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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다원주의의 진짜 배후, 바티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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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교개혁으로 인하여 천주교만으로 이어져오던 기독교가 크게 네 개의 교파로 갈라지자 천주교 안에서는 ‘예수회’라는 조직을 중심으로 자체적인 쇄신운동이 일어났습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예수회는 영성훈련을 위시하여 선교활동, 자선사업, 청년교육, 신학연구 등 다방면에서 왕성하게 활동하며 천주교의 개혁을 이끌어왔습니다. 이들의 활약 덕분에 거의 몰락했던 지금은 천주교의 신도수가 2008년을 기준으로 전 세계에 걸쳐 무려 11억 6,600만 명에 달할 정도로 교세를 회복했습니다. 비록 예전과 같은 세속권력을 되찾지는 못했지만 국제적으로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며 위상을 드높이고 있는 실정입니다.

 

   적어도 외견상으로는 천주교의 이러한 부흥이 뼈를 깎는 자체적인 쇄신의 결과처럼 보입니다. 특히, 사회에서 아주 좋은 일들을 많이 실천하고 있는 예수회의 활약상을 지켜보고 있노라면 천주교는 더 이상 심각하게 타락했던 예전의 천주교가 아니라는 생각이 절로 듭니다. 실제로 천주교에서도 개신교를 향해 “더 이상 과거를 들먹일 필요가 뭐가 있겠는가? 중요한 것은 지금이다.”라는 식으로 자주 어필하는 것 같습니다. 지극히 옳은 말입니다. 다만, 여기에는 천주교가 진심으로 반성하고 진정으로 변화되었다는 증거가 전제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변화는 반드시 성경적인 진리로 향해 있어야 합니다.


   종교개혁 이후 천주교가 좀 더 성경적으로 바뀐 부분이 과연 조금이라도 있을까요? 하지만 바티칸의 실상을 들여다보면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실제로 천주교는 종교개혁 이후에도 교리나 신학적 입장이 바뀐 것이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바뀌기는커녕 오히려 성경적 진리에 역행하는 쪽으로 오늘날까지 흘러왔습니다. 그렇다면 천주교가 스스로를 개혁했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그것은 정작 중요한 신학이나 교리와 같은 본질은 전혀 바꾸지 않고 오히려 개악을 거듭해오면서도 자선사업이나 근검절약처럼 그럴듯한 중립 활동만을 강화해왔을 뿐입니다. 물론 이것이 잘못되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다만, 문제는 덜 좋은 것으로 가장 좋은 것을 교묘하게 대체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의외로 수많은 개신교인들이 천주교의 교리나 신학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는 것 같습니다. 그 실상을 조금이라도 안다면 사소한 것 하나까지도 트집을 잡아서 이단정죄를 남발하는 오늘날의 개신교계가 천주교에 대해서는 어째서 유구무언인지 도무지 이해가 되시지 않을 겁니다. 만약 우리 주변의 어떤 교회가 천주교와 같은 가르침을 펼친다면 대번에 이단으로 낙인찍히고 교계 전체에서 매장당할 정도로 비성경적인 가르침이 천주교 안에서는 날마다 가르쳐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대표적인 것이 외경에 의해 뒷받침되는 ‘연옥 교리’입니다. 천주교에 따르면 천국에 가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연옥을 거쳐야 합니다. 이 때문에 천주교 신자들은 평소부터 연옥을 맞이할 준비를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천주교에서는 누군가가 죄를 지으면 반드시 신부에게 낱낱이 이실직고해야 합니다. 신부라는 제사장을 통하지 않고서는 죄를 사함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죄에 대한 고백을 마치면 신부는 그와 관련된 몇 가지 명령을 내립니다. 죄인이 신부의 명령을 수행하는 것을 ‘보속’(penance)이라고 하는데, 보속을 완료해야 고백한 죄가 용서됩니다. 그런데 보속만으로는 안전하지 않습니다. 미처 씻기지 못한 죄의 얼룩이 남아있을 수 있기 때문인데 이런 여죄는 연옥에서 고통당함으로 상쇄됩니다. 수백 년은 기본인데, 여죄가 크면 클수록 연옥에서 더 오랜 기간을 고통 받아야 합니다.


   천주교에서는 이와 같은 여죄를 경감시킬 수 있는 방책을 제시해주는데 이른바 ‘대사’(indulgence)입니다. 교황이나 주교가 보속으로도 씻지 못한 여죄를 사면해주면 여죄가 탕감된다는 겁니다. 소위 종교개혁을 촉발한 면죄부 사건 역시 바로 이 대사 교리에서 기인한 것입니다. 과거에는 대사를 위해 엄격한 참회행위가 강요되었는데 소위 자신의 몸을 학대하는 고행을 의미합니다. 그러다가 이것이 점점 완화되어 돈으로 대체되었습니다. 급기야 ‘대사’와 교환하는 쿠폰으로서 면죄부를 대량으로 발행하여 판매하기까지 했습니다. 물론 오늘날의 천주교가 면죄부를 팔지는 않지만, 고행의 개념이 내재된 대사의 교리는 여전히 존속되고 있습니다.


   천주교에 따르면 연옥을 면하기 위해서는 고해성사나 대사, 참회와 같은 행위가 일평생 끊임없이 이어져야 합니다. 더군다나, 천주교에서는 이미 죽은 사람들을 대신해서 대사와 참회를 감당할 것을 강요합니다. 만약 누군가가 죽어서 연옥에 가있다면 살아남은 가족들이 그 사람을 대신하여 대사와 참회를 감당해주어야 그 기간이 단축된다는 겁니다.


