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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논의 근친상간(삼하13: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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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하의 제 2 부라 할 수 있는데, 11장으로 20장은 1부 1장에서 10장에 언급하고 있는 다윗의 성공 및 번영과 대조되는 다윗의 범죄와 그로 말미암아 다윗과 왕국에 밀어닥친 연속된 시련에 대하여 다루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 11장과 12장에서는 다윗 왕의 범죄와 이스라엘의 암몬 정복을 다루었고, 이제 오늘 13장부터 14장까지는 암논의 다말 추행 사건과 이에 대한 압살롬의 암논 보복 사건이 이어지고 있는데, 그 가운데 오늘 본문은 암논이 다말을 성추행한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같이 1절을 읽겠습니다.

“그 후에 이 일이 있으니라. 다윗의 아들 압살롬에게 아름다운 누이가 있으니 이름은 다말이라 다윗의 아들 암논이 저를 연애하니”

“그 후에 이 일이 있으니라”는 말은, 지금 11장부터 기록되고 있는 모든 일들이 하나의 연관성을 가지고 일어나는 일련의 사건들임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죠?

그러니까, 지금 이 일도 역시 지난 시간 다윗이 범죄했던 일들과 같이 나쁜 일인데, 이것을 설명하면서, 이 일도 이렇게 있었고, 저 일도 이렇게 있었다는 식으로 연속해서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이런 좋지 않은 일들을 열거하고 있을까? 이것은 지난 번 다윗의 범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예언의 성취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예언을 다시 살펴보면, 다윗의 집에 칼이 영영히 떠나지 아니하리라고 했었고, 또 다윗의 집에 재화를 일으켜 다른사람으로 그의 처와 백주에 동침하게 하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다윗을 두렵게 했던 예언이 본장에서부터 시작하여 18장에 이르기까지 연속적으로 성취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은 어떤 일로부터 재화가 시작되고 있습니까?

역시 지난번에는 아비가 간음을 시작으로 살인죄까지 지었던 것을 볼 수 있었는데, 이번에는 아들이 근친상간을 함으로 살인이 저질러지고 있음을 볼 수 있죠?

하반절을 보면, 다윗의 아들 압살롬의 누이 다말을, 다윗의 아들 암논이 연애했다고 했습니다. 여기 연애라는 말은, 사랑에 빠졌다는 것이죠?

아마도 사랑했다고 번역하지 않고, 연애라고 번역한 것은, 이것이 분명히 이성적인 사랑이었기 때문이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뭐가 문제가 됩니까? 암논은 이스르엘 여인 아히노암이 낳은 다윗의 장자이며, 다말은 다윗이 그술 왕 달매의 딸 마아가에게서 낳은 딸입니다.

그러므로 이 둘은 결코 남녀간의 사랑을 할 수 없었던 이복남매지간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말이 아름다웠다고 했습니다. 얼마나 아름다웠을까요?

아마도 압살롬의 외모가 빼어났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그 동생도 다말도 무척이나 이뻤을 것이라는 짐작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레위기 18장 9절에 분명히 근친상간을 아주 엄하게 금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의 이스라엘 역사에서도 이런 일은 쉽게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요?

우리는 이것이 하나님의 심판의 결과였다는 맥락에서 이해해야 하겠죠? 그렇다면, 암논이 다말를 사랑하게 된 것이 하나님의 심판이었다는 말인가요?

그것은 아니겠죠? 하나님의 심판은 그 가정에 그런 비극이 시작되었음에도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하심이 없었다는 것이겠죠?

모든 이들에게 어려움이 있을 수 있는 것처럼 다윗에게도 있을 수 있는 어려움이 남매간의 사랑으로 생겨난 것이지만, 여기에 더 이상 다윗을 도우시는 하나님의 섭리는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치 다윗이 밧세바를 간음함으로 더 큰 죄악에 빠져들었던 것처럼, 이 사태는 더욱 악화되어 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다같이 2절을 읽겠습니다. “저는 처녀이므로 어찌할 수 없는 줄을 알고 암논이 그 누이 다말을 인하여 심화로 병이 되니라.”

어찌할 수 없다는 말은 무슨 말이고, 왜 다말이 처녀이기에 어찌할 수 없다고 했을까요?

그것은 당시 처녀들의 장막은 남자들이 가까이할 수 없도록 제한이 되어 있었고, 대개가 그런 상황에서는 아버지의 보호아래 살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암논이 연애하는 다말의 장막은 다윗의 보호와 감시가 있는 곳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암논은 그녀에 대해 감히 어떠한 행동도 할 수 없었다는 것이죠.

그러므로 암논은 심한 상사병에 걸리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다윗의 형 시므아의 아들인 요나답이라는 아주 간교한 사촌형제가 이것을 눈치채고는 접근하고 있습니다. 4절을 읽겠습니다.

“저가 암논에게 이르되 왕자여 어찌하여 나날이 이렇게 파리하여 가느뇨, 내게 고하지 아니하겠느냐 암논이 말하되 내가 아우 압살롬의 누이 다말을 연애함이니라.”

아마도 암논은 상사병에 걸려 얼굴이 파리할 정도로 병들어 보였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상사병 때문에 파리한 것하고, 육체적 병 때문에 파리한 것하고는,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이 다르죠?

