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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그를 활로 쏴 죽이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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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그를 활로 쏴 죽이겠다"



물에 빠져 아무도 도와주는 사람이 없고 죽음을 의식하며 물속으로 가라앉는 경험이 아니면 죽음의 공포를 경험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물에 빠졌던 경험이 있으면 어른이 되어서도 물에 가기를 꺼려한다. 내가 경험한 교통사고 또 기적이라고 말하는 큰 수술, 의사도 포기했던 절망의 상황에서도 죽음의 공포를 경험하지 못한다. 의식이 돌아 온 뒤에야 내가 죽었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사랑의 주님은 죄인 된 우리에게도 죽음의 공포가 어떤 것이지 경험하게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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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사가 떨어지면 당신이 안고 먼저 떨어지세요! 그래 알았어. 나도 그렇게 하려고 해!"  절규하듯 말하는 제자 이내와 아내 쥬니의 대화는 지금도 우리의 가슴에 남아 있다. 한번도 백인이 들어가지 않았던 구사라는 마을을 방문할 때 아내 이민아 선교사가 산사태로 강이 흐르는 20여m 절벽에 매달려 목 놓아 울 때 제자 이내 부부의 애절한 대화다.


칠흑처럼 어두운 밤, 부족을 찾아 갈 때 30여m 강 위에 놓인 외줄 다리가 심하게 흔들리고 폭우로 인해 미끄러워 걸을 수 없었다. 두려움 때문에 온 몸을 두 손과 팔의 힘으로 지탱하며 얼마나 밧줄을 꽉 잡고 문지르며 건넜는지 손에서 피가 흐르는 줄도 몰랐던 때 죽음의 공포와 두려움이 어떤 것인지를 경험하게 하셨다. 


우리 경험으로는 극한 공포와 두려움을 만나면 주님을 찾을 능력도, 기도할 생각도 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가 산사태 지역을 건넌 후, 좌우로 흔들리는 줄다리를 건넌 후 안전하다는 것을 알고 나서야 "주님 감사합니다"라고 기도할 수 있었다. 죽음의 공포는 경험하지 않고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나는 그런 죄인이다.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죽음의 공포를 경험하게 하셨으며 그 경험은 부족 형제들의 생각과 삶을 알고 복음을 전하는 데 큰 도움이 되고 있다.


살아계신 아버지 하나님! 이 죄인에게도 공의의 하나님을 만나는 축복을 허락하시옵소서. 말씀 앞에서 두려워하기를 소망하나이다. 말씀을 관념 속에 제한하고 있는 죄를 용서하옵소서! 부족 형제들을 바라보며 내가 얼마나 말씀을 주신 하나님의 뜻과 다른 삶을 살고 있는지 알게 하시고 자복하게 하셨다.


죽음의 공포에 두려워하는 부족 형제들에게 구약의 말씀 속에서 계시하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연대기적이며 구속사적으로 성경을 통해 하나님이 자신을 계시하신 것을 가르쳤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셨다는 사실을 가르칠 때 그들은 기뻐하며 기대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셨다고 전했을 때 모두 분노하며 마치 자신들의 부모가 죽은 것같이 울기도 하며 침울해했다.


한 청년이 분노한 얼굴을 하고 찾아와 "누가 우리의 유일한 희망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서 죽였는가? 내가 활로 쏘아 죽여 버리겠다"고 하며 슬픔과 분노를 억제하지 못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가치가 땅에 떨어지고 무엇이 참된 진리인지도 분별하기 힘든 혼동된 일이 일어나도 옳고 틀림을 분별하지 못하며 의의 분노를 상실한 세상에서 한 부족 청년의 분노를 바라보며 오늘도 나의 죄로 인하여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죽어야만 살아갈 수 있는 죄인임을 자복한다. 


주님께서 무덤에서 사흘 만에 부활하셨음을 가르치자 모든 형제들이 흥분하며 기뻐했다. 기뻐하는 그들에게 "여러분이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가 십자가에서 여러분의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믿습니까? 만약에 믿는다면 여러분이 죄로 받아야 할 심판과 형벌은 용서받았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생애에 한 번도 죄를 범하지 않은 것처럼 깨끗해졌습니다"라고 전하자 서로 일어나 기뻐하며 간증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동안 악령에 속아 머리를 땅에 대고 자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오늘부터 땅에 머리를 대고 잘 수 있습니다. 두렵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나의 죄를 용서하셨으며 나에게 악령에게서 자유함을 주셨습니다"라며 청년은 머리를 땅에 대고 잠을 잔다. 얼마를 두려움에 살았을까?


부족 남자는 절대로 여자를 돕지 않는다. 몇 명의 여자를 데리고 있어도 절대로 가정을 이루고 돌보지 않던 남자들이 가정을 세워가는 모습을 보면서 가정이 믿음의 중심임을 알게 된다. 부부가 서로 손을 잡고 우리 집에 내려와 사랑을 표현한다. 아내의 무릎에 누워있으면 아내는 남편의 머리에 이를 잡아준다. 이런 모습은 결코 이전에 없었던 일이다. 절대로 협력하며 일하지 않던 그들이 서로 도우며 일을 한다.


마약을 하고 악령을 믿고 두려워하며 악한 풍습을 따르던 형제들이 구원받고 자유함을 얻고 기뻐한다. 사람을 몰래 죽이던 르브세계 제도 때문에 언제나 두려워하던 부족 형제들이 두려움에서 자유함을 누리고 기뻐한다. 여자들이 들어가지 못하던 남자의 집은 점점 권위를 잃어가고 축소되어간다. 새의 영을 흉내내며 피리를 분다. 여자들이 새의 영의 소리가 아니라 남자들이 피리를 분다는 사실을 알거나 누설하면 목을 졸라 죽이던 풍습도 점점 머리를 숙인다. 변화되는 형제들을 바라보며 살아계신 하나님, 십자가의 보혈의 능력을 본다.


"오데바나! 네게 미히게 나가이."(하얀 사람! 내가 너무 배가 고파 죽겠습니다) 어둑해지는 저녁에 정글에서 올라온 부족 청년이 배가 고프다는 말을 듣고 의심을 가졌다. 왜냐하면 정글에는 남의 밭들도 있고 언제나 먹을 것을 구하려면 쉽게 훔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나에게 먹을 것을 요구하고 있구나'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청년이 말하기를 "정글에서 배가 고파 남의 밭에서 훔쳐 먹으려고 했는데 하나님의 말씀이 생각나 옳지 않은 행동이라고 생각이 돼 그냥 올라왔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형제의 이야기를 듣고 내가 죄악돼 선입견과 편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하셨다.


때로는 나의 지식과 생각과 경험과 자라온 문화와 그 문화의 가치관과 윤리 도덕은 편견을 만들 뿐 복음을 전하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부족의 형제들에게 훔친다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며 기회가 있을 때 훔치지 못하는 것은 기회를 놓친 것에 불과하다. 더군다나 정글에서 배가 고파 남의 고구마를 훔쳐 먹는 것은 당연하며 아직까지 아무도 문제삼지 않는 일이었다. 이런 문화 속에서 살아온 형제가 양심을 통해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에 순종하고 올라와 배가 고프다고 한다. 아버지, 이 죄인을 용서하시고 이 형제를 축복하옵소서. 아멘.


● 문성 선교사


문성(60) 선교사는 아내 이민아 선교사와 함께 20년째 파푸아뉴기니 선교를 하고 있다. 지병 박리성 대동맥류 때문에 인공동맥을 차고 있다. 선교지 코라 부족은 식인을 할 정도로 원시적이다.




인격적 신앙이 필요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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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격적 신앙이 필요한 이유


 

요즘 여러 곳에서 신비주의 신앙이 기승을 부리고 있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최근에 몇몇 분들에게 질문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기독언론사들도 기사를 다루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신사도 운동입니다. 


피터 와그너를 통하여 확산되어진 신사도 운동은 토론토 블레싱으로 유명하였던 빈야드 운동의 연속선상에 있습니다. 이들이 가진 공통점이 있다면 직통계시를 강조합니다.


사도 시대와 같이 오늘날에도 동일한 의미에서의 계시가 이루어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예언과 치유에 큰 중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직접적으로 부어주시는 은혜를 누리는 것은 얼마나 신이 나는 일입니까? 하나님으로부터 직접적으로 말씀을 받고, 음성을 듣고 예언을 할 수 있다니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으며 마치 새로운 세대가 오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거기에 20여년전부터 유행하였던 뉴에이지와 프리메이슨에 대한 케케묵은 이야기를 통하여 종말에 대한 위기를 조장하고 있는 이들도 새로운 세대에 동참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마치 유행 따라 살 듯이 많은 사람들이 시대의 유행에 흔들려 이리저리 떠다니고 있는 모습을 봅니다. 물론 조심해야 될 것이 있습니다. 특별히 거짓된 문화가 범람하고 있으며, 사악한 집단들이 세워지는 시대에 그리스도인들이 바르게 깨어있어야 함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가짜를 밝히기 위하여 가짜를 찾아내는 것은 비효율적입니다. 오히려 진짜를 바르게 알고 있어야 가짜를 분별할 수 있습니다.


신사도와 문화적 종말론에 또 다시 휘둘리는 교회를 볼 때 참으로 가슴이 아플 지경입니다. 도대체 언제까지 이러한 모습에 장단을 맞추어야 하는지 슬프기 짝이 없습니다. 도대체 이러한 일이 반복되는 일은 무엇입니까? 본질을 상실하면 유행에 따라 신앙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본질이 바로 세워지면 유행을 쫓아다니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본질적 신앙이 무엇입니까? 본질적 신앙은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알려주신 그 가르침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우리에게 주신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인격적인 존재로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는 하나님의 인격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격을 외면한 신앙은 결코 온전한 신앙이라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인격을 통하여 하나님의 비밀을 알려주셨습니다. 그 비밀은 미완성이 아닙니다. 완전합니다. 더 이상 다른 것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다른 것이 필요하다면 예수님은 헛되이 죽으셨습니다. 그 비밀은 바로 성경입니다. 


성경은 완성된 계시입니다. 전지하신 하신 하나님께서 모든 세대의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성경을 남겨주셨습니다. 우리는 말씀에 따라 살기만 하면 됩니다. 우리의 구원과 하나님 나라의 영광은 성경 외에 다른 것이 필요치 않게 하셨습니다.


성경 외에 다른 것이 필요하다면 또 다른 예수님도 필요하게 됩니다. 교회의 역사에 단 한번도 새로운 사도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와서 신사도를 보내실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성경의 신앙입니다. 성경이 우리의 신앙과 삶의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성경을 통하여 참된 것과 거짓 된 것을 구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주어졌다는 것은 우리가 인격적인 존재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특별히 역사적이고 신앙고백적 신앙을 견지하지 않는다면 인격적 신앙이 아니라 신비적 신앙으로 떨어지고 말 것입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기도가 필요한 것이지 신비적인 신앙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주신 말씀의 뜻을 바르게 분별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 새로운 계시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말씀이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지가 중요하지 예언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역사적이고 신앙고백적 신앙은 인격적 신앙이지 샤머니즘 신앙이 아닙니다.


정말 하나님의 교회가 다시 회복되고 건강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 땅 가운데 실현하고 장차 올 하나님의 나라를 맞이하고자 한다면 샤머니즘 신앙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리고 인격적 신앙으로 자라야 합니다. 인격적 신앙으로 자라지 않으니까 교회의 거룩함과 능력이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 시대가 더욱더 필요로 하는 것은 바로 인격적인 신앙입니다.