   천주교의 수많은 비성경적 가르침 가운데 고작 ‘연옥 교리’ 하나만을 예로 들었을 뿐이지만, 이에 대해 잘 모르고 계셨던 대부분의 크리스천들은 상당한 충격을 받으셨을 겁니다. 너무나 명백하게 비성경적이어서 구태여 성경을 통해 반박할 가치조차 느껴지지 않을 정도이지 않습니까? 보통 크리스천들이 별것 아닌 것처럼 흘려 넘기는 연옥의 교리는 이렇듯 기독교의 핵심적인 복음진리 자체를 완전히 뒤집고 있습니다. 만약 어떤 교회가 위와 같은 가르침을 펼치고도 과연 교계에서 살아남을 수 있겠습니까? 당장 이단으로 낙인 찍혀서 퇴출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이것은 단지 시작일 뿐입니다.


   많은 크리스천들이 천주교 역시 개신교처럼 십자가를 단순한 상징으로 사용할 뿐이지 설마 그것 자체를 우상화하여 거기에다가 절을 하며 경배할 리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천주교에서는 실제로 십자가 자체를 향해 절하고 기도하며 분향까지 합니다. 즉, 십자가 자체를 숭배합니다. 사실 이미 335년 9월 14일부터 십자가는 숭배의 대상으로 인정되었고, 692년 트룰라늄 공의회를 통해 강화되었으며, 787년 제2차 니체아 공의회에서 공식적으로 인정되어 오늘날에까지 이르고 있습니다.


   물론 천주교에서는 ‘십자가 숭배’라는 단어 대신 ‘십자가 공경’이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그런데 이 공경이 십자가 자체를 향해 절하고 기도하고 분향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과연 ‘공경’과 ‘숭배’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게다가 천주교 안에는 십자가 자체를 의인화하여 그것이 마치 죄를 용서해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분신인 것처럼 여기고 찬양하는 기도문까지 존재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미리 짚어둘 것은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어떠한 형상을 만들어놓고 그것을 숭배하지 말 것을 엄숙하게 경고하셨다는 사실입니다.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출 20:4-6).


   물론 “우리는 십자가를 예수 그리스도와 동일시하는 것이므로 다른 어떤 신의 형상을 만들어놓고 숭배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문제이다.”라고 변명할 수도 있습니다. 이렇다면 이것은 어떻습니까?


   “아론이 그들의 손에서 금 고리를 받아 부어서 조각칼로 새겨 송아지 형상을 만드니 그들이 말하되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의 신이로다 하는지라 아론이 보고 그 앞에 제단을 쌓고 이에 아론이 공포하여 이르되 내일은 여호와의 절일이니라 하니 이튿날에 그들이 일찍이 일어나 번제를 드리며 화목제를 드리고 백성이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놀더라”(출 32:4-6).


   모세가 자리를 비운 사이 아론은 금송아지를 만들어서 그것을 하나님이라고 지칭하며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숭배했습니다. 이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그래도 바알 신이나 다른 우상을 섬긴 게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으로 숭배했기 때문에 칭찬하셨습니까? 아니면, 적어도 하나님을 공경하려는 동기에서 그랬기 때문에 정상을 참작하여 그 정도는 괜찮다고 묵인하셨습니까?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내려가라 네가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네 백성이 부패하였도다 그들이 내가 그들에게 명령한 길을 속히 떠나 자기를 위하여 송아지를 부어 만들고 그것을 예배하며 그것에게 제물을 드리며 말하기를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라 하였도다 여호와께서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백성을 보니 목이 뻣뻣한 백성이로다 그런즉 내가 하는 대로 두라 내가 그들에게 진노하여 그들을 진멸하고 너를 큰 나라가 되게 하리라”(출 32:7-10).

  
   하나님께서는 애지중지하며 애굽으로부터 간신히 탈출시킨 이스라엘 백성을 모조리 진멸하신 다음, 모세를 통해 새로운 민족을 이루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성경 전체를 통틀어서 하나님께서 이 정도로 분노하신 것을 과연 몇 번이나 목격하셨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단순히 다른 신의 형상들에 대한 숭배를 금지시킨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을 위해 만든 형상일지라도 그것을 숭배하는 것 역시 금지시키시되, 더욱 엄격하게 금지시키셨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더욱 크게 미혹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이 부분만 아예 따로 꼬집어서 명령하셨습니다.


   “너희는 나를 비겨서 은으로 신상이나 금으로 신상을 너희를 위하여 만들지 말고”(출 20:23).


   그런데 지금 천주교에서는 금송아지를 만들어 하나님이라는 이름을 붙임으로써 무지한 백성들에게 숭배하도록 만든 아론과 동일한 걸림돌의 죄를 범하고 있습니다. 물론 천주교에서 사용하는 성경을 보면 이런 부분의 내용이 변개되어 있습니다. 십계명 가운데 우상숭배 금지에 대한 제2계명을 아예 삭제시키고 마지막 계명을 둘로 쪼개어서 구색을 맞추어두었습니다. 천주교에서는 단순히 십자가만이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다양한 조각상이나 그림을 준비해놓고 그것 자체를 숭배합니다. 심지어 성찬식에서 사용되는 빵과 포도주, 그리고 신부가 직접 소금을 녹인 물까지도 ‘성수’라고 부르면서 그것 자체를 향해서도 분향하고 절하고 기도합니다.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롬 1:23).


