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절부터 20장 2절까지는 다윗의 환궁을 둘러싼 이스라엘 지파 사이의 갈등과 세바의 반란에 대한 기록입니다.
다윗이 압살롬의 난을 통한 모든 난관을 헤치고 드디어 예루살렘 환궁을 눈 앞에 두고 있었지만, 또 다른 문제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애굽 땅에서 고난 받던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건넜다고 해서 모든 어려움이 다 사라진 것은 아니었죠? 다윗도 마찬가지였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죠? 우리도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 죄와 사망으로부터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지만, 여전히 어려운 일들이 많이 있죠?
그렇다면, 우리는 이와 같은 생의 어려움을 만날 때마다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가? 오늘 다윗은 어떻게 하고 있는가?를 살펴보면서 지혜를 얻도록 하겠습니다.
40절은 다윗이 요단을 건너 길갈로 갈 때, 백성의 절반이나 다윗 왕을 호행하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모든 백성의 절반이라면 얼마나 될까요? 수백만이 되겠죠?
그러나 사실 이것은 불가능한 이야기죠? 그래서 원문을 보니까, 여기 백성에 해당되는 단어가 군대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NIV 영어성경같은 경우를 보면, All the troops of Judah and half the troops of Israel, 로 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전체 유다군대와 절반의 이스라엘 군대라는 것이죠? 그렇다면,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성경학자들은 그렇다면, 다윗이 유다지파에게는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지만, 아직까지 북부 이스라엘 지파에서는 지지기반이 약했지 않았냐?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절반의 군대만 나왔다는 것입니다. 군부의 절반만 지지를 받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난 번 환궁을 논의한 것은 온 이스라엘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었을까요?
41절을 보면, 그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다같이 읽겠습니다.
“온 이스라엘 사람이 왕께 나아와서 고하되 우리 형제 유다 사람들이 어찌 왕을 도적하여 왕과 왕의 권속과 왕을 좇는 모든 사람을 인도하여 요단을 건네었나이까 하매”
역시 우려했던 일이 벌어지고 있죠?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까?
유다지파 사람들이 다윗 왕을 도적질하여 요단을 건너게 했다는 것인데, 이것은 왜 유다지파 사람들만 다윗을 모셔오는 일에 공로를 세우게 했느냐는 말과 같은 것이죠?
왜 그런 것입니까? 다윗이 일을 이렇게 되도록 만든 것이죠? 다윗이 어떻게 했습니까?
이스라엘 가운데 자신을 다시 환궁시킨다는 논의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는, 두 제사장을 시켜 유다지파에게 너희가 나를 환궁시키는 일에 ‘첫째가 되라. 공로자가 되라.’ 라고 하면서 죽어 마땅한 반란의 장수 아마사까지도 요압을 대신하여 군대장관으로 세우며, 오늘 이 자리에 제일 먼저 나오도록 하였기 때문이죠?
그러나 이 일은 결국 다른 지파들의 항의를 불러왔고, 그러므로 지파간의 주도권 다툼에 불씨를 일으키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지금 북 이스라엘 지파들은 다윗의 환궁 과정에서 배제된 것을, 앞으로 새롭게 시작될 다윗 왕정에서도 주도권을 빼앗길 것으로 보고 항의를 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결국 이런 무기력함과 인본주의적인 발상에서 비롯된 유다지파를 등에 업은 다윗의 환궁은 이스라엘과 유다 간의 반목과 질시라는 심각한 후유증을 낳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런 일들이 쌓여 결국 훗날 솔로몬이 죽고 난 후에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로 왕국이 갈리는 요인이 될 수도 있었을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아무튼 정치라는 것은 공정하지 않으면 꼭 문제를 만들어내게 되는 것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죠?
그래서 교회에서도 할 수 있는 대로 모든 일이 다 공정하여야만 하는 것이죠? 그러나 쉽지 않죠? 인간이기에 실수가 있기 때문이죠? 그러나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 기도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본심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결국 싸움이 벌어지는 것을 볼 수 있는데, 42절을 읽겠습니다.
“유다 모든 사람이 이스라엘 사람에게 대답하되 왕은 우리의 지친인 까닭이라 너희가 어찌 이 일에 대하여 분내느냐 우리가 왕의 물건을 조금이라도 먹었느냐 왕께서 우리에게 선물 주신 것이 있느냐”
유다사람들이 변명을 하며 자신들이 먼저 왕을 환궁시키는 데 앞장 선 일은 지친 인 것 이외에 아무 이유도 없다는 듯이 말을 하고 있죠?
지친이 뭡니까? 지친이란 가까운 사람 혹은 친척이란 뜻인데, 다윗이 유다지파 사람임을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이죠.
그러므로 어찌보면 다윗의 지친인 유다지파가 다윗을 맞이하러 먼저 홀로 나간 일은 그리 이상한 것같아 보이지 않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북 이스라엘 사람들은 뭐라고 합니까? 43절을 읽겠습니다.
