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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자야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막2: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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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장은 종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께서 준비과정을 거쳐 본격적으로 사역을 시작하신 내용을 담고 있었습니다.


이어지는 오늘 본문은 넓게는 9장 50절까지 예수님의 갈릴리 사역을 기록하는 내용 가운데 하나이며, 좁게는 1장과 다르게 유대 지도자들에게 부당하게 배척을 당하며 이에 대하여 논쟁하는 내용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상황에서 거룩하신 우리 주님은 어떻게 하셨는가? 함께 살펴보며 거룩의 교훈을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집에서 병자들을 고치시고 사람들이 몰려와 다른 마을들로 떠나신 후, 처음으로 다시 가버나움으로 들어가시고 있음을 볼 수 있죠?


그런데 집에 계신 소문이 들린지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 집은 어디일까요?


어떤 사람은 베드로의 집이라 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예수님의 집이라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정황을 살펴보면, 지난 번 베드로의 집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다시 이 집으로 모여들기 시작하고 있음을 볼 수 있는데, 다같이 2절을 읽겠습니다.


"많은 사람이 모여서 문 앞에라도 용신할 수 없게 되었는데, 예수께서 저희에게 도를 말씀하시더니"


용신할 수 없게 되었다는 말은, 너무 사람이 많이 모여 몸을 움직일 수조차 없게 되었다는 말이죠?


그렇다면, 예수님은 어떻게 하실까요? 그런데 그들을 쫓아내시거나 피하시거나 다른 것을 하시지 않으시고, 도를 가르치시고 계십니다.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예수님은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언제나 복음을 전하는 일에 몰두 하셨음을 볼 수 있는 것이죠?


그러나 이 때 사람들이 한 중풍병자를 네 사람에게 메워 예수께로 데리고 왔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많아 접근하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어떻게 할까요? 4절을 읽겠습니다.


"무리를 인하여 예수께 데려갈 수 없으므로 그 계신 곳의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의 누운 상을 달아내리니"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의 누운 상을 달아내렸다고 했죠? 먼저 당시 베드로의 집에 얼마나 사람들이 많았는지를 알 수 있죠?


그것이 사람이 너무 많아 직접 들어가지 못하고, 지붕에 구멍을 낼 정도였다고 했습니다.


두 번째는 이 사람들이 지붕을 뜯었다는 것이나 그것도 한 사람이 누운 침대 정도를 그냥 내릴 수 있는 정도의 크기로 뜯었다는 것은, 이 중풍병자를 데려온 사람들의 간절함을 알 수 있다 할 수 있죠?


정말 이들은 중풍병자가 낫기를 간절히 소망했던 사람들이고, 그만큼 그를 사랑하였던 사람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세 번째 이들이 지붕을 뜯었다는 가장 큰 의미는 무엇이겠습니까?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그만큼 있었다는 것이겠죠?


그렇다면, 예수님은 이 상황을 어떻게 하실 것인가? 과연 받아들일 것인가? 칭찬하실 것인가? 아니면 그들의 무례함을 야단치실 것인가? 그런데 5절을 보면, 다른 설명없이 바로 어떻게 하시고 있습니까? 다같이 5절을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소자야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바로 고쳐주시고 계시죠? 그런데 무엇 때문에 고쳐주셨다고 했습니까?


저희의 믿음? 누구의 믿음입니까? 지붕을 뜯고 중풍병자를 예수님 앞에 내려놓은 네 사람들의 믿음인 것이죠?


사실 당시 이스라엘의 서민들의 집의 지붕은 들보를 중심으로 작은 나무들을 걸치고 짚으로 덮고 진흙으로 발라놓은 것이기에 벗기기에는 쉽지만, 흙먼지가 쏟아져 내렸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말씀을 전하는 데, 왜 흙먼지를 내는가? 무례할 수 있는 것이죠? 그럼에도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다는 것입니까? 그 믿음을 보시고 그 병자를 고쳐주셨다는 것이죠?


우리 주님은 때때로 이처럼 무례한 믿음도 용납하시고 계심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오늘날 우리도 늘 담대한 믿음의 소유자가 되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병 고치는 방법이 지난번하고는 좀 다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어떻게 다릅니까?


지난번, 베드로의 장모를 고칠 때에는 그냥 그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열병이 떠났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소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하셨죠?