   더 심각한 문제는 죽은 성인들의 유물(시체와 유품)들에게까지 절하고 기도하고 분향한다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유물숭배는 787년 니케아회의에서 선포되었습니다. 가톨릭 백과사전 제12권 734페이지에서는 다음처럼 유물숭배를 강조할 뿐만 아니라, 유물숭배를 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죄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신실한 자들은 거룩한 순교자들의 시체들을 숭배하여야 한다. 하나님께서 이들의 시체를 통해 사람에게 축복해주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의 유물을 향해 합당한 경의와 존귀를 돌리지 않은 자들은 전적으로 정죄해야 한다. 교회가 오래 전부터 정죄하였고, 현재도 또한 정죄하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정말 기가 막히지 않습니까? 이것의 연장선상에서 ‘성인 공경’이라는 교리도 있습니다. 여기서 ‘성인’이란 마리아와 천사를 필두로 하여 사도, 순교자 등 천주교에서 지정한 온갖 위인들을 통칭합니다. 천주교에서는 수많은 성인들의 형상, 곧 성상을 만들어놓고 거기다가도 절하고 분향하고 기도합니다. 이쯤 되면 천주교가 어째서 조상에 대한 제사제도를 그토록 쉽게 인정하는지 납득되지 않으십니까? 그렇습니다. 그들은 벌써부터 제사와 비슷한 의식을 자체적으로 행해왔습니다. 그래서 제사에 대한 거부반응이 없는 겁니다.


   문제는 이것만이 아닙니다. 특히, 성인을 향해 자신의 어떤 기도를 하나님께 대신 전해달라고 요청할 것을 가르치는데 이것을 ‘전구기도’라고 합니다. 한마디로 마리아나 천사나 기타 먼저 죽은 신앙 위인들을 향해 하나님께 대신 말 좀 전해달라고 요청하라는 겁니다. 천주교는 이러한 전구기도가 하나님께 직접 기도드리는 것보다 더 유익하다고 가르칩니다. 이 역시 명백하게 비성경적입니다.


   “어떤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기를 주절거리며 속살거리는 신접한 자와 마술사에게 물으라 하거든 백성이 자기 하나님께 구할 것이 아니냐 산 자를 위하여 죽은 자에게 구하겠느냐 하라”(사 8:19).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죽은 사람에게 무언가를 요청하는 행위에 대해 엄격하게 금하셨습니다. 기도는 누군가를 통해서가 아니라 반드시 하나님께 직접 드릴 것을 엄격하게 명령하셨습니다. 죽은 영혼에게 기도드리는 것은 사실상 신접하는 무당들처럼 사술을 펼치는 것과 다를 바 없기 때문입니다.


   “진언자나 신접자나 박수나 초혼자를 너희 가운데에 용납하지 말라”(신 18:11).
   “너희는 신접한 자와 박수를 믿지 말며 그들을 추종하여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이니라”(레 19:31).
   “또 자기의 아들을 불 가운데로 지나게 하며 점치며 사술을 행하며 신접한 자와 박수를 신임하여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악을 많이 행하여 그 진노를 일으켰으며”(왕하 21:6).
   “아무도 꾸며낸 겸손과 천사 숭배를 이유로 너희를 정죄하지 못하게 하라…”(골 2:18).

  
   지금 소개한 교리들은 종교개혁 당시의 천주교가 가르치던 옛날 교리가 아니라 지금 이 시대의 천주교에서 가르치고 있는 교리들입니다. 이래도 천주교가 바뀌었습니까? 비록 같은 것을 가르쳐도 좀 완화되지 않았냐고요?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천주교의 대표적인 가르침 가운데 하나인 마리아 숭배 교리의 변천사만 보더라도 천주교가 성경적으로 바뀌기는커녕 오히려 점점 더 성경에서 멀어져가고 있음을 여실히 알 수 있습니다.

 

 

   마리아 숭배의 기원에 대해서는 바벨론 문명과 연관 지어 이미 충분하게 설명했습니다. 설령 그것이 사실이 아닐지라도 마리아 숭배는 그 자체적으로 성경의 가르침에 정면으로 위배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주교에서는 종교개혁 이후로도 마리아 숭배사상을 오히려 더욱 강화시켜왔습니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로마제국은 원시 바벨론이 업그레이드된 형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로마인들은 사실상 바벨론으로부터 이어져온 모든 태양신 숭배사상과 각종 이교도적 문명을 고스란히 답습한 상태였습니다. 그 와중에 기독교가 국교로 선포되었습니다. 이질적인 기독교가 그들에게 파고들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접촉점을 찾아야 했습니다. 그 대표적인 수단이 마리아의 적극적인 활용이었습니다.


   그 당시 대부분의 로마인들에게 익숙한 이교도적 풍습은 태양신 숭배와 더불어 여신 및 그 아들 신을 동시에 섬기는 것이었습니다. 로마교회는 이미 태양신을 하나님과 동일시했습니다. 그 다음 작업은 여신 및 그 아들 신을 마리아 및 예수님과 동일시하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여기에서 마리아 숭배사상이 태동했습니다. 실제로 431년의 에베소 공의회에서 마리아가 하나님의 어머니냐 아니냐에 대한 논쟁이 처음으로 시작되었습니다.