 

신동식 목사

개혁주의 신앙의 핵심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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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주의 신앙의 핵심 사상



 개혁주의 신앙의 핵심 사상은 다섯 가지이다. 그 다섯 가지란, 1. 오직 성경(Sola Scriptura) 2. 오직 그리스도(Solus Christus), 3. 오직 믿음(Sola Fide), 4. 오직 은혜(Sola Gratia), 5. 오직 하나님에게만 영광(Soli Deo Gloria) 등인데, 이제 하나씩 설명해 보도록 하자.



  첫째, 오직 성경 (Sola Scriptura)


  개혁주의 신앙은 모든 것이 성경 중심이다. 설교도, 예배도, 찬송도, 교회 행정도, 친교도, 개인의 직장이나 가정 및 사회생활도 모두가 성경의 가르침에 따른다. 성경 이외의 어느 문헌도, 어느 권위도, 성경과 같은 위치에 놓을 수 없다. 


천주교에서는 <교황은 지구상에서 그리스도의 대리자>라는 교리를 가르친다. 그들은 교황의 권위가 성경의 권위보다 위에 있다. <교황의 무오설>을 주장한다. 성경 해석도 교황이 해석한 것이 절대적이라고 믿는다. 또한 그들은 전통을 중요시 한다. 


그러나 개혁주의자는 목사나 신부나 교황이 성경을 해석하는 것이 아니고 <성경은 성경 스스로가 해석한다>고 믿는다.  다시 말하면 <성경이 유일한 최고의 권위이며 성경은 성경으로 해석하며>, 어느 인간도 결코 독단적으로 해석함을 용서치 않는다. 그러므로 개혁주의자들은 성경공부, 특히 catechism(요리문답) 공부에 집중한다. 


개혁주의자는 <성경 기록 당시 사용되었던 특별계시의 방법은 이제 종결되었다>고 믿으며, 어떤 <직통계시>도 인정치 않는다. 하나님은 신구약 66권을 통해서 인류의 구원에 필요한 말씀을 모두 충분히 주셨다고 믿는다. 즉 성경의 필요성과 함께 개혁주의 신앙은 <성경의 충족성, Sufficiency of the Scripture>를 믿는다. 


“성경의 충족성을 믿는다”는 말은 상당히 중요하다. 오늘날, 많은 기독교 교파에서는 <성경의 충족성>을 믿지 않는다. 성경의 충족성을 믿지 않으면, 직통계시, 환상, 입신, OBE(Out-of-Body Experience), NDE(Near-Death Experience) 등을 따르게 되어 성경만을 인정치 않고 성경 이외에 다른 것들을 인정하게 된다. 고로, 성경에 다른 것을 보태는 결과가 된다. 


오늘날 교계에는 이런 현상이 아주 유행이다. 우리 주변을 살펴보면 당장 입증이 되는 이야기이다. New Age와 Postmodernism의 물결이 교회에 무서운 속도로 파고드는 지금의 이런 현상은 더욱더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되어 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것은 개혁주의<Sola Scriptura, 오직 성경>의 사상에 위배된다. 



  둘째, 오직 그리스도 (Solus Christus) 


  개혁주의 신앙은, <오직 그리스도> 사상을 믿는다. <성령이 중심이 아니다>. <마리아가 

중심이 아니다>. <직통계시가 중심이 아니다>. <그리스도 중심이다>.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어 주신 분은 바로 예수 한 분이다. 마리아가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어 준 일이 없다. 누가복음 1:41절 이하에 읽어 보면, 마리아도 예수를 <아들>이 아닌 <구세주>로 보았다. 마리아도 죄인이고, 교황도 죄인이고, 목사도 죄인이며, 아담의 후손치고 죄인 아닌 분은 없다. 


그리스도는 성령으로 잉태되어 동정녀의 몸에 탄생하여 성육신하였고 우리와 같은 성정을 갖고 계셨지만, 죄는 없으신 분이다(고후 5:21). 어떤 분은 성령을 강조한다. 이 역시 잘못 된 교리이다. 개혁주의 신앙은 <오직 그리스도>를 주장한다. 예수님도 하나님이며, 성령도 하나님이며, 성부도 하나님이시며,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이 세분 계심이 아니요, 한 분 하나님에게 삼위가 계신다. 이것은 창세기 1:26, 마태복음 28:19, 고린도후서 13:13 등이 입증한다. 


성령이 누구를 증거 하는가? 요한복음 14:26이나 요한복음 15:26절을 읽어 보라. <성령은 그리스도를 증거한다>. 사도행전 1:8에는 그리스도가 승천하면서 하신 말씀을 기록하는데, “성령이 임하시면 세상 끝까지 복음을 전파하다가 <순교하리라>”고 가르친다.  거기서 <증인이 되리라>란 말은 원문에서 <순교하리>의 의미이다. 


성령을 받은 증거가 무엇인가?  성령을 받은 증거는, 죽도록 전도하는 것이다(사도행전 1:8 참고). 그러기에 16세기의 Scotland나 Holland의 종교 개혁가들은 화형에 목숨을 잃으면서도 <오직 그리스도>를 외쳤다. 오직 성령을 외친 것이 결코 아니다. 



  셋째, 오직 믿음 (Sola Fide)


  개혁주의 신앙은 <오직 믿음>을 믿는다. 믿음은 우리에게서 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선물이다(엡 2:8). 우리가 구원을 얻는 것은 오직 믿음을 통해서 이뤄진다. 믿음은 그 자체가 agent가 아니라 means이다. 구원을 얻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이뤄지는데, 믿음이란 그 은혜를 받는 방편(means)인 것이다. 믿음이란 <무엇을 보고 믿는 것이 아니고 보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믿는 행위>이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으로부터 그의 자손들이 바다의 모래처럼, 하늘의 별처럼 창성하리라는 약속을 받았지만, 히브리 11:13절 이하에 의하면 그 약속이 먼 훗날 이뤄질 것을 의심 없이 믿고 눈을 감았다. <믿음이란 이적이나 기적을 보고 믿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고후 5:7). 그러므로 이적과 기적에 관심을 갖고 신앙 생활하는 사람은 개혁주의 신앙가가 아니다. 



넷째, 오직 은혜 (Sola Gratia)


개혁주의 신앙은 <오직 은혜>를 믿는다. 우리가 구원을 얻는 것이나 살아가는 모든 복은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에 기인한다고 믿는다. 


천주교에서는 이른바 “여공(餘功, supererogation)이라는 것이 있다. 천주교에서는 사람이 구원을 얻는 것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되어진다고 믿지 않는다. 인간의 공로가 필요하다고 믿는다. 사람마다 교회를 위해서 <어느 정도의 공>을 세워야 하는데, 구원 받기에 충분한 공보다 초과한 공을 “여공” 이라고 한다. 이 “여공”은 교회에 예치(deposit) 되었다가 나중에 믿음이 약한 다른 사람에게 성찬식을 통해서 공급된다고 가르치는데 이것이 이른바 supererogation의 교리이다. 


그러나 이에 반하여 종교 개혁가들은 <Sola Gratia>를 외쳤다. <오직 은혜>란 뜻이다. 구원은 100퍼센트 하나님의 은혜로만 되어지는 것이며 인간의 노력은 조금도 가산되지 않는다. 지금도 율법을 지켜야 구원을 얻는다든지, 십계명을 지키지 못하면 구원을 얻지 못한다든지, 어떤 공로를 이루어야 구원에 가산된다고 가르치는 것은 모두 개혁주의 신앙이 아니다.


우리가 십계명, 즉 도덕법을 지킬 의무는 있으나 그 도덕법을 완전히 지킬 인간은 없다(갈 2:16, 롬 3:20). 도덕법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능동적 순종(active obedience)으로 모두 우리를 대신하여 완전히 지켜 주셨다. 이것은 우리가 도덕법을 지킬 필요가 없어졌다는 말이 아니다. 그 도덕법을 지키다가 완전히 지키지 못하여 지옥에 내려갈 형벌로부터 자유를 얻었다는 말이다. 이것을 잘 못 이해하기 때문에 소위 <도덕 폐기론, Antinomianism>이 나와서 교인들을 오도하고 있다.  


그들은 말하기를 <그리스도가 계명을 모두, 완전히, 우리를 위해 지켰으니 우리는 그런 도덕법을 지킬 필요가 없고, 마음대로 죄를 지으며 살자>라고 주장한다. 이것은 명백히 개혁주의 신앙도 아니며 극히 비성경적인 신앙이다. 시편 119편을 읽어 보라 특히 119:105을 읽어 보라.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다”라고 했다. 무슨 말인가? 성경 말씀은 내가 인생을 살아갈 규범(Norm, 規範)이란 말이다. 또한 119:109을 읽어보라. 성경이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가? 요컨대 시편 119편 전체가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그렇게 실천하며 살아가는 것이 <성도의 생활강령>임을 가르쳐 준다. 신약성경 요한복음 14장에도 15, 21, 23, 24 절 등을 보라.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요 나의 제자라”고 주님이 직접 말씀 하시지 않는가? 



다섯째로, 오직 하나님에게만 영광 (Soli Deo Gloria)


끝으로, 개혁주의 신앙의 핵심교리는 <Soli Deo Gloria, 오직 하나님에게만 영광>이라는 사상이다. 우리의 생명 전체가 주님의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아 태어났고, 하나님의 예정 속에 택함을 입어 사탄의 종으로부터 하나님의 종으로 변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아무 공로 없이 하나님의 은혜로 <의롭다>함을 얻고 하나님의 권속이 되었다.


그렇다면 우리 인생의 <최고의 선, summum bonum, the highest good>은 조물주 하나님만 공경하고, 섬기며, 그에게만 영광을 돌리고,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다(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대, 소 요리문답 제1문 참고). 이것은 예수를 믿는 사람이건 믿지 않는 사람이건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피조물인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탓에(창 2:7), 반드시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가야 한다. 


인생의 목적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고, 직업을 택하는 것도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기 위함이며, 학교를 택하는 것도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기 위함이며, 인생의 모든 것이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는 생활이다.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21세기 기독교 교계에서는 이런 생활은 극히 찾아보기 드물다. 그러나 16세기 종교개혁기의 유럽의 화란이나 Scotland, Hungary 등에서는 성도들이 그렇게 살았다.


이 말은 천주교에서 마리아를 숭배하는 것을 반대하는 의미도 들어 있다. 천주교에는 예배의 종류가 셋이다. doulia, hyperdoulia, latreia 등 세 가지이다. 천사나 성자들에게 예배하는 것이 <doulia>이다. 이들은 천사도 경배하고 천주교를 믿다가 순교한 사람이나, 그 외에 공을 많이 세워 성자(saint)로 추인 받은 사람을 경배한다. 성경에서 <성도>는 예수님을 생명의 구주로 믿는 분, 즉 중생한 분을 지칭하지만 천주교에 있어서 <성자>란 전혀 다른 개념을 가지고 경배의 대상이 된다. <hyperdoulia>란 마리아를 경배하는 것이다. 이들은 마리아를 경배의 대상으로 알고 경배한다.  끝으로, <latreia>는 성삼위 하나님을 경배하는 예배이다.  


개혁주의는 오직 성삼위 하나님에게만 경배하고 그에게만 순종하며 다른 이들에게 예배하는 것을 엄금한다. 칼빈이 목회하던 제네바에는 <십자가>도 없었고, <예수님의 사진>이나 <예수님의 십자가 성상>도 없었다. 중앙에 강대상 하나만 놓고 한 시간씩 성경 중심으로 성경을 성경으로 해석하는 설교로 회중에게 큰 은혜를 더하였다. 오늘의 대부분의 교회의 설교와는 천양지차이(天壤之差異)가 있다. 

