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사무엘하의 1부라고 할 수 있는 마지막 부분 10장입니다. 여기서는 다윗의 주요정복전쟁을 요약 정리한 8장에 이어 이스라엘의 암몬, 아람 연합군과의 전쟁과 승리가 묘사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1절로 5절에서는 이스라엘과 암몬 아람 연합군 사이에 전쟁이 발발하게 된 배경으로서 다윗의 나하스 조문 사절단에 대한 암몬 왕 하눈의 모욕사건을 기록하고 있는데, 이것이 전쟁의 발단이 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다같이 1절을 읽겠습니다.
“그 후에 암몬 자손의 왕이 죽고 그 아들 하눈이 대신하여 왕이 되니”
여기 죽은 것으로 소개되고 있는 암몬 자손의 왕은 과거 사울에게 패한 적이 있는 나하스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후에 사울에 이어 이스라엘의 왕이 된 다윗과는 화친조약을 맺고 좋은 관계를 가졌던 것으로 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나하스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그의 아들 하눈이 이런 양국간의 유대관계를 깨고 문제를 일으키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2절을 읽겠습니다.
“다윗이 가로되 내가 나하스의 아들 하눈에게 은총을 베풀되 그 아비가 내게 은총을 베푼 것같이 하리라 하고 그 신복들은 명하여 그 아비 죽은 것을 조상하라 하니라. 다윗의 신복들이 암몬 자손의 땅에 이르매”
문제의 발단은, 다윗이 나하스의 죽음으로 인하여 암몬에 조문사절단을 보낸 것에서부터 시작되고 있습니다.
사실 이것은 상반절에서 다윗이 하눈에게 그의 아비가 다윗에게 은총을 베푼 것 같이 베풀기 위해 신복들을 보냈다고 하니까, 이것은 분명 다윗의 좋은 의도였고, 강대국으로써 자비를 베푸는 것과도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여기 은총으로 번역된 ‘헤쎄드’라는 히브리 단어는 언약 안에서 상대방에게 보여주는 사랑과 충성과 성실을 의미한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 다윗이 하눈에게 베풀고자 하는 은총은 또한 지난 시간 요나단과 맺은 언약을 실천하기 위해 므비보셋을 찾아 은총을 베풀었던 것과 같은 맥락에서 이루어지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문제가 생겼을까요? 3절을 읽겠습니다.
“암몬 자손의 방백들이 그 주 하눈에게 고하되 왕은 다윗이 조객을 보낸 것이 왕의 부친을 공경함인 줄로 여기시나이까? 다윗이 그 신복을 보내어 이 성을 엿보고 탐지하여 함락시키고자함이 아니니이까?”
왜 문제가 생기고 있습니까? 하눈의 신하들이 다윗의 조문단을 염탐꾼들로 보았기 때문임을 알 수 있죠?
여기 성경이 다윗의 조문을 므비보셋에게 베푼 은총 뒤에 기록한 것은 분명 이 다윗의 조문도 역시 므비보셋에게 베푼 은총과 같이 하눈의 아비 나하스와 맺은 언약 때문임을 확실히 하고 있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들이 이렇게 다윗의 은총을 모독할 수 있을까요? 가만히 살펴보면 한 가지 원인이 될 만한 일이 있어 보이기도 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암몬의 수도인 랍바는 아주 견고한 도시였기 때문에, 사전에 철저한 조사가 선행되지 않으면 거의 정복이 불가능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암몬의 방백들은 이러한 사실 때문에 지금까지 정복전쟁을 벌여온 이스라엘이 혹 자신들도 침공하기 위해 염탐을 오려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마음에, 이스라엘의 조문단이 랍바로 들어오는 것을 꺼려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이런 암몬방백들의 조언을 들은 하눈은 어떻게 할 것인가? 다같이 4절을 읽겠습니다.
“이에 하눈이 다윗의 신복들을 잡아 그 수염절반을 깎고 그 의복의 중동 볼기까지 자르고 돌려보내매”
이들의 행위가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 것입니까? 수염을 깎는 것은 애도의 표시로써 깎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외에 당시 명예와 권위를 상징했던 수염을 강제로 깎는 것은 최고의 모욕과 수치를 안겨주는 행위였다는 사실입니다.
게다가 하눈은 다윗의 조문단의 수염을 절반만 깎았다고 했습니다.
이 히브리어의 의미는 수염길이의 절반만 잘랐다는 의미가 아니라, 보기 좋게 가꾼 수염의 한쪽 부분만을 잘라 우스꽝스러운 모양으로 만들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얼마나 모욕과 수치를 안겨주고 있었던 것입니까?