왜 이렇게 하셨는지, 왜 어떤 사람에게는 이렇게, 또 어떤 사람에게는 저렇게 말씀하시며 병을 고치셨는지는 우리 주님 밖에는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이 '소자야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는 말로 병을 고치셨다는 사실에서 무엇을 배울 수 있습니까?


죄와 병의 상관관계인 것이죠? 그렇다면, 모든 병은 다 죄로 인한 것일까요? 아니죠?


어떤 병은 죄로 인하여 올 수도 있지만, 또 어떤 병은 그냥 믿음을 성장시키시고자 오게 하실 수도, 혹은 순수하게 하나님의 영광만을 드러내게 하시기 위해서 주시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예수님은 왜 이 병자를 고치시며 죄사함을 말씀하셨을까요?


그것은 보다 근원적으로 보아야죠? 인류에게 질병과 죽음이 들어온 것은 사실 아담의 죄를 통해서였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또한 적어도 그 사람에게 있어서는 그의 병이 어떤 죄문제와 결부되었있었을 수도 있었음을 추측해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예수님이 어떤 분이시며, 어떤 일을 위하여 오셨는지를 드러내시고자 하셨음을 알 수 있죠?


예수님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질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는 능력으로 이스라엘을 로마로부터 해방하고 이 땅에 메시야 왕국을 이룰 그런 정치적 메시야가 아닌, 진정 온 인류의 죄를 사하시고 영원한 메시야 왕국을 이루실 진정한 메시야임을 선포하시고 계셨던 것입니다.


실로 예수님은 죄사함의 권세가 있으신 하나님이심을 선포하셨던 것이고, 이러한 죄사함의 선포를 통하여 무엇보다도 인생에게 있어서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할 일은 죄문제임을 또한 가르쳐 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죄문제를 해결하면 다른 문제도 해결할 수 있음을 본보기로 보여주셨다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 죄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무엇을 구하는 일이 되겠습니까? 먼저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일이 되는 것이죠? 그렇게 되면 나머지  모든 것을 더해 주시는 은혜를 받아 누릴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놀라운 의미인 것이죠?


그러나 6절이하를 보면, 결국 이 문제로 인하여 예수님은 핍박을 받고 십자가에까지 못박혀 죽으시게 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7절을 읽겠습니다.


"이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말하는가 참람하도다. 오직 하나님 한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여러분 어떻습니까? 이들의 말은 맞는 말이죠? 그러나 뭐가 잘못된 것입니까? 예수님이 하나님이신 줄을 몰랐다는 사실이죠?


그래서 예수님은 질문하죠? '중풍병자에게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


어느 것이 더 쉽습니까? 사실 엄밀히 따진다면, 죄사함을 받았다는 말은 아무나 하지 못하는 것이죠?


그러나 또 현실적으로 보면, 죄사함은 눈으로 보이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는 말이 더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느 것이 더 쉽겠습니까? 사실은 둘 다 어려운 것이죠? 그러나 예수님이 이런 말씀하신 의도는 분명 자신에게 죄사함의 권세가 있음을 알리시기 위함이었던 것이죠?


그러므로 10절에 이것을 말씀하시는데, 결국 11절에는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두 가지 다 어려운 것들이었지만, 우리 주님은 두 가지 다 하셨다는 것이죠?


우리 예수님은 바로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몰랐고, 깨닫지도 못했으며, 그렇기 때문에 이런 무지를 인하여 예수님에게 '참람죄'를 씌워 십자가를 지시게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죄목은 단 하나 참람죄였습니다. 다시 말해 인간이 예수님에 대하여 저지른 모든 죄는 사실 이 하나, 예수님에 대한 무지(믿음과 관련된 것이죠?)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도 하나님 앞에서 모든 범죄를 예방함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이 된다는 것입니까? 예수님을 알아가는 일이라는 것이죠?


호세아 4:6은 말했죠?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


성도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범죄하지 않으려면, 하나님을 알되 힘써 하나님을 알아야 할 줄 믿습니다. 그래서 땅을 치며 통곡하며 만든 것이 회당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바른 지식은 무엇을 낳습니까? 바른 믿음을 낳죠? 그리고 그 바른 믿음은 거룩한 삶의 열매를 낳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가 고민하는 거룩의 문제는 어디서부터 비롯됨을 알 수 있습니까? 하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이죠.


여러분, 하나님을 얼마나 알고 계신다고 생각하십니까? 여러분의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여러분의 모든 삶을 거룩하게 살아가도록 만드는 살아있는 참 지식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그러면 나머지 모든 것은 하나님이 더해 주실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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