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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는 잠잠하라?(고전 14: 2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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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5절까지에서는 개인의 경건생활을 위해서는 방언이 좋을지 몰라도, 교회의 덕을 세움에 있어서는 방언보다는 예언의 은사가 더 좋다는 것을 말하였죠?

 

1절로 19절에서는 방언보다는 예언이 더 유익하다는 말과 함께 방언의 한계와 올바른 사용에 대해서 말하였고,

 

20절로 25절에서는 방언과 예언의 상반된 역할에 대해 중점적으로 말하였습니다.

 

이제 오늘 본문에서 사도바울은, 방언과 예언의 사용을 중심으로, 그렇다면, 이제 우리의 예배는 어떻게 드려야 하는가?에 대한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지난 시간 사도바울은 그러면 어떻게 할꼬라고 하면서, 영과 마음으로 함께 기도하며 찬미해야 할 것을 독려하였죠?

 

오늘도 역시 그런즉 형제들아 어찌할꼬라는 말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것은 또 다른 교훈, 특히 이제는 결론을 제시하고자 던지는 질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쓰인 헬라어의 뉴앙스를 보면, 지금 사도바울은 상당히 안타까워 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지금까지 사도바울이 말한 것과 또 이제도 결론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과, 당시 고린도교회의 상황은 상당한 차이가 있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당시 고린도 교회는 사도바울이 말한 올바른 예배의 질서와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었던 것이고, 이에 사도바울은 어찌할꼬라는 안타까움의 표현을 통해서, 그들에게 간곡한 권면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사도바울이 그렇게나 간곡히 권면하는 올바른 예배의 질서는 과연 무엇일까요? 다같이 한절씩 살펴보며 은혜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26절을 읽겠습니다.

그런즉 형제들아 어찌할꼬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나니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

 

지금 사도바울은 모든 예배의 요소에 대해 말하고 있죠? 그렇다면, 이것은 그냥 어느 교회에서나 드리는 일반적인 예배의 요소일까요?

 

사실 보면, 그렇죠? 그러나 지금 여기서 사도바울이 말하는 것은 당시 고린도교회 예배의 요소인 것이죠?

 

그렇다면, 왜 이처럼 이런 모든 예배의 요소에 대해 말하고 있을까요? 가만보면, 이 모든 것이 예배의 요소이기도 하지만, 그러나 또 잘보면, 이 모든 것이 전부 은사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당시 고린도교회는 방언의 은사가 예배의 질서를 어지럽혔던 대표적인 은사임은 분명하지만, 그러나 방언의 은사뿐만 아니라, 이와 같은 다른 은사들도 많이 있었음을, 다시 말해 당시 고린도교회는 은사충만한 교회였음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교회도 이와 같이 은사 충만한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은사는 교회를 세우기 위해서 주어진 것이니까, 우리가 마땅히 은사를 구해야죠?

 

풍성한 은사는 교회를 더욱 풍성케 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예를 들면, 우리 유장효 집사님은 찬양연주의 은사가 있죠? 또 우리 송동길 전도사님은 찬양인도의 은사가 있죠? 그리고 디자인도 참 잘하십니다. 또 지휘자님은 찬양대 지휘의 은사가 탁월합니다. 그리고 우리 김정헌 집사님은 방송음향의 은사가 탁월하고, 박성규 집사님은 인터넷이나 컴퓨터의 은사가 탁월하고....., 사실 다 따지자면 한도 없죠?

 

오늘날 우리 메시야 교회가 적은 교회이면서도 왜 이렇게 풍성한 교회가 되었느냐?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많은 각기 다른 은사에 탁월한 사람들을 많이 보내주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려야죠?

 

이와 같이 고린도교회도 많은 각기 다른 은사의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도바울이 왜 이 말을 꺼냈을까요?

 

그것은 하반절에 말씀하시는 바와 같이, 그 모든 은사를 사용함에 있어, 어떤 은사도 모든 것에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는 교훈을 주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어떤 은사라도 교회의 덕을 세우지 못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워서는 아니될 줄 믿습니다.

 

여러분이 무엇인가를 잘하는 것이, 마치 그 옛날 고린도교인들이 방언을 자랑하였던 것과 같은 자랑거리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하나님께서 어떤 탁월한 은사를 주셨든지, 오직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해서만 그 은사를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체적으로 이제 27절에, 누가 방언으로 말하면, 두 사람이나 다불과(많아야) 세 사람이 차서를 따라(순서를 따라)하고, 한 사람이 통역할 것이요. 라 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방언의 은사가 교회에 덕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통역을 해야 한다는 것이죠? 그래야만 그 방언을 교인들이 다 알아들어서 다른 성도들에게 덕을 끼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만일 통역하는 사람이 없으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28절은 잠잠하고 자기와 및 하나님께 말할 것이요. 라고 했죠?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하지 말고, 오직 자기 혼자 있을 때만 하라는 것입니다. 왜요? 역시 그럴 경우 방언은 교회의 덕을 세우지 못하지 못하고, 개인의 유익만을 위하기 때문이죠?

