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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급하지 말라(왕상 1: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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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선 1절로 4절에서는 신정왕국을 정착시킨 다윗왕의 노쇠함으로 인해 발생했던 일을 살펴보며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다윗은 아무리 해도 몸이 따뜻하지 않을 정도로 노쇠했고, 그렇다면, 이 말은 다윗이 죽을 때가 가까웠다는 말인데, 그럼에도 신하들은 장례준비는 하지 않고, 아비삭이라는 아주 이쁜 소녀를 그에게 결혼시켜서 품에 안기게 했던 것을 볼 수 있는데, 결국 이로 인해 이스라엘에는 큰 문제들이 있었다고 했죠?

    

오늘은 바로 그 첫 번째 문제를 담고 있습니다. 다윗이 노쇠함에도 왕위를 물려주지 않고 딴 짓을 할 동안, 마땅히 왕위를 물려받아야 할 솔로몬을 대신하여 아도니야가 왕위를 도모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다같이 5절을 읽겠습니다.

    

때에 학깃의 아들 아도니야가 스스로 높여서 이르기를 내가 왕이 되리라 하고 자기를 위하여 병거와 기병과 전배 오십인을 예비하니

    

다윗이 노쇠하였으면, 빨리 후계자를 확정하여 공포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니까, 서열상 왕세자중에서 가장 왕이 될 가능성이 큰 압살롬의 바로 밑 동생 아도니야가 스스로 왕권에 대한 야심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었던 것이죠?

    

특히 여기 병거와 기병과 전배(그 앞에서 달리는 사람) 오십인이란 말은, 소규모 군사를 일으켰다는 말이 되는 것이죠? 뭘 말합니까?

    

물론 규모는 작지만, 아무도 무장하지 않은 상태에서 군사들을 대동했다는 말은 뭔가 강제성이 있는 행동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죠? 쿠데타의 모습이 보이고 있습니다.

    

게다가 스스로 높여서내가 왕이 되리라 했다 했습니다. 이것은 분명 아도니야의 욕심으로 인한 쿠데타임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잘하고 있는 일일까요? 못하고 있는 일일까요?

뭐가 잘못된 것일까요? 무엇인 것 같습니까?

    

여러분 이스라엘의 왕은 어떻게 세워지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세우셔야 세워지는 것이죠? 신적 소명이나 부르심이 있어야만 왕으로 기름부음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아도니야는 어떻게 해서 왕이 되려 하고 있었다는 것입니까?

    

6절을 보면, 그의 자격이 나오죠? 첫째, 그는 압살롬의 다음에 난 자라는 인간적인 서열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가 다윗의 남은 아들 중에 가장 장자이기 때문에 가장 먼저 왕위를 물려받아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둘째, 체용이 심히 준수하였다고 했습니다. 체구도 좋고 인상도 아주 좋았다는 것이죠?

    

셋째, 또한 인품도 너무나 좋아서 그 부친 다윗이 한번도 저를 섭섭하게 한 일이 없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무슨 말입니까? 이 아도니야는 외적으로 보았을 때는 왕이 되기에 한 가지도 부족함이 없었다는 것이죠?

    

그러나 문제는 무엇입니까? 그렇다고 하더라도 왕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이죠?

    

왜요? 가장 중요한 하나님의 소명, 부르심이 없었다는 것이죠?

    

아무리 공부를 많이 했어도, 용모가 출중하고, 지혜가 많고, 경험이 풍부하며, 인격이 훌륭하다 하더라도, 그래서 인간적으로 보았을 때는 과연 이만한 사람이 없다 생각될 지라도, 무엇이 없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부르심이 없으면 결코 아무도 하나님 나라의 지도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이죠.

    

왜 그렇습니까? 만일 그렇게 되면, 사무엘서의 가장 중요한 문제였던,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인본주의 왕국이 세워지는 것이기 때문인 것이죠?

    

그러면 하나님 나라가 되는 것이 아니죠? 그것이 바로 교만이라고 했고, 그러면 하나님은 물리치신다고 했습니다. 겸손한 자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 나라는 아무리 외적인 면모가 뛰어나다 하더라도, 오직 하나님이 세우시는 자만이 지도자가 될 수 있는 줄 믿습니다.

    

그러므로 아도니야는 지금 하나님이 지난 번 다윗이 하나님을 왕위에서 끌어내리고 자신이 왕위를 차지하는 실수를 범한 인구조사와 같이,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교만을 행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아도니야를 좇는 사람들이 있었다고 했죠? 문제는 이런 사람을 좇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 더 큰 문제이죠?

    

누구입니까? 7절을 읽겠습니다.