   비록 결론은 내려지지 않았지만 그때부터 마리아에 대한 숭배신앙은 천주교 안에서 확고하게 굳어져갔습니다. 이것이 종교개혁 이후 조금이라도 나아졌을까요? 완전히 비성경적일 뿐만 아니라 배교적인 이 마리아 숭배신앙이 조금이라도 수그러졌을까요? 안타깝게도 실상은 전혀 그렇지 못합니다. 마리아 숭배사상은 더욱 강화되었기 때문입니다.


   1517년에 종교개혁을 시작한 루터는 1546년에 죽었습니다. 바로 그해에 있었던 트렌트 공의회에서 외경을 정경화했으며 교회의 전통도 성경과 동일한 권위를 지니고 있음을 확정지었습니다. 외경을 도입하는 것을 통해 경전으로서의 성경의 권위는 허물어뜨리면서도 교황과 전통의 권위는 성경과 동등한 수준으로 격상시킨 것입니다. 이는 그전까지 암묵적으로 이어져온 마리아 숭배사상을 공식신학으로 만들기 위한 기초작업이기도 합니다.


   종교개혁으로부터 많은 세월이 흐른 뒤, 유명한 천주교 저술가 알폰수스 리큐오리(Alphonsus Riquuori)는 예수님께 기도하는 것 보다 마리아에게 기도하는 것이 훨씬 더 효과적이라는 취지의 이론을 발표했습니다. 그에 따르면 죄인이 감히 예수님께 직접 나아가면 그분의 분노를 사게 됩니다. 그러나 마리아를 향해 기도하면 과거에 그녀가 물렸던 젖가슴을 아들인 예수님께 보여주어 노여움을 가라앉힐 수 있습니다. 그 덕분에 마리아에게 먼저 기도한 사람은 보다 쉽고 안전하게 예수님께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이런 해괴망측한 이론을 펼친 덕분에 리큐오리는 1839년에 교황 그레고리 14세에 의해 성인으로 시성(諡聖)되었으며, 교황 비오 9세로부터는 박사로 공인받았습니다. [Lorain Boettner, 이송훈 역,『로마가톨릭 사상평가』(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1992), 147.]

 

   1854년에는 교황 비오 9세가 마리아의 ‘무원죄 잉태설’을 선언했습니다. 가톨릭 백과사전 제7권 674페이지에 따르면 복된 동정녀 마리아는 자기 어머니의 몸에 수태되었을 때 원죄의 모든 오염으로부터 면제되어 완전하게 보존되었습니다. 즉, 마리아는 원죄 없이 완전히 순결한 상태로 태어났다는 겁니다.


   1870년의 바티칸 공의회에서는 믿음 및 도덕적인 모든 문제에 있어서 교황은 전혀 오류가 없으며 절대적으로 옳다는 교황의 무오설을 선언했습니다. 성경과 동등한 권위를 지닌 교황이 마리아의 무원죄 잉태설을 가르쳤다면 그것은 무조건 진리라는 뜻입니다.

 
   1917년에는 마리아가 은총의 중재자임을 확정지었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듯 또한 마리아를 통해 예수님께 나아가는 것이 정석이라는 뜻입니다.


   1931년에는 마리아를 하나님의 어머니로 확정지었습니다. 마리아가 완전한 인간으로서의 예수님의 어머니일 뿐만 아니라 완전한 하나님으로서의 예수님의 어머니도 된다는 뜻입니다. 마리아가 성부 하나님과 더불어 예수님을 낳았다는 뜻입니다. 마리아가 성부 하나님처럼 성모로서의 신적 권위를 지니고 있다는 뜻입니다.


   1950년 11월 1일에는 비오 12세가 마리아의 몽소승천을 교리로 선언했습니다. 가톨릭 백과사전 제2권 632페이지에 따르면 마리아의 몸이 결코 부패되지 않았고 승천하여 하늘에 있습니다. 마리아가 하늘의 황후(천상모후)가 되었다는 사실을 확정지은 것입니다.

 
   1962년에는 생전에 7명 이상의 자식을 낳았던 마리아의 종신 처녀설을 주장했습니다.


   1965년의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통해 반포된 교회헌장 제8장에서는 마리아가 교회와 맺는 관계에서 어머니가 된다는 교리를 확정지었습니다. 즉, 마리아는 교회의 어머니입니다.


   정리하면, 천주교는 마리아가 자기 어머니의 태중에서 원죄 없이 잉태되었고, 죽을 때 몸과 영혼이 하늘로 승천하여 교회의 어머니이자 하나님의 어머니, 곧 하늘의 황후(모후)가 되었다고 주장합니다. 자녀를 7명 이상 가졌던 마리아가 평생 처녀로 살았다는 터무니없는 거짓말을 기정사실화하고 모든 인간들 가운데 가장 존귀한 자로 떠받듭니다. 또한 바로 그 마리아를 통해 예수님과 하나님께 나아가야 함을 설파합니다. 이처럼 천주교가 적극적으로 가르치고 있는 마리아 숭배사상 안에는 일개 인간을 신격화하고 우상화할 뿐만 유일한 구원자이자 중보자로서의 예수 그리스도를 폐기하는 배도적 교훈이 담겨 있습니다.


   물론 마리아가 육적인 측면에서 완전한 인간으로서의 예수님의 어머니인 건 사실입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결코 완전한 하나님으로서의 예수님의 어머니가 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당신을 다윗의 자손(아들)이라고 부르는 것조차도 그릇된 것임을 날카롭게 지적하시면서 바로잡아 주셨습니다.


