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시간까지 우리는 사도바울이 고린도교회를 재방문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서, 첫째는 하나님의 뜻이었다고 했고, 둘째는 그들을 아끼기 때문이라 했고, 셋째는 또 다시 근심을 끼치지 않게 하시기 위함이라 했습니다.
그래서 지난 시간 마지막은 자신이 교회를 직접 방문하는 대신, 눈물의 편지를 쓰는 방식을 택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사도바울은 오히려 고린도교인들에게 이미 징계를 받은 자들을 용서하고 위로할 것을 당부하고 있습니다. 다같이 5절을 보겠습니다.
“근심하게 한 자가 있었을지라도 나를 근심하게 한 것이 아니요. 어느 정도 너희 무리를 근심하게 한 것이니, 어느 정도라 함은 내가 너무 심하게 하지 아니하려 함이라.”
무슨 말일까요? 지금 고린도교회에서 사도바울을 근심하게 했던 자들은 사실 사도바울을 근심하게 한 게 아니었고,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근심하게 했다는 말이죠?
그리고 그 근심의 정도를 어느 정도라고 말한 이유는, 너무 심하게 표현하지 않기 위함이라 했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 무엇을 가지고 고린도교인들을 근심하게 하였는가?
이에 대해 C K 바레트는 그것은 어떤 이들이 사도바울의 사도권 권위를 무시하고 모독한 행위라고 말합니다.
생각해 보세요. 만일 우리 가운데 어떤 분들이 ‘저 한 목사는 진짜 목사가 아니다. 신학교도 가짜로 나오고, 가르치는 성경도, 진리도 다 가짜이다.’라고 하면 어떻겠습니까?
누구보다도 제가 가장 아프겠지만, 그러나 그런 저에게 지난 5년이 넘게 가르침을 받은 여러분은 어떻겠습니까? 충격인 것이죠? 큰 근심이 되는 것이죠.
그렇다면, 사실이 그렇지 않은데, 이런 충격과 근심을 준 사람들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에 6절은 말합니다. “이러한 사람이 많은 사람에게서 벌 받은 것이 족하도다.”
이 말은 무슨 말입니까? 이 사람들은 이미 대다수의 교인들의 결의에 의해서 징계를 받았다는 것이죠? 그러나 이제 그들은 더 이상 다른 징계를 할 필요가 없이 그것으로 족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7절에 “그런즉 너희는 차라리 저를 용서하고 위로할 것이니, 저가 너무 많은 근심에 잠길까 두려워하노라.”고 했습니다.
이제는 저를 용서하고 위로하라. 왜냐? 저가 너무 많은 근심에 잠길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말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지금 사도바울은 교회가 징계한 이들이 영원한 범죄자가 되기만을 원칠 않았던 것이죠?
그들이 회개함으로 이제는 구속받은 공동체 안으로 회복되어 들어올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두었다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용서를 받지 못하였다는 상실감, 공동체에서 내쳐졌다는 상실감, 여러분, 그 상실감이 얼마나 이루 말할 수 없이 크겠습니까?
아무리 큰 죄라 할지라도 용서받지 못할 죄가 있습니까?
교회의 권징은 교회의 질서를 바로 잡고 진리를 수호하기 위해서 올바로 행해져야 하지만, 결코 그것이 한 영혼을 죽이고 소외시키는 일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도 그렇죠? 꾸짖고 책망하시고 고난도 주시지만, 그러나 어떻습니까? 끝내는 다 사랑으로 품어주시죠?
8절에, “그러므로 너희를 권하노니, 사랑을 저희에게 나타내라.”고 합니다.
중요한 것은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징계로서만이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징계가 남발된다면, 하나님의 은총을 제한해 버릴 수 있는 것이죠?
그렇다면, 왜 사도바울은 눈물로 그 준엄한 편지를 써서 고린도교인들로 하여금 근심하게 했던 것인가? 9절은 말합니다.
“너희가 범사에 순종하는지 그 증거를 알고자 하여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썼노라.”는 것입니다.
