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uantcast
Channel: 워싱턴메시야장로교회
Viewing all articles
Browse latest Browse all 1287

하나님은 사람과의 약속도 소중히 보신다.(삼하 21:1-9)

$
0
0

사무엘하는 통상적으로 3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1부는 1장으로부터 10장까지, 다윗의 성공시대를 기록하고 있고, 그러나 제2부로 분류되는 11장부터는 갑자기 승승장구하던 다윗이 20장까지 계속 환란을 당하게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장남 암논이 배다른 여동생 다말을 겁탈하고, 또 다말의 오빠 압살롬은 암논을 죽이고, 후엔 반란을 일으키고, 또 그 반란을 평정하고 나니까 세바의 난이 일어나고, 계속해서 힘든 일이 일어납니다. 왜 이런 힘든 일들이 연속적으로 일어났을까요? 그것은 다윗이 밧세바를 범하고 그의 남편 우리아를 죽인 결과인 것이죠?

    

그런데 사무엘하 21장을 보면,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으로 즉위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삼년간의 심각한 기근을 맞이하게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다윗이 유다의 왕을 넘어 온 이스라엘의 왕으로 즉위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때로 추정되는 시기에 일어난 일로 보고 있는데, 사실 사무엘하 1장으로부터 10장을 보면, 그때는 다윗이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 속에 승승장구하고 있던 시대였죠?

    

그런데 왜 이런 다윗의 통치 기간에 기근이, 그것도 성경을 보면, 단순한 재해가 아닌 하나님의 심판으로 인식되는 이러한 기근이 삼년이나 연속적으로 일어났을까요? 과연 이 일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1절을 보면, 다윗이 이 일로 인하여 여호와 앞에 간구할 때,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이는 사울과 피를 흘린 그 집을 인함이니, 저가 기브온 사람을 죽였음이니라라고 하셨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왜 삼년 연속 기근이 왔다는 것입니까? 사울과 그의 집안이 가나안의 기브온 거민들을 죽였기 때문이라는 것이죠?

    

그렇다면, 이것이 왜 문제가 됩니까? 2절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기브온 사람은 이스라엘 족속이 아니고, 가나안 원주민인 아모리 사람이지만, 여호수아 9장을 보면, 가나안 정복전쟁 당시 여호수아가 이 사람들의 생명을 해하지 않기로 언약을 맺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사울이 그 언약을 깨뜨리고, 그들을 죽였다는 것입니다. 왜냐? 왜 겠습니까?

    

이스라엘과 유다족속을 위한 열심 때문이라고 했는데, 이것은 민족적 이기주의를 말하죠? 자기 민족의 유익을 위해 조상들이 맺은 언약까지도 패기하고 약한 자들을 죽였다는 것이죠.

    

잘 한 일입니까? 잘못한 일입니까? 있을 수 있는 일입니까? 있을 수 없는 일입니까? 물론 있을 수 있는 일이죠?

    

그런데 문제는 지금 이것을 누가 지적하고 있다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지적하시고 계신다는 것이죠?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하나님은 약속을 더 소중히 여기시는 분이시라는 사실을 알 수 있죠.

    

한 가지 아이러니한 사실은 사울이 잘못했으면 사울이 통치하는 시대에 벌을 받든지, 혹 받지 못했으면 없어지는 것이지, 왜 다윗 시대에 그 사울이 잘못한 재앙을 이스라엘이 받아야 하는가 하는 문제일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러나 혹자는 이 일에 대해, 출애굽기 347절을 근거로, 하나님의 아비의 죄를 자여손 삼, 사대까지 보응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맞습니까? 그렇지 않죠? 왜요?

    

에스겔 1817, 20절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에스겔 선지자를 통해, ‘아들, 혹은 자손들이 아비의 죄악으로 인하여 죽지 아니하며 아들은 아비의 죄악을 담당치 아니할 것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가문의 저주나 저주의 유전은 없다는 것이죠.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 사울의 당대에 벌을 내리지 않으시고 다윗의 시대에 벌을 내리셨을까요?

    

성경학자들은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회개의 기회를 주셨기 때문이다.’ 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들이 회개하지 않으니까, 참고 참으시다가 벌을 내리시게 되었다는 것이죠.

