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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단과 맺은 언약을 행하는 다윗(삼하 9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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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선 8장은 7장에 나오는 다윗언약에 이어 다윗이 대외적인 정복전쟁을 통해 나라를 안정시키고, 대내적인 행정조직의 정비를 통해 신정왕국의 기틀을 확고히 하였음을 다루었다고 할 수 있고, 또 한 다른 측면에서보자면, 그가 받은 축복의 언약이 잘 성취되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제 오늘 이어지는 본문은 다윗 왕국이 다윗의 선정에 의해 태평성대를 누리고 있음을 보여주는 하나의 실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윗의 선정은 8장 15절에 나오는 바와 같이 모든 백성에게 공과 의를 행하는 것으로 나타나기도 했지만, 오늘 본문에서와 같이 사울의 손자이며 요나단의 아들인 므비보셋을 선대하는 것을 통해서도 잘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1절을 읽겠습니다. “다윗이 가로되 사울의 집에 오히려 남은 사람이 있느냐? 내가 요나단을 인하여 그 사람에게 은총을 베풀리라 하니라.”

다윗이 지금 이런 말을 하고 있던 때는, 언제일까요? 이것은 사울이 길보아 전투에서 죽은 지 약 17년에서 18년이 흐른 후로 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울과 요나단이 사망할 당시 므비보셋은 다섯 살이었는데, 12절을 보면, 현재는 아들까지 둔 성인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다윗이 유다왕으로 7년 반을 있다가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으니까,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이 된 지가 한 10년이 흐른 뒤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죠?

그런데 왜 갑자기 사울의 집에 남은 사람을 찾았을까요? 아예 모반의 싹을 잘라버리기 위함이었을까요? 아니죠?

그는 요나단과 언약을 맺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나라가 안정되자, 요나단과의 신의를 지키기 위해 사울의 집에 남은 사람들을 찾았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2절을 보면, 이제 사울의 종, 시바라는 사람을 통하여 사울의 집에 남은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 3절을 읽겠습니다.

“왕이 가로되 사울의 집에 남은 사람이 없느냐? 내가 그 사람에게 하나님의 은총을 베풀고자 하노라. 시바가 왕께 고하되 요나단의 아들 하나가 있는데 절뚝발이니이다.”

시바가 요나단의 아들이 하나 있다고 하죠? 그런데 뭐라고 했습니까? 절뚝발이, 신체장애자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원문을 보면, 두 다리를 모두 절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는 아주 어려운 형편에서 살고 있었음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이 그가 어디 있는지를 묻고, 이에 시바는 로드발 암미엘의 아들 마길의 집에 있나이다고 대답하고 있습니다.

어디 일까요? 여기 마길이란 므낫세 지파가 정착한 요단 동쪽 길르앗 지역에서 사용되기 시작한 이름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 언급된 로드발이란 지역도 요단동쪽에 있는 지역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므비보셋은 예루살렘으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어떤 사람의 도움으로 은신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는 것이죠?

어찌하였든 몰락한 왕가의 후예에게 호의를 베풀고 곤경에 처한 다윗을 도와준 이 마길은, 어떤 이해관계를 떠나 선행을 베푸는 의로운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이제 사람을 보내어 그를 데려 왔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에게 묻고 있습니다. 6절을 읽겠습니다.

“사울의 손자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이 다윗에게 나아와서 엎드려 절하매 다윗이 가로되 므비보셋이여 하니, 대답하되 주의 종이 여기 있나이다.”

므비보셋이란 ‘부끄러움을 흩뜨리는 자’란 뜻이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 부끄러움이란 우상과 관련된 말이기 때문에, 우상을 타파하는 자란 뜻이 됩니다.

그런데 다윗이 므비보셋을 부르니까, 그가 주의 종이 여기 있나이다. 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다윗이 므비보셋의 이름을 불렀다는 것은, 상당히 친근한 감을 드러낸 것이며, 따라서 지금 다윗은 상당한 호의를 베풀며 그를 인정해 주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므비보셋의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여기 ‘주의 종이 여기 있나이다.’라는 말은, 두려움에 찬 대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자신은 다윗의 노예와 같은 비천한 존재이니 어떠한 처분도 감수하겠다는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므비보셋은 다윗을 죽이려고 했던 사울의 자손으로써 다윗이 왕이 되었을 때 피해있다가 다윗의 부름을 받게 되었기 때문에, 이제는 그에게 죽을 일 밖에는 남지 않았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말합니다. 7절을 읽겠습니다.

