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벧엘의 선지자로부터 나귀를 얻어타고 떠난 하나님의 사람이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대가로 하나님의 형벌을 받는 내용까지 살펴보았죠?
오늘은 그 이후에 일어난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벧엘의 늙은 선지자는 어떻게 될 것인가?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지, 25절을 읽겠습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길에 버린 시체와 그 시체 곁에 선 사자를 보고 그 늙은 선지자가 사는 성읍에 와서 말한지라.”
지난 시간 사자가 잘 나타나지 않는 곳에 사자가 나타나 사람을 죽이고도 뜯어먹지 않고 그 시체 곁에 서 있는 일은 충격적인 특이한 광경이라 했죠?
그러므로 그곳을 지나가던 사람들은 동네로 들어와 그 사람이 사자에 물려 죽은 것에 대해서만 말한 것이 아니라, 그곳에서 일어났던 모든 광경에 대해 구체적으로 이야기하며, 도대체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 의아해 하고 있었던 것이죠.
그렇다면, 누가 이 광경에 대한 명쾌한 해석을 내려줄 것인가? 그러나 거짓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 하나님의 사람을 회유함으로 그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겠끔했던 벧엘의 늙은 선지자는 알고 있었겠죠?
그러므로 26절을 보면, 이 이야기를 듣게 된 늙은 선지자가 말하고 있습니다. 다같이 읽겠습니다.
“그 사람을 길에서 데리고 돌아간 선지자가 듣고 말하되 이는 여호와의 말씀을 어긴 하나님의 사람이로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하신 말씀과 같이 여호와께서 그를 사자에게 붙이시매 사자가 그를 찢어 죽였도다 하고”
역시 그는 정확히 그 사람이 누구인지, 왜 그렇게 죽을 수 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원인을 알고 있죠? 왜 그렇게 죽을 수 밖에 없었다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음으로 하나님이 그를 사자에게 붙이셨기 때문이라는 것이죠?
여기서 강조되고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그대로 성취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같은 말씀의 성취는 거짓 선지자였던 벧엘 선지자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람의 죽음을 하나님께서 이루신 사건으로 받아들이게 하고 있었으며 동시에 벧엘에서 하나님의 사람이 전달한 신탁을 진실한 것으로 인정하는 것이었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결국 32절을 보면, 심지어 거짓말을 했던 이 늙은 거짓 선지자도 이 사건을 통하여 하나님의 행하심을 인정하고 그 예언한 모든 것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선언하게 되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은 시체를 확인하지 못했죠? 그러므로 27절을 보면, 그 아들들에게 나귀에 안장을 지우라 하고, 28절에 가서 보고 있습니다. 어떻게 되고 있습니까?
역시 “저가 가서 본즉, 그 시체가 길에 버린 바 되었고 나귀와 사자는 그 시체 곁에 섰는데, 사자가 시체를 먹지도 아니하였고 나귀를 찢지도 아니하였더라.”
자, 28절을 읽으면서 뭔가 불연 듯 우리 마음에 느껴지는 지루함이 있지 않습니까? 왜 그렇습니까?
지금 이 내용이 똑같이 반복되고 있다는 것이죠? 몇 번째 입니까? 세 번째이죠?
그렇다면, 성경저자는 왜 이 말씀을 이렇게 반복하고 있었던 것일까요?
이 말씀이 전하는 메시지가 아주 중요하니까, 이렇게 반복하고 있었던 것이죠?
이 사건이 전하는 메시지가 무엇인지는 지난 시간도 살펴보았고, 또 좀 전에도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또 반복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여러분 구약이나 신약을 통털어 성경에서 가장 많이 강조되고 있는 메시지가 무엇인 것 같습니까?
하나님 말씀과 명령에 대한 순종이죠? ‘순종하라’ ‘지켜라’ ‘행하라’ ‘따르라’ 여러 가지 표현이 나옵니다.
예수님도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했고(마7:21), 야고보서에서도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 했습니다.(약2:17, 26)
역시 지금 여기서도 말씀에 대한 순종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몇 번의 강조를 통해서 나타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여로보암과 이스라엘 사람들은 어찌해야 할 것인가? 그것은 뻔한 것이죠? 그러나 문제는 무엇입니까?
이렇게 충격적이고도 명확한 메시지가 있는 사건을 보고도 회개하여 돌이키지 않았다는 것이죠?
율법에 따르면 피살된 시체가 매장되지 못하고 버려져 있을 경우 그곳에서 제일 가까운 성읍에 있는 사람들이 와서 그의 가족들을 대신해서 그의 죽음과 흘려진 피에 대한 정결의식과 장례를 치러주게끔 되어 있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을 경우 율법은 그 죽음으로 말미암아 그 성읍이 부정해지고 그 죽음에 대한 죄책을 그 성읍에서 찾을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이런 사건의 소식은 하나님의 심판과 저주의 소식으로 인식할 필요가 있었고, 따라서 벧엘 사람들은 두려운 마음으로, 마땅히 율법대로 그에 대한 정결의식을 행하고 그 시체를 매장해 주어야 했고, 동시에 그들 자신들을 죄로부터 정결케 하고 그 시체를 묻는 것처럼 죄를 포기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것이죠? 이들은 하나님의 사람의 시체를 목도하고 또 그 일에 대한 소문을 듣고도 그 피에 대한 정결의식이나 장례를 치르려 하지 않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그러니까, 깨닫지 못하는 자는 멸망하는 짐승과 같은 것이죠?