   “예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실새 대답하여 이르시되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 하느냐 다윗이 성령에 감동되어 친히 말하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에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니라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니…”(막 12:35).


   예수님께서는 만유보다 먼저 계시고 만유를 창조하신 하나님입니다. 마리아가 이 세상에 존재하기 전부터 영존해 오셨던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어찌 감히 한낱 인간을 하나님의 어머니라고 칭할 수 있단 말입니까? 실제로 예수님께서 하나님으로서의 면모를 본격적으로 드러내시기 시작하셨던 공생애 이후로는 마리아를 향해 한 차례도 어머니라고 부르시지 않았을 뿐 아니라(요 2:4, 요 19:26), 오히려 상당히 냉정하게 대하셨습니다.


   마리아가 자신이 낳은 다른 자식들과 더불어 예수님이 미쳤다는 헛소문에 속아 넘어간 나머지 예수님을 말리려고 찾아왔을 때 만나주시지도 않았습니다. 그때 제자들이 마리아와 예수님의 동생들을 모친과 형제자매라고 부르자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발끈하시면서 혈육은 아무것도 아니요,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자들만이 당신의 모친이요 형제요 자매라고 분명하게 선언하셨습니다.


   “예수의 친족들이 듣고 그를 붙들러 나오니 이는 그가 미쳤다 함일러라”(막 3:21).
   “그 때에 예수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와서 밖에 서서 사람을 보내어 예수를 부르니 무리가 예수를 둘러 앉았다가 여짜오되 보소서 당신의 어머니와 동생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찾나이다 대답하시되 누가 내 어머니이며 동생들이냐 하시고 둘러 앉은 자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내 어머니와 내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막 3:31-35).

 
   무엇보다 성경에서는 성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낳았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 내게 구하라 내가 열방을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 끝까지 이르리로다 네가 철장으로 저희를 깨뜨림이여 질그릇 같이 부수리라 하시도다”(시 2:7).


   그런데도 마리아에게 하나님의 어머니라는 망령된 호칭을 붙이는 것은 그녀를 성부 하나님 수준으로 신격화하려는 언동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런 견지에서 천주교는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 하나님이 아니라 성부, 성자, 성령, 성모의 사위일체 하나님을 섬긴다고 보아도 무방할 정도입니다. 물론 이것이 지나친 확대해석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천주교에서 인간에 불과한 마리아를 성부, 성자, 성령이라는 호칭에 대응하여 성모라고 부르면서 신격화하여 신처럼 떠받들고 있는 것만은 명백한 사실입니다.

 
   마리아가 일반인들보다 존귀한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녀는 심지어 세례 요한보다도 덜 존귀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세례 요한을 지칭하여 여자가 낳은 자 가운데 가장 큰 자라고 선언하셨습니다(마 11:11, 눅 7:28). 그러므로 마리아는 이 땅에서 세례 요한보다도 덜 존귀한 자입니다. 그렇다면 하늘에서는 어떨까요? 이에 대해서도 성경에서는 분명히 밝히기를, 비록 세례 요한이 이 땅에서 여자가 낳은 자 가운데 가장 클지라도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지극히 작은 자라고 했습니다. 하물며, 이 땅에서 세례 요한보다도 덜 존귀한 마리아가 대체 뭐라고 하늘의 황후입니까? 그것도 모자라 유일한 중보자인 예수님을 대신하여 또 다른 중보자가 된단 말입니까? 성경에서는 이에 대해 단호하게 선언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마리아가 원죄 없이 태어났다는 주장도 터무니없는 거짓말입니다. 이는 다음의 말씀에 정면으로 위배됩니다.


   “그러면 어떠하냐 우리는 나으냐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에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롬 3:9).

 
   마리아의 무원죄 잉태설은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분으로 몰아세우는 배도적 교리입니다.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요일 1:10).


   성경은 단호하게 선언합니다. 마리아를 포함한 모든 사람이 원죄 가운데 태어났기 때문에 결코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수 없습니다. 마리아를 비롯한 모든 인간들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속량에 기초한 이신칭의를 통해서만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 3:23-24).


   이 세상에서 죄 없이 태어난 유일한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입니다. 그분만이 첫째 아담을 통해 마리아를 포함한 전 인류에게 들어온 원죄를 속량하시기 위해 원죄 없이 태어나신 둘째 아담입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롬 5:12).


   천주교에서는 마리아가 그녀의 어머니(안나)의 뱃속에 있을 때부터 예수님의 공로와 하나님의 특은을 힘입어 아담의 저주가 끊어지면서 원죄가 사라졌다고 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분명히 선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는 오직 ‘믿음’을 통해서만 우리에게 적용될 수 있다는 사실을. 마리아가 자기 어머니의 뱃속에 있을 때는 아직 예수님께서 세상에 태어나시지도 않는, 그야말로 구약시대와 동일한 상황이었습니다. 더군다나, 예수님께서 설령 세상에 계셨다고 하더라도 마리아는 ‘믿음’을 취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배아상태였습니다.


