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시간은 하나님의 사람이 여로보암과 이스라엘에게 선포했던 심판의 내용과그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여로보암의 궁전으로 가서 대접하겠다는 제안을 거절하고 벧엘로부터 다른 길로 돌아갔다는 사실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이 하나님의 사람이 벧엘의 한 늙은 선지자의 거짓말에 속아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게 되고 있습니다.
먼저 11절은 벧엘의 한 늙은 선지자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벧엘에 한 늙은 선지자가 살더니 그 아들들이 와서 이 날에 하나님의 사람이 벧엘에서 행한 모든 일을 저에게 고하고 또 그가 왕에게 고한 말씀도 저희가 그 아비에게 고한지라.”
이 사람이 여기 ‘살더니’ 라는 말은, 원문을 보면, 오랫동안 거주하였던 영향력이 있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은 유다에 있고, 지금 벧엘에는 산당이 있습니다. 그런데 왜 아직도 이 사람은 여기 벧엘에 있죠?
아이러니한 사실은, 당시 다른 레위인들과 오직 하나님만을 구했던 신실한 사람들은 모두 이스라엘을 떠나 유다로 남하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도 그가 여전히 우상숭배의 본거지인 벧엘에 남아 있었다는 것은, 그리고 그 아들들이 벧엘의 단에서 일어났던 일을 어떻게 알았겠습니까?
거기에 다녀왔으니까, 알았겠죠? 그는 자신은 참여하지 않았어도 자식들은 그 거짓 종교행사에 참여시키고 있었음을 알 수 있죠? 그렇다면, 왜 그랬을까요?
이 늙은 선지자는 변화하는 현실에 타협하며 편안히 살고자 했던 현실주의적 거짓 종교지도자였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현실과 타협하는 자가 절대로 되어서는 안될 줄 믿습니다. 시대가 그렇다고, 사회가 그렇게 변했다고~, 이제 말세지말에는 적그리스도가 나와 믿는 자들을 핍박하며 불이익을 줄테인데,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오늘 우리는 아주 작은 일에서부터 진리를 지키며 진리대로 행하는 일에 양보하지 않는 자가 될 수 있어야, 그래야 큰 것도 지킬 수 있다는 것이죠.
그런데 12절을 보면, 이 늙은 거짓 선지자가 그 아들들에게 유다에서 온 하나님의 사람이 어디로 갔는지를 묻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13절을 보면, 나귀에 안장을 지워 타고 그 하나님의 사람을 찾아가고 있습니다.
여기 나귀에 안장을 지워 타고 가는 모습은, 어느 정도 시간이 걸리는 여행을 준비함을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늙은 선지자는 하나님의 사람을 반드시 만나야겠다는 굳은 의지를 가지고 출발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될까요?
14절에서 만나죠? 14절을 보면, “하나님의 사람의 뒤를 좇아가서 상수리 나무 아래 앉은 것을 보고 이르되 그대가 유다에서 온 하나님의 사람이뇨 대답하되 그러하다.”고 했습니다.
얼마나 빨리 쫓아갔으면 이 늙은 선지자가 먼저 떠난 하나님의 사람을 만날 수 있었을까요? 이 늙은 선지자는 자신의 안위를 돌아보지 않고 전심으로 하나님의 사람을 만나려 하고 있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늙은 선지자는 왜 하나님의 사람을 이토록 간절히 만나려 하고 있었고, 이 하나님의 사람은 왜 상수리나무 아래 앉아 있었을까요?
만나려 했던 이유는 나중에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상수리나무 아래 앉아 있었던 이유는 좀 쉬려하는 의도가 있어보이죠?
그러나 이것은 그가 죄의 첫걸음을 내딛었다는 증거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9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저주와 혐오의 장소인 벧엘에서 속히 떠나 유다로 돌아오라고 명하셨고, 또 벧엘은 지난 번 말씀드린 대로 북이스라엘의 최남단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남유다와 북이스라엘의 경계에 위치하고 있었다는 것이죠? 따라서 지금 이 하나님의 사람은 마음만 먹는다면 단숨에 돌아갈 수 있었던 것인데, 하나님의 명령을 소홀히 하고 거기 상수리 나무 아래 머물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문제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즉각적으로 순종하지 않았다는 것이죠? 오늘날 우리가 범죄하는 중대한 이유 가운데 하나가 뭡니까?
하나님의 말씀순종하기를 자꾸 유보하기 때문인 것이죠? 자꾸 뒤로 미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늙은 선지자가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15절을 보면, ‘나와 함께 집으로 가서 떡을 먹으라’고 말하죠? 그렇다면, 이 하나님의 사람은 어떻게 대답하나?
16절을 보면, “대답하되 나는 그대와 함께 돌아가지도 못하겠고, 그대와 함께 들어가지도 못하겠으며, 내가 이곳에서 그대와 함께 떡도 먹지 아니하고 물도 마시지 아니하리니”라고 했죠? 잘하는 것입니까? 못하는 것입니까? 잘하는 것이죠?
여기 17절에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이르시기를’이란 말은, 내게 명하신 반드시 지켜야 할 말씀이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날도 성령께서 여러분 각자에게 주신 말씀은 반드시 지켜야 하는 줄 믿습니다.
말씀을 통하여,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하여, 성령께서 여러분 각자에게 깨닫게 하신 말씀이 있다면, 그것은 여러분이 반드시 지켜 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늙은 선지자는 어떻게 할까요? 그러나 쉽사리 물러서지 않죠?
