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우리는 숫적으로 열세에 있는 다윗의 군대가 군사들을 세분화하고, 압살롬의 군대를 선제공격하여 그들을 에브라임수풀로 이끎으로 결국 그 수풀의 지형적 조건을 이용하여, 전쟁을 승리로 몰아갔던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아직 전쟁이 끝난 것은 아니죠. 왜 그렇습니까?
반란의 주범인 압살롬이 아직은 살아있었기 때문이죠? 그러나 그도 오늘 죽고 있습니다.
9년이나 준비하여 다 이루어놓고도 결국 마지막 순간에 뜻을 이루지 못하고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오늘 그 과정을 살펴보면서,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을 찾으며 은혜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다같이 9절을 읽겠습니다. “압살롬이 다윗의 신복과 마주치니라. 압살롬이 노새를 탔는데, 그 노새가 큰 상수리 나무 번성한 가지 아래로 지날 때에 압살롬의 머리털이 그 상수리 나무에 걸리매 저가 공중에 달리고 그 탔던 노새는 그 아래로 빠져나간지라.”
먼저 압살롬이 다윗의 신복과 마주치니라 고 했는데, 사실 압살롬이 이기고 있는 상황 같았으면 이런 상황이 압살롬에게 불리하게 느껴지진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이 앞절에서 다윗의 군대가 압살롬의 군대 2만명을 죽였다는 기록을 접하였습니다. 그리고 난 직후에 이런 내용이 나오고 있습니다. 어떻습니까?
압살롬에게 뭔가 불길한 일이 일어날 것 같은 예감이 들죠? 거기다 지금 압살롬은 혼자였습니다.
사실 여기 다윗의 신복이라고 된 것은, 히브리 원문에는 복수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압살롬은 혼자였고, 다윗의 신복들은 여럿이 있었다는 것이죠.
그런데 또 압살롬이 노새를 탔는데, 큰 상수리 나무 아래로 지나갈 때에 머리털이 그 나무에 걸리고, 그는 공중에 매달리고, 나귀는 빠져나갔다고 했습니다. 어떤 상황입니까?
아무래도 압살롬이 혼자 다윗의 신복들을 만난 상황에서 큰 상수리나무 아래로 지나갔다는 것은, 도망을 갔다는 말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도망을 갔다 하더라도, 그는 머리털이 나무에 걸리고, 그가 탔던 노새는 도망을 감으로 홀로 나무에 매달리게 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머리털이 길었으면 그를 나무에 매달게 하고 있었을까? 14장 26절에서 그의 자랑이었던 머리털이 오히려 그에게 수치를 가져다주며 그의 최후를 재촉하는 촉매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도 여러분, 왜 압살롬이 그 많은 군사 가운데서 이렇게 홀로 있었고, 또 도망을 가면 잘 갔지, 왜 나무에 머리털이 걸려 오도가도 못하고 매달려 있는 신세가 되었을까요?
누가 이렇게 만든 것이겠습니까? 하나님이 모든 상황을 그렇게 만들어주신 것이죠?
아무리 치밀한 계획 속에 수많은 군사들을 동원했다 하더라도, 하나님이 만들어 놓으신 우습지도 않게 보이는 이 우연한 상황으로 인해, 그는 일순간에 무력하게 죽음을 기다리는 어처구니없는 불쌍한 처지가 되었던 것입니다.
10절을 보면, 이에 한 사람이 보고 요압에게 고하였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지난 번 요압은 다윗으로부터 소년 압살롬을 너그러게 대접해달라는 부탁을 받았는데, 과연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11절을 읽겠습니다. “요압이 그 고한 사람에게 이르되 네가 보고 어찌하여 당장에 쳐서 땅에 떨어뜨리지 아니하였느뇨, 내가 네게 은 열 개와 띠 하나를 주었으리라.”
무슨 말입니까? 왜 빨리 쳐서 죽이지 않았느냐는 것이죠? 왜 그랬을까요?
사실 도망간 압살롬을 데려온 사람은 누구입니까? 요압이죠? 그런데 왜 다윗의 말에 순종하지 않고 있었을까요?
성경학자들은 그가 과거에 정치 목적상 그술로 도피한 압살롬을 예루살렘으로 귀환하는 일에는 힘을 썼지만, 압살롬을 개인적으로는 좋아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고 보고 있습니다.
왜냐? 훗날 다윗의 아들 아도니야가 반란을 일으킬 때에, 요압은 이 아도니야를 지지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요압의 마음은 다윗의 후계자로 아도니야를 낙점하고 있었고, 따라서 그는 이번 기회에 반드시 압살롬을 제거해야 한다고 생각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요압이 압살롬이 아닌 아도니야를 다윗의 후계자로 낙점했을까요?
그것은 아마도 압살롬이 다윗의 후계자로써 더 이상 가망이 없어 보였기 때문이겠죠?
아무리 그술에서 데려왔어도 다윗은 그를 3년 동안이나 거들떠 보지도 않았습니다. 아마 거기서 요압의 마음은 이미 압살롬을 떠났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그렇다면 어떻습니까? 확실한 것이죠?
