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시간은 아말렉 소년에게서 사울 왕 사망의 보고를 받은 다윗이 심히 애통해 한 장면과 여호와의 기름부음받은 자를 죽였다고 한 그 소년을 처형하는 장면을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이어지는 오늘 17절이하는 다윗이 사울과 요나단의 죽음을 애도하는 노래입니다.
이처럼 다윗이 사울과 요나단의 죽음을 슬퍼하여 애가를 짓고 또 18절에 나타나는 바와 같이 유다족속에게 가르치게 한 것은, 역시 그가 사울의 죽음과 무관하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할 수 있습니다.
18절에 활 노래라는 것은 사울과 요나단이 활을 잘쏘는 베냐민 지파 사람들이기 때문에 이런 이름을 붙였던 것이고, 야살의 책이라는 말은, 역사상 이스라엘 민족의 위대한 영웅들의 이야기나 기억되어야 할 의미있는 사건들을 모아 집대성한 책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다윗이 사울과 요나단을 추모하기 위하여 그들이 잘 쏘는 활을 주제로 노래를 지어 그것을 이스라엘의 영웅이야기에 넣도록 하였다는 것입니다.
사울은 비록 다윗을 사사로운 감정으로 죽이려고 했지만, 다윗은 그가 기름부음받은 왕이라는 사실만으로 그의 명예를 이 책 속에서 드높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노래합니다. 다같이 19절을 읽겠습니다.
“이스라엘아 너의 영광이 산 위에서 죽임을 당하였도다. 오호라 두 용사가 엎드러졌도다.”
사울과 요나단을 이스라엘의 영광이라 칭하며, 그들을 또한 두 용사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특히 여기 영광이란 단어의 히브리 단어는, 들노루라는 의미도 있는데, 이것은 바로 요나단의 별명이었다고 보기도 합니다.
들노루는 용사들의 민첩함을 묘사하기 위해 자주 쓰인 말인데, 사무엘하 2장 18절을 보면, 아사헬의 발이 늘노루처럼 빠르다고 언급되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요나단도 그만큼 빨랐다는 것이죠.
또 두 용사라는 말은 복수입니다. 앞에서는 단수로 요나단의 영광만을 언급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나, 여기서는 용사들이란 복수형으로 다윗이 요나단에 대해 애통한 사랑과 함께 이스라엘의 왕이었던 사울에 대한 경의도 표하고 있음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 용사라는 말은, 이 노래에서 5번이나 반복되며 시의 앞뒤를 장식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노래는 이런 비중있는 개념으로 단지 사울과 요나단의 비참한 죽음을 슬퍼하는 차원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용사됨을 역설적으로 찬양하는, 보다 긍정적인 차원의 노래임을 나타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20절은 노래합니다. 읽겠습니다.
“이 일을 가드에도 고하지 말며 아스글론 거리에도 전파하지 말지어다. 블레셋 사람의 딸들이 즐거워할까, 할례받지 못한 자의 딸들이 개가를 부를까 염려로다.”
다윗은 지금 블레셋 사람들이 사울과 그 아들들의 죽음을 모르고 있기를 원하고 있죠? 그러나 어떻습니까?
사실 이미 그들은 사울과 그 아들들의 죽음을 알고 있었죠?
그러므로 우리는 혹 다윗이 지금 블레셋 사람들이 사울과 그 아들들의 시신을 성벽에 걸어놓았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였을 수도 있었다는 사실을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다윗은 전혀 감감무소식 가운데서 사울의 죽음의 소식을 전해 들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 블레셋의 아기스왕도 아직까지 그에게 만큼은 사울의 죽음의 소식을 알리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또 21절은 노래합니다. 읽겠습니다.
“길보아산들아 너희 위에 우로가 내리지 아니하며 제물 낼 밭도 없을지어다. 거기서 두 용사의 방패가 버린 바 됨이라. 곧 사울의 방패가 기름부음을 받지 않음같이 됨이로다.”
다윗은 사울과 요나단의 죽음의 현장인 길보아를 저주하고 있습니다. 흥미로운 부분은 그 땅에 두 용사의 방패가 버려졌는데, 사울의 방패는 기름부음을 받지 않음과 같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무슨 의미일까요?
원문을 보면, 여기 기름부음을 받지 않은 방패는, 기름이 발라지지 않은 방패라는 뜻이 있습니다.
즉 다시 말해 사울이 화살을 맞게 된 것은 화살이 빗겨가도록 하기 위한 기름을 그의 방패에 한번도 바르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사울이 마치 여호와의 기름부음을 받지 않은 자처럼 그분의 도움을 전혀 받지 못하고 죽었다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 22절을 읽습니다. “죽은 자의 피에서, 용사의 기름에서 요나단의 활이 물러가지 아니하였으되 사울의 칼이 헛되이 돌아오지 아니하였도다.”
