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본문도 북이스라엘 아합의 왕가에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기까지, 이미 확정된 심판의 상황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구원의 사역이 계속해서 진행되고 있음을 소개하고 있는 일련의 기사의 연속부분입니다.
지난 시간은 하나님께서 이미 심판이 확정된 이스라엘 가운데서도, 아람군대가 쳐들왔는데도 구원해 주시는 은총을 베풀어 주셨죠?
특별히 여기에는 엘리사 선지자를 통한 분명한 메시지가 있었던 것을 볼 수 있는데, 그 메시지가 무엇이었습니까?
한마디로 회개의 촉구와 믿음의 회복이었던 것이죠? 그들이 다시 심판에서 돌이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회개하는 것이었고, 그리고 그 후에도 여전히 그들이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님만을 신뢰하는 일이었음을 계속해서 여러 가지 사건을 통해 암시하거나 직접적으로 선포하고 있었습니다.
이제 이 이야기가 엘리사의 칠년기근에 대한 예언의 말로부터 시작되고 있습니다. 다같이 1절을 읽겠습니다.
“엘리사가 이전에 아들을 다시 살려준 여인에게 이르되, 너는 일어나서 네 권속과 함께 거할만한 곳으로 가서 거하라. 여호와께서 기근을 명하셨으니 그대로 이 땅에 칠년 동안 임하리라.”
무엇을 말합니까? 엘리사가 이전에 아들을 다시 살려준 여인이 누구입니까?
엘리사를 극진히 섬겼던 수넴여인이었죠? 그런데 그때는 아들이 없다 해서 아들을 낳게 해주고, 또 그 아들이 죽었을 때 살려주는 은혜를 베풀었었는데, 이번에도 또 다시 칠년기근이 올 것과 그러므로 그 여인으로 그곳을 떠나갈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어떻습니까?
한번 주의 은혜를 입은 사람은 계속해서 주의 은혜를 입게 되는 것을 볼 수 있죠? 이처럼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잘 섬겨서 손해보는 사람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이 기근은 언제 일어난 기근일까요? 모든 것을 종합해 볼 때, 이 기근은 지난 시간 살펴본 사마리아 성에 임한 기근보다는 훨씬 더 이전에 일어났던 사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열왕기하는 지난 번에도 말씀드린 적이 있지만, 연대기적(시간순)으로 기록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는 것이죠?
이것은 지난 시간 말씀드린 대로, 사마리아성에만 국한된 기근이 아니라, 팔레스타인 대부분에 해당되는 기근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7년이라고 했습니다. 어떻습니까? 굉장히 긴 시간이죠? 언제 이런 기근이 있었습니까? 아합 왕때에도 3년 반의 기근이었습니다. 그리고는 없었습니다.
굳이 거슬러 올라간다면, 그 옛날 요셉이 국무총리가 되었을 때, 바로 왕의 꿈해석을 통해 예언했던 7년기근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거의 지중해 연안국 동남부 전체에 있었던 기근이었죠?
그러므로 이제 이 여인은 일어나 하나님의 사람의 말대로 행하여 그 가족들과 함께 블레셋 사람의 땅에 칠년을 우거했다고 했습니다.
블레셋이 어디입니까? 오늘날로 말하자면, 가자지구이죠? 바로 지중해 옆과 유다남쪽 옆에 붙어 있는 작은 나라입니다.
특히 이곳은 해안지대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강수량도 적절하여 농사짓기에 좋은 환경이었다고 합니다.
따라서 아무리 팔레스타인에 기근이 와도 그나마 이곳은 이런 자연환경 때문에 좀 덜 기근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블레셋에서 칠년을 지낸 후, 이 여인이 다시 이스라엘의 땅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이 생기고 있습니다. 무슨 일일까요? 3절을 읽겠습니다.
“칠년이 다하매 여인이 블레셋 사람의 땅에서 돌아와서 자기 집과 전토를 위하여 호소하려 하여 왕에게 나아갔더라.”
무슨 일이 벌어졌습니다. 칠년이나 집을 비우고 다른 나라로 가 있었으니까, 그 집과 땅이 다 남의 것이 되어버렸다는 것이죠?
성경학자들은 아마 이 여인이 기근을 피해 칠년간 블레셋에 머무는 동안 그의 집과 전토는 주인없는 땅으로 간주되어 국가에 귀속되었거나 아니면 다른 사람이 그 땅을 차지하였을 것이라고 봅니다.
그래서 그녀는 그 자기 집과 전토를 되찾기 위하여 왕에게 나아가는데, 이것을 히브리어 원문에서는 ‘차아크’라는 단어를 썼습니다.
무슨 말이냐하면, 이 ‘차아크’는 ‘커다란 고통의 상황에 처하여 도움을 부르짖거나 흥분하여 절규를 발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이 여인이 왜 그랬을까요? 이 땅을 잃어버린 것이 너무 부당하고 억울했기 때문이겠죠? 그러므로 그는 왕에게 나아가 부르짖으며, 공의로운 심판을 요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옛날 우리 나라에도 신문고라는 제도가 있었죠?
그렇다면, 이제 왕은 어떻게 할 것인가? 그런데 때마침 왕궁에서 우연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다같이 4절을 읽겠습니다.