    

아도니야가 스루야의 아들 요압과 제사장 아비아달과 모의하니, 저희가 좇아 도우나

    

다윗의 신복, 지금까지 다윗에게 충성을 다했던 요압이 왜 지금은 이렇게 다윗이 약속한 솔로몬이 아닌 아도니야를 택하고 있었을까요?

    

먼저 우리는 지난 번 압살롬을 도피처로부터 귀환시킨 일에서도 보았듯이, 요압은 서열을 중시하는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가장 큰형이 왕이 되어야 한다는 나름대로의 지론이 있었다는 것이죠?

    

그러나 또한 요압은 무엇을 알고 있습니까? 다윗이 어떻게 솔로몬의 어머니 밧세바를 취하였는지를 잘 알고 있죠?

그는 다윗에게서 직접 전달을 받아 밧세바의 남편 우리아를 전장 일선에 내보내 죽게 했던 장본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솔로몬과 밧세바, 그리고 그들을 취한 다윗에 대해서 아주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심지어는 이런 아들이 왕이 되는 것은 나라의 수치라고도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잘하고 있는 일입니까? 아니죠? 왜요? 그는 아무리 수치스러운 왕자라도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자 했어야 했죠?

    

그런데 우리도 이럴 경우가 때때로 있죠? 누구는 이런 출신이고, 저런 출신이라서 안 된다. 그런 사람을 세우면 우리의 망신이다.

    

그러나 성도 여러분, 우리의 유일한 기준은 무엇이 되어야 하는 것이겠습니까?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뜻이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우리가 또 다시 기억해야 할 것은, 오직 모든 일은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며, 하나님은 오직 택하신 자기 사람만을 사용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을 선택함에 있어서 능력을 볼 것이 아니라, 과연 누가 하나님이 택한 사람인가를 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교회가, 나라가, 사회가, 망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아도니야는 요압과 아비아달의 후원을 얻고 왕 즉위식을 거행하고 있습니다. 9절을 읽겠습니다.

    

아도니야가 에느로겔 근방 소헬렛 돌 곁에서 양과 소와 살진 송아지를 잡고 왕자 곧 자기의 모든 동생과 왕의 신복 유다 모든 사람을 다 청하였으나

    

에느로겔 근방 소헬렛 돌 곁이란, 힌놈의 골짜기와 기드론 골짜기가 합류하는 지점으로부터 약 2백미터 떨어진 예루살렘 근방의 샘터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예루살렘에서 가까운 곳에서 즉위식을 하고 있었을까요?

    

특히 샘터라고 했는데, 샘터는 소문이 빠른 곳이죠? 그러니까, 뭘 알 수 있습니까?

    

아도니야는 자신이 왕이 되는 일에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고, 그래서 예루살렘에서 가까운 곳에서 행함으로 예루살렘 사람들과 그 궁에 있는 자들, 특히 다윗에게도 빨리 알리기를 원했음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시기에, 그리고 다윗이 보기에 이 얼마나 오만방자한 행위인 것입니까?

    

그럼에도 아이러니한 것은, 그 즉위식에 아도니야의 모든 동생 왕자들과 왕의 신복 유다 사람들이 참여했다는 점이죠?

    

이스라엘 백성들이 왜들 이렇게 하나님을 뜻을 분별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자기들 맘대로 행동하고 있었을까요?

    

이것은 아주 이들의 습관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결국 이스라엘 역사를 보면, 이들은 다 어떻게 되었습니까?

    

사실 이 일로 인하여 이후 솔로몬은 자신을 대적하는 세력을 효과적으로 제압할 수 있었고, 그러므로 새로운 인재를 등용하여 나라의 기틀을 다시 바로 잡고 더 부강한 나라를 이룩할 수 있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일이 크게 잘못 되었던 것 같지만,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솔로몬에게 더 큰 유익을 가져다주었다는 사실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 닥치는 고난이 순간적으로는 우리를 고통스럽게 할지 몰라도, 결국에는 우리에게 더 큰 축복을 가져다 줄 줄 믿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잠잠히 기다리지 못하고 서둘러 자신의 뜻을 앞세우려던 아도니야와 그를 지지했던 세력들은 그후로 비참한 삶이 되죠

예레미야애가 3:26은 말씀했습니다. “사람이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고 잠잠히 기다림이 좋도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어느 때나 조급하게 행하려 할 것이 아니라, 잠잠히 하나님의 때를 기다릴 수 있어야 할 줄 믿습니다

    

오늘 하루의 삶, 여러분에게 어떤 일이 닥칠지 모르지만, 하나님을 기다리십시오.

    

하나님을 의지하는 여러분을 하나님은 결코 외면치 않으실 줄 믿습니다. 오늘 잠잠히 기다리다 하나님을 속히 만나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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