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uantcast
Channel: 워싱턴메시야장로교회
Viewing all articles
Browse latest Browse all 1287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삶-아멘의 삶(고후1:15-22)

$
0
0

고린도후서가 쓰여진 배경 가운데는, 사도바울이 고린도교회를 방문하기로 한 계획을 변경한 것을 가지고, 바울이 자신의 경제적인 이득만을 위해서 행하는 삯군목자라는 오해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말씀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이것에 대한 사도바울의 해명이라 할 수 있습니다.

 

먼저 15절로 17절은, 그가 고린도방문계획을 변경한 것은, 인간적 변덕에 따른 것이 아님을 해명하고 있습니다.

 

내가 이 확신을 가지고 너희로 두 번 은혜를 얻게 하기 위하여 먼저 너희에게 이르렀다가 너희를 지나 마게도냐에 갔다가 다시 마게도냐에서 너희에게 가서 보내 줌으로 유대로 가기를 경영하였으니

 

여기 이 확신이라는 것은, 이 앞절에서 말한, 서로에게 서로가 자랑이 된다는 것이겠죠?

 

그 만큼 사도바울도 고린도교인들을 신뢰하며, 또한 고린도교인들도 사도바울을 신뢰할 것이라는 확신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두 번 은혜를 얻게 하기 위하여’, 무슨 말일까요? ‘두 번 방문하여 두 번 은혜를 끼치게 하기 위하여라는 말이죠?

 

그러므로 이제 그것이 계획대로 진행되지 않은 것에 대한 해명이 시작되는데, 먼저 그 방문계획이 어떤 것이었는지, 그것은 먼저 고린도교회에 들렀다가 마게도냐를 갔다가 다시 고린도교회로 가서 유대로 가려했던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고린도전서 16장을 보면, 변경 사실을 알렸죠? 고린도교회를 두 번 방문하는 대신 에베소에서 마게도냐, 고린도를 거쳐 예루살렘으로 가겠다고 했습니다.

 

고린도교인들은 바로 이와 같은 변경, 다시 말해 그렇게 분쟁과 분열로 위기상황 가운데 있는 고린도교회를 한번만, 그것도 맨 나중에 방문한다하고 다른 곳으로 방향을 튼 데에는 분명 물질적인 이유가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죠? 그래서 17절은 말합니다. “이렇게 경영할 때에 어찌 경홀히 하였으리요. 혹 경영하기를 육체를 좇아 경영하여 예, 예 하고 아니, 아니라 하는 일이 내게 있었겠느냐?”

 

이렇게 계획을 변경한 때에는 결코 경홀히, 그냥 하나님의 뜻과는 무관하게 육체를 좇아, (다시 말해 물질을 좇아 경제적 이득을 위해)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것을 어떻게 믿을 수 있는가? 어떻게 변명하고 있습니까? 이에 18절의 가장 첫 문장은, “하나님은 미쁘시니라.”고 기록하고 있죠?

 

사도바울은 17절에서 고백한 자신의 진실함이 사실이라는 점을 증명하기 위해, 하나님의 신실함을 들고 나오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바로 그의 모든 계획 변경이 하나님의 뜻에 의한 것이었기 때문이라는 것이죠.

 

그렇다면, 이것이 사실일까요? 아니면 하나님의 신실함을 빙자한 변명이었을까요?

 

오늘날도 우리는 걸핏하면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할 때가 많은데, 그렇다면, 그것은 맞는 말일까요? 그렇지 않은가요?

 

사실 맞는 말이죠? 성도 여러분, 분명 모든 것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이루어지는 줄 믿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이해하지 못함으로 조금은 아퍼하고 괴로워할 수 있지만, 그러나 완전하신 하나님이 통치하는 세상에서 하나님이 모르시는 일이 있으시겠습니까?

 

그러므로 그 다음에 나오는 말을 보면, ‘우리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예 하고 아니라 함이 없노라.”고 합니다.

 

무슨 의미일까요? 예는 무엇에 대한 예이고, 누구에 대한 예일까요? 그것은 미쁘신 하나님의 뜻에 대한 예스 인 것이고, 그러므로 하나님에 대한 예라고 할 수 있죠?

 

자신은 그저 미쁘신 하나님의 뜻에 절대적으로 순종함으로 자신의 계획을 변경했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19절은 그가 이렇게 하나님의 뜻에 절대적으로 순종할 수 밖에 없는 근거를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 곧 나와 실로아노와 디모데로 말미암아 너희 가운데 전파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예 하고 아니라 함이 되지 아니하였으니, 저에게는 예만 되었느니라.”

 

이 말은 무엇이고, 왜 이런 말을 합니까?

