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시간 하나님의 사람의 예언과 죽음, 그리고 벧엘의 늙은 선지자의 통회와 예언의 재선포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상숭배를 하며 평민들을 제사장으로 세우는 모습을 보였던 여로보암, 그렇다면, 그는 어떻게 될 것인가?
오늘은 그의 가문이 멸망할 것을 예언하는 내용과 그가 죽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지난 시간은 심판의 예언의 중복된 강화와 함께 그럼에도 여로보암이 범죄를 그치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었는데, 오늘은 어떻게 시작하는지 1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그 때에 여로보암의 아들 아비야가 병든지라.”
역시 지난 시간의 내용과 오늘 본문의 내용이 연결이 되고 있죠? 그래서 지난 시간 심판의 예언과 그것을 강화하는 사건을 무시했던 여로보암은 결국 아들이 병들고 있음을 볼 수 있는 것이죠?
부모의 죄가 자녀를 병들게 할 수 있는가? 글쎄요, 그럴 수도 있겠죠?
특히 본문에서는 그랬습니다. 그래서 이 아비야를 보면, 여로보암의 가문에서 유일하게 선한 뜻을 품었던 자녀였음에도 불구하고 회개치 아니한 아버지 여로보암의 죄로 인하여 질병에 들게 되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부모의 삶이 자녀들에게 다윗과 같이 축복을 가져다 줄 수도 있고, 혹은 오늘 여로보암과 같이 저주를 가져다 줄 수도 있다는 사실이죠?
따라서 또한 오늘 이처럼 사랑하는 자녀를 향한 하나님의 징벌은 여전히 앞으로 있게 될 엄청난 심판에 대한 엄중한 경고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여러 가지 방편을 통하여 심판의 메시지를 전달했음에도 여로보암이 듣지 않자, 이제는 자녀를 징벌하시는 것으로 메시지를 전달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범죄하여 큰 어려움을 당하는 것은 이미 그만큼 적은 일들로 인한 경고의 메시지들이 많이 주어진 이후라는 것을 알 수 있죠?
그래서 출애굽할 때도 보면, 열 가지 재앙이 어떻게 내려지고 있습니까? 점점 더 큰 것으로 강화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죠?
이와 같이 하나님은 처음에는 말씀으로, 그 다음에는 이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손이 마르거나 제단이 갈라지고 재가 쏟아지는 기이한 현상으로, 그 다음은 불순종한 하나님의 사람의 죽음과 같은 일로, 그 다음은 그 일의 진실을 깨달은 늙은 선지자의 통곡과 선포와 같은 일로, 그리고 그 다음은 자식의 죽음과 같은 일로 점점 더 강화되며, 사실은 이보다도 훨씬 더 큰 멸망을 미연에 방지하게 하기 위하여 말씀하시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사실을 깨닫는다면, 아직 내가 완전히 망하지 않았을 때에 주시는 경고의 채찍은 오히려 은혜임을 깨달을 수 있어야 하는 것이죠?
결국 그는 하나님 심판의 예언대로 아비야의 죽음까지 목도하게 됨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여로보암은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2절을 읽겠습니다.
“여로보암이 그 아내에게 이르되 청컨대 일어나 변장하여 사람으로 그대가 여로보암의 아내임을 알지 못하게 하고 실로로 가라 거기 선지자 아히야가 있나니, 저는 이전에 내가 이 백성의 왕이 될 것을 내게 고한 사람이라.”
왜 그의 아내에게 선지자 아히야를 방문하라고 했을까요? 그것도 변장을 하고 말입니다. 왜요?
사실 이것은 이제야 여로보암이 참 하나님의 선지자를 찾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죠?
특히 아히야를 찾은 이유는 바로 그의 예언이 성취됐던 경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내를 보내는 일은 잘하는 일일까요? 여러분 내가 지은 죄에 대한 회개는 바로 내 자신이 해야 하는 것이죠?
그러나 그는 과거 아히야가 권고한 순종의 길을 가지 않았기에 아들의 문제를 놓고 자신이 직접 찾아가는 일이 부담스러웠을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아주 심각한 문제인데, 무엇일 것 같습니까?
여로보암은 앞으로도 아히야가 말했던 순종의 길을 결코 갈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겠죠?
특히 아내를 변장하여 가도록 했다는 것 역시도, 하나님의 사람을 찾는 자신의 모습을 사람들의 눈으로부터 감추고 속이는 모습이었던 것이죠?
그가 그렇게 했던 이유 가운데 또 하나는 그렇게 변장해서 하나님의 사람을 찾은 것은 자신이 왕권을 지키기 위해 창안한 종교정책의 권위를 실추시키지 않으려는 의도가 있었기 때문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진정 죄로부터 돌이켜서 회개하려는 모습이 아니었다는 것이죠?
여전히 자신이 가지고 있는 범죄의 현실을 유지하면서, 잠시 자신에게 당한 환난을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극복해 보고자 했던 꼼수가 있었던 것이죠?
여기 3절에서 떡 열과 과자와 꿀 한병은 가난한 농가의 여인들이 선지자에게 드리던 정도의 분량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사람들과 선지자를 완벽하게 속이려는 꼼수가 있었다는 것이죠? 그러나 잘하는 것입니까?