이것은 사울과 요나단의 용맹과 미덕을 찬양하는 내용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요나단은 활을 쏘고, 사울은 칼을 휘둘러, 적군의 기름을 뚫고 피를 흘렸다는 것인데, 한번도 물러나거나 헛되이 휘두르거나 쏜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아주 대단한 것이죠? 그러므로 당시 전투가 얼마나 치열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는 것이고, 이에 블레셋이 얼마나 큰 전쟁을 일으켰는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23절의 원문의 뜻은,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자들이여, 그대들은 사나죽으나 서로 갈라지지 아니하였구나’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사울은 요나단을 죽이려고도 했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 서로 갈라지지 아니하였구나 라는 말은 무슨 의미이겠습니까?
이것은 요나단의 효심을 말하는 것입니다. 한 쪽이 갈라지지 않으려니까, 서로 갈라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갈라지지 않으려는 쪽은 누구였겠습니까?
요나단이죠? 그는 끝까지 자신의 아버지 곁에서 장렬한 죽음을 맞이하였던 것입니다. 그는 효도하는 아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용맹스럽고 아름다운 부자에 대한 묘사는 그들의 죽음을 더욱 슬프게 만들고 있습니다.
게다가 24절은 왕이 살아생전에 백성들이 왕으로 인하여 붉은 옷을 입혔고 금노리개를 그 옷에 채우게 하였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왕이 이렇게 죽었다고 하니, 얼마나 이를 듣는 이스라엘 백성을 더 슬프게 만들고 있겠습니까?
여기 24절에 ‘이스라엘 딸들아’라고 한 것은, 이에 앞서 20절에 블레셋 사람의 딸들과 대조를 이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대조를 이룹니까? 이스라엘 딸들은 슬퍼하고 블레셋의 딸들은 기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아들들이라 안하고 딸들이라 했을까요? 아들들은 다 전쟁에 나가서 알고 있기 때문인 것이죠? 25절은 19절과 어순만 바뀌고 다 똑같습니다.
다만 앞에서는 사울과 요나단 모두의 영광을 뜻하였지만, 여기서는 요나단만을 지목하여 그의 영광을 부각시키고 있다는 점이 다릅니다.
결국 다윗에게 있어서의 슬픔은 요나단의 죽음으로 인한 슬픔이 더 컸음을 확인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또 요나단에 대한 애가를 부르고 있습니다. 26절입니다.
“내 형 요나단이여 내가 그대를 애통함은 그대는 내게 심히 아름다움이라. 그대가 나를 사랑함이 기이하여 여인의 사랑보다 승하였도다.”
마치 동성연애자로 착각할 만큼이나 다윗과 요나단이 사랑을 했다는 것이죠?
먼저 형 이라고 했습니다. 친밀감있는 표현이죠? 그러나 요나단은 처남이었기 때문에 틀리지 않은 표현입니다.
그럼에도 이제는 다윗이 요나단의 죽음을 민족적인 차원을 벗어나 개인적인 차원으로 받아들이고 있음을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그 다음 그대는 내게 심히 아름다움이라 했습니다. 무슨 의미이겠습니까?
이것을 원문에서 직역하면, ‘그대는 내게 심히 기쁨이 되었었습니다.’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다윗은 지금 외모를 칭송했던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크나큰 기쁨이 되었던 요나단과의 과거를 회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모습들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그러므로 마지막으로 다윗은 그들의 사랑이 여인의 사랑보다 승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의 의미는 그 사랑이 자식을 향한 어머니의 사랑, 남편에 대한 아내의 사랑, 남녀간의 사랑보다 더 절대적이고 헌신적이었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왜 이들은 이리도 서로를 사랑하고 있었을까요? 그들은 다름아닌 서로가 너무나 하나님을 사랑하고 믿음으로 살아가며, 그러므로 하나님이 늘 함께 하는 자들이란 공감대가 있었기 때문이라 했죠?
성도 여러분, 우리도 하나님이 함께 하는 자라면, 또 다른 하나님이 함께 하는 성도들을 이와 같이 사랑하는 자들이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이와같이 우리 택한 자들을 사랑하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또한 우리도 그 택한 다른 자들을 사랑하기를 원하시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성도의 죽음을 슬퍼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고, 그만큼 생전에도 서로를 더욱 사랑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메시야 교회는 이런 사랑의 공동체가 진정 되어지기를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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