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본문은 지난 시간 아브넬이 죽은 것에 대한 다윗의 애가입니다.
어제 말씀드린 대로 다윗은 굳이 이렇게 하지 않아도 그가 아브넬을 죽이지 않은 것은 틀림이 없고,
또 설령 누가 오해를 한다 하더라도 요압을 그냥 품고 가거나 혹은 아브넬이 죽은 것 자체만으로는 이제 통일왕국시대에 있어서 굉장히 큰 도움이 된다고도 할 수 있는데,
왜 다윗은 이리도 애가를 부르며 다른 사람이 보기에 과하다 싶을 정도로 아브넬의 죽음을 슬퍼하고 있는가?
오늘 주시는 말씀을 살펴보면서 함께 은혜를 나누며 교훈을 찾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31절을 보면, 다윗이 백성에게 아브넬 앞에서 애통할 것을 명하고 있습니다. 다같이 읽겠습니다.
“다윗이 요압과 및 자기와 함께 있는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옷을 찢고 굵은 베를 띠고 아브넬 앞에서 애통하라 하니라 다윗 왕이 상여를 따라가서”
다윗은 지난 시간 저주 했던, 아브넬을 죽였던 요압은 물론이거니와 모든 백성들에게 아브넬의 죽음으로 인하여 그의 주검 앞에서 통곡할 것을 명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옷을 찢고 굵은 베를 띠고 애통하라고 했습니다. 어떻습니까? 좀 지나치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지난 번 아사헬의 죽음에서는 이런 기사가 나온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 누구의 죽음에서도 이런 일을 했다는 기사가 없습니다. 그런데 왜 다윗은 이렇게 하고 있을까요?
이는 뒤에 보면 알 수 있는데, 계속해서 32절을 읽겠습니다.
“아브넬을 헤브론에 장사하고 아브넬의 무덤에서 소리를 높여 울고 백성도 다 우니라.”
사실 관례에 따르자면 지난 번 아사헬처럼 아브넬의 고향에 장사를 해야 했지만, 다윗은 그를 왕도인 헤브론에 장사함으로써 그를 높여주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여기 다윗이 앞장서서 상여를 따라가며, 소리를 높여 울었다고 했습니다.
여기 저자는 다윗이 ‘소리를 높여’ 울었다고 했는데, 이 모습은 무력함과 슬픔과 고통과 연민과 자책을 나타내는 히브리인들의 일반적인 표현입니다.
다윗은 이렇게 아브넬의 죽음에 대한 자신의 비통한 심정을 백성들에게 알림으로, 사실은 아브넬의 죽음에 대한 자신의 무고함을 입증하며, 또한 동시에 불의한 죽음을 당한 아브넬을 조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백성들도 함께 울었다고 했고, 이에 다윗은 애가를 지어불렀다고 했습니다. 33절로 34절을 읽겠습니다.
“왕이 아브넬을 위하여 애가를 지어 가로되 아브넬의 죽음이 어찌하여 미련한 자의 죽음 같은고, 네 손이 결박되지 아니하였고 네 발이 착고에 채이지 아니하였거늘 불의한 자식의 앞에 엎드러짐같이 네가 엎드러졌도다 하매 온 백성이 다시 그를 슬퍼하여 우니라.”
이 짧은 한노래에 다윗이 분명히 밝히고자 하는 바가 있죠? 무엇입니까?
첫째, 그 손이 결박되지 않았거나 발이 착고에 채이지 않았다는 말은, 자신이 그를 체포하거나 포박하여 잡아다가 죽인 것이 아님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둘째, 불의한 자식의 앞에 엎드러짐같이 네가 엎드러졌도다 라는 말은, 그의 죽음이 분명 불의한 자의 소행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다윗은 이 노래를 통하여 무엇을 밝히고자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까?
다윗은 절대로 아브넬의 죽음과는 무관하다는 사실을 강조하여 밝히고자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이로 인해 온 백성은 다시 그를 슬퍼하여 울었다고 했습니다. 좀 이상하다고 여길 수 있는 것은 아브넬이 아무리 국가 통합에 앞장 선 자이지만, 그래도 지금까지 자기들을 대적하여 싸운 적장인데, 그리고 실제로는 바로 그가 나라를 갈라놓았던 장본인이었는데, 왜 그의 죽음을 슬퍼하였는가?
저는 아무래도 이 일에는 다윗의 역할이 컸다고 생각됩니다. 그리고 또한 민족의 통일을 원하는 국민들의 염원이 훨씬 더 컸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어찌하였든 이제 아브넬의 죽음은 불의의 희생으로 묘사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35절을 보면, 또 다윗에게 재미난 사실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다같이 읽겠습니다.
