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정 왕국의 분열과 열왕들의 통치를 보여주는 열왕기상의 후반부를 시작하는 지난 12장에서는 여로보암을 왕으로 하여 북이스라엘이 세워지는 과정과 왕위에 오른 여로보암 왕이 잘못된 종교정책을 시행하였음이 집중 기술되었죠?
여로보암은 북이스라엘 사람들이 절기를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이 있는 남유다로 가는 동안, 그들의 마음이 르호보암에게로 돌아갈 것을 우려하여 북이스라엘 지역 벧엘과 단에 산당을 세우고, 또 절기를 만들고, 평민출신 제사장들을 인위적으로 세워 제사를 드리게 했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하나님은 어떻게 하실 것인가? 하나님의 징계가 따르겠죠? 1절로 10절은 이제 유다선지자로부터 벧엘의 제단이 훼파되리라는 예언이 선포되고 있습니다.
다같이 1절을 읽겠습니다. “때에 하나님의 사람이 여호와의 말씀으로 인하여 유다에서부터 벧엘에 이르니 마침 여로보암이 단 곁에 서서 분향하는지라.”
흥미로운 사실은 여기 선지자를 ‘선지자’라 하지 않고 ‘하나님의 사람’이라 했다는 것입니다. 무엇이 다를까요?
선지자라는 의미의 히브리 단어 ‘나비’는 거짓 선지자들을 지칭할 때도 사용되는 호칭입니다.
그러나 여기 하나님의 사람이란, 하나님의 뜻을 적극적으로 실천하는 자들에게 부여된 특별한 호칭이라 할 수 있습니다. 모세, 사무엘, 엘리야와 같은 선지자들에게만 이런 호칭이 주어졌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 등장한 하나님의 사람은 이 사람이 전하는 심판의 메시지가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았으며 이 사람이 말한 예언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임을 드러내 보인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 하나님의 사람이 여로보암을 찾아간 곳은 어디였습니까? 벧엘이었죠? 왜요? 제단에서 분향을 하기 위해서 있었던 것이죠?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사람은 지금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벧엘로 갔는데, 여로보암은 하나님의 명령을 거슬러 불순종하여 벧엘로 왔다는 것이죠?
여로보암은 지난 시간 말씀드린 대로 하나님이 자신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신 뜻에 대하여 확신을 가지지 못함으로, 스스로 하나님의 진노를 받을 수 밖에 없는 죄악의 길을 걸어오고야 말았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람으로부터의 심판의 예언이 시작되고 있습니다. 2절을 읽겠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단을 향하여 여호와의 말씀으로 외쳐 가로되 단아 단아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다윗의 집에 요시야라 이름하는 아들을 낳으리니 저가 네 위에 분향하는 산당 제사장을 네 위에 제사할 것이요 또 사람의 뼈를 네 위에 사르리라 하셨느니라 하고”
무슨 내용을 예언하고 있는 것입니까? 한 마디로 말하자면, 다윗의 후손인 남유다의 요시야라는 왕이 쳐들어와서 벧엘 산당의 제사장을 단 위에서 불사르는 일이 생긴다는 것을 예언하고 있는 것이죠?
하나님의 사람은 여로보암이나 다른 이스라엘 사람을 향해 외치지 않고 비인격체인 단을 향해 외쳤습니다. 무엇을 의미할까요?
이것은 여로보암이나 이스라엘을 무시하는 행위이죠? 그리고 여기서 ‘단’은 결국 북이스라엘의 잘못된 종교정책과 이로 인한 제반우상숭배행위를 다 아우르는 표현입니다.
따라서 단을 향해 외치는 선지자의 행위는 결국 이 제단이 상징하고 있는 북이스라엘 종교 체제 전체가 다 잘못되었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이며, 이같은 종교체제에 연루되어 종교의식을 수행하는 북이스라엘 백성과 그 체제를 도입한 여로보암의 죄를 다 함께 정죄하는 것이라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예언은 성취되었을까요? 언제 성취되었을까요?
여기 요시야 왕은 16대 유다의 왕이죠? 르호보암이 왕위에 오른 후, 약 300년이 지난 후에 왕이 된 자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열왕기하 22장과 23장을 보면, 그는 벧엘에 있는 단에 해골을 불살라 그 단을 더럽게 하였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도 땅에 떨어지는 것이 없는 것이죠?
그러나 지금 이 시점에선 이것이 결론은 아니었죠? 무슨 말입니까? 지금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사람을 보내신 것은 경고를 하시기 위함이지, 결코 바로 징계를 내리시기 위함이 아니었죠? 그래서 시간을 주었던 것이죠.
그러므로 3절은 말합니다. 읽겠습니다.
“그 날에 저가 예조를 들어 가로되 이는 여호와의 말씀하신 예조라 단이 갈라지며 그 위에 있는 재가 쏟아지리라 하매”
예조란 ‘예표’라는 말이죠? ‘이적’ ‘기사’ 혹은 ‘표적’이란 말로도 번역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예표를 주고 있습니까? 이 앞에서 한 예언이 진실이라는 것을 확증시켜 주기 위해서였던 것이죠?
그래서 그는 ‘단이 갈라지며 그 위에 있는 재가 쏟아지리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과연 그가 말한 대로 단이 갈라지며 그 위에 있는 재가 쏟아질까요?
