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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의 위기와 사울의 허세(삼상 28: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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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시간 다윗의 속임수에 넘어가 다윗을 신임함으로 다윗을 자신의 부하로 삼고 시글락이란 지역을 주었던 블레셋의 아기스왕은, 이제 다윗을 영원히 자신의 종으로 이용할 수 있음을 확인한 후에 이스라엘을 침공하기 위해 군대를 모집하고 있습니다.

이제 악신이 들린 사울의 군대는 이미 약해져 있었고, 그나만 이스라엘의 희망이라 할 수 있는 다윗이 자기편으로 넘어왔다고 확인하였기에, 그는 이제 이스라엘을 침공하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아기스가 다윗을 자신의 완전한 부하로 삼음으로 얼마나 고무되어 있었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다윗은 어찌할 것인가? 1절 하반절을 보면, 아기스는 다윗을 전쟁에 참여시키려 하고 있는데, 과연 다윗은 아기스의 이스라엘 침공을 위한 군대모집에 참여할 것인가?

2절을 읽겠습니다. "다윗이 아기스에게 이르되 그러면 당신이 종의 행할 바를 아시리이다. 아기스가 다윗에게 이르되 그러면 내가 너를 영영히 내 머리 지키는 자를 삼으리라 하니라."

여기 다윗이 한 말, '그러면 당신이 종의 행할 바를 아시리이다.'라는 말은 무슨 의미일까요?

다윗은 지금 자기가 이스라엘을 치러 가는 싸움에 나가겠다고 대답하지 않고, 아기스 왕에게 당신은 내가 앞으로 행할 일을 알게 될 것입니다. 라는 말만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말을 들은 아기스는 이 말을 어떻게 이해했겠습니까? 당연히 그는 다윗이 전쟁에 참여할 것이라는 말로 들었을 것이죠?

그러나 다윗의 입장에서의 이 말의 의미는 어떠한 것이었겠습니까? 다윗은 결코 자기 민족 이스라엘과의 전쟁에 참여할 수가 없었죠?

그렇다면, 이 말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가 동족과는 싸울 수 없지만, 그렇다고 아기스의 말을 거역할 수도 없는 처지에서 책임질 수 없는 대답을 피하며 애매모호하게 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아기스는 역시 이 말을 오해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러면 내가 너로 영영히 내 머리 지키는 자를 삼으리라'고 했습니다.

이제 다윗이 전쟁에 나가면, 다윗을 자신의 머리 지키는 자, 이것은 호위대장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제 아기스는 다윗에게 자기의 생명을 맡길 정도로 다윗을 신임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다윗은 어떻게 할까요? 과연 그는 자기 민족의 피를 흘리게 만들까요?

그런데 3절은 이스라엘의 다른 상황을 삽입시키고 있습니다. 읽겠습니다.

"사무엘이 죽었으므로 온 이스라엘이 그를 애곡하며 그의 본성 라마에 장사하였고, 사울은 신접한 자와 박수를 그 땅에서 쫓아내었었더라."

사무엘이 죽은 후의 장사와 사울이 행한 좋은 일을 기록하고 있죠? 신접한 자와 박수를 쫓아냈다는 것은, 사울이 하나님 앞에서 굉장히 칭찬받을만한 일을 했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바로 이 블레셋과의 전쟁을 앞둔 상황에서, 그것도 어쩌면 다윗이 이스라엘을 대항하여 출전할 수도 있는 상황에서 이런 말씀을 삽입하고 있었을까요?

사실 여기서 사울이 신접한 자와 박수를 쫓아내었다는 말은, 별로 좋은 의미가 아닌 것으로 성경학자들은 해석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울은 스스로도 신접한 여인에게 찾아가 도움을 구했을 정도로, 적어도 그 자신의 신앙에서는 그들을 쫓아낼 이유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오히려 사울이 당시 이스라엘의 영적 지도자 사무엘의 죽음을 계기로 해서, 마치 자신이 여호와 신앙의 순수성을 지키는 것처럼 백성들 앞에서 과시를 함으로 지도력을 얻고자 거짓으로 허세를 부렸던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3절의 말씀은 당시 이스라엘의 영적 상태가 어떠했는지, 지도력이 어떠했는지를 보여준다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는 결코 좋은 징조라 할 수 없고, 이와 같은 상황에서 블레셋은 이스라엘을 공격하고 있는데, 4절에서 블레셋이 길보아에 진을 쳤다고 하니까, 5절에서 사울은 이를 보고 두려워서 마음이 크게 떨렸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또 기록합니다. 6절과 7절을 읽습니다.

"사울이 여호와께 묻자오되 여호와께서 꿈으로도, 우림으로도, 선지자로도 그에게 대답지 아니하시므로, 사울이 그 신하들에게 이르되 나를 위하여 신접한 여인을 찾으라 내가 그리로 가서 그에게 물으리라 그 신하들이 그에게 이르되 보소서 엔돌에 신접한 여인이 있나이다."