 

여기서 그리스도는 예하고 아니라 함이 되지 아니하였으니라는 말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에 대하여 만 한다는 완전한 순종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육신도 하셨고, 십자가도 지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예스만 하셨기 때문에, 그 예수님의 본만을 따르는 사도바울로써는, 그리고 우리 그리스도인들로써는 우리의 계획까지도 변경시키시는 하나님의 뜻에 완전하게 순종할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왜 하나님의 뜻에 순종만을 하였는가?

 

사실 불편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태어나신다는 것도 내키지 않는 일이셨을 것이고, 목수의 아들로 거추장스럽게 산다는 것도 그렇고, 인간들에게 모욕과 수욕과 침뱉음과 온갖 수치를 당하시고 그들이 말하는 저주의 십자가를 지신다는 것은 더욱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게다가 죽음의 권세에게 패하는 모습도 경험하셨습니다.

 

어떻습니까? 예수님을 향한 하나님의 뜻에는 인간적으로 생각해 보면, 참으로 예수님이 순종하기 어려운 것이 한 두 가지가 아니죠?

 

그러나 예수님은 다 순종하셨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바로 그 예수님이 순종하시는 그 하나님, 오늘날 우리가 다같이 순종해야 할 그 하나님은, 약속하신 것은 분명 얼마든지 예수가 되게 하시는 신실하신 분이시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여기 이것을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라고 한 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순종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이루신 그의 약속은 바로 예스였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다음 하반절에 있습니다. 무엇이 중요합니까?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

 

결국 사도바울이 이 앞에 말들을 장황하게 늘어놓은 이유는 무엇임을 알 수 있습니까?

 

그것은 오늘날 우리도 그 예수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모든 뜻에 아멘하여 영광을 돌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이델베르그 문답서를 보면, “아멘은 하나님의 응답의 확실성이 우리의 요구나 소원에 대해 우리 자신이 느끼는 확실성보다 더 크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무엇이든 하나님의 뜻이면 예수님처럼 아멘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너의 그 아멘도 예수님의 아멘과 같이 이루어져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도바울이 왜 지금 이런 말을 합니까? 결국 지금 사도바울이 선교여행계획을 변경한 것은 반드시 아멘해야만 하는 신실한 하나님의 뜻에 아멘했기에 일어난 일임을 보여주는 것이죠?

 

그렇다면 이 말이 맞는 말일까요? 틀린 말일까요? 맞는 말이죠?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면 무엇이든 무조건 아멘해야 하는 줄 믿습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아멘하는 것은 곧 사단에게 ‘NO’라고 외치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멘하지 못한다면, 또한 사단에게 Yes라고 외치게 되는 무서운 순간을 맞이하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항상 아멘하는 아멘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하루에 몇 번이나 아멘하며 살아가시고 계십니까?

 

혹 교회 안에 있을 때에만 아멘을 외치고, 나머지 시간들에서는 아멘을 잃어버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래서 불안과 초조와 두려움과 죄악 가운데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렇다면, 왜 우리가 아멘하지 못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혹 지식으로는 신뢰할 수 있다 하나, 감정으로는 신뢰하지 못하며, 감정으로는 신뢰하나 지식으로는 신뢰하지 못할 때가 있으며, 이 둘이 다 된다 할지라도 우리의 의지가 약하기 때문일 수 있는 것입니다.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우리의 하나님에 대한 신뢰는 우리의 온 마음과 생각과 삶으로 온전히 아멘할 수 있는 믿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어야,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 뜻에 인도함을 받을 수 있는가? 21절로 22절은 그것을 성령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너희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견고케 하시고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저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 마음에 주셨느니라.”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에게는 이미 하나님께서 기름으로 부으신 성령께서 함께 하시고 계시는 줄 믿습니다.

 

요한복음 1426절을 보면, 그가 우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하나님의 뜻으로 하나가 될 수 있는 비결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같은 성령을 받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받지 못하면 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나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성령받으셨습니까?

 

혹 성령을 소멸치 마시기를 바랍니다. 오늘날도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말씀에 순종하며 인도함을 받을 수 있는 것은 바로 우리의 의지이기 이전에 성령의 이끄심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얼마나 성령에 이끌림 가운데 여러분 자신을 내어 드리고 있습니까?

 

아멘의 삶, 이것은 곧 성령께 내 자신을 내어 드림으로 순종하는 삶인 것입니다.

 

그러면 결코 실패함이 없는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를 맛보게 될 것이요, 그것으로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이 아침도 혹 내가 성령을 소멸하며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지를 점검하시고 더욱 성령충만을 위해 간구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부족한 모든 것들은 성령께서 채우실 줄 믿습니다. 그래서 그 성령의 채우심의 은혜로 날마다 승리하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Viewing all articles
Browse latest Browse all 1287

Trending Articl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