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아빠 앞에서 살아가기
본문 : 마태복음 6장 1~6절
1.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받지 못하느니라
2.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서 영광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3.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4. 네 구제함을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5. 또 너희는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라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6.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우리는 가면을 쓰고 세상을 살아간다. 가면은 하나님과 다른 사람에게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도 참 모습을 숨기는 3중적 위장의 역할을 한다. 이 가면을 벗을 때에만이 하나님과 참된 나를 발견할 수 있다. 주님은 우리들의 참 얼굴을 찾게 하시고, 자유함을 누리게 하신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유대인들에게 가면을 벗으라고 촉구하신다. 당시에 '외식하는 자'는 무대에서 연극하는 배우를 의미했다. 예수님은 가장 경건하고 종교적인, 존경받는 유대인들을 향하여 ‘가면을 쓴 광대 노릇하는 자들’이라고 하시는 것이다.
회당에서는 헌금제도를 통해 가난한 사람을 구제할 수 있었고, 헌금내역을 공개함으로서 재정의 투명성을 확보할 수 있었다. 예수님은 제도나 관습을 비판한 것이 아니라 헌금하는 '잘못된 동기'를 지적하신 것이었다. 좋은 평판과 인정을 얻기 위한 동기로 헌금을 하는 유대인들을 향하여 '자기상을 이미 받았다(2절)'고 하신다.
또한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공공장소에서 서서 큰 소리로 기도하는 유대인들을 향해서도 동일하게 말씀하신다. 주님은 아주 선하고 경건하게 보이는 외양 속에 교묘하게 숨겨진 저열한 동기를 드러내는 명수이시다. 이 때문에 유대인들의 미움을 받으셨다.
동기와 과정보다는 결과를 중요시하는 현대 실용주의의 관점으로 보면 유대인들의 행동은 문제가 없다. 그러나 마음의 동기를 중요히 여기셨던 주님은 유대인들의 위선을 가혹할 정도로 신랄하게 질책하신다.
사람에게는 가장 거룩하고 종교적으로 보였던 유대인들은 사실은 가장 세속적인 사람이었고, 세상 사람들보다 더 철저히 무신론자였다. 그들이 정말 원했던 것은 사람들의 평판과 인정이었기 때문이다. 그들 눈에는 하나님은 보이지 않고 사람만 보였다. 하나님으로부터의 영광이 아니라 사람으로부터의 영광만을 추구했다.
우리 역시 아무리 교회봉사를 많이 해도, 우리 마음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사람들의 칭찬과 인정이라면, 세상 사람들보다 더 세속적인, 더 철저한 무신론자 일 수 있다.
우리의 동기는 우리 스스로가 알지 못한다. 우리는 자기 자신을 속이기 때문이다. 외식은 사람들의 인정에 목말라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우리는 사람들로부터 사랑과 인정을 받기 위해 외양(가면)을 꾸미느라 많은 에너지를 사용한다. 타인과 끊임없이 비교하며, 타인보다 중요하고 탁월한 사람이라는 평가와 인정을 받는데 급급하다. 그것에서 삶의 의미와 행복감을 찾는다. 이런 '인정중독'은 약물중독이나 알코올중독보다 더 심각하다. 우리 영혼을 곤고하고 피폐하게 만든다.
사람들로부터 영광을 받고 싶어 하는 이러한 죄는, 신앙인들이 가장 빠지기 쉬운 죄이다. 특히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고 헌신하는 사람들이, 다른 모든 죄를 피한 뒤에 빠지기 쉬운 죄이다. 선행과 경건의 모습 뒤에 교묘히 숨어서, 마음 속 깊은 곳에서 누군가 인정해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세상에서 인정을 못 받는 사람일수록 교회에서 더 인정받고 싶어 하고 교회직분에 욕심을 가진다. 교회는 사람들의 이런 인정욕을 이용해 열심을 자극하고, 교회 직분을 남발한다. 심지어 목사들도 인정욕으로 주의 일을 하는 경우가 많다.
사실 인간은 인정을 받지 못하면 살 수 없는 존재이다. 그래서 교회는 칭찬에 인색하면 안 된다. 인정욕구는 자연스러운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영광보다 사람의 영광을 더 원하게 될 때 문제가 심각해진다. 하나님의 종이 아니라 사람의 종이 되어 사람을 섬기는 우상숭배를 하게 되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인정과 칭창은 간사하다. 결코 우리의 목마름을 채워주지 못한다. 우리가 사람들의 인정에 그렇게나 목말라하는 이유는, 마음 중심에 하나님이 없어서 공허하기 때문이다.
