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선 1절로 18절은 다윗의 군대와 반역자 압살롬의 군대와의 전쟁에서 다윗의 군대가 대승을 거두었고, 압살롬이 비참한 최후를 맞이함으로 전쟁이 완전히 종결되었음을 보았습니다.
압살롬은 9년이 넘는 세월을 거의 완벽하게 반란을 준비하고 그래서 거의 모든 민심을 얻고, 또한 많은 지도층과 뛰어난 전략가들을 자기편으로 끌여들여 예루살렘으로까지 무혈입성하였지만, 그러나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는 그의 반란은 결코 성공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제 오늘 이에 이어지는 19절부터 33절까지는 압살롬이 죽었다는 소식이 다윗에게까지 전해진 사실과 아들의 죽음에 대하여 다윗이 몹시 슬퍼한 사실이 기록되고 있습니다.
이 장면에서 다윗은 전쟁에서 크게 이긴 승전보를 전해 듣지만, 그것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그 아들 압살롬의 안위에만 온 정신을 쏟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아무리 자기에 대해 반기를 들고 자기를 비참한 도망자의 신세로 만든 역적이라 하지만, 그가 자기 아들이라는 사실 그 하나만으로 다윗은 그의 안위를 깊이 염려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압살롬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지난 시간 압살롬은 다윗의 명령을 불순종한 요압의 창에 심장이 찔리고 그리고 요압의 병기를 맡은 열 군사에 의해 또한 찔려 완전히 비참하게 목숨을 잃고 말았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상황은 어떻게 전개가 될 것인가? 과연 이 일을 통해 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 있는지 함께 살펴보며 은혜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19절을 읽겠습니다. “사독의 아들 아히마아스가 가로되 청컨대 나로 빨리 왕에게 가서 여호와께서 왕의 원수 갚아주신 소식을 전하게 하소서.”
지금 이것은 누구에게 하는 말입니까? 요압에게 하는 말이죠?
사독의 아들 아히마아스는 누구입니까? 지난 번 예루살렘으로부터 후새의 정보를 전달한 제사장이죠?
그런데 그가 지금 압살롬의 죽음에 대해 뭐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청컨대 나로 빨리 왕에게 가서 여호와께서 왕의 원수 갚아주신 소식을 전하게 하소서”라고 합니다. 물론 이것은 영적인 면에서 올바른 해석이라 할 수 있습니다. 분명 하나님은 요압을 통하여 다윗의 원수를 갚아주셨습니다.
그러나 지금 이것을 말하는 아히마아스의 기분이 어떠한 것 같습니까? 빨리 왕에게 가겠다는 것은, 기분이 매우 좋다는 것이죠?
그러나 이 상황에서 자신과 다른 사람들은 기뻐할 수 있지만, 다윗은 기뻐할 수 있을까요? 사실 아니죠?
왜요? 압살롬이 죽는 것은 다윗의 의도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장수들에게 압살롬은 소년이니 너그러이 봐달라고 주문을 했었습니다. 그러나 요압은 이런 다윗의 요청을 물리치고 그를 비참하게 죽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제사장이라고 하는 아히마아스가 이것을 너무나도 기뻐하고 있었고, 그래서 빨리 다윗에게 알리려고 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지금 아히마아스가 올바른 판단을 하고 있는 것입니까?
성도 여러분, 우리는 아무리 우리에게 기쁘고 유리한 상황이 생긴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뜻에 합하지 않은 것에는 결코 기뻐해서만은 아니 될 줄 믿습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삶이란 뭐로 가도 한양만 가면 된다는 식으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어디를 가더라도 정도를 걸어야 하는 것이고, 또한 하나님은 항상 정도를 사용하시지 예외를 사용하시길 기뻐하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쓰임을 받고도 버림을 받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더 나아가 하나님은 그의 택한 백성들로 항상 거룩하게 살면서 천국길을 가도록 하시는 것이지, 그냥 삶은 아무렇게나 살다가 천국에 가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빌립보서 2장 12절은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하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이제 정말 사태는 어떻게 진전될 것인가? 20절을 읽겠습니다.
“요압이 저에게 이르되 너는 오늘 소식을 전하는 자가 되지 말고 다른 날에 전할 것이니라. 왕의 아들이 죽었나니 네가 오늘날 소식을 전하지 못하리라 하고”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오늘 전하지 말고 나중에 전하라는 것이죠? 왜요? 왕의 아들이 죽었기 때문이라는 것인데, 이것은 아무래도 다윗의 마음이 어떠한지를 너무나 잘 알았기 때문이라 할 수 있죠?