    

그러나 다윗이 이러한 사정을 깨달을 리는 만무하겠죠? 사실 사울이라도 깨닫기가 쉽지 않을 수도 있죠? 그런데 어떻게 깨닫게 되었다는 것입니까?

    

하나님께 기도하니까, 하나님이 가르쳐주셔서 그저서야 알게 되었다는 것이죠?

    

여기서 깨닫는 것은 또 무엇이 있겠습니까? 아쉽다는 것이죠? 왜요? 미리 기도했으면 미리 알아서 그 재난을 빨리 해결할 수도 있었는데, 3년 동안이나 기도를 하지 않아 3년 동안이나 고통을 받았다는 것이죠.

    

우리도 그럴 때가 있죠? 하나님께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해결해 주시는데, 그냥 내가 붙들고 있다보니까, 시간만 지나가고 문제만 남아 있을 때가 있죠? 그러나 우리는 문제 앞에서 어떻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까? 기도해야 한다는 것이죠.

    

그러나 이제라도 다윗은 기도함으로 알게 되었고, 결국 그들을 찾아 속죄할 방도를 찾고 있죠? 3절에 이 내용이 나옵니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어떻게 하랴, 내가 어떻게 속죄하여야 너희가 여호와의 기업을 위하여 복을 빌겠느냐?’

    

그렇다면, 이들이 어떤 방도를 말할까요?

    

4절을 보면, 자신들은 사람을 죽이는 일을 할 수 없다고 하니까, 다윗이 무엇이든 말하면 시행하리라 했던 것을 볼 수 있는데, 이 말은 너희가 할 수 없으면 내가 하겠다. 다시 말해 내가 허락하겠다는 말이죠? 왜요? 재앙을 빨리 해결해야 하니까 그런 것이죠?

    

그래서 5절로 6절을 보면, 그 족속을 학살한 사람의 자손 일곱을 내어주면 사울의 고향 기브아에서 저희의 목을 매달겠다고 합니다. 왜 일곱이었을까요?

    

일곱은 완전수이니까, 일곱이면 그들 전체로 인정해 주겠다는 것이죠?

또한 기브아에서 하겠다는 것은, 하나님이 사울을 선택하신 그곳에서 하나님의 심판을 행하겠다는 의도를 드러내고 있었던 것이죠.

    

특히 여기 목매어 달겠나이다.’라는 말을 원문에서 보면, 단순히 공중에 매달겠다는 것이 아니라, 그 일곱을 칼로 쪼갠 다음, 그 사체의 일부 혹은 머리만을 공중에 매달아 놓겠다는 의미임을 볼 수 있는데, 무엇을 연상케 하고 있습니까?

    

언약(베리트)이라는 말과 아브라함이 창세기 15장에서 짐승을 쪼개 제사를 행한 일을 생각나게 하고 있죠?

    

그들은 언약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에, 그와 같이 벌을 받고 있었음을 나타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다윗은 이제 어떻게 할까? 다시 도리가 없죠? 왜요? 하나님이 시작하신 일이니까요, 그렇죠?

    

결국 다윗은 사울의 집안 후손 일곱을 기브온 사람들에게 내어주는데, 여기에는 다만 요나단과의 언약을 지키고자 그의 자녀 므비보셋은 내어주지 않고 아꼈다고 했습니다. 무엇이 강조되고 있습니까? 여전히 언약이 강조되고 있음을 볼 수 있죠?

    

그렇다면, 오늘 말씀은 무엇을 깨닫게 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은 하나님과 맺은 언약도 소중하게 여기셔서 지키기를 원하실 뿐 아니라, 또한 우리 서로 서로가 맺은 언약도 소중히 보셔서 그것도 지키기를 원하시며, 그래서 과연 우리가 그런 것들을 지키는지를 지켜보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삶에 하나님이나 사람과 맺은 언약을 지키지 않은 것이 있다면 빨리 돌이켜 회개하고 지키는 삶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죠?

    

그래야 앞으로 다가올 하나님의 채찍이나 아니면 어쩌면 현재 그것 때문에 받고 있을지 모르는 고난을 해결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도 여러분의 삶이 하나님과 이웃과의 사이에서 맺은 언약을 지키시는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삶이 형통할 줄 믿습니다.

    

    

    

    

    

 


Viewing all articles
Browse latest Browse all 1287

Trending Articl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