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가지 비유에 이은, 네 가지 이적, 지난 시간 바람을 잠잠케 하신 이적과 군대귀신을 쫓아내신 이적에 이어, 오늘은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신 기사와 혈루증을 앓는 여인에 대한 치유기사가 나오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이 주시는 교훈은 무엇인지 함께 살펴보며 은혜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다같이 22절을 읽겠습니다.
“회당장 중 하나인 야이로라 하는 이가 와서 예수를 보고 발 아래 엎드리어”
무엇을 나타내고 있습니까? 회당장이란 유대인 공동체의 회당 모임이나 예배를 주관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당시 회당에는 열 명 정도의 관리자들이 있었고, 그 중에 세 사람 정도가 회당장의 책임을 맡았었습니다.
그러나 이 회당장은 아무나 될 수 없었습니다. 이 회당장은 당시 회당관리가 아니라, 말씀을 강론하는 회당 예배를 주관하는 자였기 때문에, 매우 신앙적이고 덕망이 있는 사람 가운데서 선출되는 명예직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회당장은 동네에서 가장 존경을 받는 어른이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런 어른이 이제 갓 30을 넘은 젊은 예수의 발아래 엎드리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까?
첫째, 당시 예수님의 권세와 권위가 얼마나 대단했었는지를 알 수 있죠?
왜 굳이 이것을 드러내 기록하고 있었을까요? 지금 마가는 이런 사실을 알려줌으로 당시 로마에서 핍박을 받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힘을 주고자 했던 것이죠?
그러나 둘째는 실질적으로 또 무엇 때문에 이 회당장이 예수께 엎드렸겠습니까?
이 회당장이 뭔가 예수님께 아쉬운 소리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 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어떤 상황일까요? 23절을 읽겠습니다.
“많이 간구하여 가로되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을 얻어 살게 하소서 하거늘”
지금 회당장 야이로가 처한 상황은 어떤 상황입니까? 어린 딸이 죽게 된 상황이라는 것이죠?
여기 ‘많이 간구하여’ 라는 말은, ‘아주 전심으로, 온 마음으로, 진정으로, 매우,’ 이런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 회당장은 아주 애절한 마음으로 간절하고도 또 간절히 예수님께 딸을 살려달라고 간구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간구하는 말이,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을 얻어 살게 하소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어떻습니까? 먼저 ‘오셔서’ 라는 말은, 이미 예수님에 대한 무례가 아니라 철저한 신뢰를 나타내고 있죠?
역시 ‘손을 얹으사’ 라는 표현도 철저한 신뢰를 나타낸다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예수님은 병든 사람들을 치료하시기 위해서 자주 그들에게 손을 얹는 모습들을 보이셨습니다.
게다가 여기 “오셔서, 손을 얹으사”라는 두 단어는, 모두 일회적 행위를 나타내는 부정 과거형을 쓰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여러 번 오셔서, 한참 동안 혹은 여러 번 손을 얹어달라는 말이 아니라는 것이죠? “딱 한번만이라도 오셔서 딱 한번만이라도 손을 얹어주시면 나을 줄 믿습니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로 구원을 얻어 살게 하소서’라고 했습니다. 치유해 달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이제 어떻게 하실 것인가? 어떻게 하십니까? 24절을 보면, 예수님은 이에 그와 함께 가셨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죠? 뭡니까?
첫째는 큰 무리가 따라가며 예수님을 에워싸 밀었던 것이고, 둘째는 열 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는 한 여자가 나타난 것이죠?
첫째, 큰 무리가 예수님을 따랐던 것은, 사실 예수님의 이적을 구경하기 위한 호기심으로 따랐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예수님의 행보에 방해가 되었던 것이죠.
이런 점에서 결코 예수님의 사역의 기간 동안에는 진정 제자된 자들로써의 큰 무리는 없었다는 점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진짜 예수님이 원하는 예수님의 제자는 큰 무리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적은 무리였다는 것입니다. 인기를 원치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 지금은 목숨이 경각에 달린 회당장의 딸을 치료하러 가고 있는데, 열 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는 한 여자가 나타났다는 점입니다.
어떻습니까? 지금 빨리 가서 고쳐주지 않으면 회당장의 딸은 죽는 것이죠. 실제로 죽었습니다.
그렇다면, 생명을 구하는 것이 더 급하니까, 이 혈루증으로 앓는 여자는 그냥 내버려두고 가야 할까요? 과연 어떻게 하는 것이 현명할까요?
그런데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사실 예수님이 어떻게 하신 것은 없죠? 다만 그 여인이 무리 가운데 섞여 뒤로 와서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었고, 그 즉시로 혈루의 근원이 마름으로 병이 나았죠?