지금까지도 요압은 항상 자신의 권력을 최고로 만드는 편을 택하였었죠? 그러므로 이번에도 요압은 소망이 없는 압살롬을 제거하고자, 보다 확실한 편의 개국공신이 되고자 하였던 것임을 짐작해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여기 요압이 압살롬을 죽였으면 주었겠다고 한 은 열 개와 띠 하나를 훈장으로보는 학자들도 있지만, 대개는 물질적 포상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다음 구절은 말합니다. 12절을 읽겠습니다.
“그 사람이 요압에게 대답하되 내가 내 손에 은 천개를 받는다 할지라도 나는 왕의 아들에게 손을 대지 아니하겠나이다. 우리가 들었거니와 왕이 당신과 아비새와 잇대에게 명하여 이르시기를 삼가 누구든지 소년 압살롬을 해하지 말라 하셨나이다.”
병사 하나가 요압보다 낫죠? 요압은 그렇지 못하는데, 이 병사는 왜 이렇게 말할 수 있었겠습니까?
사실 이 병사는 일신의 영달을 꿈꾸기보다는 왕을 더 신뢰하고 무서워했기 때문이죠?
더 엄밀하게 말하자면, 그는 일개 군졸에 지나지 않았다 할지라도 하나님을 더 무서워하는 자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그는 지혜로운 자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13절을 읽겠습니다.
“아무 일도 왕 앞에는 숨길 수 없나니, 내가 만일 거역하여 그 생명을 해하였다면 당신도 나를 대적하였으리이다.”
무슨 말입니까? 어차피 자신이 압살롬을 죽였어도, 자신은 왕의 명령을 어겼다는 이유로 요압에게 죽었을 것이라는 말이죠?
그러니까, 요압의 의도는 압살롬을 죽이는 것이라도, 그 모든 것을 압살롬을 죽인 병사에게 뒤집어 씌워 자신의 의도는 가리우고 욕심만 챙겼을 것이라는 말이죠?
그러므로 더 이상 말싸움에서 이기지 못한 요압은 ‘나는 너와 같이 지체할 수 없다’하고는 작은 창 셋을 가지고 가서 압살롬의 심장을 찔렀다고 했습니다.
여기 14절에 아직 살아 있는 압살롬이라고 한 것을 보면, 압살롬이 단순히 나무에 걸려 있었던 것이 아니라, 치명상을 입고 위독한 가운데 매달려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혹자는 여기 머리털로 번역된 것을 머리로 번역하여, 그 머리가 두 갈래로 갈라진 상수리나무 가지 사이에 걸려 있었다고 해석을 하기도 합니다.
어찌했든 요압은 압살롬의 심장을 찔렀고, 이에 15절을 보면, 요압의 병기를 맡은 소년 열이 압살롬을 에워싸고 쳐죽였다고 했습니다.
여기 요압의 병기를 맡은 자들은 요압의 신복들이라 할 수 있죠? 아까 압살롬을 못 죽이겠다고 한 병사와는 다른 자들인 것입니다.
자 이렇게 해서 압살롬은 죽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요압은 나팔을 불어 전쟁을 그치게 하고 돌아오는데, 그렇다면, 이제 압살롬을 죽인 요압은 어떻게 될 것인가? 다같이 17절을 읽겠습니다.
‘무리가 압살롬을 옮겨다가 수풀 가운데 큰 구멍에 던지고 그 위에 심히 큰 돌무더기를 쌓으니라. 온 이스라엘 무리가 각기 장막으로 도망하니라.’
먼저 16절과 17절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한 가지가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다윗의 군대가 이스라엘 온 무리를 치고, 이스라엘 온 무리를 도망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전세가 이미 다윗의 군대에게로 기울었다는 것이죠.
그런데 사람들이 압살롬을 옮겨다가 수풀 가운데 큰 구멍에 던지고 큰 돌무더기를 쌓았다고 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사실 이 모습은 보통 왕이나 일반사람들의 장사방법이 아닙니다. 이것은 저주 받은 자의 장사법입니다.
18절을 보면, 그가 얼마나 명예심이 강한 사람이었으며, 자기 이름을 떨치고 싶어한 사람이었는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성경학자들은 아마도 그런 압살롬의 명예욕은 그의 빼어난 외모와 모든 사람들로부터 사모함을 받았던 것과 관계되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럼에도 후대에 자기 이름을 남길만한 아들이 없었고, 따라서 그것을 견디지 못하고 커다란 비석을 세워 이름을 남기려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욕심이 결국은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아버지를 대적한 저주 받은 자가 되게 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압살롬의 죽음을 하나님의 심판으로 보고 있었기에 이런 장사법을 택하였던 것입니다.
어찌하였든, 요압은 압살롬을 죽였고,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요압은 과연 잘 한 일일까요? 아니죠? 왜요?
결과는 하나님의 뜻이었지만, 그 과정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기 때문이죠?
따라서 그는 쓰임을 받고 버림을 받게 되는 종말을 보게 됩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의 삶은 언제나 하나님께 순종하고자 노력하는 가운데 내가 스스로 높아지려 하기보다는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는 가운데 선한 일에만 쓰임을 받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