[2012-07-15] "행복한 자의 삶"

[2012-07-08] "주님 주신 아름다운 세상"

[2012-07-15] "주여 나의 모든 것을"

세계에서 가장 큰 교회(뉴에이지)의 전도사 오프라 윈프리

지옥에 갈 목사들은 과연 누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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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에 갈 목사들은 과연 누구일까?



대형교회 담임목사와 신학교 교수를 역임했던 이가 '내가 본 천국과 지옥'이란 책을 썼다. 자신이 특별한 체험을 했으면 혼자만 간직했으면 좋으련만 분별력이 흐려졌는지, 그렇지 않아도 천국과 지옥에 대한 괴담으로 몸살을 앓고 있는 한국교계에 혼란을 더 부채질하고 있다. 


정통신학을 연구한 교수가 그런 책을 냈으니 황당한 얘기를 해대며 복음을 혼잡하게 하는 이들에게 큰 지원군이 되어 준 셈이다. 여기서 그 책의 문제점을 지적하려는 것이 아니고 그 책에 기록된 한 내용을 화두로 삼고자 함이다. 


그 목사는 지옥에서 유명한 목사들을 봤다고 했다. 전혀 그 진위를 확인할 방법이나 객관적인 근거가 없는 말이지만 상당히 호기심을 자극하는 얘기이다. 지옥에 갈 목사는 과연 누구일까? 지금 한국교회를 보면 지옥에 갈 목사들이 꽤 많은 성 싶다. 의외로 교인들로부터 존경받던 목사들도 거기 있을지 모른다. 나를 비롯한 모든 목사들은 그 후보자 명단에서 제외되지 않을 것이다. 평생 하나님 말씀을 전하고 목회사역으로 수고하고도 지옥에 가는 목사는 어떤 사람일까? 그런 일이 실제 가능한 것인가? 이에 대한 신학적인 근거라도 있는 것인가?


가장 탁월한 청교도 신학자로 알려진 존 오웬은 그의 저서에게 이 문제를 심도있게 다루었다. 오웬에 의하면 교회에는 궁극적인 구원을 위해 선택된 이들이 있는 반면 일시적인 교회 사역을 위해 선택된 이들이 있다. 그래서 결국 구원에 이르지 못할 사람도 히6:4-6절의 말씀처럼,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 성령에 참여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목회사역을 잘 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은혜체험은 그들을 진정으로 회심하게 하고 구원에 이르게 하지 못한다. 영원한 생명을 보장하는 은혜를 받지 않고 성령의 은사만을 받고 교회 사역을 하는 이들도 이런 정도의 은혜를 체험할 수 있다는 것이다.


히 6:4-6 절 말씀은 매우 난해하며 논란의 여지가 많은 구절이다. 이 말씀을 구원의 은혜를 받은 이들도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타락할 수 있다는 알미니안적인 교리를 지원하는 성경적인 근거로 삼기도 한다. 곧 이 말씀은 실제로 일어날 수 없는 가상적인 위험을 경고하기 위한 목적으로 쓰였다는 것이다. 


이런 견해들은 특정 교리적 입장을 본문에 투사해서 해석한 것이다. 이 본문을 진정으로 거듭난 이들도 버림받을 수 있다는 주장의 증거 구절로 삼는 것은 성경 전체의 진리와 상충되는 해석의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역으로 이 말씀을 정통 구원론의 틀에 무리하게 뜯어 맞추려는 시도는 이 본문의 진정한 의미를 왜곡시켜 단순히 가상적인 위험만을 언급한 것으로 보는 우를 범하고 만다.


오웬의 견해는 이런 오류들을 지혜롭게 피해간다. 그는 이 문제를 이중적인 선택의 관점에서 풀려고 하였다. 결국 버림받을 목사는 구원을 위한 선택(the election for salvation)이 아니라 사역을 위한 선택(the election for function)만을 받은 것이다. 곧 그들은 심령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켜 궁극적인 구원에 이르게 하는 은혜 없이 사역을 위한 은사만을 받았다는 말이다. 


이 같이 오웬은 성령의 은혜(grace)와 은사(gift)를 구별하였다. 성령의 은사는 성령의 은혜와는 달리 그 수혜자의 중생과 성화를 보장하지 못한다. 성령의 은혜와 은사는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둘 다 목회자에게 필수적이지만, 은혜없이 은사만 받아 사역하는 것이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것이다. 오웬은 구원에 이르지 못할 사람도 성령의 은사에 참여할 수 있다고 봄으로 성령에 참여하고도 타락할 자가 있다는 히브리서의 말씀을 액면 그대로 이해하는데 별 어려움이 없게 하였다.


이렇게 은사와 은혜를 이원론적으로 구별하는 것은 여러가지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그럼에도 오웬이 이런 논리를 고수한 것은 교회 역사에 만연하게 나타나는 배도의 현상을 설명하려는 시도와도 깊이 연관된다. 왜 뛰어난 은사를 가졌던 많은 사역자들이 타락하는 비참한 말로를 맞이하는가?  앞에서 살펴 본 것 같이 오웬은 선택과 은혜와 은사를 이중적 관점에서 봄으로 이에 대한 적절한 설명을 가능케 하였다.


우리는 어떤 이가 한 때 성령의 감동을 받고 사역에 은사가 나타나면 그는 당연히 중생하고 구원받은 사람이라고 쉽게 생각해 왔다. 그리하여 히브리서6:4-6절 같은 말씀을 무의미하게 만들어 그런 말씀이 주는 강력한 경고의 메시지가 목사들과 교인들에게 경종을 울리지 못하게 하였다. 그


러나 오웬을 비롯한 청교도 신학자들, 그리고 조나단 에드워즈는 그런 은혜 체험이 반드시 회심을 동반하지 않으며 구원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곧 그런 은혜를 체험하고 한 동안 교회를 위해 열심히 일하다가도 타락하여 영원히 버림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이들도 상당한 성경진리와 신학적인 지식을 터득하여 남들을 잘 가르치며 탁월한 설교의 은사를 받아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주고 유익을 끼치기도 한다. 그러나 남에게 전파하고 자신들은 결국 버림받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은혜없는 은사는 사역자를 더 깊은 파멸의 수렁에 빠트릴 수 있다. 그가 하는 거룩한 일이 그를 더욱 타락하게 만든다. 거룩한 것에 타성이 붙어 그에 대한 모든 경외심을 잃어버리고 하나님을 모두지 두려워하지 않는 목사가 된다. 그가 전하는 생명의 말씀이 그의 심령을 점점 더 강팍하게 한다. 복음의 약효에 완전히 면역이 되어버린 화인 맞은 심령이 되어버린다. 결국 회개가 불가능한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성직자 중에 가장 사악한 인간이 나온다. 상당한 성령의 은사에 참여했던 자들 중에서 도저히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완악해지는 이들이 나온다는 것이다.


주님은 휘어진 막대기도 사용하신다. 헛된 영광을 구하는 그릇된 동기로 일하는 이들도 사용하여 당신의 자녀들을 유익하게 하신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을 사용하신 후에는 버리실 수 밖에 없다. 그들은 주님을 자신의 헛된 영광을 위해 이용하려 했으나 주님은 누구도 이용가치로 대하지 않으신다. 주님은 우리가 주님과의 깊은 사랑의 교제에서 우러나오는 봉사를 하시기를 원하실 뿐이다.


오웬의 가르침에 따라 진단해 본다면, 버림받을 목사들이 한국교회에 얼마나 될까? 혹 우리 자신이 이런 부류에 속하지는 않았는지 심히 두려워해야 할 것이다. 이런 목사들의 두드러진 특징은 사역의 은사와 능력은 나타나지만 삶과 인격에 열매는 없는 것이다. 


은사가 뛰어날수록 열매 없음이 교묘히 위장될 수 있다. 설교의 은사가 탁월할수록 교인들을 감동시키는 위력이 있기 때문에 더 고차원적으로 자신을 경건하고 영성이 풍성한 이로 가장할 수 있다. 계속 말씀을 은혜롭고 열정적으로 전하다보면 자신이 말씀과 성령의 사람이라는 착각속에 빠지기 쉽다. 그러므로 은사가 오히려 자기기만의 위력을 배가하는 역기능을 할 수 있다.


또한 그런 목사들은 은사를 활용하여 주님을 섬기기보다 성공한 목사라는 명성과 영광을 얻는 것에 더 마음을 쏟는다. 성령의 은사를 하나님의 영광보다 육신의 부패한 욕망을 성취하기 위한 도구로 오용하는 것이다. 


이런 목사들은 영적인 에너지를 자기중심적 추구를 위해 모두 소진하기에 외적으로 많은 것을 성취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내면세계는 황폐해진다. 목사들이 목회성공과 자신의 명예에 그토록 집착하는 것은 그들의 영혼이 매우 공허하다는 분명한 반증이다. 


목사가 영광의 주님과 교제하며 주님을 섬기는 자체로 만족하고 즐거워하지 못하고 이 땅에서 꼭 성공해야만 행복하고 만족할 수 있다면 그의 영혼은 심히 병들어 있다는 증거이며 거기서 돌이키지 않으면 그도 버림받을 목사의 말로를 걷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


박영돈 목사


엄청난 배교와 종교 통합의 실제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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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청난 배교와 종교 통합의 실제현장....



예일대학이 주도하여, 릭 워렌(목적이 이끄는 삶) 과 그외 많은 목사들(조용기 목사 포함) 과 많은 신학교(풀러 신학교 포함) 그리고 많은 교단들이 서명한바, 알라신과 여호와를 동일시하며 그의 새이름을 ChrisLam(크리스램: Christian+Islam)으로 부르기로 한 서류에 서명했읍니다.



Rick Warren, Chrislam and the Yale University Covenant


*듣기:  이곳을 그냥 클릭해 주시기 바랍니다.


* 다운로드를 받으시려면, 마우스 오른쪽 버튼으로 클릭하신 후 "Save Link As" 혹은 "Save Target As"를 선택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MORIEL MINISTRIES - April 6, 2012 
Rick Warren has joined anti Israel activist Colin Chapman, heretical Emergent church guru Brian McLaren, apostate positive thinking church marketing demagogue of the now bankrupt Crystal Cathedral Robert Schuller, and Korean advocate of a hybrid of Christianity and mystical Buddhism Yonggi Cho as a signatory of the Yale Chrislam document identifying YHWH the God of Israel and the Judeo Christian scriptures with the ancient Nabatean moon god allah of Islam. 


I NOW HAVE THE OFFICIAL YALE UNIVERSITY COVENANT SIGNED BY RICK WARREN. This is proof positive that he is a signed partner in promoting the Covenant between Islam and our Jehovah God as one God now named "Chrislam". I'm simply printing for you the entire covenant and coping his and other name from this document. Below is the exact list directly from the web page itself. Please note the underlined names mentioned here, and on the radio program: Robert Schuller, Rick Warren, Brian D. McLaren and David Yonggi Cho. Check the list for other names you might be familiar. There are hundreds of ministers that may include your Pastor or leaders in your denominations. Check the large list of names on this official list from Yale.http://www.yale.edu/faith/acw/acw.htm


While thousands of Arabs and former Islamic believers are coming to Christ and experiencing forgiveness and the "New Birth" by the Cross-, American Apostate ministers are turning to Chrislam. Say what you please, but the Bible has made it plain, "seeing they crucify to themselves the Son of God afresh and put Him to an open shame." (Hebrews 6:6b) This crowd, unless they repent with great sorrow will spend eternity in a "devil's hell". 


