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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으로 확신가운데 행하라(왕상 12:2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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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시간은 여로보암을 왕으로 해서 북 이스라엘이 건국되었다는 사실과 남유다의 르호보암이 북이스라엘을 징벌하기 위하여 군사들을 모았으나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전쟁을 치르지 않았다는 사실을 기술하였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이런 르호보암의 순종은 그의 아비 솔로몬의 가르침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했고, 이로 인하여 르호보암은 통치 초기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통치 후기에는 애굽에게 아주 비참한 패배를 당하는 하나님의 징계를 받았던 것을 볼 수 있었는데, 왜 그랬다고 했습니까?

 

그것은 그 아비 솔로몬이 가르침을 잘 하였는지 모르지만, 삶이 본이 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오늘은 여로보암이 행한 일에 대해 기술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르호보암과 달리 여로보암은 어떻게 무엇을 하고 있는가? 살펴보며 은혜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다같이 25절을 읽겠습니다. ‘여로보암이 에브라임 산지에서 세겜을 건축하고 거기서 살며 또 거기서 나가서 부느엘을 건축하고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세겜과 부느엘을 건축하고 있죠? 그리고 33절까지 그가 행한 악한 종교정책을 기술하고 있습니다.

 

세겜을 건축하였다는 말은, 세겜을 왕국의 수도로 정하고 자신이 거주할 궁전을 짓고 요새화하였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실제로 고고학적 발굴로 입증되었습니다.

 

체제정비와 국정운영을 위해서는 행정수도가 필수적이었지만, 그러나 그가 르호보암에게 요구했던 세금감면과 부역면제를 생각하면,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부느엘에는 왜 건축을 했을까요?

 

이곳은 요단동편에 압복강을 끼고 있는 군사적 요충지였기 때문에 동쪽으로부터의 침입자들의 통로를 봉쇄하기 위하여 방어선을 구축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세겜이나 부느엘의 건축은 둘 다 합당한 건축이었던 것이죠? 그렇다면, 저자는 왜 굳이 이 사실을 여기 기록하고 있을까요?

 

그것은 바로 이스라엘은 이전에 이런 노역과 세금 때문에 르호보암으로부터 반란을 일으켜 자유로워졌지만, 그러나 그렇게 해서 여로보암이라는 새로운 왕을 두었다고 해서 여전히 그 노역과 무거운 세금문제에서 전혀 벗어날 수 없었다는 것이죠?

 

이들의 반란과 나라의 분열은 하나님의 뜻이었을지 몰라도, 그러나 이들의 반란과 분열의 원인이 되었던 이들의 요구는 그들이 어느 왕의 백성이 되는 한 결코 쉽게 벗어날 수 없는 문제였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저자는 이런 문제를 사람 앞에서 해결하려 하기보다는 오히려 하나님 앞에서 해결하려 했음이 옳다는 사실을 암시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26절 이하의 사건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오히려 하나님을 떠나고 우상숭배를 함으로 범죄하여 손해를 보게 되는 것을 기록하고 있죠?

 

26절은 여로보암의 생각입니다. “그 마음에 스스로 이르기를 나라가 이제 다윗의 집으로 돌아가리로다.”

 

왜 이런 생각을 했을까요? 그는 다윗과 솔로몬이 하나님의 뜻대로 왕이 된 것만을 알지, 자신이 하나님의 뜻대로 왕이 되었음은 확신하지 못했던 것이죠?

 

11장에서 하나님은 선지자 스마야를 통하여 이미 여로보암에게도 말씀에 순종하기만 한다면 다윗과 같이 견고한 집을 세워주실 것이라 약속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왕이 된 과정을 철저히 인간적 관점에서만 이해함으로 하나님의 섭리를 인정하지 않는 불신앙의 생각을 갖게 되었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매사에 어떤 일이 아무리 인간적으로 보았을 때 합리적으로 이루어진다 하더라도, 늘 그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볼 수 있는 자가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세상의 일은 결코 이렇고 저렇게 해서 당연히 일어나거나 혹은 우연히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모든 것은 하나님의 섭리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우리가 무엇이 된 것도 하나님의 은혜로 여겨야 하고, 무엇이 되지 않은 것도 하나님의 은혜로 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여로보암은 어떤 생각까지 하게 됩니까? 27절을 보면, “만일 이 백성이 예루살렘에 있는 여호와의 전에 제사를 드리고자 하여 올라가면 이 백성의 마음이 유다 왕된 그 주 르호보암에게로 돌아가서 나를 죽이고 유다왕 르호보암에게로 돌아가리로다 하고

 

어떤 생각까지 하고 있습니까? 이제는 자기 백성들이 예루살렘 전에 제사하는 일로 올라가면 르호보암에게로 마음들이 돌아가 자신을 죽일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죠?