“이스라엘 사람이 유다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는 왕에 대하여 십분을 가졌으니 다윗에게 대하여 너희보다 더욱 관계가 있거늘 너희가 어찌 우리를 멸시하여 우리 왕을 모셔오는 일에 먼저 우리와 의논하지 아니하였느냐 하나 유다 사람의 말이 이스라엘 사람의 말보다 더 강경하였더라.”
우리가 보기엔 아무 일도 아닌 것 같은데, 굉장히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죠?
뭐라고 합니까? 자신들은 왕에 대하여 십분을 가졌다고 합니다. 십분이 뭡니까? 북이스라엘이 열지파이니까, 열을 가졌다는 것이겠죠?
사실 여기 북 이스라엘에는 베냐민 지파도 포함하여 11지파가 있었지만, 성경학자들은, 당시 베냐민 지파는 시므이가 천명을 데리고 나왔었기 때문에 제외했던 것이 아닌가 추측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유다는 하나요, 북이스라엘은 십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어디가 더 큽니까? 사실은 북 이스라엘이 더 큰 것이죠?
게다가 반란을 다 같이 일으키기는 했지만, 압살롬의 반란의 주도세력은 어디였습니까? 유다지파였죠?
그러므로 유다 지파는 아무리 지친이라도 다윗을 먼저 홀론 나와 맞이할 수 있는 아무런 근거가 없었던 것이죠. 이에 이들은 강경하게 대응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사실 제가 생각하기엔 아무 일도 아닌 것 같은데...., 그것도 먼저 나와 왕을 맞이하는 일이 뭐 그리 대단한 일이라고...., 안 그렇습니까?
다윗이 원래 유다를 마음에 품었으면 어떻게 하든 유다의 말에 귀를 더 귀울이게 되는 것이 아니었겠습니까?
그러나 이런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왜 목사님들을 청빙할 때도 누가 공항에 먼저 나오느냐? 누가 제일 먼저 연락하고 모셔오느냐? 에들 민감하죠?
아마 여기서도 이런 정치적인 논리가 매우 크게 작용하고 있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결국 세바의 난이 일어나고 있는데, 1절을 읽겠습니다.
“마침 거기 난류 하나가 있으니 베냐민 사람 비그리의 아들 세바라 하는 자라. 저가 나팔을 불며 가로되 우리는 다윗과 함께할 분의가 없으며 이새의 아들과 함께할 업이 없도다. 이스라엘아 각각 장막으로 돌아가라 하매”
난류라는 말은 무엇입니까? 영어성경을 보면, 'troublemaker'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어디 가든 항상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이 있죠?
그런데 그 사람들이 대부분 어느 때에 결정적인 문제를 일으킵니까? 지도자가 결정적인 실수를 할 때, 결정적인 문제를 일으키죠?
여기서도 이 trouble maker 세바가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거기서 나팔을 불며 ‘자신들은 다윗과 함께 할 분의=분깃, 분배할 업, 이 없다’고 하면서, 항의하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자기 집으로 돌아가도록 동요시키고 있습니다.
나팔을 불었다는 것은 군사적 신호를 보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이 말은 세바가 무장반란을 도모하고 있었음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결국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2절을 읽겠습니다.
“이에 온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윗 좇기를 그치고 올라가 비그리의 아들 세바를 좇으나 유다사람들은 왕에게 합하여 요단에서 예루살렘까지 좇으니라.”
온 이스라엘이라고 했습니다. 드디어 남 유다와 북 이스라엘이 완전히 갈라져 버리고 서로 반목하며 질시하는 가운데 전쟁이 일어나게 됨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먼저는 이 부족한 종이 어떤 정치적 계산으로 목회하지 않도록 기도해 주시기를 바라고요, 여러분도 이런 기대와 계산 가운데 신앙생활하지 않도록 힘써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한다면, 지금 중요한 것은 누가 다윗을 데리러 나왔느냐가 아니었죠? 무엇이었습니까? 다윗에게 그를 버리고 압살롬을 좇은 일에 대해 머리를 조아리고 사죄를 먼저 해야 했던 것이죠.
그러므로 세바의 난은 다윗이전에 자신들의 잘못을 뉘우치지는 않고 여전히 권력에 눈이 어두워 논쟁을 일삼는 유다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었다고 할 수 있죠? 결국 하나님은 누구의 손을 들어주십니까?
유다가 아니라, 다윗의 손을 들어주셨던 것이죠? 결국 유다의 아마사가 아닌, 압살롬의 난 때 함께 했던 요압이 이 난을 진압하게 되는 것을 앞으로 보게 됩니다.
무엇을 교훈하고 있습니까?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오직 나를 높이시기도 하시고 나를 낮추시기도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기억하여, 늘 모든 것을 하나님께만 맡기고 신실하게 충성해야만 할 줄 믿습니다. 충성하기만 하면 하나님이 높여주시는 것이죠.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