여러분, 우리는 신앙생활에 꼼수를 부려서는 아니될 줄 믿습니다. 잘못했으면 다 하나님 앞과 사람 앞에서 완전히 과감히 포기하고 내려놓고 완전히 죄에서 돌이켜서 회개하고 새출발을 하는 것입니다.
뭘 그렇게 다른 방법이 있는가를 찾습니까? 자신의 지은 죄는 회개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 나와 다른 방법을 찾을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도 하나님 앞에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아니라는 것이죠.
그렇다면, 이제 여로보암의 아내는 어떤 결과를 가져올까요? 4절을 보면, 여로보암의 아내가 아히야의 집에 도착을 했는데, 선지자 아히야가 눈이 어두워 보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5절을 보면, 그럼에도 여호와의 말씀이 임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아히야에게 이르시되 여로보암의 아내가 그 아들이 병듦을 인하여 네게 물으러 오나니, 너는 이리이리 대답하라. 저가 들어올 때에 다른 사람인 체험함이니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뭐라고 대답하라 하셨을까요? 6절을 읽겠습니다.
“저가 문으로 들어올 때에 아히야가 그 발소리를 듣고 말하되 여로보암의 처여 들어오라. 네가 어찌하여 다른 사람인체 하느뇨? 내 명령을 받아 흉한 일로 네게 고하리니”
뭐라고 합니까? 제일 처음 아히야가 모르게 변장하고 온 여로보암의 아내에게 ‘여로보암의 처여’라고 말하죠? 어떻겠습니까? 깜짝 놀랐겠죠?
여러분, 주의 종을 속이는 자가 되어서는 아니될 줄 믿습니다. 절대로 안됩니다. 왜냐? 하나님이 깨닫게 하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놀랍죠? 이런 일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며 ‘네가 어찌하여 다른 사람인체 하느뇨?’라고 한 것은, 분명 여로보암과 그의 아내가 잘못하고 있음을 지적해 주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죄를 회개하지 않고 묻어두려 할 때는 또 다른 죄를 낳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는 것이죠?
그러므로 좋지 않은 흉한 일이 전해지게 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7절이하에서는 하나님께서 먼저 당신이 여로보암에게 은혜를 베푸셨지만, 그에 따른 여로보암의 반응은 반역이었다는 사실을 지적하시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서도 여로보암의 악행을 책망하는 7절로 9절까지는 여로보암을 2인칭으로, 여로보암의 가문의 완전한 멸망을 예고하는 10절로 11절에서는 여로보암을 3인칭으로 지칭하고 있습니다. 무엇을 의미할까요?
2인칭이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대화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이지만, 3인칭이 되었다는 것은 대화의 대상에서 벗어나 제 삼자가 되고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죠?
이제는 더 이상 하나님과의 관계가 나와 너의 관계가 아닌, 나와 그 라는 머나먼 관계, 상관없는 관계, ‘남’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7절로 9절에서는 너, 네, 라고 쓰시던 인칭대명사가, 10절에서는 여로보암의 집이라는 3인칭, 그러나 구체적인 3인칭이 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결국 11절에 아주 구체적인 징벌이 예고 되고 있죠? 다같이 읽겠습니다.
“여로보암에게 속한 자가 성에서 죽은즉 개가 먹고 들에서 죽은즉 공중의 새가 먹으리니 이는 여호와가 말하였음이니라 하셨나니”
무엇이 강조되고 있습니까? 죽는다는 것이죠? 그런데 그것도 어떻게 된다는 것입니까?
죽음 이후에 무덤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방치 되어 모든 짐승의 밥이 될 것이라는 것이죠?
무엇과 비슷합니까? 13장에서 말씀을 거역했던 하나님의 사람이 죽었던 상황과 비슷하죠?
그러니까, 하나님의 사람의 죽음은 정확히 미래 북이스라엘의 죽음을 예언해 주고 있었다는 것이죠?
그렇다면, 어떻게 될까요? 정말 이렇게 될까요? 12절을 보면, 이 말씀이 확실한 하나님의 예언이라는 증거로 ‘네 발이 성에 들어갈 때에 그 아이가 죽을지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또 무엇을 말합니까? 13절을 보면, 이상하게도 그 심판의 결과로 죽은 아이가, 그 아이만 어떻게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까?
‘그 아이만 묘실에 들어가리라’고 말하죠? 왜요? 다같이 13절 하반절을 읽겠습니다.
“이는 여로보암의 집 가운데서 저가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향하여 선한 뜻을 품었음이니라.”
어떻습니까? 11절에서 앞으로 멸망받을 여로보암에게 속한 자와 다르게 대조적으로 이 아이만 묘실에 들어가는 이유는, 오직 그만 하나님을 향하여 선한 뜻을 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죠?
역시 이 말씀도 실례가 포함된 경고성 메시지임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아이는 저주받은 아이일까요? 축복받은 아이일까요? 축복받은 아이이죠?
뭘 알 수 있습니까? 질병과 사망이 꼭 저주요, 저주의 끝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죠?
그래서 성도는 아무리 죽을 병에 걸렸어도, 그래서 심지어 죽는다 하더라도, 결코 그것이 끝이 아니다! 결과가 아니다!라는 사실을 반드시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은 개인적이라는 것이죠? 아무리 범죄하는 나라와 집단 속에서도 내가 하나님 앞에서 잘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오직 이 아이와 같은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향해 선한 뜻을 품으시고 실현하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