   이처럼 마리아의 무원죄 잉태설은 비성경적일 뿐만 아니라 비상식적이고 비논리적입니다. 몽소승천설의 경우에는 무원죄 잉태설로 인해 파생된 자체적 모순을 해결하고자 탄생한 교리입니다. 만약 마리아가 원죄 없이 태어났다면 어떻게 죽을 수가 있겠느냐는 천주교 안에서의 반문에 대응하고자 지어낸 또 하나의 거짓말인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더 이상 거론할 가치조차 없습니다. 지금까지 확인한 것처럼 천주교는 종교개혁 이후 성경적인 진리에 가까워지기는커녕, 오히려 성경적인 진리로부터 점점 더 멀어져왔습니다. 이런 사실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도표를 첨부합니다.

 

 

   이래도 정녕 천주교가 과거와는 달라졌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물론 달라지기는 했습니다. 다만, 개선이 아니라 개악이라는 것이 문제입니다. 만약 여기서 그쳤다고만 해도 천주교를 더 이상 성토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마리아 숭배사상이 터무니없기는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삼위일체 하나님을 인정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이자 유일한 구세주라는 고백하는 가장 중요한 진리만큼은 개신교와 공유하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천주교는 마리아를 신격화시키는 데에만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천주교가 기독교일 수 있었던 최소한의 정체성마저도 스스로 파괴해버렸기 때문입니다.

 
   공신력 있는 기독교기관인 카톨릭 정보 연구국(CRIB, Catholic Research Information Bureau)는 다음과 같은 경고의 나팔을 불었습니다.


   “속지 말라. 바티칸은 카멜레온과 같다. 바티칸은 프로테스탄트 국가들 내에서는 관용적이고 우호적이며 도덕적 권위가 지고한 듯 보이지만 국민 다수가 천주교도인 곳에서는 전혀 딴판이다. 그들은 자유의 수호자도 결코 아니다. 그들은 상황에 따라 색깔을 바꾸지만, 겉으로 드러나는 색깔은 절대로 천주교의 진짜 색깔이 아니다.” [유석근, 『밝혀진 적그리스도의 정체』, 367.]


   실제로 1965년 바티칸 공의회 때의 ‘비 그리스도교 선언’은 충격 그 자체였습니다. 그것은 사실상 ‘배교선언’이었습니다. 타종교와의 화해라는 명분으로 사실상 다른 종교에서의 구원을 인정했기 때문입니다. [Ibid., 433.]


 그 이후에도 천주교는 타종교에도 구원이 있을 수 있다는 종교 다원주의적 발언을 지속해왔습니다. 이는 세계의 종교를 천주교 아래로 흡수합병하기 위한 전략입니다. 종교다원주의란 천주교가 개신교를 포함한 세계의 모든 종교를 그들의 품 안으로 끌어들이기 전까지 한시적으로 내세우는 기만책에 불과합니다.


   2008년을 기준으로 전 세계의 천주교 신자의 숫자는 11억 6,600만 명이라고 합니다. [위키 백과사전(http://ko.wikipedia.org).] 수많은 교단으로 갈라진 개신교와는 달리 천주교는 교황청을 중심으로 하는 철저한 중앙집권체제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신자들에 대한 교황의 영향력은 실로 엄청납니다. 실제로 천주교 신도들에게 있어 교황은 살아있는 신과도 같은 존재입니다. 따라서 교황의 사상이 곧 천주교의 사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지금 현재 교황청에 거하고 있는 교황의 이름은 베네딕토(Benedictus) 16세입니다. 그는 2005년에 죽은 요한 바오로(Joannes Paulus) 2세의 뒤를 이어 교황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1978년 10월 22일에 교황으로서의 직무를 시작한 요한 바오로 2세는 “사람이 곧 그리스도다. 이 새로운 진리를 밝히고자 이 자리에 올랐다.”고 선언했습니다. 이것은 “사람이 곧 신이다.”고 가르치는 뉴에이지 교회의 교리를 방불케 합니다. 그래도 여기에서만 그쳤다면 단순히 역설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넘어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 이후 수많은 설교를 통해 “사람이 곧 그리스도다.”라는 선포가 역설적 표현이 아니라 직설적 표현임을 스스로 증명했습니다. 그는 대놓고 뉴에이지 교회의 핵심적인 가르침인 종교다원주의를 표방했기 때문입니다.


   《LosAngeles Times》지 1984년 12월 12일자에는 “죄를 용서 받으려면 하나님께로 가지 마라. 내게로 오라.”는 요한 바오로 2세의 신성모독적인 발언이 실렸습니다. 그 요약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개신교 신자들과 점점 늘어나는 로마가톨릭 신자들 사이에 널리 퍼진 신념을 반박하며, 지난 화요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죄사함을 받을 수 있다는 널리 알려진 견해’를 일축하고 고해성사를 더 많이 하도록 카톨릭 신자들을 촉구했다.”

 

 

   1986년 10월 27일 요한 바오로 2세는 전 세계에서 무려 100여 개가 넘는 수많은 종교의 지도자들을 이탈리아의 아사시로 초청하여 세계평화를 위한 기도모임을 주최했습니다. 거기에는 이슬람교, 힌두교, 불교는 물론이고 세계 각지에서 만연하고 있는 온갖 종류의 토속종교와 사이비종교, 심지어는 사탄숭배 계열의 종교들의 지도자까지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요한 바오로 2세는 모든 종교는 결국 같은 신을 향해 기도하는 것임을 천명함으로써 자신의 종교다원주의 사상을 만천하에 드러냈습니다. 특히, 이교도들과의 합동 기도는 애당초 요한 바오로 2세가 직접 제안한 아이디어였습니다.