바울의 관심은 정작 범죄한 자들에 대한 처벌이 아니라, 고린도교인들의 순종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순종을 알아보려 했을까요? 사도바울이 혹이라도 자신을 지지하는 사람들의 마음이 아직 어떤 가를 떠보기 위해서 그랬다는 것일까요?
아니죠? 이미 1장 24절에서 그는 자신이 그들의 신앙에 대해 주인노릇을 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바울은 단순히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알퍅한 수단으로 그들의 순종을 요구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기를 통해 그리스도의 권위가 교회에 나타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사실 고린도교인들의 최상의 영적 이익은 그리스도의 사도인 사도바울에 대한 순종에 의해 도모될 수 있는 것이죠.
그래서 고린도후서 12장 19절을 보면, 그의 이런 순종의 요구는 권세를 부리기 위함이 아니라, 오히려 덕을 세우기 위함이라는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에 10절은 말합니다. “너희가 무슨 일이든지 뉘게 용서하면 나도 그리하고”
이제 고린도교회가 용서한다면, 그저 자신도 용서하겠다는 것입니다. 왜요? 용서받을 사람보다도 그들을 용서하는 고린도교인들이 바울의 주된 관심사였기 때문이죠?
그리고 하반절은, “내가 만일 용서한 일이 있으면 용서한 그것은 너희를 위하여 그리스도 앞에서 한 것이니,”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11절에 “이는 우리로 사단에게 속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그 궤계를 알지 못하는 바가 아니(로라)”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사도바울이 그들을 용서하는 것은 지금 이런 일은 무엇으로 말미암아 있는 일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까?
사단의 궤계로 말미암아 있는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죠?
교회의 권징은 말씀의 참된 전파와 성례의 정당한 집행과 더불어 참된 교회를 구별케 하는 교회의 표지로서 역할을 합니다.
그러나 명백한 회개에도 불구하고 무자비하게 엄격히 징계를 적용한다면 어찌 되겠습니까?
다른 그리스도인들을 완전히 절망 상태에 빠뜨림으로 오히려 사단의 궤계에 넘어가는 일이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들이 권징에 소극적인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지, 다른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것이 다만 권면으로 끝나는 것이지요. 특히 유교적인 문화 가운데서 명분을 중시하는 것이 몸에 배인 우리 한국 크리스천들은 어떻겠습니까?
한번 징계는 영원한 징계처럼 씻지 못할 상처가 될 수 있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권징이 살아있어야 건강한 교회인줄을 알면서도 권징을 하지 못하고 권면으로 대처하는 이유는 첫째는 그 영혼을 사랑함이요, 둘째는 그 광경을 지켜보는 성도들을 사랑함이요, 셋째는 교회를 무너뜨리려는 사단의 궤계에 빠지지 않기 위함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누군가 비진리를 설파하고 이단사상을 교회 안으로 가지고 들어와 교회를 어지럽힌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그것은 마땅히 잘라내야 하는 것이죠? 왜요? 그는 구원받은 자가 아니며, 또한 그가 신봉하는 도도 진리의 도가 아니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일이 아니면, 권면하고......, 그래서 제일 먼저는 강단에서 선포되는 말씀을 통해 간접 권면을 하는 것이죠?
그것이 직접 권면을 하는 것보다는 더 기회를 주는 일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고, 사람이 아닌 하나님께서 하시기를 원하기 때문인 것이죠.
그러나 그래도 안 되면, 주의 종이나 장로님들이 권면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우리 교회도 한번 권면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찌하였든 사랑의 마음으로 이 일을 해야 하고, 그러므로 권징을 한다 하더라도 회개하는 자는 진정으로 용서함으로 사단의 간교한 술책에 넘어가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형제를 용서해야 할 이유는, 우리 또한 죄인으로 용서를 받았기 때문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궁극적인 사랑은 용서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분노하고 비난하고 정죄하고 더 나아가 징계를 한다하더라도, 결국 우리는 십자가로 용서에 승리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