Originally posted on the MORIEL website
http://moriel.org/MorielArchive/index.php/discernment/islam/rick-warren-chrislam-and-the-yale-university-covenant



릭 워렌(Rick Warren), 크리슬램(Chrislam)과 예일대학교 언약(Covenant)

Moriel Ministry-April 6, 2012

릭 워렌 목사는 반 이스라엘 주의자인 콜린 챕프만과 이단으로 떠 오르는 교회 지도자인 브라이언 맥라렌과 배교한 긍정의 힘을 주장하는 파산한 수정교회 로버트 슐러 목사, 그리고 기독교와 신비 불교 둘 다 주장하는 한국의 조 용기 목사와 연합하여 예일 대학교의 “크리슬램”(Chrislam) 서류에 서명하였는 바, 이것은 이스라엘의 "여호와" 하나님과 기독교 성경을 이슬람의 고대 나바티안 “달” 신인 “알라”와 동일시 하는 서류에 서명한 것입니다.

지금 본인은 릭 워렌 목사가 서명한 공식적인 예일 대학교 Covenant를 가지고 있는 바, 이것은 “이슬람”과 우리 “여호와 하나님”을 “크리슬램”(Chrislam)이란 한 하나님의 이름으로 언약(Covenant)을 진전시키는 데 협력자로서 서명한 것이다. 본인은 여러분들을 위하여 전체 언약을 프린트 하고 있으며 이 서류로부터 그의 이름과 또 다른 이름을 복사할 뿐입니다. 아래의 웹 페이지에 나타난 명단이 있으니 여기에 거론된 이름들과 또한 로버트 슐러, 릭 워렌, 브라이언 맥래인과 다윗 조 용기 목사의 방송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또한 다른 이름들 가운데 알고 계시는 이름들을 확인해보시기 바랍니다. 여기에 수백명의 사역자들이 있는 바, 여러분의 목사나 여러분이 속해 있는 교단의 지도자들의 이름들도 있을지도 모릅니다. 예일 대학교 웹 싸이트 http://www.yale.edu/faith/acw.htm에 나와 있는 공식적인 수많은 명단들이 있으니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수천의 아랍인들과 전에 이슬람을 믿었던 사람들이 그리스도께 돌아와서 죄사함과 십자가에 의해 새로운 출생을 경험하고 있는데 반해, 미국의 배교한 사역자들은 크리슬램(Chrislam) 으로 향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말씀해 보세요, 성경은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는 그들이 스스로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박아 공개적으로 조롱함이라.”(히 6:6b) 이 무리들이야말로 엄청난 슬픔으로 회개하지 않으면 그들은 마귀가 들어갈 지옥에서 영원무궁토록 있게 될 것입니다.

***(이분들은 평생을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여호와)께로 올 사람이 아무도 없느니라.”(요 14:6)는 말씀을 수 천, 수만 번 전한 분들이 아닐까요? 그런데 어떻게 아들이신 예수를 부인하는 “달 신”(moon god) “알라”를 믿는 자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과 같다고 말씀하시는지 그들 안에 마귀가 들어있지 않고서야…그래서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 “너희 뱀들아, 독사들의 세대야, 어떻게 너희가 지옥의 저주에서 피할 수 있겠느냐?”(마 23:33)고 말씀하셨는지 이해가 갑니다)

Moriel 웹 페이지: http://moriel.org/MorielArchive/index.php/discernment/islam/rick-warren-chrislam-
and-the-yale-university-covenant


*참고사항

위에 있는 예일 대학교 웹 싸이트를 방문하시면 거의 대부분의 교단에 속한 사역자들이 이 배교한 예일대학에서 만들어낸 사탄의 작품에 서명한 것을 보시게 될 것입니다. 한국에서는 조용기 목사와 유니온 신학교에서 에큐메니칼을 가르치는 전 현경 교수가 포함되어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참고로 이 배교에 참여한 사역자들이 속해 있는 교단들은 다음과 같이 나타나 있습니다만 여러분들이 직접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성공회,아랍 침례교 신학교, 아프리카 개혁 교회, 복음주의자 협회, 에일 대학교, 바이올라 대학교, 프린스턴 신학교, 장로교, 유니온 신학교, 연합 감리교회, 버클리 신학교,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제슈잇 신학교, 풀러 신학교, 형제 교회, 빈야드 교회, 그리스도 교회, 루터란 교회, 수정교회 등등



복음의 동역자가 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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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의 동역자가 되라


골로새서 4:7-18
7   두기고가 내 사정을 다 너희에게 알려 주리니 그는 사랑 받는 형제요 신실한 일꾼이요 주 안에서 함께 종이 된 자니라
8   내가 그를 특별히 너희에게 보내는 것은 너희로 우리 사정을 알게 하고 너희 마음을 위로하게 하려 함이라 
9   신실하고 사랑을 받는 형제 오네시모를 함께 보내노니 그는 너희에게서 온 사람이라 그들이 여기 일을 다 너희에게 알려 주리라 
10   나와 함께 갇힌 아리스다고와 바나바의 생질 마가와 (이 마가에 대하여 너희가 명을 받았으매 그가 이르거든 영접하라) 
11   유스도라 하는 예수도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그들은 할례파이나 이들만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함께 역사하는 자들이니 이런 사람들이 나의 위로가 되었느니라 
12   그리스도 예수의 종인 너희에게서 온 에바브라가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그가 항상 너희를 위하여 애써 기도하여 너희로 하나님의 모든 뜻 가운데서 완전하고 확신 있게 서기를 구하나니 
13   그가 너희와 라오디게아에 있는 자들과 히에라볼리에 있는 자들을 위하여 많이 수고하는 것을 내가 증언하노라 
14   사랑을 받는 의사 누가와 또 데마가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15   라오디게아에 있는 형제들과 눔바와 그 여자의 집에 있는 교회에 문안하고 
16   이 편지를 너희에게서 읽은 후에 라오디게아인의 교회에서도 읽게 하고 또 라오디게아로부터 오는 편지를 너희도 읽으라 
17   아킵보에게 이르기를 주 안에서 받은 직분을 삼가 이루라고 하라 
18   나 바울은 친필로 문안하노니 내가 매인 것을 생각하라 은혜가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신앙인의 삶의 특징은 그리스도 중심, 성경 중심, 교회 중심의 삶입니다. 특히 교회 중심의 삶은 그리스도 중심, 성경 중심의 신앙을 몸으로 실천하는 모습입니다. 물론 이 때 말하는 교회는 그리스도 중심이요 성경 중심적인 참된 교회를 의미합니다. 즉, 복음 중심이며 성경 중심인 교회에서 교회를 중심하여 삶을 사는 것이 모범된 신앙 생활을 살아가는 비결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 믿음의 사람들에게는 내가 속한 나라와 가정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내가 속한 교회입니다. 교회는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는 곳이요 영혼의 안식을 얻는 곳으로서 영원한 멸망과 구원이 결정나는 곳이며 또한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살아계신 주 여호와 하나님의 편에 서는 것도 교회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나아가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의 분량까지 자라날 수 있는 힘을 얻는 곳도 교회입니다.
 
지금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은 영혼 구원이 얼마나 중요하며 또한 하나님의 보좌로부터 내려오는 풍성한 꼴을 먹으며 평안을 누리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잘 아실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사업터를 위한 좋은 자리와 교육을 위한 대학, 그리고 직장을 위해서는 어디든지 전국, 나아가 온 세상을 찾아 헤매입니다. 하지만 참된 교회를 찾아 이사를 다니며 온 마음으로 교회를 소중히 여기는 자들은 많지 않습니다. 지금 이 땅에는 배교에 속한 교회도 많고, 성경을 바르게 가르치지 않는 교회도 많으며 나아가 이단 교회들도 많은데 아무 교회나 다니는 사람들이 사실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말씀을 알고 복음을 접하게 되면 바르고 참된 교회를 소중히 여겨 온 마음을 다해 바른 교회를 찾게 되는 것입니다.
 
바른 교회에서 교회를 중심으로 신앙 생활을 할 때 그 사람에게 이루어지는 일들이 있습니다. 첫째는 교회를 통해 하나님 나라를 체험하며 그리스도의 분량까지 자라나는 것입니다. 또한 그 사람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된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하나님 나라의 확장은 바른 교회에 속한 성도들의 말과 행동과 가치관을 통해 주께서 택한 자들이 주의 교회로 모이게 됨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거듭남의 역사와 함께 신자들의 영적 성장은 그리스도와 성경 중심인 교회를 통해 나타나는 것입니다.
 
먼저 우리의  삶을 진단해 봅시다.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의 마음과 시간과 경비를 주로 어디에 사용하고 있습니까?
 
성도의 우선권은 무엇보다 먼저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 교제하는데 있어야 합니다. 이때 성도들이 가장 큰 관심을 갖게 되는 것은 자연스럽게 주의 몸된 교회입니다. 그 이유는 교회는 하나님께서 주의 나라와 주의 뜻을 이 땅에 이루기 위해 세우신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를 대하는데 있어서 자기 기분을 따르지 않기를 바랍니다. 기분이 나쁘다고 하여 교회를 멀리해서도 안되고 기분이 좋다고 해서 무분별하게 교회를 섬겨도 안됩니다. 우리는 오직 더욱 주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바른 교회에 대한 꿈을 꾸며 그러한 교회를 중심으로 하여 살아가면서 그 교회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와 복음이 확장될 수 있도록 수고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일꾼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골로새 교회를 세우기 위해 희생하고 노력한 일꾼들이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복음으로 인하여 바울을 만났던 사람들인데, 이들 모두는 교회를 사랑하였고 복음을 위해 자신의 삶을 헌신하였던 사람들입니다. 이에 바울이 몇몇 사람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본문에는 두기고(7-8절), 오네시모(9절), 아리스다고(10절), 마가(10절), 유스도(11절), 에바브라(12절), 누가(14절), 데마(14절), 라오디게아에 있는 형제들(15절), 눔바(15절), 아킵보(17절) 등이 있습니다.
 
먼저 두기고에 대한 바울의 소개를 들어봅시다. “두기고가 내 사정을 다 너희에게 알려 주리니 그는 사랑 받는 형제요 신실한 일꾼이요 주 안에서 함께 종이 된 자니라. 내가 그를 특별히 너희에게 보내는 것은 너희로 우리 사정을 알게 하고 너희 마음을 위로하게 하려 함이라” (골 4:7-8).
 
두기고는 바울이 골로새 교회에 보내는 골로새서를 전해 준 사람입니다. 두기고는 에베소에 보내는 바울의 편지도 전달한 사람입니다. 에베소서 6장 21절과 22절을 보면 “나의 사정 곧 내가 무엇을 하는지 너희에게도 알리려 하노니 사랑을 받은 형제요 주 안에서 진실한 일꾼인 두기고가 모든 일을 너희에게 알리리라. 우리 사정을 알리고 또 너희 마음을 위로하기 위하여 내가 특별히 그를 너희에게 보내었노라”(엡6:21-22)고 증언합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에게 중요한 편지를 보낼 때 아무에게나 심부름 부탁을 하지 않습니다. 가장 믿을 수 있는 사람을 통해 중요한 서신을 보냅니다. 하물며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전하는 바울에게 있어서 그 서신을 두기고에게 부탁했다는 사실은 두기고는 바울이 가장 신뢰할 수 있었던 사람이란 뜻입니다. 즉, 두기고는 바울이 가장 믿을 수 있는 사람이었고 바울의 사역을 돕는 자였습니다. 바울은 그를 “사랑 받는 형제요 신실한 일군이요 주 안에서 함께 된 종”이라고 소개합니다.
 