“다윗이 가로되 무서워말라. 내가 반드시 네 아비 요나단을 인하여 네게 은총을 베풀리라. 내가 네 조부 사울의 밭을 다 네게 도로 주겠고 또 너는 항상 내 상에서 먹을지니라.”

먼저 무서워말라고 안심시키고 있죠? 그러면서 아비 요나단을 인하여 은총을 베풀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어떻습니까? 근거없는 안심의 말은 믿을 수 없지만, 근거 있는 말은 어떻습니까? 믿을 수 있는 것이죠?

게다가 다윗은 그러므로 이제는 그에게 사울의 밭도 다 도로 주겠고, 항상 다윗의 상에서 먹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사실입니까? 사울은 40년 동안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얼마나 큰 밭을 가지고 있었겠습니까?

16장 3절을 보면, 시바가 이것을 ‘내 아비의 나라’로 표현할 만큼, 엄청나고도 지나친 호의임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왕의 신탁에서 먹는다는 것은 왕과 함께 나라의 일을 의논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얼마나 파격적인 은혜입니까?

우리는 그렇다면, 여기서 다윗의 어떤 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까?

다윗은 정말 욕심이 없는 신실한 사람이었음을 찾아볼 수 있는 것이죠?

그는 욕심이 없어서 사울을 죽이지 않고 자신이 도망을 다녔고, 또한 신실하여 이렇게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자신과 언약을 맺은 요나단의 아들을 찾아 은혜를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베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역시 다윗은 무엇이든, 확실한 사람이었음을 볼 수 있고, 그러므로 그의 나라도 하나님 앞에서 확실하게 행하였음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이와 같이 놀라운 은혜를 입은 므비보셋은 어찌할 것인가? 8절을 읽겠습니다.

“저가 절하여 가로되 이 종이 무엇이관대 왕께서 죽은 개 같은 나를 돌아보시나이까?”

무슨 말입니까? 므비보셋은 지금 다윗의 너무나 큰 호의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머리 숙여 감사를 표시하고 있었던 것이죠?

그런데 왜 자신을 죽은 개라고 했을까요? 죽은 개란 므비보셋이 가졌던 장애를 극대화한 표현이라 할 수 있습니다.

두 발을 저는 자신은 마치 죽은 개와 같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가치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이처럼 무가치한 자신을 돌봐주시니 감개무량할 따름이라는 의미인 것이고, 또 그러나 한편으론 이제 자신은 죽은 개와 같기 때문에 아무리 자신이 물질적으로 회복된다 하더라도 자신은 결코 모반을 할 수 없는 사람임을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또한 여기 ‘죽은 개’란 표현은 고대근동에서 자기보다 월등한 자 앞에서 자신의 무가치함을 드러내는 겸양의 표현으로 흔히 쓰였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또한 ‘종’이라는 말과 함께 자신을 극도로 낮추는 말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어찌하였든 우리는 여기서 은혜를 받는 자의 자세가 과연 어떠해야 하는지를 배울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를 받는 자는 언제나 겸손함으로 그 받은 은혜에 감사를 표현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제 다윗은 9절로 13절에서 므비보셋에게 하였던 약속을 실천하기 위한 실질적인 후속조치를 취하고 있습니다.

특히 사울의 사환이었던 시바를 통해 실행하는데, 사울과 그의 온집에 속한 것은 다 므비보셋에게 다 주었으니, 시바의 가족은 므비보셋을 섬길 것을 말하여 실행하고 있고, 또 므비보셋은 이제 다윗의 상에서 먹을 것이라고 말하여 예루살렘으로 거처를 옮겨 지내게 됨을 말하고 있습니다.

특히 13절에 그가 두 발이 다 절뚝이더라는 말을 다시 표현함으로 다시 다윗의 사랑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왜냐? 원래 중근동에서는 장애인은 하나님의 은총에서 제외된 사람으로 취급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가장 큰 장애는 무엇이겠습니까? 영적 장애인 것이죠? 영적 장애자는 예수를 믿을 수도 없고,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런 영적장애자들 가운데서 하나님은 우리를 택하셔서 은혜를 베풀어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감히 하나님의 상에 동참하는 자격을 얻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여기서 상은 잔치상을 의미한다고 보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도 하나님은 여러분 앞에 잔치상을 베풀어주실 줄 믿습니다. 언제나 그 은혜의 하나님을 기억하며 늘 오늘의 므비보셋과 같이 자신을 낮추심으로 그 상이 여러분 앞을 떠나지 않게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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