아브넬 장군을 죽임으로 다윗으로부터 저주를 받았음에도 밧세바의 남편 우리아를 죽음의 현장으로 내몰라는 힘든 명령까지도 잘 수행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또 보면, 이런 요압이 다윗의 마음을 살피는 가운데 그 마음이 압살롬에게로 향하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과연 요압은 정말 충복이고, 그래서 지금도 다윗의 마음을 잘 살피고 있었던 것일까요?

    

한마디로 말하자면, 그렇지 않습니다. 지난 번에도 말씀을 드린 적이 있지만, 요압은 권모술수에 능한 자였습니다.

    

그래서 후에도 보면, 세바의 반란 때 아마사를 죽이고 군대장관으로 복직할 정도로 권력에 대한 집착이 강한 자였습니다.

    

따라서 이런 자가 다윗의 속마음을 알았다는 것은, 별로 좋은 느낌을 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제 그는 다윗의 판단력을 흐릴 것이 뻔한 일이었습니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러한 사실을 반영이나 하듯, 본장에는 하나님의 이름이 한번도 언급되지 않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오직 온통 인간적 생각과 술수로만 가득차 있다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우리의 생각과 말 속에 하나님의 이름이 한번도 떠오르거나 말해지지 않고, 그저 인간적 생각과 술수만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한다면, 그 인생이 어찌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압살롬 귀환을 위한 요압의 인간적 계책이 나오게 되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 결국 범죄한 다윗의 왕가에 재난이 임하게 되는데, 결국 다윗 왕국 전체의 재난으로 확대 재생산되게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런 일들이 진행될까? 다같이 2절을 읽겠습니다.

    

드고아에 보내어 거기서 슬기 있는 여인 하나를 데려다가 이르되 청컨대 너는 상제된 것처럼 상복을 입고 기름을 바르지 말고 죽은 사람을 위하여 오래 슬퍼하는 여인같이 하고

    

어떤 뉴앙스가 풍기고 있습니까? 진심이 아닌 가식적인 연출의 뉴앙스가 풍기고 있죠?

    

그렇다면, 왜 요압은 이처럼 슬기 있는 여인을 데려다가 상복을 입히고 죽은 자를 위하여 오래 슬퍼하는 여인같이 만들고 있었을까요?

    

뭔가 불길한 음모가 진행되고 있는 듯한 인상을 받을 수 있습니다. 실상은 다윗을 위로하기 위함인 것 같으면서도, 그 수단이 거짓임을 보면, 결코 좋은 느낌을 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요압이 이렇게 하고 있는 것은, 다윗에게 동병상련의 마음을 일으켜서 여인의 말을 수용하게 만들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진정 요압이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과연 그는 무엇을 하려고 하는 것일까요? 그러나 3절을 보면 그것을 아직은 감추고 있죠?

    

다만 그 이후에 먼저 요압이 택한 슬기로운 여인으로 보이는 드고아 여인이 등장하여 왕 앞에서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도와달라고 하면서, 계획된 음모를 시작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5절로 6절을 읽겠습니다.

    

왕이 저에게 이르되 무슨 일이냐, 대답하되 나는 참 과부니이다. 남편은 죽고 아들 둘이 있더니 저희가 들에서 싸우나 말려줄 사람이 아무도 없으므로 저가 이를 쳐 죽인지라.”

    

먼저 참 과부라고 했는데, 이렇게 과부라는 말을 강조하는 있는 이유는, 당시 율법이 과부를 보호할 것을 명하고 있다는 점을 이용한 것이고, 그래서 요압은 이것을 이용해서 다윗의 동정심을 이끌어 내려 하고 있는 것이죠?

    

그런데 그가 한 말을 보면, 어떻습니까? 마치 다윗이 당한 상황과 흡사한 이야기를 하고 있죠? 압살롬과 암논이 싸우나 말려줄 사람이 없으므로 압살롬이 암논을 쳐 죽였다. 그런데 그 다음도 마찬가지입니다. 다같이 7절을 읽겠습니다.

    

온 족속이 일어나서 왕의 계집종 나를 핍박하여 말하기를 그 동생을 죽인 자를 내어 놓으라. 우리가 그 동생 죽인 죄를 갚아 저를 죽여 사자될 것까지 끊겠노라. 하오니, 그러한즉 저희가 내게 남아 있는 숯불을 꺼서 내 남편의 이름과 씨를 세상에 끼쳐 두지 아니하겠나이다.” 무슨 말입니까?

    

먼저 상반절에서 사자라는 말은, ‘상속자를 말하는 것입니다. 암논이 장자로 상속자였지만, 그러나 죽고 그렇다면, 그 다음 둘째 길르압이 상속자가 되지만, 그는 암논보다 더 먼저 죽었을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에, 이제는 압살롬이 사실상 다윗의 왕위를 계승할 장자의 신분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이 말은 압살롬이 처한 상황을 묘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압살롬은 이와 같이 온 백성에게 죽게 될 위기에만 놓여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반절의 말씀도 결국 이러한 사실이 다윗의 왕가에 득이 되지 않고 있음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여기 이 의미는 압살롬이 설령 극형에 처할 죄를 저질렀다고 하더라도 그의 신분을 고려해 죄를 용서하고 이스라엘로 돌아오게 해야 한다는 필연성을 은연 중에 내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이야기를 들은 다윗은 과연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8절을 읽겠습니다.