먼저 “사랑을 받는 형제”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누군가가 다른 어떤 사람에게 특별한 사랑을 받는 때는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습니다. 바울은 본문에서 두기고에 대해 형식적으로 ‘사랑을 받는 형제’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진심으로 이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즉, 두기고는 바울과 매우 특별한 관계에 있던 사람입니다. 두기고는 바울의 특별한 사랑을 받는 형제였으며 또한 여러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는 형제였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들에게 복음 사역자인 제가 특별한 사랑과 감사를 느끼는 것처럼, 바울은 두기고를 향해 특별한 감사와 사랑을 느꼈던 것입니다.
 
두 번째로 바울은 두기고를 “신실한 일꾼”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이 뜻은 '믿을만한 봉사자'라는 뜻입니다. 여기에 사용된 ‘일꾼’이라는 말은  원어로는 ‘디아코노스’인데 집사라는 뜻을 지닌 영어 단어 ‘deacon’이 이 헬라어에서 나왔습니다. 그 원어의 뜻은 봉사자입니다. '봉사자'라는 말은 돈이나 어떤 댓가를 위해 일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가 감사하여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섬기는 자가 ‘신실한 일꾼’, 즉  ‘디아코너스’ 또는 ‘집사’입니다.
 
저는 제 자신을 포함해서 우리 모두가 ‘집사’가 되기를 원합니다. 즉, 그리스도의 보혈에 대한 감사한 마음 때문에 주의 몸된 교회를 섬기며 봉사하는 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교회를 섬기는데 있어서 다른 동기가 있으면 안됩니다. 다른 동기를 가진 자들은 보통 당을 지어 교회를 파괴하는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이같은 자들은 우리 주 그리스도를 섬기지 아니하고 다만 자기들의 배를 섬기나니”(롬 16:18). 하지만 바울이 보기에 두기고는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복음 사역의 일을 맡아 감당하는 자였습니다. 따라서 복음 및 주의 교회를 섬기는 일이라면 어떤 일이라도 믿고 맡길 수 있는 신실한 봉사자였던 것입니다. 두기고는 아무런 조건 없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 빚진 심령을 가지고 복음 전파 및 하나님 나라를 위해 교회 일을 맡아서 신실하게 섬기던 집사였습니다.
 
지난 세월 동안 목회를 하면서 발견한 것은 주의 나라의 일을 믿고 맡길 ‘신실한 일꾼’들이 많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대부분의 교인들이 교회를 섬기는 이유는  그리스도의 보혈에 대한 감사 때문이 아니라 자신을 위한 것임을 발견하였습니다. 즉, 많은 사람들에게 인정 받고 싶은 마음, 목사에게 인정 받고 싶은 마음, 교회 공동체 내에서 권력과 이득을 취하고 싶은 마음 등이 주된 동기인 것을 보았습니다. 따라서 기분에 따라 봉사의 자세가 하늘로 올라갔다고 땅으로 떨어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들 중에는 잘못된 성품과 기질 탓도 있겠지만 거의 대부분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깨닫지 못했거나, 또는 하나님 나라가 그들 인생에 있어서 중요한 자리에 있지 않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런 자들은 돈과 명예와 지위와 연관된 문제라면 발벗고 나설텐데, 순수하게 복음을 위해 봉사하는 일에는 관심이 없는 것입니다. 노골적으로 표현하면 주님의 교회에서 ‘신실한 일꾼’으로 서지 못하는 이유는 결국 주 예수 그리스도께 감사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점이 참으로 안타까운 것입니다.
 
그러나 두기고는 바울이 진심으로 믿고 일을 맡길 수 있는 훌륭한 봉사자였습니다. 앞으로 우리 모두가 두기고와 같이 주께서 믿고 일을 맡길 수 있는 봉사자들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아무런 대가나 보상 없이 오직 단 한가지 이유, 즉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에 감사하며 사랑하는 그 마음 하나로, 궂은 일도 마다하지 않고 봉사하는 그러한 ‘디어코너스’가 되기를 바랍니다.
 
세 번째로 바울이 두기고를 표현할 때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된 종'이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뜻은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성령 충만한 상태를 말합니다. 두기고는 성령을 통하여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 바울과 함께 복음 사역을 이루어 가는 동역자였습니다. 하나님이 성령으로 기름부어 따로 세우신 복음 사역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성경 중심, 그리스도 중심, 그리고 교회 중심을 강조하기 마련입니다. 구원 받은 주의 백성들은 이러한 주의 종들과 함께 동역해야 합니다. 만일 여러분이 그리스도 안에서 연합하며 복음 사역자와 동역할 수 있게 된다면 이는 하나님이 대단히 큰 축복을 베푸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두 번째로 소개하는 인물은 오네시모입니다.
“신실하고 사랑을 받는 형제 오네시모를 함께 보내노니 그는 너희에게서 온 사람이라 그들이 여기 일을 다 너희에게 알려 주리라”(9절).
 
오네시모 역시 두기고와 같이 '신실하고 사랑받는 형제'였습니다. 오네시모는 골로새 교회에 아주 잘 알려진 사람입니다. 그는 그의 주인 빌레몬 때문에 소문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무익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로마 감옥에서 사도 바울을 만나 복음을 듣고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빌레몬서에 오네시모에 대한 내용이 있습니다. “갇힌 중에서 낳은 아들 오네시모를 위하여 네게 간구하노라. 그가 전에는 네게 무익하였으나 이제는 나와 네게 유익하므로 네게 그를 돌려 보내노니 그는 내 심복이라”(빌 1:10-12). 바울은 오네시모를 가리켜 '갇힌 중에서 낳은 아들'이라고 말합니다. 이는 바울이 감옥에 갇혔을 때 복음을 전하여 얻은 영적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하되 아버지의 심정을 지닌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버지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내가 복음으로써 너희를 낳았음이라”(고전 4:15). 바울은 복음을 통하여 영적인 자녀들을 낳았습니다. 오네시모 역시 사도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듣고 그리스도의 교회의 지체가 된 것입니다.
 
중요한 사실은 오네시모는 구원을 받기 전에 무익한 사람이었습니다. 언제나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손해만 끼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빌레몬의 노예였지만 선한 주인을 속이고 도망친 불의하고 무익한 노예였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듣고 변화하였습니다. 바울이 그에 대해 증거합니다. "그가 전에는 네게 무익하였으나 이제는 나와 네게 유익하다"(몬 1:11). 바울은 오네시모의 구원 전과 구원 후를 말합니다. 구원 받은 후의 오네시모는 바울에게 "신실하고 사랑받는 형제”였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변화입니까? 구원을 받은 자의 특징은 하나님의 나라에, 가정에, 교회에, 사회에 유익한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특히 하나님과 주의 나라에 요긴한 존재가 되는 것이 복음으로 인한 변화입니다.
 
우리 모두에게 오네시모에게 나타난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변화들이 있기를 바랍니다. 모든 사람에게 유익을 주는 사람, 특히 우리 주인 되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께 유익하고 하나님 나라에 요긴한 주의 신실한 자녀들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바울은 또 다른 두 사람을 더 소개합니다.
"나와 함께 갇힌 아리스다고와 바나바의 생질 마가와 (이 마가에 대하여 너희가 명을 받았으매 그가 이르거든 영접하라) 유스도라 하는 예수도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그들은 할례파이나 이들만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함께 역사하는 자들이니 이런 사람들이 나의 위로가 되었느니라" (골 4:10-11).
 
마가 요한은 마가복음을 썼기 때문에 우리에게 잘 알려진 사람입니다. 그는 바나바의 조카입니다. 마가의 어머니와 삼촌 바나바는 하나님 나라에 소중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초대 교회가 마가의 가정 때문에 설 수 있었습니다. 그 덕에 마가는 바울의 1차 선교여행에 동행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구브로에서 배를 타고 밤빌리아로 갈 때 마가는 밤빌리아에서 선교여행을 포기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버렸습니다. 그 후에 바울과 바나바가 다시 제2차 선교여행을 떠나게 됩니다. 이때 바나바는 마가를 다시 데리고 가자고 주장하고 바울은 극렬하게 반대합니다. 결국 이 문제로 바나바와 바울이 갈라서게 됩니다(행15:36-39). 그러나 먼 훗날 바울은 마가 요한을 버리지 않고 그를 다시 불러 복음 사역에 중요한 사람으로 만들었습니다(딤후4:11).
 
오늘 본문은 아리스다고와 마가와 유스도는 바울의 ‘위로’가 되었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이 세 사람을 소개할 때 "그들은 할례파이나 이들만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함께 역사하는 자들”이라고 말합니다. 사실 아리스다고와 마가, 유스도는 할례파에 속하는 유대인이었습니다. 할례를 자랑하던 유대인들은 노골적인 반기독자(反基督者)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세 사람은 바울과 함께 고통을 나눌 정도로 주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이들이야말로 바울에게 특별한 위로가 되었는데 그 이유는 그들은 할례파 유대인으로써 그리스도인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저주받은 자로 알고 있던 할례파 가운데서 하나님 나라의 동역자들이 나오게 되었으니 얼마나 큰 위로였겠습니까? 어떻게 이러한 변화가 가능합니까? 오직 복음 때문입니다. 그들 역시 바울처럼 복음으로 인해 거듭나서 하나님 나라의 일꾼들이 된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 때문에 이들은 “하나님 나라를 위한 동역자들”이 된 것입니다. 이들은 할례파 유대인들 가운데서 ‘유일하게’ 복음을 위해 헌신된 동역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은 바울에게 큰 위로가 되었던 사람입니다.
 
이제 바울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헌신하는 여성 한 분을 소개합니다. 그 이름은 눔바입니다. 바울은 눔바를 소개하면서 골로새교회와 인접해 있는 라오디게아의 교회를 언급합니다. 라오디게아는 골로새로부터 약 20km 떨어진 곳입니다. 15절을 보면 "라오디게아에 있는 형제들과 눔바와 그 여자의 집에 있는 교회”라고 말합니다. 그 당시 교회는 지금 우리처럼 교회 건물이 없었습니다. 신약성경에 나오는 대부분의 교회는 가정에서 모이는 교회였습니다. 빌립보의 루디아의 가정 교회(행16:15, 40), 고린도의 가이오의 가정 교회(롬16:23),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의 가정 교회(고전16:19), 마가 요한의 가정 교회 등등입니다. 또한 바울의 편지로 볼 때 골로새에는 눔바의 가정 교회 외에 다른 여러 가정 교회가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오네시모의 주인이었던 빌레몬의 집에도 가정 교회가 있었습니다(몬1:2).
 
아무튼 라오디게아에 눔바라는 여성의 집에 가정 교회가 있었습니다. 눔바가 누구인지 그 정보는 이 구절 밖에 없기 때문에 자세히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눔바라는 여성은 자기 가정을 개방하고 그 장소를 예배처소로 사용하게 하였습니다. 이 일은 절대로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눔바와 같은 거룩한 열정을 가진 성도가 자기 가정을 교회에 내어 줌으로 인해 오늘날 온 세상에 복음이 전파되게 되는 그루터기들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의 가정이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초석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그렇게 되면 눔바처럼 하나님 나라에 영원히 기억되는 복된 가정이 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바울은 믿음에서 떨어지는 아킵보에게 경고합니다. 물론 사랑에서 나오는 경고입니다. 17절을 보면, "아킵보에게 이르기를 주 안에서 받은 직분을 삼가 이루라고 하라"고 당부하고 있습니다. 아킵보는 빌레몬의 가족이었습니다(몬1:2). 아킵보는 바울에게 "함께 병사된 자”라고 불릴 정도로 소중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자기에게 맡겨진 직분을 잘 감당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에 바울은 가장 짧은 말로 아킵보에게 충고합니다. “주 안에서 받은 직문을 힘써 이루라.”
 
