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의 성전은 하나님이 그의 백성과 함께 하신다는 약속의 구체적인 표현이며 임마누엘의 상징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성전은 온전한 임마누엘인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가 구약 성전의 마침이 되는 온전한 성전이다. 그 육체가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으로 충만한 성전이며, 하나님의 은혜와 진리가 강물처럼 흘러나오는 성전이었다.
예수님은 자신의 육체를 제물로 바쳐 하나님께 영원한 제사를 드림으로 제사제도를 완전히 폐지하셨다. 동시에 손으로 만든 성전이 더 이상 필요 없게 하셨다. 건물성전시대가 막을 내리게 하신 것이다. 그래서 주님은 유대인들에게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고 하셨다. 이것은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다(요2:19, 21). 유대인들이 성전된 예수의 육체를 파괴하면 사흘 만에 부활하여 새로운 성전을 지으시겠다는 말씀이다.
주님이 새로 일으키실 성전이 바로 교회인 것이다. 신약교회는 예수의 죽으심과 부활에 정초된 새로운 성전이다. 교회 건물이 성전이 아니라 신자들의 모임, 즉 신앙 공동체가 성전이며 신자들의 몸이 예수님의 육체와 같이 성령이 거하는 성전인 것이다.
신약시대에 사는 신자들은 솔로몬이 지은 화려하고 웅장한 성전보다 더 탁월하고 영광스러운 성전을 건축하도록 부름 받았다. 삼위하나님이 충만히 임재하여 그의 백성들을 다스리시는 영적인 성전을 지으라고 부름 받은 것이다.
우리는 먼저 말씀에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성전의 청사진을 발견해야 한다. 한국교회의 문제는 교회의 설계도가 없다는 것이다. 설계도 없이 지은 건물이 부실할 수밖에 없듯이 교회가 성경에 충실한 설계도 없이 주먹구구식으로 세워져가는 것이 문제이다.
좋은 예술품이 실제 존재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먼저 예술가의 아이디어에 존재해야 하듯이 좋은 교회가 탄생하기 위해서는 그것은 먼저 목사의 비전에 존재해야 한다. 목사는 말씀을 따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교회의 꿈을 꾸는 사람이다. 그리고 이 꿈을 교인들에게 전해 교인들과 함께 이 꿈을 꾸며 그들을 동력화하여 하나님이 원하시는 영적 성전을 건축하는 일에 앞장서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목사는 말씀을 통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의 분명한 비전을 제시해야 한다. 목사가 자신의 야망을 하나님이 주신 비전으로 포장하여 교인들을 감쪽같이 속이고 자신의 야망을 성취하기 위해 교인들을 도구화하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하여 벌리는 무서운 사기행각이다.
이런 일이 한국교회에 비일비재하다. 그 대표적인 예가 성전건축이라는 이름으로 엄청난 자금을 쏟아 부어 화려하고 웅장한 건물을 짓는 것이다. 하나님이 원하시지 않는 일인데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성전을 건축하는 일이라고 교인들을 독려하여 그들의 자원과 에너지를 끌어내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왜곡해서 교인들을 속이고 하나님을 우롱하는 신성모독 죄이다.
성전을 건축한다는 것은 액면그대로 예수님이 십자가로 허무신 것을 다시 세우는 것이며 주님의 고난을 헛되게 하는 십자가 원수로 행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되돌리며 하나님의 구원의 경륜을 전복시키려는 반역행위이다. 그러므로 성전을 건축한다는 말은 곧 적그리스도 적 행위를 뜻하는 것이다.
물론 성전건축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이들이 구약에서 성전을 짓는다는 의미로 그렇게 말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단지 하나님께 거룩하게 예배드리는 목적으로 구별된 건물이라는 의미로 그렇게 칭할 뿐이라고 둘러댈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올바른 언어, 즉 성경적인 용어를 사용해야 한다.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가 우리의 생각과 신앙과 행동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적그리스도적 행위를 뜻하는 말을 아무 거리낌 없이 사용한다는 것은 어떤 이유에서건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중대한 과오를 범하는 것이다.
그것은 성경의 가장 기본적인 진리마저 파악하지 못하는 무지의 극치를 드러내는 일인데, 많은 목사들이 그런 부끄러운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한다는 것은 심히 개탄스러운 일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이 말이 하나님이 원하시지 않는 일을 마치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일인 양 거기에 헌신하도록 교인들을 유도하는 수단으로 이용된다는 것이다.
교회당을 짓는데 헌금하라는 것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성전을 짓는다는 대의명분을 내세우는 것이 교인들의 헌신과 자원을 끌어내는 데 훨씬 더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성전건축이 한국교회에 미친 심대한 폐해는 교인들의 관심과 에너지를 매우 부차적인 일에 다 소진하게 하여 정작 그들이 해야 할 중대한 일에는 집중하지 못하게 했다는 점이다.