“석양에 뭇백성이 나아와 다윗에게 음식을 권하니 다윗이 맹세하여 가로되 내가 해지기 전에 떡이나 다른 것을 맛보면 하나님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리심이 마땅하니라 하매”
여러분 다윗이 왜 자꾸 이럴까요? 다윗이 이렇게 할 만큼이나 아브넬을 사랑했었기 때문일까요? 그런 구석은 조금도 찾아보기가 힘들죠?
그런데 왜 이렇게 그의 죽음으로 옷을 찢으며 슬퍼하고 통곡할 뿐만 아니라, 금식까지 하고 있었을까요?
36절을 읽겠습니다. “온 백성이 보고 기뻐하며 왕이 무슨 일을 하든지 무리가 다 기뻐하므로”
무슨 말입니까? 다윗이 아브넬의 죽음을 인하여 옷을 찢고 통곡하고 애가를 지어 부르고 금식을 하니까, 오히려 백성들이 그의 그런 모습을 보고 기뻐했다는 것이죠?
그런데 여기 기뻐하다는 의미는, ‘좋다’ ‘훌륭하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36절의 의미는 무슨 의미일까요?
여기서 백성들이 다윗의 행동을 좋은 것으로 판단했다는 것은, 아브넬의 죽음에 다윗이 관여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신하게 되었다는 의미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왕이 무슨 일을 하든지 무리가 다 기뻐했다는 것입니다. 왜냐? 그 일들은 다 왕의 아브넬의 죽음에 대한 결백함을 나타내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백성들은 지금까지도 다윗을 신뢰했던 것처럼, 아브넬 살해 사건이후에도 다윗을 계속해서 신뢰하게 되었던 것임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37절은 말합니다. 읽겠습니다.
‘이 날에야 온 백성과 온 이스라엘이 넬의 아들 아브넬을 죽인 것이 왕이 한 바가 아닌 줄을 아니라’
역시 이 모든 행동을 통해 백성이 기뻐했던 이유는, 바로 그 모든 행동이 결국은 다윗이 아브넬을 죽이지 않았음을 증거하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죠?
게다가 38절을 보면, “왕이 그 신복에게 이르되 오늘 이스라엘의 방백이요, 또는 대인이 죽은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 말하고 있습니다.
어떻습니까? 다윗은 정말 완벽하리만큼 지혜로운 자임을 알 수 있죠? 제가 이번 사무엘서를 공부하면서 다시 다윗을 살펴보면서 느낀 것은 그는 역시 지혜로운 지도자라는 사실입니다.
사실 아브넬은 요압의 범행으로 살해를 당했지만, 실제적으로는 요압이 다윗의 수하에 있는 군장이었기 때문에, 다윗 역시 공모 혐의를 피할 수 없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특히 북 이스라엘은 아직까지도 분리된 나라이며 아브넬의 편에 있었기 때문에, 당연히 다윗을 의심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의 이런 모든 지혜로운 행동들이 결국은 다윗의 무고함을 입증하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요압은 어떻게 할 것인가? 39절을 읽겠습니다. “내가 기름부음을 받은 왕이 되었으나 오늘날 약하여서 스루야의 아들인 이 사람들을 제어하기가 너무 어려우니 여호와는 악행한 자에게 그 악한 대로 갚으실지로다 하니라.”
요압을 어떻게 하겠다고 말하고 있습니까? 다윗은 이미 요압을 저주했었습니다. 그리고 아브넬의 죽음을 불의한 자의 소행으로 몰아가며 요압을 궁지에 몰아넣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다윗은 지금 요압을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사실은 요압을 죽이지 않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저주만 할뿐, 그는 지금 뭐라 합니까? 자신이 제어하기가 너무 어렵다고 하죠?
그리고는 어떻게 합니까? 다 하나님께 맡기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결과적으로 다윗은 요압을 어떻게 하고 있는 것입니까?
다윗은 요압에게 아무런 징벌을 가하지 않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요압은 언제 죽습니까? 열왕기상 2장에 가서 아도니야를 쫓은 일로 인해 솔로몬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맡기니까, 결국은 하나님께서 그 요압으로 다윗의 평생을 돕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필요한 때에 그를 처단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도 우리의 모든 행사를 다 하나님의 손에만 맡겨야 할 줄 믿습니다. 그리하면 그가 반드시 이루어주실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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