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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새] 긍휼히 여기는 자(마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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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지난 시간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받는 복에 대해 살펴보며 은혜를 나누었죠?

 

성도는 근본적으로 온유한 자가 되어야 하지만, 그러나 의에 대하여는 의분을 품을 수 있을 정도로 간절히 사모함이 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런 두 대조적인 성품의 완전한 조화를 예수님의 모습에서 예를 들어 보았죠?

 

예수님은 온유한 자로써 개인적인 일, 자존심 상하는 일에는 오히려 온유함으로 대처하셨지만, 그러나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한 일에는(예를 들면, 성전 청결사건이라든지, 하나님 나라 전파를 방해하는 바리새인들의 가식적인 모습에 대해서는) 분노하심을 표출하셨다고 했죠?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도 나의 자존심을 위하여서는 오히려 온유하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 분노할 수 있는 자가 되어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나 그 분노가 결코 파괴적으로 표출되어서는 안 된다고 했죠? 오히려 하나님께 더욱 매달려 기도하며 자신과 자신의 주변으로부터 의를 바로 세워나가는 일을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와 병행되는 구절은, 10절의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정말로 의는 굽혀져서는 안 되는 것이지만, 그것을 성취하고자 함에 있어서는 가장 먼저 하나님의 주권적 권능 앞에 내 맡기어야 하고, 그 다음은 내가 희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결국은 희생하신 것이죠?

 

오늘은 긍휼히 여기는 자가 받는 복입니다. 다같이 7절을 읽겠습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긍휼이란 무엇입니까? 헬라어로, 엘레오스라고 하는 단어를 쓰는데, 성경에서 이 말은, 라함과 헤세드라는 히브리단어가 합성된 의미가 있습니다.

 

라함이란 슬픔’ ‘애통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상대방의 처지를 깊이 이해하고 그들의 입장에서 슬픔을 느낀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긍휼이란 단어를 영어로 ‘compassion’이라 번역하기도 하는데, 이는 ‘passion’‘com’ (함께 한다)는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와 심정을 같이 해 주셨죠? 그래서 그분은 우리가 울 때 함께 우셨고, 우리가 웃을 때 함께 웃으셨다는 사실입니다. 지금도 그러시죠?

 

그래서 우리가 고통받으면 하나님도 마음이 아프신 것입니다. 설령 그 고통을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이라 할지라도 말입니다. 채찍질하는 부모의 심정을 생각하면 잘 알 수 있죠?

 

그러나 하나님의 긍휼은 거기서 그치지 않으시죠? 그래서 어떻게 하십니까?

 

거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더 적극적으로 상대방의 어려움을 해결해 주시기 위해 행동하시며 더 구체적인 도움을 주시고자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성육신시키신 것이죠?

 

그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게 하심으로 우리가 갚을 수 없는 죄값을 친히 다 갚아주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리고도 모자라 성령을 선물로 주셨죠? 그래서 우리가 연약할 때에도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 친히 간구하게 하신 것이죠.

 

얼마나 놀라운 사랑입니까? 그래서 이것을 구약성경에서는 헤세드’, 우리 말로는 자비’, 영어로 ‘mercy’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여기 긍휼에는 좀 전에 살펴본 ‘compassion’과 더 나아가 방금 살펴본 ‘mercy’의 의미가 모두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사랑입니까? 바로 이것을 사랑이라 표현하지 않고 이런 긍휼이란 단어를 쓰신 것은, 그 사랑이 어떤 사랑이어야 하는지를 보다 구체적으로 보여주시기 위함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긍휼을 받은 우리도 또한 다른 사람에게 그 긍휼을 베풀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또다시 우리에게 더 큰 긍휼을 베푸시는 은혜를 더 하신다는 것입니다.

 

여기 하반절에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요, 라고 한 것은, 신적수동태입니다.

 

내가 다른 사람을 긍휼히 여기면, 그 사람이나 어떤 다른 사람이 나를 긍휼히 여기는 것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이 나를 긍휼히 여기신다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이미 만족할 만큼이나 긍휼을 입었죠? 그러나 그럼에도 연약하고 부족한 우리의 삶은 하나님의 저주를 완전히 피할 만큼이나 완전한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여전히 범죄함으로 여전히 하나님의 긍휼을 입어야 할 많은 것들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안타까운 모습입니까?

 

이것은 아무리 더 많이 성화된 사람이라 할지라도 하늘나라가는 그날까지는 계속될 인간의 어쩔 수 없는 연약함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긍휼을 행하면 하나님은 또 다시 이런 연약한 우리에게 긍휼을 베풀어주신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제 이것은 구원과는 상관이 없는 것이죠. 오히려 우리 삶에서 받을 징벌에 대한 관용이라 할 수 있는 것이죠.

 

그러므로 우리는 마치 다시는 하나님으로부터 긍휼을 입지 않아도 되는 사람처럼 다른 사람을 막 대하는 사람이 되지 말고, 여전히 그들에게 긍휼을 베풂으로, 우리의 삶도 역시 하나님의 긍휼이 계속해서 그치지 않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우릴 용서하시고 또 용서하셔서 실로 그 긍휼의 풍성한 은혜를 입은 순탄한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긍휼은 근본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는 겸손함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삶에서 의를 포기하지 마십시오. 그러나 그렇다고 다른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고 긍휼을 베푸는 일까지도 포기해서는 아니 될 줄 믿습니다.

 

그렇죠? 그러니까, 지금 여기 팔복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까?

 

서로가 서로를 보완해주면서 실로 완벽한 축복을 만들어가고 있음을 알 수 있죠?

 

그래서 우리는 이 팔복을 각각 따로 따로 떼어서 선택적으로 내가 어떤 복을 받기 위해서 어떤 것만을 행하겠다고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이 팔복 전체를 행하려 할 때, 실로 그 하나하나에 약속된 복을 누릴 수 있음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으며 슈바이처 박사의 이야기 하나를 들려드리겠습니다.

 

어느 날 하버드대학생이 아프리카에 있던 슈바이처 박사를 찾아가 가르침을 받고자 했는데, 환영은커녕 만나주지도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학생이 몹시 실망을 해서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려 하는데, 큰 비가 와서 마을이 온통 물에 잠기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때 한센병을 앓는 한 아이가 물에 빠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본 이 학생이 물로 뛰어들어 그를 구해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소식이 슈바이처박사에게 알려졌습니다. 그랬더니 슈바이처 박사가 그를 불러서는 이런 말을 했다는 것입니다.

내가 며칠 자네를 지켜보니 전혀 나를 만날 준비도, 만날 가치도 없었네. 그런데 아이를 구해 주는 것을 보고 자네에게 긍휼의 마음이 있는 것을 보았네. 세상을 구할 수 있는 것은 의사나 약이 아니라 긍휼의 마음일세.”

성도 여러분, 언제나 부족한 인생은, 오직 긍휼을 베풂으로 긍휼을 입은 자만이 더 큰 일을 감당할 수 있는 줄 믿습니다. 저는 이것이 복에 복을 받는 일이라고 믿습니다.

그러므로 2012년 이후 여러분의 인생이 하나님 앞에서 더 큰 축복 가운데 더 크게 쓰임 받기 위하여, 긍휼의 사람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여러분의 삶에 베푸시는 복에 복을 더하시는 놀라운 은혜를 체험하게 될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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