삼위하나님이 충만히 임재하고 다스리는 영적 성전을 짓는데, 교인 각자가 성령이 거하는 이동성전으로서 세상 속에 영적인 에너지와 빛을 발산하는 그리스도인으로 성숙하는데 심혈을 기울이지 못했다.
그동안 한국교회의 주된 관심과 사역은 ‘모여라 돈내라 교회당(성전) 짓자는’ 말로 압축된다는 어느 목사의 말이 아주 터무니없는 말만은 아닐 것이다.
많은 대형교회들은 70-80년도 영적추수가 한창일 때 태동되었습니다. 그렇게 거둔 영적수확으로 자체교회 몸집 불리기에만 매진하지 않고 적당한 교회 사이즈로 분립해서 교인들을 이 사회의 빛 된 역할을 하는 성숙한 교인들로 양육하는데 주력했다면 지금의 한국교회 상황은 완연히 달라졌을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선배 목사들에게 갖는 아쉬움입니다. 교회 건물은 최대한 소박하게 그러나 그 안은 말씀과 성령이 충만한 교회로 발전했어야 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보다는 인간의 야심이 앞서 교회를 대형화하고 그 교두보로 성전을 짓는데 열을 올려왔다.
지금까지 의식이 있는 목사들도 교회의 대형화에 대해 너무 미온적으로 대처함으로 결국 대형화가 낳는 폐단을 답습해왔다. 복음주의 4인방이라는 목사들마저 한국교회가 지향해야 할 모범적인 교회상을 제시하지 못하고 세속화의 물결을 따라 대형화의 추세에 편승하고 말았다.
옥한흠 목사나 하용조 목사도 자신들은 결코 대형화를 추구하지 않았다고 했다. 자신들을 찾아오는 양들을 뿌리칠 수 없어 그들을 섬기다보니 대형교회가 되었다는 것이다.
옥한흠 목사는 교회를 대형화한 과오를 솔직히 인정하여 개혁정신이 투철한 목사로 알려졌지만, 그가 왜 그런 잘못을 알면서도 적극적으로 개혁하려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는지 매우 유감스럽다. 그는 대형교회의 문제를 일깨워주어 교인들을 계몽시키려고 하지도 않았고, 분립 개척 같은 것을 전혀 시도하지도 않았다. 대형화는 그에게 성공한 목사라는 계급장을 붙여주었고 그 유명세를 입고 그는 개혁적인 목사인 것 같은 포즈까지 멋지게 취해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목사라는 존경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결정적인 순간에 그동안 취해온 개혁적 목사라는 제스처를 접고 2천 억짜리 교회당 건축을 교인들에게 독려하는 일에 참여하는 이율배반적인 행동으로 한국교회를 크게 실망시켰다. 고인이 된 분을 이렇게 혹독하게 비판하는 것이 죄송스러운 일이지만 한국교회의 미래를 위해 이쯤에서 한 번 집고 넘어가야 할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 분들이 한국교회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대형교회를 이루는 것이 목회 성공의 척도라는 은연중의 암시가 한국교계에 편만하게 퍼지는데 톡톡히 한 몫 하였고, 그래서 한국 교회가 하나님 나라의 가치관보다 세상의 가치관에 의해 휘둘리는 것을 막아내기보다 오히려 기여한 것이 아닌지 의문스럽다.
그들이 존경받는 목사들이었기에 어쩌면 한국교회에 미친 선한 영향 뒤에 가려진 무형적인 해악도 컸을지 모른다. 젊은 목사들에게 그들의 아쉬운 발자취를 따르도록 상당한 영감을 불어넣었기 때문이다. 많은 목사들이 별 비판의식 없이 그들의 목회 방식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그들의 후임 중에는 무한 대형화를 추구하는 이도 있다.
이제는 그들의 한계를 뛰어넘어 한국교회에 참된 교회상을 보여주는 목회자들이 많이 등장해야 할 것이다. 이 땅에서 성공한 목사라고 인정받으려는 현세지향적인 목회비전을 십자가에 못 박고 비록 이 세상에서는 실패한 것처럼 보이고 무명해도 하나님께 인정받으려는 내세지향적인 비전을 가지고 목회하는 이들이 참으로 종말의 영인 성령에 사로잡힌 사람들이다.
이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지극히 영광스러운 하늘에 속한 이들이다. 다행히 이렇게 이름 없는 목사들이 이 땅의 도처에 많이 숨어있다는 사실이 한국교회의 희망이며 영광이다.
박영돈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