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시간까지 우리는 압살롬의 난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암논이 다말을 겁탈하고 버린 일로 인하여 분노를 품고 복수를 위해 이를 갈던 압살롬이 무려 9년에 걸쳐 준비하여 성공했던 반란,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기에, 끝내는 한순간에 실패할 수밖에 없었음을 살펴보았습니다.
압살롬의 군대는 온 이스라엘에서 불러모은 수많은 인원이었지만, 그러나 하나님이 함께 하신 다윗의 군대가 그들을 에브라임수풀로 이끌어 들여 싸울 때에는 속수무책으로 당하여 금새 2만명이라는 대군이 칼뿐만 아니라, 수풀의 자연조건에 의해 목숨을 더 많이 잃음으로, 승리는 다윗의 편으로 기울었고, 마침내 다윗의 신복들과 마주쳐 도망하다 머리가 나무에 걸려 있던 압살롬이 요압의 창에 맞아 죽음으로 압살롬의 난은 완전히 평정이 되었음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런 승리의 기쁨에도 불구하고, 지난 시간 마지막 구절에서 다윗은 내 아들 압살롬아 라고 하며 눈물을 흘렸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다윗의 이런 아들을 잃은 심정이 백성들에게 전해지는 것으로부터 시작되고 있는데, 다같이 함께 살펴보며 주시는 은혜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1절로 2절을 읽겠습니다.
“혹이 요압에게 고하되 왕이 압살롬을 위하여 울며 슬퍼하시나이다 하니, 왕이 그 아들을 위하여 슬퍼한다 함이 그 날에 백성들에게 들리매 그 날의 이김이 모든 백성에게 슬픔이 된지라.”
지금 이스라엘은 압살롬의 난을 평정한 기쁨보다는 아들을 잃은 다윗의 슬픔으로 인한 슬픔이 더 했다는 것이죠?
혹이 요압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고 했는데, 이것은 이제 다윗이 압살롬의 죽음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요압이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다 할 수 있습니다.
이제 요압은 후에 다윗의 뜻과는 다르게 아마사까지 살해하게 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무기력한 다윗과 대조적으로 더욱 득세하게 되는 것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다윗의 슬픔과 함께 모든 백성들이 함께 슬퍼하고 있었고, 그러므로 누구도 기뻐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3절을 보면, 그 날에 백성들이 싸움에 쫓겨 부끄러워 도망함같이 가만히 성으로 들어가니라 고 했습니다.
이 말은 압살롬의 난을 진압하여 기세등등해야 할 다윗의 군사들이 마치 수치스러운 패잔병들과 같이 기가 죽어 가만히 성으로 들어갔다는 것이죠?
그러나 사실 누가 이 전쟁에 승리자이겠습니까? 사실은 모두가 다 동족끼리의 전쟁에서 엄청난 희생과 피해를 입은 패배자였던 것이죠?
그럼에도 지금은, 적어도 지금은, 다윗이 그 반란군을 진압한 자신의 군사들의 수고를 격려하며 기쁨을 주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백성들의 분위기와는 아랑곳없이 다윗은 여전히 압살롬을 외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4절을 읽겠습니다.
“왕이 얼굴을 가리우고 큰 소리로 부르되 내 아들 압살롬아 압살롬아 내 아들아 내 아들아 하니”
우리는 지난 장 마지막 절에서도 다윗이 압살롬의 죽음 소식을 들은 직후에도 마하나임의 성루에서 이렇게 통곡하며 외쳤던 것을 보았죠?
그런데 지금 다윗은 그 군사들이 성에 들어가는 것을 보면서도 이러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다윗이 얼마나 지도자로써의 분별력을 잃을 만큼이나 연약해져 있는가를 알 수 있죠? 실로 이것은 실망스러운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동족끼리의 전쟁으로 인해 수많은 사상자와 피해와 상처를 당한 백성들의 아픔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오직 왕의 슬픔으로 인해 함께 슬퍼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다윗은 이들에게 어떻게 해야 했겠습니까?
자신이 좀 슬프더라도, 이들 앞에서는 웃고 격려하고 희망을 주었어야 했죠?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자신은 도수장에 끌려가는 양과 같은 처절한 심정일지라도, 그것을 보는 이들에게는 더 위대한 나라의 꿈과 희망과 기쁨을 주며 격려했어야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그랬을까요? 아마도 이제는 나이가 들어서, 너무나 쇠약해졌기 때문에, 그래서 이제 얼마 있지 않아 떠날 것 같은 자신보다는 앞으로 살아갈 날이 창창했던 자식에 대한 걱정이 더 앞섰던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런데 바로 이 때 요압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다같이 5절을 읽겠습니다.
