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온유한 자가 받는 복에 대해서 살펴보았죠? 온유한 자는 어떤 사람이라고 했습니까?
그는 한마디로 예수님과 같이 속으로는 그렇지 않으면서도, 겉으로는 억눌리고 속임을 당하고 착취를 당하나 이에 대해 무방비인 무력한 사람이라고 했죠?
그러면 하나님께서 오히려 그런 미련하고 무능력한 것만 같은 사람에게 땅을 기업으로 주신다고 했습니다.
물론 예수님의 모습 가운데는 저 위선자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독사의 새끼들’이라고 하셨다든지, 아니면 분노로 채찍을 들어 성전을 청소하셨던 모습이 있죠? 또 제자들을 꾸짖으신 적도 있습니다.
무엇을 가르쳐 줍니까? 오늘날 우리도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하여 정말 불의한 일에 대해서는 의분을 품을 수도 있다는 것이죠.
그러나 결코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한번도 화를 내거나 분노를 폭발해 버리신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히려 자신을 배반할 가룟 유다 앞에서도 담담하셨고, 또한 욕하고 침뱉고 따귀를 때리고 채찍질을 하는 대제사장이나 그들의 무리, 유대병정, 로마병정 앞에서는 그저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잠잠한 어린 양과 같았다는 것입니다.
의분이라는 것은요? 절대로 자기를 위한 분노가 아닌 것입니다. 오직 우리의 분노는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한 것이어야 하는 줄 믿습니다.
그러므로 오늘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받는 복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같이 6절을 다시 읽겠습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영어성경 NIV를 보면, “Blessed are those who hunger and thirst for righteousness, for they will be filled”라고 번역되었습니다.
한국어 성경하고 의미가 똑같죠? 정말 의에 대하여 배가 고프고, 목말라 하는 자가 복을 받아 그 고픈 배가 채워지고, 목마른 목이 시원케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 의는 무엇일까요? 첫째는 윤리적인 의미의 의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윤리적인 의에 대해서도 배고프고 목말라 할 수 있어야 할 줄 믿습니다.
그래서 20절을 보면,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했습니다.
마태복음 7장에서도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오직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간다”고 하셨죠?
먼저 주님은 우리에게 우리가 세상 사람들보다도 더 윤리적이고 도덕적으로 올바르게 살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사람들처럼 함부로 말하고, 함부로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보다도 더 예의범절을 잘지키며 범죄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의미에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이 세상에서 윤리가 땅에 떨어지고 불의가 득세하는 것에 대해 분노하며 의를 갈망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무엇보다도 우리의 가정과 일터와 교회 가운데서 이런 의를 이루도록 해야 할 줄 믿습니다.
성도들이 먼저 정직하지 못하고, 그러므로 사업에도 정직하지 못하며, 교회사역에도 정직하지 못하다면 하나님은 결코 그를 축복해 주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바로 이런 일들에 더 적극적으로 주리고 목마른 자가 되어 세사의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축복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두 번째, 우리는 여기서 말하는 의가 또한 어떤 의임을 짐작할 수 있습니까?
죄인을 심판하시고 멸하시며 의인을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의 기준인 공의를 말하는 것이죠?
이처럼 의를 심판과 구원의 관점에서 보는 것은 바울서신에도 자주 등장합니다.
그리고 또 이런 입장을 취하면 본절에 등장하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무엇보다도 ‘구원에 대한 불타는 열망을 가진 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런 경우는 사회적인 의를 말하는 것이겠습니까? 개인적인 의를 말하는 것이겠습니까?
그리고 다른 사람의 의를 말하는 것이겠습니까? 아니면 자신의 의를 말하는 것이겠습니까? 개인적인 자신의 의를 말하는 것임을 알 수 있죠?
그러나 앞에 언급한 윤리적인 의와 지금 이 개인적인 의를 종합해 보면, 여기서 말하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라는 말은, 이 세상의 불의한 현상에 깊이 탄식하며 이 세상을 정의롭게 만들기 위하여 노력할 뿐 아니라, 자신의 죄성에 대해서도 깊이 회개하며 오직 하나님의 의만을 사모함으로 하나님의 구원을 바라는 자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과적으로 이런 사람은 어떤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까?
세상에서나 내 안에서 의를 이루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항상 바라며 갈망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죠?
그러므로 이런 사람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 자요,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기다리는 자요, 그래서 기도하는 자요, 바르게 살아가려고 몸부림치는 자라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축복을 주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하반절을 보면,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라고 했죠? 여기 배부를 것이라는 말은, 단순히 허기나 갈증을 면하는 정도가 아닌, 포식하는 것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위해 하나님을 간절히 찾으며 말씀대로 살아가며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려고 노력한다면, 하나님은 그런 우리 삶을 넘치도록 채워주신다는 것이죠?
그렇다면, 무엇으로 포식하게 하실까요? 그것은 역시 그 의를 이루심으로 포식하게 하신다는 것이겠죠?
그 사회가 의롭게 되기를 바라며, 그 교회가 의롭게 되기를 바라며, 또한 내가 의롭게 되기를 바라며 몸부림치며 노력하고 기도하면, 하나님은 반드시 그렇게 될 수 있도록 축복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결국 의를 위해 애쓰는 것은 반드시 다 응답을 받되, 넘치도록 받게 된다는 사실을 말씀하고 있음을 알 수 있죠?
그러므로 이것은 궁극적으로는 신령한 것의 만족함으로 채워주신다는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온유한 자가 되십시오. 그러면 땅을 기업으로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이 신령한 축복을 넘치도록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어느 축복이 어느 축복보다 더 우선이 되어야 한다고 하여, 무시될 수는 없는 것이죠?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여러분의 영혼도 축복해 주시기를 원하실 뿐만 아니라, 또한 여러분의 기업도 축복해 주시기를 원하시고 계시는 줄 믿습니다.
그래서 사도요한은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가 잘되고 강건하기를 간구한 것이죠?
그러나 여러분의 주변환경이 신령한 복을 누리는 환경으로 변화되기를 원한다면, 늘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실제로 보면, 정말 은혜를 사모하며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예배에도 더 은혜를 받는 것을 볼 수 있죠?
2011년까지 여러분은 이점에 있어서 어떻게 살아오셨습니까? 2012년에도 더욱 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되어서, 늘 풍성히 채우시는 하나님의 축복 가운데 여러분의 삶이 항상 근심을 벗어나 기쁨으로 모든 축복을 누리는 복된 삶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