“때에 왕이 하나님의 사람의 사환 게하시와 서로 말씀하며 가로되 너는 엘리사의 행한 모든 큰일을 내게 고하라 하니.”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까? 수넴 여인이 집과 땅을 찾기 위해 왕궁으로 갔을 때, 때마침 왕과 엘리사의 종 게하시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는 것이죠?
그렇다면, 지금이 어떤 때임을 알 수 있습니까? 게하시가 나아만 장군이 가져온 물건에 대한 탐욕 때문에 거짓을 행함으로 문둥병자가 되었던 때 이전, 그러니까, 5장 이전의 사건이 지금 나오고 있음을 알 수 있죠?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서 분명 이 열왕기서가 연대기적(시간적 순서)로 기록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왕과 게하시는 무슨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을까요? 5절을 읽겠습니다.
“게하시가 곧 엘리사가 죽은 자를 다시 살린 일을 왕에게 이야기할 때에 그 다시 살린 아이의 어미가 자기 집과 전토를 위하여 왕에게 호소하는지라 게하시가 가로되 내 주 왕이여 이는 그 여인이요 저는 그 아들이니 곧 엘리사가 다시 살린 자니이다.”
놀라운 사실은 지금 게하시가 왕에게 수넴여인에게 일어났던 기적을 이야기할 때와 수넴여인이 왕에게 자신의 부당함을 호소하러 들어올 때와 시간이 같았다는 것이죠?
우연일까요? 아니죠? 지난 번에도 황혼의 때에 문둥병자들이 아람의 군대진영으로 갔고, 그 아람군대는 또 마침 그 때에 하나님께서 들려주신 병거와 말과 큰 군대소리를 듣고는 도망을 갔었습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분명 하나님의 섭리라는 것이죠?
그러므로 게하시가 ‘이는 그 여인이요, 저는 그 아들이니, 곧 엘리사가 다시 살린 자니이다.’라고 마침 말하게 될 때, 이 여인의 호소가 어찌 되겠습니까?
훨씬 더 왕이 들어주기가 쉽게 된 것이죠? 우리는 분명 여기서 하나님이 개입하시고 계심을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왕은 어찌할까요? 6절을 읽겠습니다.
“왕이 그 여인에게 물으매 여인이 고한지라 왕이 저를 위하여 한 관리를 임명하여 가로되 무릇 이 여인에게 속한 것과 이 땅에서 떠날 때부터 이제까지 그 밭의 소출을 다 돌려주라 하였더라.”
어떻게 되고 있습니까? 왕이 그 수넴 여인 하나를 위하여 관리까지 임명해가면서까지 그를 도와 그에게 속한 모든 것을 회복시켜주는 일이 일어나고 있죠?
게하시가 왕에게 수넴 여인의 일을 말할 때 들어가,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했던 것이, 오히려 수넴여인에게는 놀라운 이득이 되고 있음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이와 같이 수넴여인의 삶에 놀랍게도 때를 맞추시는 섭리 가운데 그로 하여금 그의 문제가 해결을 받도록 하셨을까요? 왜요?
결론적으로 보자면, 우리는 여기서 어떤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습니까? 순종하는 자를 책임지시는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죠?
지금 수넴여인이 자신의 집과 전토를 잃어버리게 되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가 칠년이란 긴 세월동안이나 그 집과 전토를 떠났었기 때문이죠?
그렇다면, 왜 떠났습니까? 엘리사가 시켜서 였던 것이죠? 그렇다면, 그 수넴여인이 그의 집과 전토를 잃어버리게 된 근본적인 원인은 누구에게 있는 것입니까?
엘리사에게 있다는 것이죠?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 일에 대해서 책임을 줘 주셨는데,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 엘리사의 일을 이처럼 책임져주시고 계셨을까요?
우리는 여기서 주의 종의 사역을 책임져주시는 하나님을 또한 발견할 수 있는 것이죠?
저도 종종 이런 경험이 있습니다. 제가 하라 해서 순종함으로 손해를 본 것은, 하나님이 간섭하심으로 채워주시는 일을 볼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이겠습니까? 이처럼 하나님은 주의 종들도 사랑하셔서 책임져주시고, 또한 그들을 사랑해서 돕고 섬김으로 그들의 사랑을 받는 이들도 역시 사랑하셔서 책임져 주신다는 것이죠?
그래서 마태복음 10장 42절을 보면,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고 했죠?
그래서 우리는 모두가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는 자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사랑하는 서로를 통하여 더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여러분 모두를 사랑하고 있고, 그래서 혹이라도 성도들에게 좋지 않은 맘을 갖지 않으려고 무척이나 주의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간혹 이런 마음을 가졌다가, 그가 잘못되어지는 것을 본 경험이 예전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의 부친이 항상 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주의 종들은 무조건 성도들을 많이 축복해 주어야 한다. 그러면 그들이 복을 받으면 받고, 그렇지 않으면 나에게로 돌아온다. 그래서 저는 매일같이 여러분 한분 한분을 놓고 축복하며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반드시 여러분을 축복해 주실 줄 믿습니다. 오늘도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가 잘되고 강건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