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바다를 잔잔케 하신 이적에 이어, 오늘은 네 가지 이적 가운데 두 번째인 가라사인의 지방에서 군대귀신을 축사하시는 이적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사건은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도 나오는데, 마가복음이 가장 많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이 7절, 누가복음이 14절을 기록하고 있는데, 마가복음은 20절이나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가는 그만큼 이 이적 기사를 통해 당시 핍박가운데 있던 로마의 독자들에게 전하고자 했던 특별한 목적이 있었음을 알 수 있죠? 그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악한 영의 세력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권세가 훨씬 더 강하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함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군대 귀신도 벌벌 떨던 하나님의 아들이다. 그러므로 그는 어떤 영적 전쟁에서도 승리하실 수 있는 권능자이시다. 따라서 너희가 당하는 영적 전쟁에서도 예수 그리스도가 함께 하면 반드시 승리할 것이다.” 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당하고 있던 모든 문제는 사실 다른 것이 아니라, 영적 전쟁이었거든요? 그러므로 마가는 이것을 더욱 강조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지금 이 이적이 일어나고 있는 장소는 다름아닌 이방인의 지역이었습니다. 이곳은 통일왕국시대나 분열왕국시대까지만 해도 이스라엘의 영토였습니다.
그러나 북왕국 이스라엘의 멸망과 함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잊혀진 땅이었습니다.
따라서 이곳은 영적으로 보면, 철저히 이방화가 되어 버린, 악한 영의 세력이 지배하고 있는 곳이 되었던 것이죠? 그래서 이곳에는 군대귀신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곳만 이방화된 곳일까요? 우상숭배가 있는 모든 곳은 악한 영의 세력이 지배하는 영적으로 이방화된 지역이었던 것이죠? 그래서 우상을 숭배하던 우리 민족도 귀신을 섬겼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예수님이 갈릴리 호수를 건너기 위해 타고 오신 배에서 나오자 마자, 곧 더러운 귀신들린 사람이 예수님께 나아오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렇다면, 그렇게 더러운 귀신이 들린 사람은 어떻게 생긴 사람인가? 3절로 5절에 나옵니다. 3절을 읽겠습니다.
"그 사람은 무덤 사이에 거처하는데, 이제는 아무나 쇠사슬로도 맬수 없게 되었으니"
왜 무덤 사이에 거하고 있었을까요? 여기 무덤은 동굴로 만든 무덤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사람들이 거하기에는 안성맞춤이었던 것이죠? 그래서 성경에서 볼 때, 이 무덤은 극빈자들이나 핍박받는 자들의 거처로도 이용이 되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무덤의 이미지는 죽음과 멸망입니다. 똑 귀신들과 같은 이미지이죠?
그러므로 구약적 배경에서 무덤에 거처하는 자들은 또한 이방인들을 상징하였습니다.
이사야의 표현에 따르면 이방인은 무덤 사이의 은밀한 처소에 거하여 돼지고기를 먹는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은 이들을 구원의 은혜에서 배제하지 않으시고 손을 벌려 적극적으로 찾아가시지만 이들은 여호와를 배척하고, 이에 대해 노를 품으신 하나님은 이들에 대해 잠잠하지 않으시고 반드시 보응하실 것을 다짐하신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러한 구약적 배경에서 본다면, 본문에 대한 이해가 어렵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호와의 종으로써 선민 이스라엘 땅에서 주로 활동하시던 예수께서는 이방 세계도 적극 찾아가신 것입니다.
그러나 귀신은 물론 거라사인조차 예수님을 배척하였던 것이고, 이후 이들의 운명에 대한 설명은 없지만, 이 설명없는 이야기 구조자체가 예수를 거부한 이방인들의 최후 운명이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한 강렬한 암시가 되는 것입니다.
또 3절 하반절로 4절을 보면, 두 번째, 이 귀신들린 사람은 힘이 너무나 쎄서, 쇠사슬이나 쇠고랑으로도 맬 수 없었다고 했습니다.
쇠사슬을 끊고 고랑을 깨뜨렸다고 했는데, 여기 이렇게 귀신의 광적인 힘이 강조되고 있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이것은 그렇다면, 과연 예수께서는 그 엄청난 힘을 지닌 귀신들린 자를 제어하실 수 있는가? 라는 의구심을 더욱 증폭시키기 위함이었던 것이겠죠?
그 다음 세 번째, 이 귀신들린 자는 5절에 "밤낮 무덤 사이에서나 산에서나 늘 소리 지르며 돌로 제 몸을 상하고 있었더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마가의 독특한 기록이라 할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의 병행구절에서는, 단지 '오래 옷을 입지 아니하며' '그 맨 것을 끊고 귀신에게 몰려 광야로 나갔더라'고 되어 있고, 마태복음에서는 더 간단하게 '심히 사나와'라는 표현으로 끝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마가는 지금 이 귀신들린 자에 대해서 아주 상세하게, '소리'라는 청각적 이미지와 돌로 몸을 긁고 있는 '광경'에 대한 시각적 이미지를 동시에 사용하여 귀신들린 사람이 발광하는 모습을 보다 입체감 있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역시 귀신들린 자를 더욱 실감나게 보여주기 위함인 것이죠? 왜요? 그렇게 함으로써 그 귀신들린 자를 물리치신 예수님의 능력을 더 부각시키고자 했던 것이죠?
그러므로 6절을 보면, "그가 멀리서 예수를 보고 달려와 절하며 큰 소리로 부르짖었다."고 했고, 7절을 보면, 그 내용은, “가로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원컨대 하나님 앞에 맹세하고 나를 괴롭게 마옵소서.” 라고 했다 했습니다.
