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부터 사도바울은 자신이 왜 고린도교회의 재방문을 연기하였는지를 해명하기 시작했죠?
그 가장 첫 번째 까닭은 바로 신실하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자 함이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순종에 대한 예를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또 다른 이유들은 없을까? 그저 하나님의 뜻이기에만 순종했던 것일까?
어제도 말씀드렸지만, 이것이 정답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이렇게만 말하면 성도들이 잘 납득하려 들지 않죠?
그러므로 이제 사도바울은 그 성도들의 연약함을 배려하기 위해서 다른 실질적인 이유들을 이야기하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그것이 무엇인지 함께 살펴보며, 그것을 통해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를 함께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재방문을 연기한 이유는 고린도성도들을 아끼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23절로 24절에 말하고 있는데, 먼저 23절을 한번 읽어볼까요?
“내가 내 영혼을 두고 하나님을 불러 증거하시게 하노니 다시 고린도에 가지 아니한 것은 너희를 아끼려 함이라.”
‘내 영혼을 두고 하나님을 불러 증거하시게’ 한다는 말은 무슨 말인가요?
먼저 ‘내 영혼을 두고’라는 말은, ‘내 생명을 걸고’ 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불러 증거하시게 한다’는 말은 하나님을 증인으로 내세운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도 그러셨고, 야고보서에도 그랬듯이 ‘도무지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도 하지 말라, 땅으로도 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우리가 말할 때 과연 하나님을 증인으로 내세울 수 있을까요?
내 세울 수는 있겠지만, 그러나 이같이 하는 것은, 만일 자신의 말이 거짓이라면 하나님의 진노를 받을 준비가 되어 있음을 말하는 것이죠?
그렇게 생명을 걸 만큼이나 자신은 진실하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사도바울은 자신의 사역의 진실함과 신실함을 아주 목숨과 같이 소중하게 여겼음을 알 수 있다는 것이죠?
하나님을 믿는 하나님의 백성에게 있어서의 신뢰, 진실됨과 같은 것들은 정말 생명과 같은 것들이죠?
그것이 생명을 걸 만큼이나 매우 심각한 문제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잃으면 생명을 잃는 것과도 진배가 없을 정도로 우리는 진실함을 지킬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고린도교회를 두 번 방문하기로 한 것을 변경한 사도바울의 진실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반절에 고린도교인들을 아끼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무슨 말일까요?
만일 원래대로 사도바울이 고린도교회를 방문했더라면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의 마음에 상처를 주었을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고린도전서를 통해서도 그들에게 야단을 친 적이 있는 것처럼, 당시 고린도교회에는 엄중한 처벌을 받아야 할 만큼이나 바울을 근심하게 하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바울이 예정대로 방문을 했더라면, 그들은 어떤 꾸지람과 징계를 받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렇게 하지 않으려고 방문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잠시 분노하였지만, 그러나 인내하기로 마음을 정하였던 것이죠?
우리도 어떤 일에 대하여 잠시는 분노할 수 있지만, 그러나 금새는 인내할 수 있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죠?
그러나 24절에서 사도바울은 또 다른 이유를 대고 있습니다. “우리가 너희 믿음을 주관하려는 것이 아니요, 오직 너희 기쁨을 돕는 자가 되려 함이니, 이는 너희가 믿음에 섰음이라.”
사도바울이 그처럼 분노한 마음으로 그들에게 달려가 그들을 치리하지 않았던 또 하나의 이유는, 바로 이제는 그들이 믿음에 선 자들로써, 스스로가 그 문제를 해결하고 감당할 수 있으리라는 확신이 섰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더 이상 그들의 믿음을 주관할 필요가 없다. 이제 나는 오직 너희 기쁨을 돕는 자가 되려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그렇죠? 아직 믿음이 부족하여 어려움이 올 때 스스로 판단하고 감당할 능력이 없을 때에는 성숙한 성도가 주도적으로 그 사람을 인도할 수 있지만, 그러나 이제 다 크고 나면 그저 옆에서 도우며 맡겨야 되는 것이죠?
사실 우리는 누구도 다른 사람의 신앙의 지배자는 아니죠? 칼빈은 목회자라도 지배자는 아니며 다만 봉사하는 사람이며 돕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이에 2장 1절은, “내가 다시 근심으로 너희에게 나아가지 않기로 스스로 결단하였노니”라고 했습니다.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이렇게 그들이 믿음에 선 자들이요, 자신은 그들을 돕는 자라고 생각하니까, 이제 더 이상 근심으로, (근심은 감정을 말하니까, 다른 말로 말하면 분노라고도 말할 수 있죠?) 이런 분노로 나아가지 않기로 스스로 결단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재방문을 연기한 두 번째 이유로 고린도성도들에게 또다시 근심을 끼치지 않기 위함이라고 말합니다.