그런데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거기서 그냥 지나치지 않으시고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고 말씀하시며 가던 걸음을 멈추셨죠?
왜 그러셨을까요? 사실 아무리 예수님께로부터 능력이 나간 것을 아신다 하더라도, 지금은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는 것이 더 시급하기 때문에 빨리 가는 것이 더 중요하다 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러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예수님이 자신의 능력을 표시내시기 위해서 그러셨을까요?
결국 이 여자는 예수님에 의해 발견이 되어 떨며 와서 모든 사실을 고하죠? 그리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다같이 34절을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
여러분, 이 말씀 속에는 어떤 의도가 담겨 있을까요?
이 말씀 속에는 이 여인이 믿음으로 치유함을 받았음을 확증해 주고자 하는 의도가 있음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28절에서 이 여인은 왜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었다고 했습니까? 다같이 읽겠습니다. “이는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얻으리라 함일러라.”
예수님의 옷에 손만 대어도 구원을 얻는다. 다시 말해 여기서 구원은 앞에서와 같이 치유의 의미이죠?
그렇다면, 이 이야기를 이 여인이 예수님께 33절에서 말을 했을까요? 하지 않았을까요? 했죠?
그러므로 예수님은 뭐라 하셨습니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셨다”는 말씀을 하신 것이죠?
그렇다면, 이제 여기 예수님의 구원의 의미는 무엇이겠습니까? 여기서는 치유 뿐 아니라, 진정한 죄로 부터의 구원도 포함한다고 할 수 있겠죠?
이 여인은 질병으로부터의 치유라는 의미로 구원의 말을 썼지만, 그러나 예수님은 그의 믿음으로 인하여 그 여인을 질병의 치유뿐 아니라, 죄로부터의 구원도 함께 허락해 주셨음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왜요? 그 여인의 믿음은 보통 믿음이 아니라,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소문 그대로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위대한 믿음이었기 때문인 것이죠.
그러므로 여기 평안히 가라는 말씀 속에는,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심령의 만족과 편안한 생활의 상태”가 포함되고 있다고 해석을 합니다.
오늘 우리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도 죄로부터의 구원뿐만 아니라, 또한 모든 것으로부터도 우리를 능히 구원하실 수 있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회당장 야이로의 딸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어떻게 되었습니까?
35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아직 말씀하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 가로되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어찌하여 선생을 더 괴롭게 하나이까?”
회당장의 딸은 죽었다는 것이죠? 그러므로 이제는 더 이상 예수님을 bother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무슨 의미입니까? 이제는 끝이라는 것이죠? 예수님도 이제는 아무 것도 하실 수 있는 것이 없다는 의미이죠?
그렇다면, 이제는 정말 예수님은 아무 것도 하실 수 없으셨을까요? 아니 그보다도 예수님은 이 회당장의 딸의 죽음에 대해 일말의 책임도 없는 것일까요?
예수님은 과연 이렇게 예수님이 늦게 가면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 죽을 것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계셨던 것일까요?
아니죠? 사실 예수님은 다 알고 계셨죠? 그러나 그럼에도 혈루증을 앓던 여인을 만나 시간을 지체하신 까닭은, 반드시 그를 통해 교훈해주셔야 할 복음이 있었기 때문이었던 것이죠.
그리고 또한 그렇게 시간을 지체하셔도 회당장의 딸을 고치는 일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계셨기 때문에 지체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말은 이제 회당장의 딸이 죽었으니, 예수님은 아무 것도 하실 수 있는 것이 없다고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정말 예수님은 이 딸의 죽음에 대해서 아무 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을까요? 혹은 이들의 말의 뉴앙스대로 아무 것도 하지 않으셔도 되는 것일까요?
아니죠? 그러므로 36절에 이렇게 말씀하시죠? 다같이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그 하는 말을 곁에서 들으시고 회당장에게 이르시되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하시고”
그리고는 39절에 들어가셔서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고, 41절에 손을 잡고 ‘달리다굼’하시니 그 아이가 곧 일어나서 걸으니 사람들이 크게 놀랐다고 했습니다.
43절에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라는 말씀은, 이 소녀가 분명히 육신적으로 살아났음을 확인시켜주시고 있는 것이죠? 그렇다면, 오늘 이 말씀이 독자들에게 가르쳐주는 확실한 교훈은 무엇이겠습니까?
성도 여러분, 우리 주님께는 절대 절망이란 결코 없는 줄 믿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무리 세상적으로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결코 믿음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암병이라도, 아무리 큰 중병이라도, 실패라도, 어려운 관계라도, 우리 주님이 개입하시면 반드시 해결될 줄 믿습니다.
오늘도 이 믿음으로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하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