“요압이 집에 들어가서 왕께 말씀하되 왕께서 오늘 왕의 생명과 왕의 자녀의 생명과 처첩들의 생명을 구원한 모든 신복의 얼굴을 부끄럽게 하시니”
당연한 말이죠? 지금 요압은 옳은 말을 하고 있죠? 자신들은 다윗과 그의 가족을 위해 생명을 내어 놓고 싸웠는데, 다윗은 그런 그들의 희생과 수고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저 자신의 아들을 잃은 슬픔에만 치우쳐 있다니, 얼마나 그 수고한 신복들이 부끄럽겠습니까? 혹이라도 괜히 싸웠다는 심정이 들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6절을 보면, ‘이는 왕께서 미워하는 자는 사랑하시며, 사랑하는 자는 미워하시고, 오늘 장관들과 신복들을 멸시하심을 나타내심이라.’고 말하면서,
‘오늘 내가 깨달으니, 만일 압살롬이 살고 오늘 우리가 다 죽었더면 왕이 마땅히 여기실 뻔하였나이다.’라고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다윗의 마음이 그러하지는 않았겠지만, 충분히 이런 오해를 할 수 있는 행동을 다윗이 했던 것이죠?
여기 ‘왕께서 미워하는 자는 사랑하시며, 사랑하는 자는 미워하신다’는 말은 무슨 말이겠습니까?
이것은 왕을 미워하는 압살롬은 왕이 사랑하고, 왕을 사랑하는 자신들은 왕이 미워한다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요압은 지금 왜 이런 말을 이렇게나 강하게 하고 있었을까요?
사실 당시 다윗의 권력으로 보았을 때는 아무도 다윗 앞에서 함부로 이런 말을 할 수 없었죠? 요압도 얼마전까지는 그러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요압은 다윗의 최대위기인 압살롬의 반란을 진압한 장본인이었고, 그러나 또 다른 한편으로 보면, 다윗이 원치 않았던 압살롬을 죽인 장본인이기도 한 상황에서, 반란을 진압한 위세를 가지고 자신이 범한 불순종의 과오를 정면돌파로 뚫고 나가려 하는 의도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런 강력한 행동을 통해서, 지금 연약해질대로 연약해진 다윗을, 자신의 의도대로 움직이려 하는 의도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결국 이후를 보면, 다윗은 요압의 말대로 움직이게 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7절을 읽겠습니다.
“이제 곧 일어나 나가서 왕의 신복들의 마음을 위로하여 말씀하옵소서. 내가 여호와를 가리켜 맹세하옵나니 왕이 만일 나가지 아니하시면 오늘 밤에 한 사람도 왕과 함께 머물지 아니할지라. 그리하면 그 화가 왕이 젊었을 때부터 지금까지 당하신 모든 화보다 더욱 심하리이다.”
어떻습니까? 이제는 완전히 협박조로 나오고 있죠? 왕이 안 나가면 왕의 모든 신복들이 다 왕을 떠날 것이라고 하고 있죠?
그런데 그러면 왕이 지금까지 당한 어떤 화보다 더 큰 화를 당할 것이라는 말은 무슨 말일까요?
사실 돌이켜보면, 다윗이 사울을 피해 도망을 가기 시작한 때에도 400명의 소년들이 따라다녔음을 생각해보면, 지금 다윗의 신복들이 다윗을 떠나면 다윗은 실로 압살롬의 위기보다 더 큰 위기를 맞이하게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죠?
그렇다면, 이제 다윗은 어떻게 할 것인가? 8절을 읽겠습니다. “왕이 일어나 성문에 앉으매 혹이 모든 백성에게 고하되 왕이 문에 앉아 계시다 하니, 모든 백성이 왕의 앞으로 나아오니라.”
다윗은 요압의 말을 듣고는 일어나 밖으로 나와 성문에 앉고 있죠? 이곳은 재판과 통치행위가 이루어졌던 곳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이 성문에 앉았다는 것은, 다시 자기 자리를 찾았다는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그는 요압의 강요에 의해 모든 백성들 앞에서 회복된 모습을 보이며 공적 직무를 수행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백성이 왕의 앞으로 나아왔다고 했는데, 이것은 왕의 통치를 받겠다는 의미로 나왔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이 다윗이 이전처럼 전 이스라엘을 다스리게 되었다는 말인가요? 아니죠? 왜요? 아직은 요단동편 마하나임에서 압살롬의 난 때에 함께 했던 자신의 지지자들과만 함께 있었기 때문인 것이죠?
과연 다윗이 압살롬의 난을 진압함으로 압살롬에게로 돌아갔던 민심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그러나 아직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기까지는 그가 온 이스라엘을 통치한다고 할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본문을 통해 무엇을 배울 수 있겠습니까?
성도는 감정 또한 바르게 다스릴 수 있어야 하며, 특히 지도자는 사사로운 감정 때문에 백성의 분위기를 거스려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배울 수 있죠?
결국 그런 다윗의 모습이 요압을 이끌어야 할 자로써, 오히려 요압에게 이끌려 다니는 연약한 모습을 보이게 되는 계기가 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흔히 서양 사람들에게 이렇게 공과 사를 구분해야 할 문제에 직면하게 되면, 그들은 “The play must go on!”이라고 외친다고 합니다. 무슨 말이니까?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Role 역할을 계속해서 끝까지 감당해 나가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죠.
저는 이것이 너무나 피부에 와 닿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제 역할을 감당하기 위해 Play를 하게 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의 교훈은 무엇입니까? 그렇더라도,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이죠?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 4:23)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언제나 우리의 마음을 지켜 성도로써의 생명을 잃지 않고 본분을 끝까지 다 할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