그런데 갑자기 여로보암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4절을 보면, 여로보암이 이 하나님의 사람의 말을 들을 때에 손을 펴며 저를 잡으라고 외쳤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그 하나님의 사람을 향하여 폈던 손이 말라버리는 일이 일어났죠?
말라버렸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원문에 기록된 단어의 의미를 보면, 수분이 빠짐으로 굳어지는 현상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는 감히 하나님의 사람을 향하여 손을 펴서 잡으라 했다가 그 손이 경직되고 감각을 잃어버리는 일을 경험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는 5절에 곧바로 하나님의 사람이 말한 대로 단이 갈라지며 재가 쏟아졌다고 했습니다.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바르게 전하는 사람을 절대로 대항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죠?
그가 목회자이든, 평신도이든, 누구이든, 아무리 그 말을 듣는 사람이 훌륭한 목사님이라 하더라도, 설령 아이가 말한다 하더라도 그 말이 하나님의 뜻에 부합된다면 절대로 잘못 대응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렇게 되면 누굴 대적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까?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 되기 때문인 것이죠?
그러므로 하나님을 대적함으로 손이 말랐던 여로보암은 하나님의 사람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구해줄 것을 부탁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되었습니까?
여로보암이 그 하나님의 사람의 기도로 다시 온전하게 전과 같이 되는 역사를 체험하였죠?
그렇다면, 이제 여로보암은 이런 확실한 일을 체험한 후에 어떻게 하고 있을까요? 다같이 7절을 읽겠습니다.
“왕이 하나님의 사람에게 이르되 나와 함께 집에 가서 몸을 쉬라 내가 네게 예물을 주리라”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왕궁으로 데려가서 대접해 주겠다는 말을 한 것이죠?
그렇다면, 지금 이런 여로보암의 태도는 합당한 태도였을까요? 사실 아니죠? 왜요? 지금 여로보암은 이 하나님의 사람을 회유하려 했기 때문입니다.
사실 여로보암이 영적으로 바른 사람이라면, 이 정도 체험을 했으면 빨리 깨닫고 하나님 앞에서 우상제단을 부수며 회개하고 돌아올 수 있어야 하는 것이죠?
그런데 우상제단을 그냥 놔두고 하나님의 사람만을 왕궁으로 데려다가 극진히 대접해 주려 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자신의 죄는 회개하지 않고, 주의 종에게 대접하는 것으로 하나님 앞에서의 죄를 가리우려 하는 사람들이 있죠? 그러나 그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사람은 여로보암을 따라갈까요? 8절을 읽겠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왕께 대답하되 왕께서 왕의 집 절반으로 내게 준다 할지라도 나는 왕과 함께 들어가지도 아니하고 이곳에서는 떡도 먹지 아니하고 물도 마시지 아니하리니”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왕의 집의 절반을 준다 하더라도 왕궁으로 따라가지 않는다. 그리고 이곳에서도 떡도, 물도 마시지 않는다는 것이죠?
이것이 올바른 주의 종의 자세인 것이죠? 주의 종은 대답받기를 좋아할 것이 아니라,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기 위해 더 힘써야 한다는 것이죠? 다만 지혜가 필요할 뿐이지요.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이 하나님의 사람은 이후에 다른 길을 통해 우상숭배의 장소를 벗어나긴 했지만, 벧엘을 속히 떠나지 않고, 가장 눈에 쉽게 띄는 장소에 머물렀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무엇을 말해주고 있습니까?
그 하나님의 사람은 말은 하나님의 말을 했지만, 삶은 아니었다는 것이죠?
그렇다면, 왜 이렇게 하고 있었을까요? 9절을 보면, 그가 했던 일이 다 하나님의 명령임을 볼 수 있는데, 그가 명령을 지키는 사명완수에는 적극적이었지만, 그 사명완수를 하고 난 후에는 마음이 놓여 다시 본래의 연약한 본성으로 돌아갔기 때문으로 보고 있습니다. 여러분 누구의 이야기입니까?
바로 우리의 이야기이죠? 하나님께서 교회를 통하여 우리에게 맡겨주신 어떤 일을 할 때 자체는, 아주 열심히 올바르게 하지만, 그 일이 끝나고 나서는 마음이 놓여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범죄할 수 있는 연약한 모습을 지닌 것이 바로 우리들이라는 사실입니다.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성도 여러분,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근본이 늘 성령충만하기 위해 몸부림치는 삶을 살아야 할 줄 믿습니다.
항상 거룩하게 살고자 하는 노력과 그런 노력을 통한 거룩한 영성을 지키는 근본적인 삶이 없이는 언제든 큰 주의 일을 하고도 범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시편 37편 31절은, “그 마음에는 하나님의 법이 있으니 그 걸음에 실족함이 없으리로다.”고 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항상 여러분 마음 중심이 하나님의 법으로 충만하여 살아가고 있습니까?
사도바울은 로마서 7장에서 자기 속에 하나님의 법과 육체의 법이 싸운다고 하면서, 그러나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에서 자신을 해방하였다고 했죠?
그래서 하나님은 육신이 할 수 없는 것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도록 하셨다고 했습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오늘 하루 여러분의 삶이 늘 성령으로 충만하여 하나님이 원하시고 요구하시는 삶을 넉넉히 사심으로 언제나 승리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