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시간은 아합왕가를 멸망시킨 북이스라엘의 예후왕조의 2대왕인 여호아하스와 그의 아들 요아스의 통치에 대해서 살펴보았죠?
특히 요아스는 엘리사가 운명을 하게 되자, 엘리사를 아버지라 부르면서 그의 죽음을 안타깝게 여겼던 것을 보았고,
이에 엘리사는 요아스에게 활과 살을 붙잡게 한 후, 동편창을 열고 활를 쏘게 하고, 화살로 땅을 치게 하라 했는데, 요아스가 세 번 밖에는 땅을 치지 않아 세 번만 아람에게 이겼던 것을 살펴보았죠?
오늘은 다시 북이스라엘에서 남유다로 넘어오고 있습니다. 지난 시간 아합의 딸 이자, 예후에 의해 죽은 유다왕 아하시야의 어머니인 아달랴의 통치를 뒤엎고 새로운 왕이 되었던 요아스의 통치에 대해서 살펴보았죠?
오늘은 그의 아들 아마샤가 유다 왕이 되고 있습니다. 2절을 보면, 그는 25세에 왕이 되어 29년을 통치했다고 했는데,
3절을 보면,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으나 그 조상 다윗과는 같지 아니하였고, 산당은 제하지 않아 백성이 오히려 산당에서 제사를 드리게 되는 범죄를 저지르게 했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그의 통치 기간 중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함께 살펴보며 은혜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다같이 먼저 5절을 읽겠습니다.
“나라가 그 손에 굳게 서매 그 부왕을 죽인 신복들을 죽였으나”
여기 부왕은 요아스이고, 요아스는 지난 시간 하사엘의 침공 때에 성전의 기물들을 그에게 주어 위기를 모면한 후, 신복들에 의해 실라로 내려가는 길가의 밀로 궁에서 죽었다고 했죠?
그런데 그 요아스의 뒤를 이어 왕이 된 아마샤가 그때 자기 아버지를 죽인 신복들에게 복수를 행하였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것은 당시 어린 나이에 왕이 되어 거의 섭정을 받음으로 왕권이 약해졌던 요아스 때의 약한 왕권이 다시 강하게 회복되었음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여기서 ‘나라가 그 손에 굳게 서매’라는 말의 의미를 보면, 첫째, 지금 왕권이 솔로몬의 번영기 때처럼 확실하게 확립되었음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 아마샤의 왕권이 강하게 확립될 수 있었느냐?
성경학자들은 그것은 아마샤가 아버지의 죽음으로 어려운 상황을 맞았음에도 여호와 앞에서 정직히 행하였기에 정권을 확립할 수 있었다고 말합니다.
둘째, 여기 나라가 그 손에 굳게 섰다는 말은, 통치권의 확립과 더불어 국력의 신장으로 보고 있습니다.
사실 당시 유다는 아하시야와 아달랴의 집권, 그리고 아람왕 하사엘의 공격으로 약해질 대로 약해진 국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마샤는 에돔과 싸워 대승을 거둠으로 국력신장의 계기를 삼음으로 나라를 굳게 서게 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어떻게요? 역시 여호와 앞에 정직히 행하였기 때문인 것이죠?
성도 여러분, 세상의 모든 문제를 풀어가는 데 있어서의 확실한 만능열쇠는 있을까요? 있죠? 무엇인 것 같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정직히 행하는 것이죠? 가정의 자녀의 문제는 그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서 정직히 행하게 하는 것보다 더 확실한 해결책은 없죠?
부부사이의 문제는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를 확실히 바르게 하는 일로 풀어가려 한다면, 해결되지 못할 문제가 없죠?
사업도 그렇고, 교회도 그렇고, 사실은 세상의 어떤 것도 다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먼저 하나님 앞에서 정직히 행하도록만 잘 한다면, 이보다 확실한 문제해결의 열쇠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무엇이겠습니까? 그렇게 해서 하나님이 축복해 주시면 계속해서 겸손하게 하나님만 의지하며 정직히 행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고 교만하여 범죄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마샤가 북이스라엘 왕 요아스에게 동맹을 맺으러하다가 큰 화를 불러 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9절에 요아스가 아마샤에게, “레바논 가시나무가 레바논 백향목에게 보내어 이르기를 네 딸을 내 아들에게 주어 아내를 삼게 하라 하였더니 레바논 들짐승이 지나가다가 그 가시나무를 짓밟았느니라.”고 했는데,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이겠습니까?