그렇다면, 이제 이 시신은 어떻게 될 것인가? 29절을 보면, 늙은 선지자가 이 일을 하고 있죠?
“늙은 선지자가 하나님의 사람의 시체를 떠들어 나귀에 실어 가지고 돌아와 자기 성읍으로 들어가서 슬피 울며 장사하되”
떠들다는 말은 들어올리다는 말이죠? 율법에 의하면 사람의 시체를 만진 자는 칠일 동안 부정한 자로 여겨졌습니다.
따라서 시체를 만진 자는 스스로 정결케 하는 규례를 따라야 하는 번잡함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늙은 선지자는 이를 개의치 않고 시신을 거두어 수습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것은 자신의 거짓말까지 동원한 적극적인 행동이 하나님의 사람을 죽음으로 몰고 갔다는 자책감 때문이겠죠?
거짓말까지 동원하며 어떤 목적을 이루기 위해 적극적인 노력을 할 필요가 있을까? 어떻습니까? 성도의 삶은 결과도 좋아야 하지만, 과정도 좋아야 하는 것이죠?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지나치지 말아야 할 것은, 벧엘의 늙은 선지자의 이런 행동은 자신의 과거를 뉘우치고 올바른 자리로 돌아와 선지자로써의 사명을 감당하고 있는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결국 그가 하나님의 사람이 전한 메시지를 받아들이고 신뢰하고 있게 되는 것을 볼 수 있죠?
여기 ‘돌아와’라는 표현의 의미가 그가 벧엘로 돌아왔다는 표현도 되겠지만, 또한 말씀을 불신하던 자리에서 신뢰하는 자리로 돌아왔다는 의미도 함축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성읍으로 들어가서 슬피 울며 장사했다고 했습니다.
사회적으로 영향력이 있던 이 늙은 선지자가 하나님의 사람을 장사할 때는 많은 사람들이 왔을 것이고, 따라서 이런 그의 장사하는 모습은 그들에게 어떤 분명한 교훈을 각인시켜 주었을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30절을 보면, 그 시체를 자기의 묘실에 두었다고 했는데, 첫째는 지금 이 하나님의 경고를 전했던 하나님의 사람의 시체가 벧엘에 묻혔다는 것이죠?
벧엘의 선지자는 하나님의 사람의 묘를 벧엘에 둠으로써 그 성읍에 대한 지속적인 경고와 교훈의 표시를 남게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둘째 히브리인의 관습상 나그네의 시신을 자기의 묘실에 두는 것은 죽은 자에 대한 최대의 경의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이 하나님의 사람은 자신의 속임수로 인하여 죽었다는 죄책의 감정이 더 이 사람의 죽음을 예우하게 하였음을 알 수 있죠?
30절 하반절에는 그를 위하여 슬피울며 ‘오호라 나의 형제여’라고 했다고 했고, 31절에는 자기가 죽을 때 자신의 뼈를 하나님의 사람의 뼈 곁에 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최대한의 경의를 표시하고 있다고 할 수 있죠? 그러나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이 사람에 대한 존경의 모습이 바로 이 사람이 전한 말씀에 대한 존중으로 연결된다는 사실인 것이죠?
그러므로 사실 이 장례식은 통곡하며 회개하는 장이 되었어야 했던 것이죠.
이들은 이 장례식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람이 행한 심판에 대한 신탁과 그가 말씀을 어김으로 인해 죽게 된 사실을 새롭게 깨달으며, 이제 자신들도 말씀을 지키지 않으면 멸망할 수 밖에 없음을 각인하며 눈물로 회개했어야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33절을 읽겠습니다.
“여로보암이 이 일 후에도 그 악한 길에서 떠나 돌이키지 아니하고 다시 보통 백성으로 산당의 제사장을 삼되 누구든지 자원하면 그 사람으로 산당의 제사장을 삼았으므로, 이 일이 여로보암 집에 죄가 되어 그 집이 지면에서 끊어져 멸망케 되니라.”
결국 어떻게 하고 있고, 어떻게 되고 있습니까? 여전히 악한 길에서 돌이키지 않고 범죄하고 있고, 그러므로 멸망케 되는 것을 볼 수 있죠?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우리가 범죄할 때면 계속해서 우리에게 회개하라는 메시지를 여러 경로와 사건과 모습들을 통해서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무엇입니까? 그럼에도 다 깨닫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죠?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늘 우리는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찾고 듣기에 노력해야 하는 것이고, 그래서 늘 적은 죄라도 찾아 회개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죠?
마태복음 11장 7절은, “가로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애곡하여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어떤 사람들이라고 생각합니까? 여러분의 삶이 늘 주의 음성을 듣고 돌이키는 삶을 살아가시는 소망있는 삶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