정말 6절이 당시 이스라엘의 영적 상태가 어떠했는지를 분명히 나타내고 있죠?

당시 이스라엘에는 아무런 계시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침묵하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답답한 사울은 이제 신접한 여인을 찾게 되는데, 어떻습니까? 좀 전 3절에서 말한 것과는 어떻습니까? 완전히 다른 것을 볼 수 있죠?

그가 신접한 자와 박수를 쫓아내었다는 것이 허세였음은, 바로 여기서 들통이 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이제 엔돌의 신접한 여인을 찾아가고 있습니다. 다같이 8절을 읽겠습니다.

"사울이 다른 옷을 입어 변장하고 두 사람과 함께 갈쌔 그들이 밤에 그 여인에게 이르러는 사울이 가로되 청하노니 나를 위하여 신접한 술법으로 내가 네게 말하는 사람을 불러올리라."

그의 행동이 그가 백성에게 보여주었던 것과 맞지가 않기 때문에 그는 변장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는 자신이 말하는 사람을 불러올리라고 말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그는 과연 누구일까요?

그러나 그 이전에 그 여인이 말하고 있죠? 9절을 읽습니다.

"여인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사울의 행한 일 곧 그가 신접한 자와 박수를 이 땅에서 멸절시켰음을 아나니, 네가 어찌하여 내 생명에 올무를 놓아 나를 죽게 하려느냐"

지금 이 신접한 여인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입니까? 사울이 국가적으로 신접한 자와 박수를 멸절시키고 있으니까, 이 사람도 자신에게 올무를 놓아 그가 신접한 자임을 밝혀냄으로 그를 죽게 하려한다고 생각했던 것이죠?

아직 이 사람이 사울이라는 생각은 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다만 자신을 잡아 죽게 하려는 자로만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사울은 어떻게 할 것인가? 그는 여호와의 이름을 빌려가면서까지 네가 이 일로 벌을 당치 아니하리라는 말을 하죠?

무슨 의미입니까? 그만큼 사울이 신접한 여인이 절실하게 필요했다는 것이죠?

그렇다면, 왜 필요했을까요? 11절을 읽겠습니다.

"여인이 가로되 내가 누구를 네게로 불러올리랴, 사울이 가로되 사무엘을 불러올리라."

결국 누구를 불러오라고 하고 있습니까? 사무엘이죠? 무엇을 나타냅니까? 그만큼 그가 사무엘을 의지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죠?

그런데 신접한 여인이 사무엘을 보면서 큰 소리를 치며 말하고 있습니다. 12절을 읽겠습니다. "여인이 사무엘을 보고 큰 소리로 외치며 사울에게 말하여 가로되 당신이 어찌하여 나를 속이셨나이까, 당신이 사울이시니이다."

지금까지는 알지 못했다는 것이고, 그러나 이제는 알게 되었는데, 어떻습니까? 두려움에 떨고 있었던 것이죠? 왜요? 그는 바로 신접한 자와 박수를 다 죽인 장본인이기 때문에, 자신도 죽을 수 있다는 생각때문이죠?

그러므로 사울은 이제 그에게 두려워말라 말하며, 자신이 원하는 바를 구하고 있습니다. '네가 무엇을 보았느냐?'

이 여인은 내가 신이 땅에서 올라오는 것을 보았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모양을 말하는데, 한 노인이요, 겉옷을 입었다고 말합니다. 이때 사울은 그가 바로 사무엘임을 알고 얼굴을 땅에 대고 절하죠?

그렇다면, 여기 신은 무엇이며, 과연 사울이 본 것은 사무엘이었을까요?

이것은 다음 시간에 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을 통해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교훈은 무엇이겠습니까?

첫째, 다윗을 통해 주시는 교훈은, 다윗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방법대로 하지 않으면 분명 위기를 맞이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방법대로 하지 않고 속임수를 썼다가 자기 민족과의 전쟁을 치루어야 할 위기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또 그가 결코 원치 않는 아기스의 호위대장이 될 위기에 처하였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정당한 하나님의 방법으로 인생을 살지 않는다면, 때때로 우리가 원치 않는 일을 해야만 하는 인생의 위기를 맞을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둘째, 사울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의 경건행위를 결코 허세로 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결국 사울은 신접한 자를 진멸하고도 또한 신접한 여인을 찾아감으로, 그냥 신접한 여인을 찾아간 것보다 더 큰 죄악을 저지르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도 오늘날 하나님 잘 섬기는 행위를 가식적으로 했다가는 더 큰 죄악에 빠질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성도 여러분, 그러므로 오늘도 여러분은 정직하고 순전한 삶을 살아가시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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