 

 

   좌측 사진은 천주교에서 발간하는 잡지 《30일》의 표지(1989년 8/9월호)입니다. 표지에는 한쪽에는 십자가를 다른 쪽에는 부처상을 달고 있는 천주교의 묵주와 불상의 모습이 삽입되어 있습니다. 실제로 요한 바오로 2세는 심지어 달라이 라마를 불러들여 성 베드로 성당의 제단 위에 불상을 올려놓고 스님들과 함께 불경을 외우고 불가를 부르면서 부처를 숭배하는 의식에까지 직접 참여했습니다. 우측 사진은 성전 제단 위에 놓은 불상의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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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0년 10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도미누스 예수스’ 선언을 통해 천주교에만 구원이 있으며 개신교의 교파들은 구원도 없는 떨거지들일 뿐임을 역설했습니다. 그는 천주교가 다른 모든 교파보다 우위에 있으며 기독교 통합의 토대가 돼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성 베드로 광장에서 천주교의 신도들에게 “로마가톨릭이 여타 교파에 견주어 우위에 있다는 사실이 기독교 통합의 기초가 되어야 한다.”면서 “이같은 사실을 명확히 하지 않고서는 교파 통합을 위한 대화는 말의 성찬으로 전락할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당시 교황청 신앙교리성 이름으로 발표된 선언문에서 “세상에는 카톨릭 교회에 기반을 둔 유일한 기독교회만이 존재하며, 한 교파가 다른 교파와 같다는 생각은 기독교회 본래의 메시지를 위험에 빠뜨리는 것”이라는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유석근, 『밝혀진 적그리스도의 정체』, 428.]

 

 

 

   지금 현재의 교황인 베네딕토 16세는 여기에서도 배도를 향해 한 발자국 더 전진했습니다. 교황청 신앙교리성 장관의 직책을 맡고 있을 당시의 그는 방대한 책들을 편찬했습니다. 또한 그는 수많은 연설과 자신의 저서를 통해 충격적인 이단사설들을 만들어내고 그것을 천주교의 교리에 그대로 반영시켰습니다. 문제는 그 가운데 기독교신앙의 정체성을 원천적으로 뒤집는 교리까지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마리아 숭배나 연옥처럼 이단성 짙은 교리들을 가지고 있는 천주교가 그래도 개신교와 일치했던 한 가지는 예수 그리스도를 완전한 신이자 완전한 인간으로 고백했고, 구원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해야한다는 진리를 붙들고 있었다는 점이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천주교를 기독교로 받아들일 수 있게 만들어준 유일한 공통분모였습니다. 이 한 가지만큼은 지금까지 고수해온 탓에 비록 많은 부분에서 혼탁할지라도 천주교 안에서도 예수님을 바로 믿고 구원받은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었습니다. 그런데 현임 교황인 베네딕토 16세는 이 마지막 보루마저 무너뜨리고 말았습니다.


   베네딕토 16세는 자신의 저서인 『Milestones』(1998), 『GOD and the WORLD』(2000), 『The Jewish people and their Sacred Scriptures in the Christian Bilbe』(2001) 등을 통해 예수님을 구약성경에 예언된 그 메시야로 받아들이지 않아도 된다고 선포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요 구약에 예언된 메시아라는 사실을 믿지 않아도 무방하다고 선언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받는 것을 정당화했던 유대교의 해석이 맞을 수도 있고 반드시 기독교의 믿음이 옳다고 장담할 수 없다는 내용도 담겨 있습니다. 즉, 유대교의 주장처럼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며 구약성경에 예언된 메시야는 더더욱 아닐 수 있다고 인정한 것입니다. 믿어지지 않으신다면 직접 위 책들의 내용을 확인해보시기 바랍니다. 이처럼 요한 바오로 2세가 종교다원주의로 닦아놓은 터 위에서 베네딕토 16세는 천주교의 마지막 보루인 베드로와 마르다의 고백마저 무너뜨려버렸습니다.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
   “이르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요 11:27).


   베네딕토 16세는 요한 바로오 2세의 배턴을 이어받아 종교다원주의에 근거한 세계종교통합운동을 계속해서 이어가면서도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며 구약에 예언된 메시아가 얼마든지 아닐 수도 있다는 가르침을 더욱 심화시켜가는 중입니다. 기독교의 정체성을 완전히 뒤집는 이 엄청난 배도적 교리가 가져올 파장을 고려하여 가급적 우회적으로, 그리고 은밀하게 적용시키고는 있으나 본질은 다르지 않습니다. 베네딕토 16세의 천주교는 더 이상 기독교가 아닙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개신교를 가짜 교회로 매도합니다.


   2007년 7월 10일 교황 베네딕트 16세는 개신교는 교황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올바른 교회가 아니라고 선언했습니다. 그는 천주교 이외의 기독교 교파들을 ‘올바르지 못한 교회’로 규정한 문서를 발표했습니다(2007년 7월 10일). 16쪽 분량의 그 문서를 통해 “그리스도는 지구상에 오직 하나의 교회를 세웠고 이는 천주교회로 존재한다.”며 “다른 교파들에 과연 교회의 자격이 있는지 알기 어렵다.”고 밝혔습니다. 이 문서는 또 그리스 정교회에 대해서도 “교황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아 결함이 있다.”고 묘사했고, 개신교 등 16세기 종교개혁으로 생겨난 기독교 공동체들도 “교황의 존재를 시인하기를 거부하고, 성찬식에 대한 견해를 달리하는 등 올바른 의미에서 교회라고 볼 수 없다.”고 발언했습니다. [유석근, 『밝혀진 적그리스도의 정체』, 426.]