그뿐 아니라 중동볼기까지 잘랐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엉덩이가 드러나도록 옷의 절반을 잘랐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당시 속옷을 입지 않는 유대인들의 엉덩이를 강제로 드러내어 수치를 안겨주었다는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얼마나 창피스러운 일입니까?
특히 이런 일은 전쟁 포로에게나 가하는 관행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일들을 행했다는 것은, 일종의 선전포고를 했다는 말과도 같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다윗은 어찌할까요? 5절을 읽겠습니다.
“혹이 이 일을 다윗에게 고하니라. 그 사람들이 크게 부끄러워하므로 왕이 저희를 맞으러 보내어 이르기를 너희는 수염이 자라기까지 여리고에서 머물다가 돌아오라 하니라.”
왜 그랬을까요? 왜 다윗이 수염이 잘린 신하들에게 여리고에서 수염이 자랄 때까지 있다고 오라고 했을까요?
물론 그 신하들이 아주 크게 부끄러워하고 있었기 때문이었고, 또 이런 수치 스러운 모습을 굳이 예루살렘 사람들이나 이스라엘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라 할 수 있고, 그래서 암몬에서 가까운 여리고로 보냈다고 볼 수 있지만,
그러나 또한 다윗이 이들을 여리고로 보냈다는 것은, 이들을 반드시 징벌하고야 말겠다는 의지가 암시되고 있다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리고는 이스라엘이 출애굽하여 가나안에 입성할 때, 하나님의 도움으로 첫 번째 승전을 거둔 의미있는 곳이기에, 따라서 이와 같이 이제 하나님을 백성을 모독한 암몬에게도 하나님의 이름으로 징벌을 가하겠다는 의도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암몬은 어떻게 될 것인가? 굳이 보지 않아도 그들이 이스라엘에게 당할 것은 불보듯 뻔하죠? 그러나 이것은 시간관계상 내일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이겠습니까?
첫째, 하눈의 실수를 통해, 우리는 다른 사람과 한 약속을 믿어주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교훈을 먼저 얻을 수 있죠?
만일 암몬의 하눈이 자기 아버지와 다윗이 맺은 언약을 믿고 그의 조문단을 잘 기쁨으로 받아주었더라면 어찌되었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그 언약을 믿지 못하고 의심함으로 큰 실수를 저질러 엄청난 위기를 초래하였다는 사실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설령 나중에 믿음이 깨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먼저 다른 사람을 믿어주는 사람이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우리는 너무 지혜로와서 다른 사람이 약속을 지킬 것인지, 안 지킬 것인지를 너무나 빨리 잘 파악하곤 합니다.
그래서 미리 넘겨짚고 부정적인 생각을 할 때가 있는데, 그러나 여러분 만일 그런 우리의 추측이 잘못된 것이 될 때는 어떻게 그 일을 감당하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를 믿듯이, 또한 결과는 하나님께 맡기고 다른 사람의 말을 믿어주는 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둘째, 그러나 그럼에도 다윗의 조문실패를 통해, 나의 선의가 반드시 좋은 결과를 가져오는 것은 아니라는 것은 기억하고 있어야 하는 것이죠?
흔히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도 곱다’고 하지만, 때로는 가는 말이 고와도 오는 말이 거칠 때가 있고 심지어는 주먹이 날아오는 것과 같은 상황이 될 때도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인류의 구원을 위해 온 사랑을 다 쏟으셨는데, 오히려 사람들은 조롱과 침뱉음과 주먹질과 채찍질을 하고는 마침내 십자가에 그를 못박았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도 이런 상황이 올 수 있고, 또 올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그러나 그럼에도 성도는 여전히 선을 행하여야 하는 것이죠? 왜냐?
갈라디아서 6장 9절,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고 했습니다.
선을 행하면 반드시 때가 되면 좋은 열매를 거두게 될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죠?
결국 예수님의 죽음은 온 인류를 구원하는 역사를 가져오게 된 것을 보면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다만 지혜롭게 행해야 할 뿐이지, 성도는 선한 모습을 결코 잃어버려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성도 여러분, 그러나 진정 축복을 받으려면 은혜를 은혜로 여길 줄 알아야 하는 줄 믿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은혜의 기회를 주실 때, 그 모든 기회를 다 축복의 기회로 삼으심으로, 과연 하나님이 주시고자 하시는 모든 축복을 다 받아 누리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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