    

왕이 여인에게 이르되 네 집으로 가라 내가 너를 위하여 명령을 내리리라.”

    

다윗이 여인의 문제를 해결해 주겠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죠? 그러나 다윗의 이런 판단은 어떻습니까? 이것은 매우 성급하고 어리석은 판단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다윗은 사건의 진위를 파악하지도 않은 채 그 여자의 말만 믿고, 그녀의 아들의 형제살인을 우발적인 것으로 속단하는 어리석음을 드러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난 번에도 다윗은 암논의 간청을 이기지 못하여 다말을 보냈고, 압살롬의 간청을 이기지 못하여 암논을 보냈었는데, 이런 작금의 판단력 결여는 그의 영적 무능력을 드러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찌하여 그 지혜롭고 분명한 판단을 했던 다윗이 이렇게 되었을까요?

    

그것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자신의 욕망을 채운 범죄의 결과였던 것입니다. 죄악 가운데 헤메이는 사람은 결코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죄로 인하여 징계를 받은 사람도 결코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요? 그 삶은 그 징계의 값이기 때문에 피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다윗은 어떻게 할 것인가? 어떤 조치를 취할 것인가?

    

그런데 그 여인이 가지 않고 계속해서 다윗에게 말하고 있죠? 다같이 13절을 읽겠습니다.

    

여인이 가로되 그러면 어찌하여 왕께서 하나님의 백성에게 대하여 이같은 도모를 하셨나이까, 이 말씀을 하셨으니, 왕께서 죄 있는 사람 같이 되심은 그 내어 쫓긴 자를 집으로 돌아오게 아니하심이니이다.”

    

무슨 말입니까? 다윗 왕의 허락을 받은 여인은 즉각적으로 왕이 자신에게 말한 것과는 모순된 행동을 하고 있음을 밝히고 있는 것이죠?

    

즉 이스라엘 백성들은 압살롬이 3년 동안이나 도망자의 신세로 살아가는 거을 원치 않았다는 것과 다윗은 그러한 염원을 아는지 모르는지 압살롬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었다는 것을 사실은 말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여인의 이런 지적과 요구가 합당한 것이었을까요? 이런 일을 계획한 요압의 의도가 정당한 것이었을까요?

    

그렇지 않죠? 사실 압살롬은 하나님의 율법대로 분명히 고살자였기 때문에 합당한 처벌을 받았어야만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압살롬이 무죄한데도 다윗이 추방해 버린 것처럼 말을 만들고 있었던 것입니다. 결국 다윗으로 하여금 죄책감에 들게 하고 있었던 것이죠? 왜요? 압살롬을 다시 불러 오게 하려고 했던 것이죠?

    

그러므로 14절에서 말합니다. 읽겠습니다. “우리는 필경 죽으리니 땅에 쏟아진 물을 다시 모으지 못함 같을 것이오나, 하나님은 생명을 빼앗지 아나하시고 방책을 베푸사 내어 쫓긴 자로 하나님께 버린 자가 되지 않게 하시나이다.”

    

어떻습니까? 이 말 자체는 아주 좋은 것이죠? 그러나 압살롬의 범죄를 생각한다면 어떻습니까? 합당하다고 볼 수만은 없는 것이죠?

    

하나님은 자비로우시고 은혜로우시고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소외된 자를 사랑하시지만, 회개하지도 않는 고의로 범죄한 자에게까지 은혜를 베푸시는 분은 아니시라는 사실은 간과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은 여기서 말씀을 맺겠습니다.

    

여러분 어떻습니까? 요압의 의도가? 별로 좋지 않죠? 물론 그가 다윗의 마음을 헤아려 압살롬을 데려오려는 계책의 기본적인 의도는 좋다 할 수 있을지 몰라도, 벌써 뭐가 틀렸습니까? 방법이 틀렸죠?

    

그렇지 않아도 범죄함으로 흐려진 다윗의 분별력을 더욱 흐리게 만들고 있습니다. 결국 우리는 여기서 다윗의 마음을 위한다고 하는 요압의 의도가 뭔가 심상치 않은 계략이 있음을 암시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의 삶은 언제나 의도뿐만이 아니라, 시작도 과정도 결과도 다 좋아야 할 줄 믿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삶은 인정에 호소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호소해야 하는 것이고, 그 기준은 언제나 하나님 말씀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이 여인은 말씀을 왜곡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삶은 말씀대로 행하시기를 바랍니다. 말씀으로 여러분의 삶을 가득 채우시기를 바랍니다. 시편 1281절은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도에 행하는 자가 복이 있도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기뻐하시고 축복해 주실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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