압살롬의 반역으로 인한 다윗의 도주, 지난 시간은 그 전 시간 하나님 앞에서 온전한 회개를 통하여 온전한 회복을 이룬 다윗이 하나님이 주신 놀라운 지혜대로 행동하여, 하나님의 궤를 다시 예루살렘 성으로 들여보냄으로 그것을 받드는 제사장들을 정탐꾼들로, 또 연락자로 심어둘 수 있었다고 했고, 또 팔레스타인 원주민인 후새를 아히도벨의 모략을 패할 자로 압살롬의 진영에 합류하게 했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과연 일은 어떻게 진행되어질 것인가? 과연 제사장들은 믿을만 하며, 후새 또한 믿을만한 사람인가? 혹 믿을만 하다 하더라도 아히도벨의 전략을 따라가지 못하여 작전에 실패하게 되는 것은 아닌가?
그러나 이 이야기는 잠시 중단되고 다윗에게 일어난 또 다른 일이 기록되고 있습니다. 다같이 1절을 읽겠습니다.
“다윗이 마루턱을 조금 지나니 므비보셋의 사환 시바가 안장 지운 두 나귀에 떡 이백과 건포도 일백송이와 여름 실과 일백과 포도주 한 가죽부대를 싣고 다윗을 맞는지라.”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까?
므비보셋의 사환 시바가 도망가는 다윗 일행을 마중 나와 먹을 것을 대접하는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므비보셋의 사환 시바가 왜 도망가는 다윗에게 이토록 많은 음식을 가지고 나타나 위로를 하고 있을까요?
므비보셋은 누구입니까? 므비보셋은 요나단의 아들이죠? 다윗이 그를 왕자의 상에서 먹게 해 주었던, 다윗의 은혜를 입은 자였습니다.
그리고 시바는, 다윗이 이렇게 므비보셋을 회복할 때, 사울 가문에 속했던 모든 재산을 므비보셋에게 주면서 그 재산을 관리하도록 하였던 자였습니다.
그러니까, 시바는 므비보셋의 그 많은 재산을 관리하고 있던, 청지기였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시바가 이 엄청난 양의 음식을 가지고 나온 것은, 바로 그의 주인 므비보셋 때문이었다는 말인가? 그런데 3절을 보면, 그렇지 않죠? 아주 음흉한 흉계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같이 3절을 읽겠습니다. “왕이 가로되 네 주인의 아들이 어디 있느뇨 시바가 왕께 고하되 예루살렘에 있는데 저가 말하기를 이스라엘 족속이 오늘 내 아비의 나라를 내게 돌리리라 하나이다.”
다윗의 처음 질문은 왜 지금 내가 이렇게 곤경에 처했는데, 므비보셋은 보이지 않고 너만 나타났느냐는 것이죠?
벌써 다윗의 질문부터가 기분이 좋지 않다는 눈치를 살필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에 대답하는 시바의 말도 그런 다윗의 기분에 기름을 끼얹고 있죠?
뭐라 했습니까? “저가 말하기를 이스라엘 족속이 오늘 내 아비의 나라를 내게 돌리리라 하나이다.” 이 말은 무슨 말입니까?
므비보셋이 거사를 일으키겠다고 했다는 것이죠? 그래서 그는 반란을 일으켜 예루살렘을 차지하기 위해서 지금 그 자리에 없다는 것입니다.
과연 진실일까요? 그렇지 않죠? 다윗은 그의 아비의 절친이었고, 또한 그에게 모든 것을 내어준 장본인이었고, 그리고 사울이나 요나단이나 누구에게도 잘못을 한 일이 없었던 자였습니다.
그러므로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도, 그가 단순히 나라를 도모하고자 하는 욕심이 아니라면, 다윗에게 억하심정을 가질 이유는 없었다는 것입니다.
결국 사실을 살펴보면, 반란이 일어났을 때 므비보셋은 다윗을 따라가려 했지만, 시바가 그를 속여 따라오지 못하게 했음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므비보셋은 다리를 절뚝거렸기 때문에 그냥 따라 갈 수 없어서 나귀에 안장을 지워 따라 가려고 했지만, 시바가 자신을 속여서 가지 못하게 하였고, 결국 시바는 그 나귀의 안장에 음식들을 가져왔음으로, 므비보셋의 말이 사실임이 증명되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시바는 왜 이런 거짓말을 하고 있었을까요? 그 다음 4절을 보면, 시바가 왜 이러고 있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읽겠습니다.
“왕이 시바더러 이르되 므비보셋에게 있는 것이 다 네 것이니라. 시바가 가로되 내가 절하나이다. 내 주 왕이여 나로 왕의 앞에서 은혜를 입게 하옵소서 하니라.”
시바가 왜 그렇게 했는지가 드러나고 있죠? 왜 그렇게 했다는 것입니까? 시바가 노렸던 것은, 바로 므비보셋의 재산이었습니다.
다윗은 므비보셋이 반란을 도모했다는 말을 하니까, 그 므비보셋의 재산을 시바더러 다 가지라고 했다는 것이죠.
다윗은 아들의 반역이란 엄청난 충격에 대응하는 일에만 분주하였던 터라, 므비보셋의 자초지종은 살필 여유가 없었던 것이고, 그러므로 이것이 거짓이라면 앞으로 얼마든지 판명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기에 이런 판단을 하였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물론 그럼에도 우리는 다윗의 그 엄청난 스트레스와 계속되는 도주로 인한 피곤함으로 인해 영육이 지쳐 판단력이 흐렸다는 의심을 떨쳐버릴 수가 없죠?
