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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병이어의 기적(막8: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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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시간은 에바다의 기적에 대해서 살펴보며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오늘은 칠병이어의 기적이 나오고 있습니다.


지난 번에 오병이어의 기적이 나왔죠? 그러면 또 여기 칠병이어의 기적은 무엇이겠습니까? 이것은 또 오병이어에 이은 또 다른 기적인 것입니다.


여기 본문을 보면, '그 즈음에'라고 했으니까, 지난 번 살펴본 에바다의 기적이 일어날 즈음에 일어난 사건임을 알 수 있고, 또 그것으로 인하여 그 다음에서 말씀하고 있듯이, 지난 번 오병이어의 기적 때와 마찬가지로 큰 무리가 모여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지난 번보다도 더 무리들도, 예수님도, 말씀을 듣고 전하는 일에 푹 빠져 있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다같이 2절을 읽겠습니다.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저희가 나와 함께 있은지 이미 사흘이매 먹을 것이 없도다."


지금 이 큰 무리가 예수님과 함께 얼마나 있었던 것입니까? 사흘이라고 했죠?


얼마나 예수님의 말씀이 꿀송이와 같이 달았으면 사흘이 되도록 먹을 것이 다 떨어졌는데도 이렇게 말씀을 듣고 있었겠습니까?


시편 19편을 보면, 여호와의 말씀은 "금 곧 많은 정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도다."고 했습니다.


역시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그 말씀 자체가 가장 능력이 있고, 달고, 신령한 매력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사흘 후 어느 시점이 되어 예수님께서 먹을 것이 없음을 깨달으신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때 예수님의 반응은 어떻습니까?


2절 상반절을 보면,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고 하셨죠?

 

 

역시 지난 번 오병이어의 기적 때와 같은 감정을 지금도 느끼시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불쌍히 여길 자기 백성을 불쌍히 여기시는 분이시라는 것이죠. 결코 지나치는 법이 없으시다는 것입니다.


어제도 홍 목사님의 자녀가 4년 만에 장애치료를 위한 약을 끊는 기도 응답을 체험했다고 했죠?


주일에도 말씀드렸지만, 우리가 서로를 잘 알지 못하고, 또 서로 서로가 좋지 않은 것은 별로 내 보이지 않아서 그렇지, 사실 알고 보면 사람들마다 남모르는 고민들이 다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우리가 그런 고민들 가운데서도 힘을 내고 용기를 잃지 않을 수 있는 것은, 바로 우리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기만 하신 하나님이 아니라, 반드시 그 백성을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입니다.


로마서 9:15을 보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하나님이 긍휼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실 사람이겠습니까?


바로 택함을 받은 저와 여러분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일설교에도 말씀드렸다시피, 어떤 고난 가운데서도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으로 인하여 분명히 부활할 것이다. 라는 부활의 믿음으로 인내하고 승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도여러분, 믿음에는 결코 실망함이 없는 줄 믿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을 구하는 바는 조금도 의심치 마시기 바랍니다. 의심하면 하나도 얻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믿음으로 구하기를 포기하지 않으심으로 반드시 구하는 바를 얻기만 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3절의 말씀은 예수님의 긍휼의 마음이 잘 드러나는 말씀입니다. "만일 내가 저희를 굶겨 집으로 보내면 길에서 기진하리라. 그 중에는 멀리서 온 사람도 있느니라."


어떤 긍휼의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까? 우리 주님은 결코 우리가 굶어서 기진하는 것을 보지 못하는 분이시라는 것이죠?


우리가 먹을 것이 없고, 쓸 돈이 없어서 걱정할 때, 우리는 아무도 이런 우리를 알아주지 못한다고 섭섭해 할 수 있지만,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아니시라는 것입니다. 다 알고 긍휼의 마음의 품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 중에는 멀리서 온 사람도 있느니라.'는 말씀과 같이 우리의 모든 속사정과 겉사정과 형편을 잘 알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오늘 칠병이어의 기적과 같이 놀라운 은혜로 해결해 주실 것이니, 결코 걱정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직 우리 주님께 날마다 맡겨버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가 해결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어떻게 해결해주시느냐? 어떻게 해결해 주시고 있습니까? 4절에서 제자들은 또 다시 지난 번 오병이어 때와 비슷한 질문을 하고 있습니다.


지난 번에도 마을에 가서 2백 데나리온의 떡을 사다가 나눠주오리까 라고 했는데, 이번에도 그때의 기적은 다 잊어버린 것 같은 질문을 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참 망각증세가 심하죠? 아무리 하나님의 살아계신 증거를 체험하면서도, 어려운 일이 닥칠 때면 또 똑같은 근심을 되풀이 합니다. 그렇죠? 이상하죠?