정리합니다. 신앙 생활의 비결은 그리스도 중심의 교회, 성경 중심의 교회에서 교회를 중심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교회를 섬기는 것이 신앙 생활의 비결입니다.
 
그래서 개혁주의는 직분을 매우 귀중하게 가르쳤습니다. 그 이유는 복음의 역사는 교회의 직분을 통해 이루어지도록 하나님이 정하셨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 성경은 교회의 직분을 은혜의 방편으로 선포합니다. "집사의 직분을 잘한 자들은 아름다운 지위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에 큰 담력을 얻느니라"(딤전 3:1). 이 말씀을 보면, 교회의 직분을 잘 감당하는 자에게 두 가지 은혜가 약속되고 있습니다. 하나는 아름다운 지위를 얻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자신만이 아는 하나님과의 깊은 체험의 비밀, 믿음의 담력, 믿음의 비밀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즉, 복음을 전하는 교회를 잘 섬기면 하나님의 기쁨이 되어 믿음이 크게 자라난다는 뜻입니다.
 
오늘 바울이 언급한 이 사람들은 영원히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즉, 그들의 영광이 영원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나라 새하늘과 새땅이 이 땅에 완전하게 임한 후에도 이들의 이름은 영원토록 기억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습니다. 세상에서 그들이 어떤 사람인지, 나이는 어떠한지, 용모와 외모는 어떠한지, 공부를 얼마나 했는지, 돈을 얼마나 버는지에 관심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평가하시는 단 한가지는 그들이 얼마나 주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며 그러기에 주의 복음을 위해 어떻게 주의 나라와 주의 몸된 교회를 섬겼는가 하는 것입니다.
 
교회 내에서의 섬김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우리의 사랑의 표현입니다. 다른 방법으로도 주께 사랑의 표현을 할 수 있지만, 절대적으로 반드시 주님께 사랑의 표현을 해야 하는 곳은 바른 복음을 전하는 교회입니다. 그리스도 중심, 성경 중심의 삶을 산다는 것은 성령으로 충만한 가운데 하나님의 나라와 복음을 위해 교회를 중심으로 산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한국 땅에서 그리스도의 보혈 교회를 시작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복음 때문에 여신 이 복된 교회에 크신 축복과 은혜를 주실 것입니다. 이 위대한 일에 동참하는 여러분들과 가정에 영원한 영광이 주어질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두 구절을 우리 모두에게 드립니다. 첫째는, 야고보서 5장 19-20절입니다. 다 함께 읽읍시다. “내 형제들아 너희 중에 미혹하여 진리를 떠난 자를 누가 돌아서게 하면 너희가 알 것은 죄인을 미혹된 길에서 돌아서게 하는 자가 그의 영혼을 사망에서 구원할 것이며 허다한 죄를 덮을 것임이라.” 그러나 돌아서게 하여 어디로 가게 할 것입니까? 그 영혼을 붙들고 계속 하나님의 말씀을 공급할 수 있는 참된 교회가 없다면 죄인을 미혹된 길에서 돌아서게 하는 일은 완성될 수 없습니다. 또 다른 구절은 다니엘 12장 3절입니다.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리라.” 많은 사람들을 참된 교회로 인도하는 것은 하늘의 별처럼 영원히 빛나는 일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에 나온 바울의 동역자들처럼 오직 주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주의 몸된 교회를 중심으로 섬기시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되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인천 그리스도의 보혈교회
스데반 황 목사

2012년 7월 22일 주일 주보 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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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가족 환영회 
오늘 2부 예배 후 새가족 환영회가 친교실에서 있습니다.
* 메시야 평생교육원 이사회   
오늘 새가족환영회 후 오후 1:30에 새가족실에서 평생교육원 이사회가 있습니다.
* 2012 메시야잔치 준비위원회  
오는 수요예배(25일) 후에 새가족실에서 메시야잔치 준비위원회로 모이겠습니다.
* 가족 새벽기도회  
오는 토요일(28일) 새벽예배는 자녀들과 함께 하는 가족새벽기도회로 드립니다.
* 니카라과 단기선교를 위한 릴레이 금식 기도와 Car Wash
8월 9일부터 14일까지 있을 니카라과 단기선교와 선교팀을 위해 지속적인 지원과 
기도를 부탁 드립니다. 이를 위해 릴레이 금식기도를 구역별로 실시하오니, 
모두 동참해 주시길 바랍니다(게시판 참조). 또한 28일(토)에는 단기선교를 위한 
Car Wash가 본 교회에서 있습니다.  
* 전도폭발 무장사역  
다음 주일(29일) 오후 1:00에 전도폭발 무장사역으로 모입니다.  
* 무료진료  
오는 토요일(28일) 오후 7시부터 9시까지 Dr. Kim의 무료진료가 있습니다.
원하시는 분들은 반드시 먼저 접수를 해 주시기 바랍니다. (문의: 김인애 집사)
* 생명의 삶 8월호 신청  
생명의 삶 8월호 구매를 원하시는 분들은 오늘까지 강영옥 전도사에게 
신청하시기 바랍니다. 
* 무료 검도교실    
매주 목요일과 토요일에 친교실에서 무료검도교실이 열리고 있습니다. 
대상은 4학년 이상 남녀노소 누구나 참여하실 수 있습니다(게시판 참조).

* 교우 동정
* 한국방문: 김정숙(A) 권사, 김정숙(B) 권사, 김진영(B)집사, 오석영 청년, 윤용상 집사, 하미경 권사

2012년 7월 8일 주일 풍경

2012 여름학교 7월 16일~20일

2012 여름학교 7월 16~20일 2

예수 샤론의 꽃 / 조수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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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ttached Multimedia

 

인생은 참 슬픈 이야기

인생은 참 외로운 노래
차갑고 메마른 이 땅 위에

맑은 꽃 한송이 피워주시길


샤론의 꽃 예수 나의 마음에

거룩하고 아름답게 피소서
내 생명이 참 사랑

그윽한 향기로

간데 마다 피어 나소서
예수 샤론의 꽃

예수 내 사랑 이야기
예수 참 사랑의 노래

내 맘 속에 사랑으로 핀 꽃

 

샤론의 꽃 예수 나의 마음에

거룩하고 아름답게 피소서
내 생명이 참 사랑의 향기로

간데 마다 피어 나소서
예수 샤론의 꽃

예수 내 사랑 이야기
예수 참 사랑의 노래

간데 마다 그윽한 향기 피어 나소서
내 맘 속에 사랑으로 핀 꽃


세계교회협의회(WCC)의 정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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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교회협의회(WCC)의 정체



스데반 황 작성

 

세계 교회 협의회에서 맨 처음에 에큐메니칼 운동을 시작할 때는 기독교 안에서 성령의 하나되게 하심을 따라 교파를 초월하고 교회들이 연합하여 교회의 일치를 이룬다는 정신으로 시작하였다. 하지만 점차 시간이 지남에 따라 숨겨져 있던 베일이 하나씩 벗겨졌다. 일차적으로는 기독교 교파간의 담을 헐어버리고 교회들이 연합하였지만 그 다음 단계에서는 종교간의 담을 헐고 서로 대화를 하고 있다.세계 교회 협의회는 기독교 통합 운동을 넘어서서 제 종교 단일화 운동(Inter-Faith Movement)의 방향으로 분명하게 나아가고 있다.

 

이러한 면에서 세계 교회 협의회는 로마 카톨릭과 뜻을 같이하고 있으며 종교 통합 운동을 양면에서 추진하고 있다. 이러한 교회연합운동과 종교 통일 운동의 영향으로 인하여 기독교 내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유일성이 희석되면서 바른 교리와 진리를 가르치는 일이 급속히 약화되고 있다.


성경은 성도들이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켜야 한다”(4:3)고 가르친다. 그러나 성령의 하나됨은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구속을 참으로 믿고 깨달은 성도들 사이에만 가능하다. 만일 믿는 성도가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한다면 이는 마치 빛과 어두움이 함께 공존하려는 것과 같다. 따라서 성경은 성전과 우상이 함께 할 수 없다고 말씀하신다(고후6:14-16).

 

하지만 지금 세계 교회 협의회는 믿지 아니하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세우신 교회와 사탄의 우상을 일치시키면서 하나(One Unity)가 되자고 주장한다. WCC가 시작된 이후 일어난 다음의 사실들을 보면 세계 교회 협의회가 주도하고 있는 기독교 통합운동은 성경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의 진리를 훼파하는 인본주의 연합운동이며 하나님께 엄중한 심판을 받을 무서운 운동이다. 현재 WCC가 역사 속에서 등장하고 많은 교회들과 목회자들이 이러한 기독교 통합 운동을 용인하는 것을 보면 지금 이 상황이 사도 바울이 경고한 종말의 배도의 시대임을 알 수 있다.

 

1 WCC총회: 1948년 암스텔담 (Amsterdam, Netherlands)

 

WCC가 그들의 강령에서 언급하였듯이 그들의 목표는 "눈으로 확인할 수 있겠끔 한 믿음과 한 성찬으로 교제하는 통일된 교회"를 만드는 것이다. 세계 교회 협의회는 세계적으로 통일된 교회를 건설할 목표로 1948년 네델란드 암스텔담에서 44개국, 147개 교회의 대표자들 351명이 모이면서 창설되어1 총회를 개최하였다.  1 차 총회에서는 인간의 무질서와 하나님의 계획(Man's Disorder and God's Design)이라는 주제로 진행되어  2 세계대전의 후유증을 앓고 있는 무질서한 인간 세계를향한 하나님의 계획을 추구하면서 국제난민국제기구 발족하였다.

 

 

2 WCC총회: 1954년 미국 일리노이주 에반스톤 (Evanston, IL, USA)

 

 2차 총회의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 세상의 희망(Christ the Hope of the World)’이란 주제로 열렸으며 161 교단이 가입하였고 해당 교파와 교단에서 502명이 참석하였다.  총회에서는 세상의 모든악을 퇴치시키기 위한 사회주의 건설이 WCC 지상목표라고 신앙을 고백함으로써 스탈린의 평화공존 결의안을 지지하였고, 대한민국은 이때 가입 신청을 냈다. 따라서 한국 교회의 보수와 진보가 갈라지기 시작한 분기점이 되었다. 이때 기장, 기감, 예장(통합) KNCC(National Council of Church in Korea) 이름으로 WCC 가입하였다. 

 

 

3 WCC총회: 1961년 뉴델리 (New Delhi, India)

 

3차 총회에서 매우 위험스러운 변화의 조짐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3차 총회의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의 빛(Jesus Christ - the Light of the World)"이라고 하여 그리스도가 주제의 중심이었는데 루터란 신학자 죠셉 시틀러(Joseph Sittler)가 총회에서 연설한 이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WCC의 신앙에 그릇된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시틀러의 주장에 의하면 그리스도의 구속의 교리는 우주의 교리와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의 구속뿐만 아니라 온 우주 만물의 구속도 동반되어야 한다. 그 이유는 우주 자체가 하나님의 활동무대이고 우주와 모든 자연은 서로 떨어질 수 없는 상호 보살피는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이때 나온 것이 "우주적 그리스도(Cosmic Christ)"란 개념이다. 그 개념에 의하면 "우주적 그리스도"는 다른 모든 종교에서도 보편적으로 감지될 수 있는 창조의 중보자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자유를 추구할 때 그리스도는 그들의 이데올로기에 관계 없이 그들에게 임하신다는 것이다(David Wells). 그러므로 "우주적 그리스도(Cosmic Christ)"는 불교, 힌두교, 이슬람교에도 임재하시는데, 다만 그들이 잘못 알고 힌두교에서는 그리스도 대신에 크리슈나(Krishna)를 구세주로 믿으며, 불교에서는 부처(Buddha), 모슬렘에서는 마디(Imam Mahdi)를 구주로 믿는 것이다.