성도 여러분, 우리의 영혼이 건강하려면, 우리의 육체도 잘 건강하게 보존할 수 있어야 할 줄 믿습니다. 그래서 저는 쉼이라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느낄 때가 많습니다.
말씀을 준비하는 일에도 쉬지 못하고 피로에 지친 상태에서는 제대로 할 수 없다는 것을 종종 경험합니다. 그래서 그럴 때마다 잠깐씩 수면을 취하곤 합니다.
판단력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메릴랜드 연구소에서 26명의 군인들을 대상으로 53시간 동안 잠을 재우지 않고 판단력을 알아보는 실험을 했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무엇을 판단하는데 있어서 시간이 아주 길어지는 것을 발견했고, 또 도덕적인 문제를 개의치 않고 판단하는 것을 발견했다고 합니다.
또 존스 합킨스대에서 32명의 건강한 여성을 두 그룹으로 나눠 3일 동안 푹 잔 그룹과 도중에 여러 번 깨워 숙면을 방해한 그룹을 비교했는데, 숙면을 취하지 못한 그룹이 더 통증에 예민하게 반응했다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학자들은 말합니다. 수면이 부족하면, 정서적으로 불안정하고 기억력이 감퇴하고 집중력 판단력이 흐려지는 인지적 기능장애가 온다.
그러므로 어찌할 수 없는 피곤한 환경 가운데 생활하시는 여러분은 신중에 또 신중을 기해서 판단을 하고 분별해야 함을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하고, 또 적절한 휴식 또한 반드시 필요한 투자임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5절로 14절은 두 번째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이제 도망자의 신세로써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시므이라는 자에게 저주와 조롱을 당하게 되고 있는데, 다같이 5절로 6절을 읽겠습니다.
“다윗왕이 바후림에 이르매 거기서 사울의 집 족속 하나가 나오니 게라의 아들이요 이름은 시므이라 저가 나오면서 연하여 저주하고 또 다윗과 다윗왕의 모든 신복을 향하여 돌을 던지니 그 때에 모든 백성과 용사들은 다 왕의 좌우에 있었더라.”
시므이는 사울의 친척이었고, 다윗은 지금 공교롭게도 그 시므이가 살고 있는 지역을 통과하여 피신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자 시므이가 나와서 계속해서 저주하며 돌을 던졌다는 것이죠? 왜 그랬을까요?
당시 다윗이 도망을 가는 처지라고는 하나, 그래도 시므이는 평민이요, 다윗은 군사들을 대동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할 수 있었을까요?
이것은 시므이의 실수 인 것이죠? 그러나 그는 다윗이 다시 왕권을 회복할 때, 그 앞에 무릎을 꿇고 목숨을 구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는 그저 자신의 감정에 따라 앞뒤 분별하지 못하고 행하던, 미련하고도 비열한 자였음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시므이에 대해서도 다윗은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9절을 보면, 스루야의 아들 아비새가 시므이의 머리를 베갰다고 하지만, 다윗은 10절에 말합니다. 읽겠습니다.
“왕이 가로되 스루야의 아들들아 내가 너희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저가 저주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저에게 다윗을 저주하라 하심이니, 네가 어찌 그리하였느냐 할 자가 누구겠느냐 하고”
뭐라 하는 것입니까? 다윗은 시므이의 말을 시므이의 말로 들은 것이 아니라, 누구의 말로 들었다는 것입니까?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었다는 것이죠?
그는 자신이 전에 지었던 죄를 깨달으며, 그 죄로 인해 하나님은 현재 시므이를 통해 자기를 징계하며 훈련시키신다고 믿고 있었던 것입니다.
결국 다윗은 시므이를 어떻게 합니까? 11절을 보면, 저로 저주하게 버려두라 하면서, 12절에 말씀합니다. 읽겠습니다.
“혹시 여호와께서 나의 원통함을 감찰하시리니 오늘날 그 저주 까닭에 선으로 내게 갚아주시리라 하고”
또 뭐라는 것입니까? 다윗은 자신이 사울을 죽인 것이 아니니까, 시므이의 저주가 원통한 것이었고, 그러나 그럼에도 자신이 그 저주를 하나님의 음성으로 받았음으로, 그는 오히려 그 저주 때문에 하나님이 자신에게 선을 베푸실 것이라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흥미로운 사실은, 여기 ‘갚아주시리라’는 동사의 히브리 원문을 보면, 8절에서 시므이가 다윗을 저주했을 때 썼던 동사를 그대로 쓰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다윗이 그 시므이의 말을 그대로 사용함으로 저주를 선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갈망하고 있었음을 나타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다시 한번 다윗의 더 놀라운 신앙을 확인할 수 있죠? 그는 시므이의 음성을 하나님의 음성으로 듣는데서 그치지 않고, 더 나아가 그 저주의 음성을 축복의 음성으로 바꾸어달라고 갈망하며 기도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그에게는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그의 갈망이 이루어졌던 것을 볼 수 있죠?
성도 여러분, 성도는 아무리 저주스러운 상황 속에서도 다시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다는 믿음이 있어야 할 줄 믿습니다. 그래서 그 믿음을 가지고 소망 가운데 다시 갈망하며 부르짖는다면, 하나님은 반드시 축복해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예레미야가 시위대의 뜰에 갇힌 저주스러운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은 말씀하셨죠?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내게 보이리라.”
이 아침도 믿음으로 기도하셔서, 여러분의 기도가 과연 믿음대로 이루어지는 기도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