여기 가시나무는 유다, 백향목은 이스라엘을 상징하죠? 그런데 가시나무가 갑자기 교만하여 백향목에게 딸을 달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교만하다고 보는 것입니까? 이런 요구는 당시 동등한 신분이라야 성사될 수 있는 것인데, 감히 가시나무가 백향목에게 교만하여 딸을 달라 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10절을 보면 네가 에돔을 쳐서 파하였으므로 마음이 교만하였으니 스스로 영광을 삼아 궁에나 거하라 어찌하여 화를 자취하여 너와 유다가 함께 망하고자 하느냐 고 말하죠?
그러나 영적인 시각으로 보았을 때는 유다에게 또 다른 교만의 모습이 있습니다. 뭘까요?
지금 유다가 우상숭배를 하는 이스라엘과 동맹을 맺는 것이 합당한 일입니까? 아니죠?
하나님을 잘 믿는 경건한 왕 여호사밧 왕 때에도 북이스라엘의 아합과 동맹을 맺었다가 가문이 몰살을 당하는 결과까지 초래되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역시 지금 아마샤도 아무리 도움의 손길이 필요했더라도 결코 우상숭배를 하는 북이스라엘과는 손을 잡지 말았어야 했다는 것입니다.
결국 어떻게 됩니까? 북이스라엘 요아스에 의해 예루살렘이 침공을 당해 성벽이 헐리고, 여호와의 전과 왕궁 곳간에 있는 금은과 모든 기명을 빼앗기고 사람들도 볼모로 잡히는 참변을 당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6장 15절은,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라고 했죠?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오직 하나님만 의지해야 할 줄 믿습니다. 결국 아마샤은 요아스가 죽은 후에도 십오년을 생존하지만, 어떻게 됩니까?
19절을 보면, “예루살렘에서 무리가 저를 모반한 고로 저가 라기스로 도망하였더니 모반한 무리가 사람을 라기스로 따라 보내어 저를 거기서 죽이게 하고”라고 했습니다.
아마샤는 어떻게 됩니까? 모반한 무리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무엇을 깨닫게 됩니까?
우리가 아무리 하나님을 섬기는 것처럼 보여도, 세상과 짝하거나 세상의 힘을 의지하려 한다면, 하나님은 진노하신다는 것이죠?
이런 신앙은 어찌보면, 가식적인 신앙인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앞에선 하나님만 섬기는 것처럼 하면서, 뒤로는 세상도, 사람도 의지하는 것 어떻습니까?
그래서 오늘날 우리도 그 옛날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기 전에 고백했던 것처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만을 섬기겠노라’고 고백하고 선포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결국 아마샤는 다윗 성에서 장사되고, 그 뒤를 이어 아마샤의 아들 아사랴가 왕이 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 22절에 엘랏을 건축하였다고 했는데, 엘랏은 지금의 홍해만 반대쪽 아카바만에 위치한 곳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상당히 남쪽까지 내려갔죠?
어떻게 이렇게 남쪽까지 내려갈 수 있었겠습니까? 그의 아비 아마샤가 에돔을 대파했기 때문인 것이죠?
결국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에돔을 친 일로는 귀중한 유산을 후손에게 남겨주는 위대한 일을 하지만, 그러나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우상숭배자들과의 동맹을 한 일로는 멸망을 받게 되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깨달을 수 있겠습니까?
성도 여러분, 심은대로 거둔다는 말씀이 있죠? 우리가 선으로 심은 것은 선한 열매가 맺히고, 악으로 심은 것은 악한 열매가 맺힌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선한 것, 좋은 것을 심는 자들이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그러나 마태복음 7장은 우리가 근본적으로 좋은 나무가 되지 아니하면 좋은 열매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다고 했죠?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근본적으로 좋은 나무가 될 수 있을까요?
성도 여러분, 성령받아야 좋은 나무가 될 수 있는 줄 믿습니다. 그 안에 성령이 충만하여야 근본적으로 우리의 내면이 변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예수의 이름으로 회개하고 성령충만을 구하여야 하는 것이죠?
오늘 이 아침도 기도하고 일어설 때, 성령의 충만함으로 일어서시게 되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