그렇다면, 예수님은 어떻게 하실 것인가? 어떻게 하십니까? 역시 예수님은 이번에도 변함없이 지난 번과 똑같은 방법으로 그 문제를 해결해 주시고 계시죠?


5절을 보면, 또 "너희에게 떡 몇 개나 있느냐"고 물으시는데, 다같이 6절을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무리를 명하사 땅에 앉게 하시고 떡 일곱 개를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그 앞에 놓게 하시니, 제자들이 무리 앞에 놓더라."


어떻게 하십니까? 또 그들에게 있는 떡, 이번에는 일곱 개를 가지고 축사하시고 나눠주게 하시죠?


그렇다면, 예수님은 왜 이런 방법을 택하셨을까요?


지난 번 40일 금식 기도 후에 사단이 나타나서 돌덩이로 떡이 되게 하실 수 있다고 했는데, 만일 돌덩이로 떡을 만들어 먹게 하셨으면 더 놀라운 역사가 되었을 수 있으셨을 텐데, 왜 그리하지 않으시고, 이번에도 또 이들이 가진 떡 일곱 개를 가지고 기적을 일으키셨을까요?


이런 공통점을 통해 우리가 깨달을 수 있는 하나님의 기적의 비결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우리가 가진 것을 통해서 역사하신다는 것이겠죠?


우리에게 없는 것을 통해서 역사하시는 것이 아니라, 사르밧 과부의 기적 속에서도 그들이 가진 마지막 밀가루 한줌 기름 한방울의 헌신을 통해 역사를 일으키신 것처럼, 하나님은 언제나 먼저 우리의 가진 적은 전부를 기적의 제물로 요구하시고 계심을 알 수 있죠?


그러면 그 위에 하나님의 기적의 산물을 더해 주시는 놀라운 역사가 일으켜 주신다는 것이죠?


마치 한 알의 겨자씨가 큰 나무가 되는 놀라운 역사를 일으키는 하나님 나라의 원리와도 같이 말이죠?


그래서 우리 교회도 보면, 우리의 가진 적은 전부를 건축헌금으로 바칠 때, 하나님께서 더욱 더 많은 것으로 더해 주시는 놀라운 기적을 체험하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저는 담임목사로써 할 수 있는 데로 적지만 저의 전부를 바치기를 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또 하나님이 반드시 그 위에 더 놀라운 것으로 채워주시는 역사를 체험하더라는 것입니다.


지난 번 청소년 비전 헌금 때에도 그랬죠? 이번 건축헌금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교회를 축복해 주시면 어떻게 됩니까? 저도 축복을 받는 것이죠. 그래서 저는 하나님께 전부 바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요즘에는 더 축복해 주시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번 집회에 주신 사례비를, 거기 가는데 사용한 다른 비용을 빼고는 전부 하나님께 부활절 감사예물로 바쳤습니다. 그러나 또 채워주실 것을 믿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렇게 헌신하면 어떤 역사가 일어납니까? 4천명이 배불리 먹는 역사가 일어난다는 것이죠. 얼마나 놀랍습니까? 바로 하나님 나라는 이런 역사를 통해서 더욱 커져 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이제 예수님은 그들이 배불리 먹고 난 후에, 강압적인 의미를 지닌 표현으로 '흩어 보내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빨리 가거라." "빨리 가거라." 그들의 가정으로, 일터로 강압적으로 돌려 보내셨다는 것이죠.


우리 주님은 우리에게 풍성함으로 채워주셔서 우리의 가정이 회복되고, 일터가 회복되기를 원하심을 알 수 있는 것이죠. 언제나 붙잡아 두기만을 원하시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제자들의 경우는 달랐죠.


그러나 사도의 사명을 가지지 않은 일반 성도들에게는 달랐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사명은 역시 가정과 일터에 있었기에 우리 주님은 그들의 사명의 터로 돌려보내셨다는 것입니다.


지난 주 어느 분을 만났는데, 그런 말씀을 하시더라구요. 교회가 너무 성경공부나 훈련에만 붙잡아두면, 가정이나 다른 사명은 어떻게 하나? 신앙생활이 좀 균형적이도록 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지난주일 그 말씀이 제 마음에 와 닿아, 제자훈련을 쉬고, 일 년에 세 번 미국에서 가장 가족들이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인 부활절, 추수감사절, 성탄절 가운데 하나이기에, 가족과 함께 하시라고 일찍 돌려보내드렸습니다.


저는 처음부터 그랬지만, 우리의 신앙생활은 정말 균형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너무 한쪽에만 치우쳐서는 안 된다는 생각합니다. 이것이 사명을 제대로 깨닫는 건강한 신앙생활인 것이죠?


말씀을 맺습니다. 이사야 55장 2절에서는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나를 청종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마음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고 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삶이 오직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분별하여 청종하심으로 반드시 좋은 것, 기름진 것으로 채워지는 복된 삶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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