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열왕기상을 끝내고, 열왕기하를 시작합니다.
지난 시간 열왕기상은 아합의 죽음과 여호사밧에 관한 평가, 그리고 아합이 죽은 후 그의 아들 아하시야가 이스라엘의 왕으로 등극한 일에 대하여 마지막으로 기술하며 마쳤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가? 특별히 지난 시간 아합은 그 가문이 멸망을 받을 것이라는 예언을 받았던 적이 있고, 이에 그가 회개함으로 그 예언이 유보가 된 적이 있는데, 그렇다면, 그 일이 이제는 일어날 것인가?
오늘 열왕기하에 들어서는 이스라엘 역사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1절은 먼저 모압의 배반을 말하고 있습니다. 다같이 1절을 읽겠습니다.
“아합이 죽은 후에 모압이 이스라엘을 배반하였더라.”
아합이 죽은 후와 모압이 이스라엘을 배반한 것은 무슨 관계가 있을까요?
그만큼 국력이 쇠해졌음을 의미하는 것이겠죠? 그래도 아합의 나름대로 막강한 나라를 통치하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윗에 의해 정복을 당하고 그 후로 계속해서 이스라엘에게 조공을 바치던 모압이, 이제 타락한 북이스라엘 왕들의 쇠퇴로 말미암아, 기회를 엿보다가 결국 아합 때에 이르러 반기를 들기 시작했고, 이제 아합이 죽고 나니까, 완전히 이스라엘을 배반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와중에 아합의 아들 아하시야가 다락 난간에서 떨어져 병이 드는 불운까지 겹치고 있습니다.
2절을 보면, “그가 병들매, 사자를 보내며 저희더러 이르되 가서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이 병이 낫겠나 물어 보라 하니라.”고 말합니다.
떨어져 병들었다는 것은, 그가 높은 곳에서 떨어짐으로 심한 타박상과 골절을 입은 상태, 그리고 거기에다 어떤 합병증까지도 입은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에그론이란 블레셋의 지역의 신 바알세붑, 번역하면 ‘파리의 주’ ‘날벌레의 주’란 의미가 있는데, 이곳으로 사자를 보내어, 이 병이 낫겠나를 물어보라 했다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 발생하고 있는 것이죠? 어떤 글을 읽어보니까, 지금 미국에도 이 바알을 믿는 자들이 있다는 이야기를 보았습니다.
그렇다면, 이 바알은 누구냐? 샤마니즘의 최고의 신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어떤 종교를 통해서든, 이 경지에 이르기만 하면 된다는 식으로 현재 보이지 않는 검은 손이 세상을 종교다원주의로 만들고 있다는 글을 읽어보았습니다.
그렇다면, 아하시야는 왜 자신의 병문제를 바알세붑에게 물으러 했을까요?
사실 그가 질병에 걸렸으면 의사를 찾았어야 했죠? 물론 하나님께도 기도해야 했겠지만, 그는 하나님을 잘 섬기는 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난간에서 떨어져 몸이 다친 일로 우상을, 그것도 멀리 블레셋의 우상을 찾아, 자신이 나을 것인지를 물어보라 한 것은, 그가 얼마나 영적으로 약한 자였으며, 그래서 조그마한 일에도 우상에 묻고 행하며 의지하려 했던 우상숭배에 민감한 자였는지를 잘 나타낸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 점보러 다니기를 좋아하는 사람)
그런데 이 때 여호와께서 엘리야에게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3절을 읽겠습니다.
“여호와의 사자 디셉 사람 엘리야에게 이르시되 너는 일어나 올라가서 사마리아 왕의 사자를 만나서 저에게 이르기를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없어서 너희가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물으러 가느냐?”
어떻습니까? 얼마나 답답하셨겠습니까? 사실 여호와 하나님은 누구의 하나님이십니까?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셨죠? 그런데 그런 하나님을 뒤로 하고는 바알세붑을 만나러 간다니, 여러분 하나님이 얼마나 화가 나셨겠습니까?
만일 여러분이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도,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고, 그저 인간적으로 답답하다 하여, 점쟁이를 찾아간다거나, 무당을 찾아간다면, 하나님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러므로 4절을 보면, ‘여호와의 말씀이 네가 올라간 침상에서 내려오지 못할지라.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고 전하게 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사람이나 점쟁이에게 물음으로 하나님을 화나게 해드려서는 아니될 줄 믿습니다.
그러나 모든 일에 있어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그 백성이 어떻게 어떤 일에 있어서는 하나님을 소외시키고 배제시킬 수 있습니까?
우리는 모든 일에 절대로 하나님을 섭섭하게 해드려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여러분의 일을 여러분에게 묻지 않으면 섭섭해 하실 때가 많죠? 하나님도 역시 섭섭해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일은 기도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엘리야가 하나님의 이 말씀을 전하였는데, 아마도 왕이 보낸 사자들에게 전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사자들이 왕에게 돌아오는데, 왕이 너희는 어찌하여 돌아왔느냐고 묻고, 그래서 그 사자들은 엘리야가 말한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전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7절을 보면, 먼저 그 이야기를 전한 사람이 누구인지를 확인하고 있죠?