아마도 간교한 요나답은 이것을 이미 알고 접근했을 것이라고 봅니다. 그런데 암논이 또 그런 그의 계교와 상관없이 사실을 말했다고 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간교할수록 수단이 더 많은 법이니까 그랬겠죠?

그러므로 이제 요나답은 암논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5절을 읽겠습니다.

“요나답이 저에게 이르되 침상에 누워 병든 체하다가 네 부친이 너를 보러 오거든 너는 말하기를 청컨대 내 누이 다말이 와서 내게 식물을 먹이되 나 보는데서 식물을 차려 그 손으로 먹여주게 하옵소서 하라.”

먼저 병든 체 하여 부친을 불러들이라는 말을 하죠?

그리고 그래서 부친이 오면, 다말에게 음식을 먹이게 해 달라고 청하고 합니다.

그것도 암논이 보는데서 음식을 차려 그 손으로 먹여주게 해 달라고 청하였습니다. 뭔가 상당히 이상하죠?

음식이란 밖에서 만들어 오는 것이고, 보통은 왕자니까 궁에서 일하는 종들이 들고 들어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뜬금없이 공주에게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왕 앞에서 말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이 궁금증은 6절에 가서 좀 풀리고 있습니다. 읽겠습니다.

“암논이 곧 누워 병든 체하다가 왕이 와서 저를 볼 때에 왕께 고하되 청컨대 내 누이 다말로 와서 내가 보는 데서 과자 두 어개를 만들어 그 손으로 내게 먹여 주게 하옵소서.” 어떻습니까? 뭐가 좀 다르죠?

여기 과자 두어개라는 말이 다릅니다. 이것은 병자가 먹을 수 있는 특별식을 제공받도록 해달라는 부탁이라고 주석가들은 말합니다.

그러니까, 다말에게 식사를 위한 음식을 부탁한 것이 아니고, 특별간식을 부탁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굳이 암논이 다윗에게 요청했던 것은, 다윗의 딸들은 다윗의 보호를 받고 있었던 터라, 다윗의 허락이 있어야만 움직일 수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윗도 이런 요구에 대해서 별 이의를 달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이제 다말은 그 오라비 암논의 집에 이르러 밀가루를 가지고 반죽하여 암논이 보는데서 과자를 만들고 굽고 그 앞에 갖다 쏟아 놓습니다.

그런데 암논이 어떻게 합니까? 9절을 읽겠습니다.

“그 남비를 가져다가 그 앞에 쏟아 놓아도 암논이 먹기를 싫어하고 가로되 모든 사람을 나가게 하라 하니, 다 저를 떠나 나가니라.”

먹지는 않고, 다 나가라고 하였다는 것입니다. 먹지 않은 것도 다른 사람들을 다 나가라 말하기를 좋게 하기 위한 방법임을 알 수 있죠?

뭔가 아주 안 좋은 상태임을 굳이 드러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10절에서 다말에게 요구하는 말도 더 하지 않으면 안되게 만들고 있습니다.

“식물을 가지고 침실로 들어오라. 내가 네 손에서 먹으리라”

어떻게 되었습니까? 다말이 자기의 만든 과자를 가지고 침실에 들어가 그 오라비 암논에게 이르렀다고 했습니다. 그리고는 가까이 갈 때에 암논이 그를 붙잡고는 누이야 와서 나와 동침하자. 정신 빠진 소리를 하게 됨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다말은 어찌할까요? 12절을 읽겠습니다.

“저가 대답하되 아니라. 내 오라비여 나를 욕되게 말라. 이런 일은 이스라엘에서 마땅히 행치 못할 것이니 이 괴악한 일을 행치 말라.”

다말은 분명히 암논의 행위가 잘못된 것임을 밝히고 있죠? 아니라는 말은, 그의 행동이 불법이라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를 욕되게 말라는 말은, 그를 폭력으로 제압하여 강간함으로 더럽히고 욕보이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다말은 암논이 자기에게 행하고자 하는 것이 자신을 학대하는 행동이고 자신의 인격과 명예에 치명적인 상처를 입히는 강간이며 근친상간임을 분명히 하면서 그리하지 말 것을 간청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분명 죄악의 의지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완강히 말입니다. 13절을 보면, “내가 이 수치를 무릅쓰고 어디로 가겠느냐”고 했고, 또 “너는 이스라엘에서 괴악한 자 중 하나가 될 것이라” 했고, 또 ‘왕도 자신을 너에게 주지 않을 것이라’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너무나 또렷하게 자신의 분명한 의지를 밝히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데도 죄악은 어떻게 되고 있습니까? 저질러지고 있죠? 14절을 보면, 암논이 다말보다 힘이 세므로 억지로 동침했다 했습니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죄악이 저질러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찌 이런 일이 다윗의 왕가에서, 그것도 다윗의 장남이 스스럼없이 저지를 수 있었을까요? 그도 누구를 보고 배운 것이겠습니까? 다윗이죠?

지금 우리는 암논이 주인공이 아니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이 일의 주인공은 누구입니까? 다윗이죠? 그러므로 우리도 항상 주의하여 나로 인하여 내 가족과 다른 사람들이 범죄치 않도록 늘 하나님 앞에서 성결한 자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도 여러분의 삶이 육신의 쾌락을 쫓는 삶이 아닌, 영혼의 신령한 즐거움을 위해 살아가는 복된 하루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그 마음에서 찬양이 그치지 않는 삶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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