 

 

 

 <교황청 발표 문서 주요내용>

● 그리스도는 지구상에 오직 하나의 교회를 세웠고 이는 카톨릭 교회로 존재한다.”

 

● 그리스 정교회는 교황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아 결함이 있다.”

 

● 개신교 등은 교황의 존재를 시인하기를 거부하고성찬식(예수의 수난을 기념해 빵과 포도주를 먹는 의식)에 대한 견해를 달리하는 등 올바른 의미에서 교회라고 볼 수 없다.”

 

   2009년 1월 18일 오후에 서울 올림픽공원 내 올림픽 홀에서는 개신교와 천주교 신도 4천 명 이상이 모여 소위 ‘그리스도인 일치 기도회’라는 행사를 개최했습니다. ‘그리스도인 일치 기도회’는 세계교회협의회(WCC)에 속한 개신교회들과 로마 교황청 아래의 교구들이 연합하여 진행하는 기독교 일치운동입니다. 이 얼마나 위선적인 집회입니까? 바티칸은 교황의 존재를 부정하는 개혁교회는 올바른 교회가 아니라고 선언했습니다. 그런 망언을 사과한 적도 없고 취소한 적도 없습니다. 그러면서도 겉으로는 분열된 형제라는 유화의 제스처를 취하며 이중 플레이를 하고 있습니다. 쉽게 말해, 양의 탈을 쓴 늑대입니다. [유석근, 『밝혀진 적그리스도의 정체』, 429.]


   아니나 다를까요? 2009년에는 다윈의 진화론을 사실상 인정했습니다. 2009년 2월 12일자 한국일보 보도자료를 그대로 인용하겠습니다.

 

 

    교황청이 찰스 다윈의 진화론을 인정하려는 자세를 보이고 있다고 영국 일간 

더타임스가 보도했다. 더타임스는 교황청 부속 기관의 신학자가 진화론이 교회의

창조론과 상호 보완적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교황청이 다음달 다윈 탄생 150주년 

기념 학술회의를 개최하는 등 진화론을 수용하려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고

11일 보도했다.


   교황청 문화평의회 의장인 지안프랑코 라바시 대주교는 10일 "다윈의 진화론이

교회 신앙과 양립할 수 있다"고 선언, 진화론이 교회의 창조론과 상호 보완 

관계라는 점을 사실상 인정했다. 그는 교회가 진화론에 적대적이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진화론을 공식 비판한 적은 없었다는 점도 강조했다.


   라바시 대주교는 1950년 교황 비오 12세가 "진화론은 인간의 발전에 유용한 

과학적 접근"이라고 말했던 것을 상기하며 다윈의 복권이 이미 시작됐다고 말했다.

그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도 진화론을 "가설 이상의 것"으로 평가했다며 변화한

교황청의 입장을 드러냈다.


   교황청 부속기관인 로마 산타 크로체 대학의 신부이자 교수인 주세페 탄젤라

니티도 4세기에 활동한 히포의 성 아우구스티누스나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책에서도 진화론의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며 교황청과 입장을 같이 했다. 

히포의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진화론이라는 용어를 직접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생물의 형태가 세월이 지나면 점차 변한다는 점을 알고 있었고, 성 토마스 

아퀴나스도 중세에 관찰을 통해 이와 비슷한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탄젤라 니티 교수는 지금은 과학자 뿐 아니라 신학자도 “생물의 다양성이 종의 

경쟁 때문인지 아니면 협력 때문인지 알아내려고 노력하는 시기”라며 “진화론은

기독교 신학에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고 말했다.


   3월 중 다윈 탄생 150주년 기념 학술회의를 개최하는 그레고리안 대학의 자연 

철학자 마르크 르클레르크도 “다윈 탄생 200주년에 무관심한 학자는 있을 수 

없다.”며 “교회가 다윈을 단호하고 객관적으로 평가할 시기가 왔다.”고 말했다.

 


   물론 위에서 진화론이란 전통적인 진화론이 아니라 유신진화론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유신진화론은 기본적으로 뉴에이지 교회의 가르침입니다. 즉, 기독교신앙과는 정면으로 상치되는 배교적 사상이라는 뜻입니다. 개신교 안에서 활동하는 대부분의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바로 이 유신진화론을 수용하고 있습니다. 종교다원주의와 유신진화론이라는 뉴에이지 교회의 핵심사상을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진리까지 부정하는 지금의 천주교가 과연 정상이란 말입니까?


   그래도 과거에는 그렇게 혼탁한 와중에도 그 안에 담긴 핵심적인 진리를 제대로 붙들고 구원받는 천주교 신자들이 많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제는 종교다원주의가 공식화되었을 뿐만 아니라 베드로의 고백마저 허물어뜨림으로 인하여 그마저도 어렵게 된 것 같습니다. 물론 아직까지 대부분의 천주교도들은 이런 내막까지는 제대로 알지 못합니다. 이는 바티칸에서 전략적으로 은폐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그 오랜 세월 동안 바티칸이 진리를 왜곡시키는 방식은 언제나 ‘점진주의’였습니다. 마치 개구리를 찬물이 담긴 냄비에 넣고 서서히 가열시키듯 그런 식으로 부지불식간에 변질시켜왔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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