 

여로보암은 자신이 왕이 된 것이 하나님의 섭리인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으니까, 백성들의 마음이 예배하러 올라가서 변할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고, 그러므로 역시 인간적인 생각으로 그들이 자신을 죽일 것이라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여로보암은 어떻게 할 것인가? 다같이 28절을 읽겠습니다.

 

이에 계획하고 두 금송아지를 만들고 무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다시는 예루살렘에 올라갈 것이 없도다.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올린 너희 신이라 하고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이제는 예루살렘으로 예배하러 올라가지 못하도록 금송아지를 만들죠? 그런데 이 모습이 흡사 누구의 모습과 똑같습니까?

 

그 옛날 시내산에서 백성들의 성화에 못이겨 금송아지를 만들어내었던 아론의 모습과 너무나도 똑같죠?

 

그때에도 이 금송아지가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올린 신이라 하였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자꾸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을까요?

 

그것은 이처럼 송아지 형상을 보고 하나님이라 말한 이유는 이교도와 같이 송아지를 예배의 대상으로 삼았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을 송아지로 형상화하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눈에 보이지 않으니까, 이제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나타난 하나님은 송아지 형상이라는 것이죠? 이것을 금으로 만든 것은 그 가치가 최고임을 나타내는 것이죠?

 

그렇다면, 하나님은 어떻게 생기셨을까요? 과연 송아지처럼 생기셨을까요? 아니죠? 이들은 지금 중대한 실수를 하고 있죠? 왜요?

 

창세기 126절로 27절을 보면,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라고 했고,

 

또 그러므로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라고 했기 때문이죠?

 

그러므로 차라리 그들이 하나님을 상징하는 우상을 만들고자 했다면 무슨 모양을 만들었어야만 했겠습니까? 사람의 모양이겠죠?

 

그러나 그렇다면, 그렇게 사람의 모양으로 하나님을 만들면 잘 하는 것일까요?

 

아니죠?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이는 상징물로 형상화하는 이러한 행위는 하나님께서 증오하시는 행위인 것이죠?

 

출애굽기 204절은, 하나님께서 우상을 만들지 말고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나, 물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도 만들지 말라고 십계명을 통해 명령하셨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하나님을 섬기는 마음이 변치 않고 하나님을 섬기기 위한 열심으로 행한다 하더라도 절대로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한 어떤 것도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요즘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하여 성도들의 마음을 미혹하게 하고 개인의 탐욕과 이득을 채우는 사람들이 많죠?

 

그러나 아무리 하나님을 섬긴다 하더라도,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 결코 드러나지 않는 하나님을 섬겨야지, 그 하나님을 눈에 보이는 그 어떤 것으로도 만들거나 나타내 보이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로보암은 지금 정말로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가증한 행위를 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29절에 이 두 금송아지를 벧엘과 단에 두었다는 말은, 북이스라엘 최남단과 최북단에 두었다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또한 이 벧엘과 단은 신앙적 유서가 깊은 곳이죠? 그러므로 여로보암은 이것을 이용하여 백성들에게 우상숭배를 강요하는 기만을 저지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31절에서는 우상들이지만, 하나님을 섬긴다고 산당들을 만들어 놓고는 레위자손이 아닌 보통 백성으로 제사장을 삼았다고 했고, 32절에서는 절기까지 똑같이 만들어 놓고 일년에 한번씩 벧엘로 올라가 제사를 드리게 했다고 했습니다.

 

어떻습니까? 마치 불교나 원불교에서 기독교를 따라하는 것 같죠? 33절은, 그 절기의 때가 자기마음대로 정한 것이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세히 살펴보면, 여로보암 저가 직접 쌓은 단에 올라가서 분향하는 솔선수범을 보여주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지금 하나님을 빙자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죄를 아주 스스럼없이 자행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결국 믿음이 없으니까, 이미 받은 축복조차 온전히 누리지 못하고 탐욕과 이기심에 사로잡혀 스스럼없이 하나님을 빙자하여 우상숭배를 만들어 냈음을 알 수 있죠?

 

그렇다면, 오늘 본문을 통해 깨달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요?

 

이사야 558절로 9절은,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고 했죠?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인간적인 생각에 치우쳐 범죄하는 자가 아니라, 우리의 생각보다 높은 하나님의 생각을 분별하여 하나님의 길로 행하는 자들이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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