그렇다면, 이 귀신들린 자가 왜 이렇게 부르짖고 있었느냐? 8절을 보면,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다같이 읽겠습니다.
“이는 예수께서 이미 저에게 이르시기를 더러운 귀신아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셨음이라.”
순서가 바뀐 것을 알 수 있죠? 귀신들린 자가 소리를 지른 것은, 바로 먼저 예수님께서 그를 알아차리시고 귀신을 쫓아내셨기 때문이라는 것이죠?
그러니까, 그 귀신들린 자는 이미 예수님의 주권 아래, 그의 권세 아래서 움직이고 있었다는 것이죠.
그러므로 그에게 네 이름이 무엇이냐 묻습니다. 뭐라 대답합니까?
‘내 이름은 군대니 우리가 많음이니이다.’ 도대체 얼마나 많을까요?
여기 군대라는 말로 쓰인 헬라어 단어는 6천명에 이르는 로마보병군단의 단위인 레기온이란 단어를 쓰고 있습니다. 얼마나 많습니까?
아이러니하게도 당시 로마군단이 한번도지지 않는 군대로 데가볼리에 정착해 있었고, 누구도 그들을 이길 군대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로마군단보다 더 강한 사단의 군단을 예수님은 그저 말씀 한마디로 컨트롤하시며 내쫓고 있으셨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사실입니까? 이것을 접하는 로마의 독자들에게는 아주 큰 위로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군대귀신은 그 지방에서 나가기를 원치 않고 있죠? 그래서 예수님께 간구하여, 산 곁에서 먹고 있던 큰 돼지 떼에게로 들어가게 해달라고 간구하였다고 했습니다. 이제는 사람이 아닌 돼지떼에게라도 있기를 원하고 있었다는 것이죠?
어떻게 되었습니까? 13절을 읽겠습니다. “허락하신대 더러운 귀신들이 나와서 돼지에게로 들어가니 거의 이천 마리 되는 떼가 바다를 향하여 비탈로 내리달아 바다에서 몰사하거늘”
돼지에게로 들어갔다는 말은, 인간의 범죄로 말미암은 타락의 결과가 인간 자신에게 뿐만 아니라, 전피조물에게까지 미쳤다는 증거인 것이죠?
그렇다면, 왜 바다로 달려가 몰사했을까요? 물론 이것은 귀신의 세력의 완전한 몰락과 패배를 말한다고 할 수 있지만, 그러나 사단은 그 지방을 떠나지 않기 위해 돼지떼에 들어가기를 원했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왜 돼지떼로 들어가 바다에 빠져 몰사했던 것일까요?
그렇게 해서라도 그 지방에 남아있고 싶었던 것이죠? 그러나 그것을 보고 돼지떼를 치던 자들이 난리가 났습니다.
첫째, 15절을 보면, 그들이 예수님께 이르러 그 귀신들렸던 자가 옷을 입고 정신이 온전하여 앉은 것을 보고 두려워했다고 했습니다.
둘째, 16절을 보면, 그러므로 이들이 사람들에게 가서 이 일들을 소상히 알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셋째, 17절에 결과적으로 예수님을 그 지경에서 떠나시기를 간구하였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18절에 예수님은 배에 오르셨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예수님은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을 모르시고 계셨을까요?
다 아시고 계셨죠? 그렇다면, 왜 귀신을 쫓아내셨고, 그것도 돼지떼 2천마리에 들어가 바다에 빠져 죽는 것을 허락하셨을까요?
우리는 여기서 몇 가지 생각해 볼 것이 있죠? 뭡니까?
첫째, 예수님은 분명 천하보다 한 생명을 더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알 수 있죠?
여기서는 2천 마리의 돼지떼보다 이 귀신들렸던 한 사람의 영혼을 더 사랑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이와 같이 여러분도 세상 어떤 것보다 더 소중하게 여기시는 줄 믿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사람의 영혼을 세상의 어떤 물질보다도 더 소중하게 여길 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둘째, 19절을 읽겠습니다.
“허락지 아니하시고 저에게 이르시되 집으로 돌아가 주께서 네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사 너를 불쌍히 여기신 것을 네 친속에게 고하라 하신대”
20절을 보면,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그가 가서 예수께서 자기에게 어떻게 큰 일 행하신 것을 데가볼리에 전파하니 모든 사람이 기이히 여기더라.”
그렇다면, 예수님은 왜 지금 이 일을 행하시고 계셨다는 것입니까?
이 한 사람을 통하여 데가볼리 지역을 복음화시키고자 하셨던 것이죠? 군대귀신들렸던 자가 고침을 받았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까?
그런데 그가 가서 그 일을 행하신 예수의 능력을 전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무엇이 복음입니까? 예수를 전하는 것이 곧 복음인 줄 믿습니다.
내가 경험한 예수, 그렇게 하나님께서 나로 하여금 그 능력의 하나님을 경험케 하시는 이유는, 나로 하여금 그를 전하게 하시기 위해서 경험케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도 이 사실을 기억하고 내가 경험한 주님을 전하기에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성도 여러분, 분명 우리 주님은 세상의 어떤 보이는 권세나 보이지 않는 권세보다도 능하셔서, 모든 것을 다 지배하고 계신 줄 믿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오늘 어떤 일을 당한다 하더라도, 우리 주님이 다 해결해 주실 것을 믿고, 그분께 믿음으로 맡기시기를 바랍니다. 분명 그가 그의 복음전파를 위해 그 문제를 해결해주시고 여러분을 사용하여 주실 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