 

 

또한 카톨릭 신학자 칼 라너(Karl Rahner)는 이 "우주적 그리스도(Cosmic Christ)" 개념으로 불교 신자, 힌두교 신자, 모슬렘 신자 모두가 "익명의 크리스챤(anonymous Christian)"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로서 타종교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기독교인이 되는 일이 없이도 상호간의 일치와 연합을 시도하는 거짓된 신학이 태동하고 말았다.

 

 3차 총회에서부터 WCC "다른 종교 안에도 그리스도가 관념적으로 내재되어 있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그리스도를 통한 화해는 모든 창조물과 전 인류를 포용한다(The reconciliation wrought through Christ embraces all creation and the whole of mankind)"(Yri, Quest, p.169)라는 WWC“Witness Section”의 수록된 내용이 이 무서운 사실을 증거하고 있다. WCC가 다른 종교인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여 그들을 구원하는데 힘쓰고 있지 않고 장차 지옥에 빠질 다른 종교인들을 그대로 방치하면서 복음의 변질을 초래하는 그릇된 연합을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60년대 초 칼 라너로부터 시작된 카톨릭의  타 종교에 대한 비 성경적인 신학과 사상은 계속 유지되고 발전하다가 드디어 지난 2005 11월 교황 베네딕트 16세가 "불신자도 역시 구원 받는다" 그릇된 가르침을 바티칸 뉴스로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이로서 WCC의 종교 통합운동은 더욱 탄력을 받게 되었다.

 

"NONBELIEVERS TOO CAN BE SAVED, SAYS POPE" (VATICAN CITY, NOV. 30, 2005, Zenit.org - Whoever seeks peace and the good of the community with a pure conscience, and keeps alive the desire for the transcendent, will be saved even if he lacks biblical faith, says Benedict XVI ) (누구든지 순전한 양심으로 공동체의 평화와 선을 추구하며, 초월적인 것을 위하여 그 소원을 활기있게 유지하면, 성경적 신앙이 부족하더라도 구원받을 것이다 - 교황 베네딕트 16세 발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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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CC는 종교통합을 위해서 만인구원설을 주장하였고 로마 카톨릭 역시 WCC와 보조를 맞추기 위해 만인구원설에 힘을 실어주었다. 이 두 조직은 같은 뜻을 가지고 협력관계를 유지하며 서로 가까이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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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WCC총회: 1968년 스웨덴 읍살라 (Uppsala, Sweden)

 

WCC 1968년 제4차 총회에서 "보라, 내가 모든 것을 새롭게 하노라(Behold, I make all things new)"는 주제로 모였다. 모임의 목적은 "세상의 모든 종교의 어두움 속에서 주무시는 그리스도를 깨우기 위하여(to awaken Christ who sleeps in the night of all religions of the world)"라고 발표하였다(Spence). WCC는 제 4차 총회에서 "현존하는 다른 믿음의 사람들과의 대화프로그램(Program of Dialogue with People of other Living Faiths)"을 개설하기로 결정하였다. 타 종교들과의 대화운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1970년부터는 "크리스챤(Christian)"이란 용어를 "신자(believer)"라는 말로 바꾸기로 하였고,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을 가리켜서 "동료 신자들(fellow believers)" 이라고 부르기로 하였다. 이러한 용어 변화는 WCC가 다른 종교를 향하여 "우리 모두가 함께 같은 하나님을 섬긴다"라는 그릇된 사상이 유입되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그리고 1971년부터 모든 종교를 포용하는 "현존하는 (다른) 신앙과 이념을 가진 사람들과의 대화(DFI: Dialogue with People of Living Faiths and Ideologies)" 프로그램을 본격적으로 가동하였고, 1973년 방콕에서 모인 여러 종교간의 대화의 장에서는 세계불교협회 회장이 중심인물이 되었다.

 

 

5 WCC총회: 1975 나이로비 (Nairobi, Kenya)

 

1971년부터 시작한 타종교와의 대화프로그램인 DFI의 열매가 1975년 제5차 총회에 본격적으로 나타났다. WCC 총회에 이슬람교, 로마 카톨릭, 불교, 힌두교, 유대교, 무신론자 등 각종 이방종교의 대표자들이 대거 참석하여 대성황을 이루었다.

 

 

6 WCC총회: 1983 뱅쿠버 (Vancouver, Canada)

 

6 WCC 총회에서는 개회식 때 카나다 원주민(Red Indian: 북아메리카 인디언)의 종교행사도 곁들였다. WCC는 인디언의 종교를 존중한다는 의미에서 그들의 우상인 토템기둥(totem pole)을 총회장소에 세웠고(JS Malan), 개회식 때 그들의 종교주문을 암송하며 북과 노래와 춤에 맞추어 그들의 정결의식도 행하게 하였다. 그리고 WCC 총회역사상 최초로 무신론자(theological atheist)를 초청하여 총회에서 멧세지를 전하게 하였다.

 

WCC "종교간 대화프로그램(Interfaith Dialogue Program)의 의장인 뮬더(Dirk Mulder)는 카나다 원주민에 관한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저들이 복음화 되지 않았다고 해서 영원히 버림받았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기자는 그렇다면 불교신자나 힌두교 신자들이 그리스도를 믿지 않았어도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말인가요?"라고 물었을 때 뮬더는 그럼은요, 그렇구 말구요! (Sure, sure!)"라고 확신하였다. 이에 WCC 지도자들 역시 모든 종교에 구원이 있다는 사실을 믿는다고 선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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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WCC총회: 1991 캔버라 (Canberra, Australia)

 

호주 캔버라에서 모인 제7 WCC총회는 그 주제가 "오소서, 성령이여! 모든 창조를 새롭게 하소서!(Come, Holy Spirit - Renew the whole creation)"였는데 이방 종교를 본격적으로 포용하고 연대하는 모습을 드러냈다. 4,000여명의 참가자 가운데에는 점술가, 심령술사, 마술사, 무당 등의 세계 15개 종교 대표자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개회식에서는 호주 원주민의 전통종교의식을 진행되었다. 호주 원주민 마법사들(Witchdoctors)이 젖은 고무나무 잎새를 태우면서 짙은 검은 연기를 하늘로 올리고 참가자들은 조상들의 영들로부터 축복받기 위하여 그 연기 사이로 걸으라고 요청받기도 했다(JS Malan).

 

이때 한국의 여성 신학자 정현경 교수(teaches at Union Theological Seminary in New York)는 주제 강연에서 흰 치마 저고리를 입고 창호지에 쓴 초혼문을 가지고 나와서 낭독하며 죽은 영혼들을 불러내고 "오소서, 우리들의 신앙의 조상 아브라함과 사라에 의하여 이용당하고 버림받은 이집트 여인 하갈의 영이여. . . 다윗 왕에 의하여 죽임을 당한 우리야의 영이여 오소서 . . . . 나치에 죽음 당한 영이여, 2차 대전 중 창녀로 끌려간 한국 여인의 영이여, 십자가의 고통으로 죽은 우리의 형제 예수의 영이여 오소서 . . ." 라고 읽은 다음 그 종이를 불에 태워 공중에 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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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WCC총회: 1998 하라레 (Harare, Zimbabwe)

 

 
짐바브웨 하라레에서 열린 제8 WCC총회는 그 주제가 "하나님을 바라라. – 소망 가운데 기뻐하라(Turn to God – Rejoice in Hope)”이었다. 이 총회의 특징은 WCC 가 창설 된지 반세기가 지난 후에 아프리카와 결속을 다짐하는 것이었다. 특히 이 총회에서는 처음부터 WCC와 함께 하던 동방 정교회의 여러 질문에 대해 구체적으로 응답하고 포용할 수 있도록 특별 담당부서(Special Commission)를 창설하였다. 이는 WCC의 회원 교회의 지경이 크게 넓혀진 것을 의미한다.

 8 WCC 총회에 참석한 한국의 정현경 교수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요한복음 14:6의 내용으로 "그리스도가 천국에 이르는 유일한 길인가 라는 질문을 하고 대답하기를 "예수님이 실수한 것입니다(Jesus was mistaken)"라고 말하였다(Ralph G. Colas). 이것 하나만 보더라도 오늘날 WCC의 종교간의 연합운동의 실체가 무엇인지를 확실하게 알 수 있다.

 

 

 9 WCC총회: 2006  포르토 알레그레(Porto Alegre, Brazil)

 

 

 9 WCC 총회의 주제는 당신의 은혜를 통해 세상을 변화시키는 하나님이었고, WCC 역사상 가장 많은 기관과 단체들이 모인 총회였다. 전 세계적으로 4천의 단체와 348개의 회원 교파가 참여하였다.  9차 총회에서는 하나의 교회로 부르심에 동의하고 무엇보다 우선적으로 통합된 세계 교회 및 세례와 기도를 강조하였다. 특히 WCC의 모든 결정은 다수에 의하기로 결정하고 이 결정에 따라WCC의 회원 자격이 대폭 수정되었다. 특히30세 이하의 젊은 층들을 대거 영입하기로 하였다.

10 WCC총회: 2013년 부산(Busan, South Korea)에서 개최될 예정이다

 

지금까지 진행되어 온 세계교회협의회(WCC: The World Council of Churches)의노선은 상대주의, 혼합주의, 그리고 인본주의에 기초한 통합운동(Ecumenical Movement)임이 분명하다. 이는 교회가 하나님의 절대적 진리인 성경을 부인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피 묻은 십자가를 집어 던지는 배교 그 자체이다. 우리 WCC를 통하여 일어나고 있는 이 엄청난 사실을 모든 교회들과 하나님의 자녀들이 깨닫기를 바란다.  

알고 못먹는 코카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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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 못먹는 코카콜라

 


미국의 여러 주의 고속순찰경관들은 

2 갤런 정도의 코카콜라를 차에 싣고 다닙니다. 

그 코카콜라의 사용목적은 교통 사고가 났을때 

길에 묻은 핏자국을 지우기 위해서입니다. 


비프스테이크를 코카콜라로 채워진 대접에 

넣어두면 2일 동안에 그 고기 덩어리가 다 

삭아버립니다 


변기의 때를 없애는 데는 코카콜라가 좋습니다. 

변기에 묻은, 찌든 때는 코카콜라에 함유된 

시트르산이 말끔히 제거해 줍니다 


자동차 앞뒤에 달린 녹슨 크롬 범퍼를 깨끗이 

하려면 코카콜라에 적신 종이로 닦으면 녹이 

깨끗하게 없어 집니다. 


__ 자동차의 밧데리에 녹이 슬었으면 

밧데리 케이블에 코카콜라를 부으면, 

거품을 내면서 녹이 없어짐, 


__ 녹이 슬어 빠지지 않는 볼트가 있으면 

코카콜라를 발라주십시오. 