게다가 압살롬은 정말 적의 수장이 아닌 왕의 아들이었습니다. 물론 다윗이 암논살인사건후에는 별로 쳐다도 보지 않았지만, 그러나 우리가 앞으로도 보겠지만, 다윗의 마음에는 언제나 압살롬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아들이 죽었고, 또 다름아닌 자기 군사 요압에 의해 죽었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비통한 노릇입니까? 그렇다고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러니, 지금은 전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이 소식은 묻고 가는 것인가?
그런데 21절을 보면, 요압은 이것을 구스 사람에게 가서 왕께 고하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네가 본 것을 왕께 고하라고 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전쟁의 종료는 알려야 하겠고,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 아히마아스가 가면 그가 죽을 수도 있을 것이니까, 이방사람을 보낸 것이죠?
구스 사람은 어느 나라 사람입니까? 이디오피아 사람이죠? 이는 아마 노예로 끌려온 자로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미련한 아히마아스는 뭐라고 합니까? 22절을 보면, 자기도 그 구스 사람의 뒤를 따라가게 해달라고 구하고 있습니다. 어리석죠?
그러나 결국 요압이 어떻게 합니까?
23절을 보면, 허락을 하는데, 이에 아히마아스는 들길이라는 지름길을 택하여 구스 사람보다 더 앞서 다윗에게 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24절로 25절을 보면, 때에 이것을 파숫군이 보고는 왕에게 고하였다고 했고, 왕은 ‘저가 만일 혼자면 그 일에 소식이 있으리라’고 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말이 무슨 의미일까요? 다윗이 이렇게 말했던 것은 당시 전령은 대개가 홀로 다녔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전령이 온다면 전쟁의 소식을 가지고 왔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26절을 보면, 파숫군이 또 다른 사람을 보죠? 그러니까, 다윗은 이번에도 또 ‘저도 소식을 가져오느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전쟁에 경험이 많은 사람이기에 지금 상황이 어떤 상황인지를 대충 짐작하고 있었던 것이죠?
그러므로 말합니다. 27절을 읽겠습니다. “파숫군이 가로되 나 보기에는 앞선 사람의 달음질이 사독의 아들 아히마아스의 달음질과 같으니이다. 왕이 가로되 저는 좋은 사람이니 좋은 소식을 가져오느니라.”
좋은 소식은 좋은 소식이죠? 그러나 다윗 개인에게는 어떻습니까? 좋지 않은 소식이죠? 그러므로 다윗은 대적들이 패하였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가장 먼저 압살롬의 소식을 묻지만, 그러나 아히마아스가 말합니까? 하지 않죠?
그는 무슨 일인지 알지 못하였나이다. 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압살롬의 소식을 듣고 싶었던 다윗은 그에게 물러나 곁에 서 있으라고 싸늘한 반응을 보이고 있습니다.
아마도 또 한 전령이 온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다윗에게는 어떤 소식이 가장 중요했다는 것입니까?
압살롬이 살아있느냐 죽었느냐는 소식인 것이죠? 그는 너무나도 너무나도 아들을 사랑한 왕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구스 사람이 도착해서 뭐라고 말합니까? 31절에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왕을 대적하던 모든 원수를 갚으셨나이다 라고 한 구스 사람은, 32절에서 왕이 압살롬에 대해 물을 때, 이런 말을 합니다. 읽겠습니다.
“왕이 구스 사람에게 묻되 소년 압살롬이 잘 있느냐 구스 사람이 대답하되 내 주 왕의 원수와 일어나서 왕을 대적하는 자들은 다 그 소년과 같이 되기를 원하니이다.”
무슨 말입니까? 죽었다는 말이죠? 이에 다윗이 어떻게 합니까?
문루(성문 꼭대기 공간)로 올라가면서,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내 아들 압살롬아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면, 압살롬 내 아들아 내 아들아 라고 통곡을 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통곡은 무엇에 대한 통곡입니까? 자신의 범죄로 인한 아들의 죽음에 대한 통곡인 것이죠? 단순히 아들이 죽었다는 사실 때문만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죄를 짓고 난 후에 그 징계로 인하여 통곡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죄를 짓고 난 후에 통곡하는 자가 아니라, 죄를 짓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사는 자가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오늘 하루 여러분의 삶이 하나님의 은혜로 죄를 피하고 의로운 길로 행할 수 있는 복된 삶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