생수의 근원인 하나님께 나와야 한다. 하나님만이 목마름을 채워주실 수 있다. 성령이 생수이다. 성령으로 충만하게 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 복음의 음성을 듣게 된다. 성령이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증거 해주신다. '너는 나의 지극히 사랑하는 아들이다. 너의 가치는 너의 외모, 소유, 성취, 재능에 있지 않고, 나의 은혜와 사랑에 있다. 나의 은혜와 사랑 안에 살아라.'
하나님의 인정은 영원불변하다. 우리가 승리했을 때 뿐 아니라 비참하게 실패했을 때도, 죄 속에 빠졌을 때도 영원히 존귀한 아들, 딸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인정욕에서 자유하게 하실 때에는, 그 인정욕을 말라 없애 버리시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채워지게 하신다. 그래서 더 이상 허망한 것을 쫓지 않게 하신다.
성령으로 충만하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영광과 인정을 구하게 된다. 모든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것 보다 가장 중요한 한 분, 하나님께 인정받기를 더 원하게 된다.
모든 사람에게 인정받는다 할지라도 하나님께 인정받지 못하면 진정한 만족을 느끼지 못하고, 모든 사람에게 인정받지 못해도 하나님께만 인정받으면 행복해 지는 것이다. 불신자와 신자의 차이는, 은밀한 중에 계신 '아빠'의 임재를 의식하는 것에 있다.
'코람데오'의 삶은, 거룩하고 엄위하신 하나님 앞에서 라기 보다는, 오히려 자애롭고 친밀하신 아빠 앞에서 사는 삶, 아빠 앞에서 뛰노는 삶을 의미한다. 성령님은 아들의 영이시면서 아빠의 영이시다. 아들과 아빠를 함께 묶어두는 연합의 영이시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아빠가 아들이 있는 곳에 항상 함께 계시는 것이 아들이 누리는 특권이다(요 8:29). 아들인 우리 곁에는 아버지가 항상 함께 하시며 격려하시고 지원해주신다. 세상의 평판을 구걸하지 말고 내 사랑 안에 살라고 하신다.
헛된 욕구에서 자유 하는 길은 욕구를 온전히 충족시켜주시는 아빠 앞에서, 아빠와 함께 은밀한 곳에서 깊은 사귐을 갖는 것이다. 사귐 가운데 우리가 얼마나 가치 있는 존재인지를 계속 확인하게 된다. 그 아빠로부터 오는 사랑만이 우리의 심령 안에 진정한 행복과 만족을 준다.
아빠와의 은밀한 교제는, 믿음의 뿌리를 생수의 강에 깊이 뿌리내리게 하며, 아버지 집의 풍성한 보화를 누리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비참한 외식자가 될 수 있다. 주일에 타인에게 하는 보이는 봉사는 빙산의 일각이어야 하고, 주님만이 보시는 은밀한 교제와 봉사가 더욱 깊어질 때에 영적으로 성숙하게 된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봉사를 하는 사람은 인간적으로 볼 때에는 답답하고 바보같이 여겨진다. 하지만 그런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약사 빠르고 지혜로운 사람이다. 가장 영광스러운, 존귀한 한 분에게 보이기 때문이다. 그분이 영원한 상급을 주신다. 이 땅에서도 부분적으로 그 상급을 누린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나를 인정하시는 세미한 음성을 듣는다. 평강과 기쁨으로 우리를 격려하신다.
모든 사람에게 인정받으려고 하는 것보다, 하나님 아빠 앞에서 사는 삶이 더 쉽다. 아빠에게만 집중하고, 아빠의 마음에만 들면 된다. 이미 우리는 그분의 마음에 든, 하나님께 사랑받는 자녀이다.
모든 사람들에게 인정받으려는 헛된 수고에 지쳐서 하나님께 돌아갈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품에 안으시고 말씀하신다. 나의 사랑과 은혜 안에서만 살라고. 아빠 품에서 내 정체성과 가치를 확인하며 살 때에 우리는 광대 짓에서 헤어 나와 자기 얼굴로 자유함 가운데 살게 된다. 그리고 쓸데없이 낭비되었던 에너지를 참된 자아의 성숙을 위해 창조적으로 사용하게 된다. 이 축복이 모든 교우들과 함께 하기를 바란다.
박영돈 목사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