2절에, “내가 너희를 근심하게 하면 나의 근심하게 한 자 밖에 나를 기쁘게 하는 자가 누구냐?”
원문을 직역하면, “만약 내가 너희를 고통스럽게 하면, 나로 말미암아 고통스럽게 되는 자를 제외하고 나를 기쁘게 하는 자가 누가 있겠느냐?”는 말입니다.
그래서 자신은 그만 여기서 중단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렇죠?
우리는 분노함으로 불의한 자를 향하여 말할 때가 있지만, 그러나 그 파장은 그 사람에게만 미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미쳐 다른 사람들도 힘들어지는 것이죠?
결국 나를 기쁘게 해 줄 사람들에게는 슬픔을 안겨주는 셈이 된다는 말인 것입니다.
그래서 3절을 말하는데, “내가 이같이 쓴 것은 내가 갈 때에 마땅히 나를 기쁘게 할 자로부터 도리어 근심을 얻을까 염려함이요 또 너희 무리를 대하여 나의 기쁨이 너희 무리의 기쁨인 줄 확신함이로라.”고 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다른 사람의 근심이 내 근심이 되고, 다른 사람의 기쁨이 내 기쁨이 되는 자들이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그것이 그러지 못하고 내 감정만을 위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3절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사도바울이 고린도교회를 방문하지 않고 한 일이 있는데, 그것은 무엇인 것 같습니까?
편지를 쓴 일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소위 ‘눈물의 편지’라고 말합니다.
사도바울은 고린도교회를 재방문하는 대신에 애절한 마음과 눈물로 그들의 잘못을 지적하는 준엄한 내용의 편지를 썼던 것이죠. 어찌보면 이것이 더 파워풀하다 볼 수도 있죠? 그래서 이 눈물의 편지를 또한 ‘준엄한 편지’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고린도교인들은 이 편지를 보고 두려운 마음을 갖기도 했는데, 이에 대해 4절을 보면, 그 편지의 의도가 근심이 아닌 사랑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큰 환난과 애통한 마음이 있어 많은 눈물로 너희에게 썼노니, 이는 너희로 근심하게 하려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내가 너희를 향하여 넘치는 사랑이 있음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라.”
그 눈물의 편지, 준엄한 편지를 쓴 근본적인 이유는 무엇이라는 것입니까?
사도바울 자신에게 고린도교인들을 향한 넘치는 사랑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알게 하려고 했다는 것이죠?
그렇다면, 사도바울은 왜 이들이 근심할 것이라고 생각했겠습니까? 실로 근심하게 하는 투의 표현들을 사용했기 때문이겠죠?
그렇다면,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사도바울은 고린도전서 13장 사랑장을 썼던 장본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생각하기에 사도바울은 그저 모든 것을 참고 인내하며 감싸기만 하는 사랑의 사람으로만 생각할 수 있겠지만,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사도바울은 오직 그것만이 진정한 사랑은 아님을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진정한 사랑이란, 마치 자식이 불의하고 거짓되고 잘못하는 일까지도 다 ‘오냐, 오냐’ 하며 받아주는 부모의 어긋난 마음으로 행하는 것이 아니라, 잘못된 것은 지적도함으로 어찌해서든 바르게 살도록 야단도 치고 때론 눈물을 흘리며 준엄하게 가르치기도 함으로, 7장을 보면, 잠시는 근심케 하지만, 결국은 회개하게 하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만일 이것이 없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자식이 spoil되는 것처럼, 성도들도 다 spoil되는 것이죠. 그래서 spoil된 아이들처럼 감당할 수가 없는 것이죠.
그래서 교회는 권면도 있고, 치리도 있는 권징조례가 있는 것입니다.
다만 중요한 것은, 그 중심에 진실된 사랑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이죠.
결국 고린도교회 교인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잠시는 근심하였으나 회개에 이르렀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하여 잠시 근심하는 것에 너무 힘들어 하지는 마시기를 바랍니다. 그 말씀이 올바른 하나님의 말씀일 진대, 분명 그 아픔은 성도를 살리고 교회를 살리게 될 줄 믿습니다.
중요한 것은 진정한 사랑인 것이죠? 그러므로 오늘도 여러분의 삶이 모든 일을 진정한 사랑 위에 바탕을 두고 행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잠시는 실패하는 것 같으나 끝내는 성공할 것이요, 잠시는 근심하는 것 같으나 분명 끝내는 모두가 다 함께 기쁨을 누리게 될 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