다같이 18절을 읽겠습니다. “저가 그 사람에게 이르되 나도 그대와 같은 선지자라 천사가 여호와의 말씀으로 내게 이르기를 그를 네 집으로 데리고 돌아가서 그에게 떡을 먹이고 물을 마시우라 하였으니라 하니, 이는 그 사람을 속임이라.”
어떻습니까? 감히 하나님의 말씀을 빙자하여 속이고 있죠? 그는 이미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을 잃어버리고 영적으로 부패해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도 자칫 이럴 수가 있죠? 우리도 이 늙은 선지자와 같이, 거짓된 말씀의 해석과 적용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는 자가 될 수 있죠?
예를 들면, 술먹고 담배를 피는 문제라든지, 주일성수를 하는 문제라든지, 예전같으면 신사참배하는 문제라든지, 여러 가지 신앙생활의 문제에 관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잘못 해석적용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합니까?
탐심과 탐욕의 이기적인 죄악된 마음 때문인 것이죠? 그래서 말씀은 결코 있는 그대로를 실천하려 해야지, 내 편의대로 적용하기 위해 잘못 해석하고 갔다 붙여서는 안 된다는 것이죠?
그렇다면, 이제 이 늙은 선지자의 속임에 대하여 이 하나님의 사람은 어떻게 할 것인가? 어떻게 합니까?
19절을 보면, ‘이에 그 사람이 저와 함께 돌아가서 그 집에서 떡을 먹으며 물을 마시니라.’고 말하죠?
그는 분별력을 잃어버리고 거짓 속임수에 넘어가 하나님의 명령을 불순종하는 길로 들어가게 됨을 볼 수 있죠?
오늘날도 분별력을 잃어버리면, 이와 같이 거짓된 신앙이나 영적으로 잘못된 길로 들어가게 됨을 볼 수 있죠?
그렇다면, 그렇게 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역시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이 말씀을 붙드는 일을 놓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죠?
그렇다면, 이 분별력을 잃고 늙은 선지자의 거짓 속임에 넘어가 하나님의 명령을 어겼던 하나님의 사람은 어떻게 될까요? 죽고 있죠?
20절로 22절을 보면, 여호와의 말씀이 늙은 선지자에게 임하여 하나님의 사람이 명령을 지키지 않았음으로 ‘네 시체가 네 열조의 묘실에 들어지 못하리라’ 했죠?
그리고 나서 이제 나귀를 타고 떠나갈 때, 24절을 읽겠습니다.
“이에 그 사람이 가더니 사자가 길에서 저를 만나 죽이매 그 시체가 길에 버린 바 되니, 나귀는 그 곁에 섰고, 사자도 그 시체 곁에 섰더라.”
어떻게 되고 있습니까? 그는 길에서 사자를 만나 비명횡사하죠? 무엇입니까? 징벌이죠?
여기 나귀는 그 곁에 섰고, 사자도 그 시체 곁에 섰더라는 말을 보면, 사자가 배가 고파 죽인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먼저 지나치기 쉬운 문제인데요, 여기 늙은 선지자는 왜 하나님의 사람을 찾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사람을 대접하기 위해서였던 것임을 알 수 있죠? 아마도 같은 선지자로써, 하나님의 말씀을 확인하고, 또 그를 대접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던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잘못된 것일까요? 대접하는 자체는 선한 일이라 할 수 있겠죠?
그러나 무엇이 잘못된 것입니까? 아무리 선한 일이라도 거짓말을 하고, 말씀을 지키기 못하게까지 하면서 하면 절대로 안 된다는 것이죠?
여기 하나님의 사람의 시체, 나귀, 사자는 그 길에서 여로보암과 북이스라엘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의 말씀의 신실함과 엄중함을 전달하면서 모든 사람들의 뇌리에 결코 잊혀지지 않을 만큼 놀랍고 충격적인 장면을 연출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게 이토록 놀랍고도 충격적인 사건을 주셨을까요? 하나님은 이 놀랍고도 충격적인 장면을 통해 무엇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까?
하나님은 아무리 선하고 합리적이고 인지상정처럼 보이는 일이라 할지라도, 어떤 경우에도 말씀에 불순종하는 자는 반드시 심판하신다는 강력한 메시지를 보여주시며 회개를 촉구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이겠습니까?
첫째, 우리는 특히 주의 종들은 결코 순종을 늦추는 영적 태만을 보여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둘째, 우리는 특히 주의 종들은 결코 있지 말아야 할 자리를 피하고 있어야 할 신령한 자리에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셋째, 하나님의 놀라운 일을 수행하고 난 다음에는 분명 시험이 올 수 있음을 기억하고, 우리는 그 모든 시험을 이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치 예수님이 40일 금식후 세 번의 시험을 다 말씀으로 승리하였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하나님의 사람은 첫 번째 시험은 통과했으나 두 번째 늙은 선지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빙자할 때는 분별력을 잃고 유혹에 빠지게 되었죠?
이처럼 유혹에 빠진 하나님의 사람이나 또한 거짓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빙자하였던 늙은 선지자나, 모두 영적 태만과 헤이함으로 영적분별력과 센스를 잃고 범죄하고 있었던 것이죠?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오늘 하루 여러분의 삶이 늘 있어야 할 자리에서 순종하기를 늦추지 않으심으로 영적으로 센스있는 삶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께서 분명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가 잘되고 강건케 하실 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