그래서 ‘너희에게 고한 그 사람의 모양이 어떠하더냐?’고 묻고, 이에 사자들은 그가 털이 많고, 허리에 가죽띠를 띠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사람은 누구일까요? 왕이 가로되 그는 디셉 사람 엘리야로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이제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과연 왕은 엘리야의 말을 듣고 두려워서 벌벌 떨고 있을까요? 어떻게 할까요?
그런데 9절을 보면, 오십부장과 그 오십인을 엘리야에게 보내죠? 그리고 오십부장이 산꼭대기에 앉은 엘리야를 보고는 ‘하나님의 사람이여, 왕의 말씀이 내려오라 하셨나이다.’라고 말합니다.
과연 엘리야가 내려갈까요? 이미 하나님의 뜻은 정해져 있는데, 그가 내려갈 이유가 있었을까요?
이때 10절에서 엘리야가 말합니다. 다같이 읽겠습니다.
“엘리야가 오십부장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만일 하나님의 사람이면 불이 하늘에서 내려와서 너와 너의 오십인을 사를지로다 하매 불이 곧 하늘에서 내려와서 저와 오십인을 살랐더라.”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요? 성경학자들은 두 가지로 보고 있습니다.
첫째는 오십부장의 불손한 태도를 징치하기 위함이며, 둘째는 아하시야 왕의 완악함을 경고하기 위함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아하시야는 어떻게 할 것인가? 사실 아하시야가 엘리야를 두려워했다면, 그만 엘리야를 부르지 말았어야 했죠?
그런데 어떻게 합니까? 다시 오십부장과 오십인을 보내죠? 그리고 또다시 엘리야에게 왕의 말씀이 속히 내려오라 하셨다고 전하고 있죠?
그리고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또 다시 똑같은 일이 일어나, 새로 다시 온 오십부장과 오십인이 다 불살라 죽게 되죠?
이렇게 아하시야가 왕의 위치에서 두 번이나 같은 행위를 시행했다는 것은, 이미 개인적인 차원을 떠나 국가적인 의지를 표명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엘리야는 왜 또 이렇게 오십인을 죽였을까요? 그러나 사실 누가 죽인 것입니까? 엘리야가 아니라 하나님이신 것이죠?
그러므로 여기서 엘리야가 자신이 ‘만일 하나님의 사람이면’ 이라는 말은, 그들로 이스라엘에 아직도 하나님께서 살아서 실존하시고 계심을 나타낸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세 번째 오십부장과 오십인을 보내는데,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다같이 13절을 읽겠습니다.
“왕이 세 번째 오십부장과 그 오십인을 보낸지라. 셋째 오십부장이 올라가서 엘리야의 앞에 이르러 꿇어 엎드려 간구하여 가로되 하나님의 사람이여 원컨대 나의 생명과 당신의 종인 이 오십인의 생명을 당신은 귀히 보소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까? 세 번째 오십부장이 엘리야 앞에 무릎을 꿇고는 살려달라고 말하죠? 왜요?
14절의 말씀대로 전번에 그런 일이 있었기 때문이겠지만, 그는 그런 일을 통하여 아직도 하나님은 살아서 이스라엘 가운데 역사하시고 계시며, 또한 아직도 엘리야를 사용하시고 계시다는 사실을 분명히 깨달았기 때문이라 하겠죠?
사실 지난 번 이세벨이 엘리야를 죽인다고 해서 엘리야가 도망을 간 이후로, 지금 엘리야는 처음으로 등장을 하고 있는 것이죠?
그러므로 그들은 이제 엘리야는 하나님이 버리신 비겁한 종이라는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제 이런 일들을 통하여 엘리야는 당당히 자신이 아직도 하나님께 쓰임을 받고 있음을 드러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제 세 번째 오십부장은 그것을 인정하는 말을 하며 살려달라 했는데, 그렇다면, 과연 엘리야는 이번에는 어떻게 할까요?
15절을 보면, 두려워말고 함께 내려가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내리죠? 이에 엘리야가 저와 함께 내려가서 왕에게 하나님의 죽으리라는 메시지를 전하고, 그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죽죠?
17절에 저가 아들이 없으므로 여호람이 대신하여 왕이 되었다고 했는데, 여기 여호람은 누구일까요?
라틴어 성경에는 ‘그의 형제’라는 말이 덧붙여져 있습니다. 그는 유다 왕 여호사밧의 아들 여호람이 아니라, 아하시야의 형제 여호람(요람)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아합의 가정은 훗날 예후라는 사람에 의해 다 몰살을 당하게 되죠?
그렇다면, 오늘 본문을 통하여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교훈은 무엇이겠습니까?
먼저 성도는 언제나 하나님의 심기를 건드리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께 기도하며 행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버지께 묻고 행하는 자식을 아버지가 더 좋아하죠? 하나님도 마찬가지시라는 것입니다.
둘째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한다는 것이죠? 따라서 주의 종들도 두려워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말씀은 축복의 말씀이든, 저주의 말씀이든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언제나 축복의 말씀을 듣는 자가 되고자 힘써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이 실로 늘 하나님의 은총과 축복이 그치지 않게 되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