그러나 29절로부터 보면, 이러한 제약을 예언의 은사를 사용함에 있어서도 똑같이 적용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먼저 29절은, “예언하는 자는 둘이나 셋이나 말하고 다른 이들은 분변할 것이요라고 했죠? 어떻습니까? 방언과 똑같죠?

 

그렇다면, 여기서 다른 이들은 누구이겠습니까? 다른 예언의 은사를 받은 자들이라는 견해가 많습니다.

 

오늘날로 말하자면, 기록된 예언의 말씀을 풀어 선포하는 주의 종들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역시 중요한 것은, 다른 이들이 분변하라는 것이죠. 그래서 32절을 보면, “예언하는 자들의 영이 예언하는 자들에게 제재를 받나니,” 33절에,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시오. 오직 하평의 하나님이시니라.”고 했습니다.

 

예언하는 자들의 영은 성령이죠? 그렇다면, 성령이 제재를 받는다는 말일까요?

 

아니죠? 이것은 은사가 제재를 받는다는 것이죠?

 

따라서 우리는 여기서 예언의 은사 역시도, 제어할 수 없는 가운데 임하는 하나님의 갑작스런 충동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진정한 예언은 방언하는 자들이 원할 때 잠잠할 수 있었던 것처럼, 역시 침묵해야 할 이유가 주어진다면 침묵해야 함을 가르쳐주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30절을 보면, “만일 곁에 앉은 다른 이에게 계시가 있거든 먼저 하던 자는 잠잠할지니라.”고 한 것이죠?

 

당시는 성경이 완전되지 못한 때요, 그러므로 사도바울도, 다른 사도들도 계시의 영을 받아 성경을 기록하고 있던 때인 만큼, 아직 직접적인 하나님의 계시가 임하던 때였습니다.

그러므로 사도들과 같이 이런 은사가 있으면 그 계시를 말할 수 있었는데, 말을 하다가 또 다른 사람에게 계시가 임하면 먼저 하던 자는 잠잠하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고린도교회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지난번에도 말씀드렸다시피, 그들은 아직 말씀사역자들이 양성되지 못한 때에 회당 예배를 드리고 있었으므로, 누구나 말을 할 수 있다는 점을 이용하여 아주 무질서하게 말을 하여, 교회를 어지럽게 만들고 있었습니다.

 

이에 33절에 사도바울은,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시오.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고 한 것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교회에는 분명 질서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괜히 교회에서, 당회에서 결정할 일을 어떤 사람이, 어떤 성도가 막 다른 성도들에게 말하며 질서를 무너뜨리려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특히 34절을 보면,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고 했는데, 당시 고린도교회에서는 여자들이 이런 잘못된 일을 했던 것 같습니다.

 

성도 여러분, 교회는 분명히 질서를 지킬 줄 알아야 하는 줄 믿습니다. 교회 일을 많이 한답시고,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는다해서, 혹은 은사가 좀 있다고 해서 자기의 의견을 막 성도들에게 주장하고 설득시키려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결국 그러면 꼭 나중에는 그 사람이 다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왜요?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교회의 질서를 어지럽게 만드는 사람을 그냥 두지 않기 때문인 것입니다.

 

지난 주일에도 장로님들, 안수집사님들이 모여서 공동의회에 대해서 의논을 했는데, 협동장로님들도 안수집사님들도 다들 하시는 말씀이 당회에서 결정하는 대로 하겠습니다.”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왜요? 이분들은 교회의 질서를 잘 아시기 때문에 어느 편이 교회를 위해 유익한 것임을 아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34절에 저희의 말하는 것을 허락함이 없나니, 율법에 이른 것 같이 복종할 것이요. 라는 말은, 공식예배 때에 남편이 아닌 사람들에게 질문을 하며 소란을 피우던 당시 고린도교회 여자들을 염두에 두고 한 말입니다.

 

이들은 율법에 의해 올바른 규제를 받아야 한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율법은 무엇인가? 창세기 316절로 보고 있습니다.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라고 봅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35절에서 바로 나오기 때문입니다.

 

만일 무엇을 배우려거든 집에서 자기 남편에게 물을지니 여자가 교회에서 말하는 것은 부끄러운 것임이라.”

 

왜 그럴까요? 칼빈은 말합니다. “여기서 다루고 있는 일들은 선하거나 악한 것과는 무관한 것이고, 단지 그 일들이 품위나 건덕에 방해가 되기 때문에 금하고 있는 것이다.”

 

무슨 말입니까? 이것은 당시 문화가 반영된 말씀이라는 것이죠? 그래서 당시에는 여자들이 교회에서나 어디에서나 말을 하는 것이, 특히 말을 많이 한다면 품위나 건덕에 좋지 않게 보였음을 알 수 있는 것이죠.

 

그러므로 이것이 반드시 여자들의 교회 활동을 위축시키는 진리라고 볼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40절은, “모든 것을 적당하게 하고 질서대로 하라.” 그래서 교회에는 조직이 생겨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우리 교회는 이와 같이 하나님이 주신 직분에 따라 현명하고 질서있게 행하는 교회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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