수 분 후면 그 볼트가 빠집니다 


__ 기름에 쩌린 옷을 세탁 하려면 

기름이 묻어 있는 곳에 코카콜라를 

부은 후에 세제를 가하여 세탁을 하면 말끔히 

씻어집니다 


__ 자동차의 앞 유리가 흐려졌으면 

코카콜라를 발라 닦으면 깨끗하게 됩니다. 


__ 코카콜라의 주요성분은 인산인데 

그 pH치는 2.8입니다. 그 정도의 pH치이면 

보통크기의 못을 4일 내에 녹여 버립니다 


__ 미국에서 콜라의 농축액을 운반하는 

트럭들은 독극물에 적용되는 유해물질 카드를 

소지해야함 (이거 매우 중요합니다. .

분류기준이? 독극물 이죠) 


__ 콜라를 배달하는 트럭들은 트럭의 

엔진을 깨끗이 씻기 위하여

 코카콜라를 20년간 사용해 왔습니다. 


__ 콜라 한 잔에는

 약 50mg의 카페인이 들어있죠. 

카페인은 몸 안에서

 공격형 호르몬 분비를 촉진하여, 

아이들을 산만하고 공격적인 아이로 만듭니다.


또한 설탕이 13%를 차지하는 콜라를 너무 많이 

먹으면 아이들은 지능이 떨어뜨리고 정서가 

불안해집니다. 설탕을 너무 많이 먹으면 

면역력이 떨어지고  뇌 대사가 불안정해지기 때문이죠. 


__ 임산부가 콜라 많이 먹으면? 태아가 

뼈 없는 아이나 약한 아기가 태어나죠

 

 ※.탄산음료도 안 좋습니다.

이런 음료를 먹어서

아토피 피부염이 극성을 부린다고 합니다.

 

종교적 황홀경을 경계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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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적 황홀경을 경계하라

[찬양 속에 흐르는 사탄의 술수]



요즘 찬양이 심각하다. 최근 내가 사는 곳에서도 몇 교회가 연합하여 한국의 유명한 찬양 사역자를 초청하여 찬양 집회를 열었다. 모든 것이 나쁘지는 않았다. 평소에 우려하였던 것처럼, 왜 이런 노래를 왜 불러야 하는지 회의가 드는 순간이 있었다. 


성도들이 모여서 찬양하게 하는 것을 마다할 이유가 없다. 그러나 언제나 복음의 진리는 살아있어야 하고 분명해야 한다. 진리에 대한 바른 도전을 주지 못하면서 바른 복음으로 무장된 사람이나 거짓 영의 터치에 미혹되어 있는 사람 모두에게 즐거운 시간이 되는 찬양 집회는 아무 유익도 없고 오히려 손해만 초래한다. 사탄이 기도를 더럽히기 위해 24/7이라는 것을 퍼뜨린 것처럼, 찬양 속에도 사탄의 술수가 이미 들어와 있다. 



사탄이 행하는 일을 칭송하는 기막힌 술수 


어떤 찬양을 분석해 보면 그 실상이 참으로 끔찍하다. 찬양을 드린다고 함께 모였으므로 모든 사람들이 마음을 열고 뜨겁게 노래하게 된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 노래 속에 사탄의 가증한 이론이 담겨져 있는 경우가 있다. 그 심각한 사실을 모르고 그런 노래에 취하여 감정이 심히 고조되고, 크게 열광한다면 어떻게 되는 것인가.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우리의 눈에는 당장 보이지 않으나, 그 실상은 자명하다. 


하나님의 교회가 귀신들의 놀이터로 전락하는 것이다. 그 일을 상습적으로 주도하는 사람은 미혹되어 사탄의 종 노릇하는 사람이라고 보아야 한다. 뭐가 뭔지 전혀 모르고 느낌이 좋으니 사람들이 부르도록 인도하는 단순한 실수일 수 있지만, 결코 곱게 보아주어서는 안 될 참혹한 실수이다. 하나님께 찬양을 드린다고 사람들을 모아 그러한 일을 한다는 것을 누구도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엄연하게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이런 엄청난 사변이 일어나지 않도록 찬양을 인도하는 사람들 주시해야 한다. 그들의 영적인 성향이 건전해야 한다. 노래 잘한다고 그냥 마이크를 맡길 일이 아니다. 어떠한 영적인 기질을 가진 사람인지 검증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교회와 예배 속으로 침투하는 귀신의 미혹을 돕는 어이없는 자살골이 잘 일어나도록 그들이 돕기 때문이다. 


요즘 우리가 가장 엄히 경계해야 할 찬양은 신사도운동가들에 의해서 지어진 찬양곡들이다. 신사도운동 사상을 가진 찬양사역자들이 지은 노래에는 사탄이 행하는 일들이 하나님이 행하시는 사역으로 표현되면서 성도들로 하여금 칭송하게 만든다. 순진한 성도들을 분위기와 감정으로 요리하여 교묘하게 사탄을 칭송하게 하는 가증한 노래들이 많은 교회들의 예배를 더렵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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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교회에서도 '창조의 아버지'(Let Your glory fall)라는 이름으로 널리 애창된 노래의 작곡자 데이비드 루이스(David Ruis)는 마이크 비클이 세운 캔자스시티선지자교회(Kansas City Fellowship)에서 일하였고, 후에 빈야드운동이 왕성했던 토론토(Toronto)의 '웃음운동'의 중심지였던 토론토공항교회의 존 아놋과 동역하였던 찬양사역자, 즉 신사도운동가이다. 


'이 노래를 누가 지었는지 그것이 뭐 그리 중요한가. 그 작곡자가 무슨 뜻으로 지은 노래이건, 내가 좋은 뜻으로 부르면 되지' 라면서 가리지 말고 잘 부르자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이것을 기억하자. 모여서 예배한다고 항상 하나님이 경배 받으시는 것은 아니다. 사탄은 항상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하기 원한다. 우리가 힘써 부르는 찬송의 내용이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행하시는 구원과는 무관하고 오히려 사탄의 벌이는 장난을 높이는 내용이라면, 그 예배의 주인은 사탄이 되는 것이다. 사탄이 하는 일을 힘써 노래하면서 칭송하는데, 사탄이 즐거움을 만끽하고 있는데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그래도 여기는 내 교회니까 '하시며 자존심을 굽히고 그 예배를 구걸하듯 받으시겠는가. 


예배의 가장 중요한 시간에 예배를 인도하는 담임목사 모든 성도들이 일어서서 사탄의 장난을 칭송하는 노래를 힘써 부르면 하나님은 사탄의 수준으로 격하되거나 그 예배의 실제 주인이 바뀌는 것이다. 교회가 영적으로 더러워지고, 성도들의 영혼에 사탄의 독이 들어가고, 이후에도 사탄의 미혹이 계속 역사하게 될 것이라는 생각이 근거가 없다고 누가 말할 수 있겠는가. 멋진 노래 가락 속에서 교회는 황홀하게 더럽혀진다. 그러나 사람의 눈에는 찬양이 좋고 분위기가 좋은 교회이다. 이 얼마나 무서운 사실인가. 


찬양은 반드시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와 우리를 위해 역사하신 일들을 노래하는 내용이어야 한다. 출애굽기의 미리암의 찬양(출 15:1~21)을 보면 그것이 분명하게 나타난다. 홍해를 갈라 육지처럼 건너게 하신 하나님의 크신 역사를 미리암은 찬양하였다. 이처럼 모든 찬양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행하신 일을 높이고 기리는 노래이어야 한다. 


데이비드 루이스가 지은 이 유명한 노래도 겉보기에는 아주 좋은 찬양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노래의 내용에는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정체불명의 일들에 대한 칭송이 들어있다. 이 노래 속에 담겨진 그 정체불명의 일들을 칭송하는 내용들 몇 가지를 살펴보자. 


1)'택하신 세대 일으키어'라는 내용은 우리의 하나님이 행하시는 구원의 일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 신약 성경 어디를 보아도 이 땅을 고치기 위해 택하신 세대를 일으키시는 하나님의 역사에 대한 말씀이 전무하다. 이것은 분명히 신사도운동의 거짓 하나님, 즉 사탄을 높이고 찬양하는 내용이다. 신사도운동에서는 이 세상을 영적으로 완성하기 위해 종말에 한 특별세대가 일어난다고 한다. 밥 존스(Bob Johnes)같은 거짓 선지자는 1973년 이후 출생한 세대가 하나님이 택하신 특별한 세대라고 하였다. 겉보기에 하나님을 찬양하는 신령한 노래인 것 같으나, 이 노래는 우리를 구원하신 성경의 하나님이 아니라 신사도운동가인 데이비드 루이스의 거짓된 하나님, 사탄을 숭배하는 노래이다. 


2)'주 영광 여기 임하사'라는 부분도 그렇다. 주의 영광이 임한다는 것은 신약의 시대와는 아무 관련이 없는 내용이다. 구약 시대 지성소에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셨다. 그러나 십자가 사건 이후에는 모든 성도의 몸과 교회에 성령 하나님이 내주하신다. 그러므로 결코 구약 식으로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시는 일이 없다. 


그러면 데이비드 루이스는 왜 이러한 가사를 지었을까. 신사도운동가들의 집회에는 지금도 구약의 방식으로 하나님의 영광이 임재하신다고 한다.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가 있을 때에 그 흔적으로 안개, 구름, 금가루, 금이빨 등이 나타난다고 신사도운동가들은 믿는다. 실제로 그러한 괴이한 현상이 나타나기도 하는데, 그것은 귀신들의 장난이지 우리 구원자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이 아니다. 이 노래가 말하는 '주'라는 단어는 우리를 지으시고 구원하신 성경의 창조주 하나님이 아니다. 신사도운동가들을 지배하고 속이며 장난하는 사탄을 경배하는 노래인 것이다. 


3)"만물이 사모하는 '성령의 기름'"을 부어주신다는 내용도 우리를 지으시고 구원하신 성경의 하나님과는 무관한 내용이다. 성령이면 성령이지, 성령의 기름은 또 무엇인가. 성령의 기름이라는 것은 성경에 없다. 성경은 우리 속에 내주하시는 성령님을 구약식으로 '기름부음'(요일 2:20,27)이라고 표현할 뿐이다. 이것을 왜곡하여 성령으로부터 anointing이라고 불리우는 어떤 것이 흘러나온다고 근거 없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신사도운동가들이다. 


이 거짓 개념은 80년대에 일어난 빈야드 운동을 통하여 등장하였고, 신사도운동가들을 통하여 광범위하게 확산되어 많은 사람들이 개념도 없이 입에 담는 말이 되었다. 특히 쓰러지거나, 웃거나, 짐승소리를 내거나, 몸을 비트고 꼬는 현상, 이상한 소리(방언)까지도 이것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이 노래는 우리의 하나님의 역사를 찬양하는 것 같지만, 실상은 아주 정교하게 사탄을 칭송하기 위해 고안된 가증한 노래인 것이다. 


특히 데이비드 루이스가 지은 원 가사를 보면 성령이 'releasing' 된다고 표현되어 있다. 신사도운동에서는 성령의 역사를 release라는 단어와 outpouring 이라는 단어로 표현한다. 성령이 하나님으로부터 방출되어 나타나는 영적인 '힘', '에너지'로 이해하는 것이다. 이런 성령 이해는 현대의 뉴에이지(new age) 사상이며, 거슬러 올라가면 고대의 영지주의(gnosticism)와도 연결된다. 


영지주의는 영적세계에 관한 '앎'(knowledge), 즉 단순 이론이 아닌 영적세계에 대한 경험되어지는 지식(gnosis)을 가질 때 인간에게 구원이 일어난다고 했다. 이 사상이 기독교와 접목되어 하나님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신성'(divine)에 연합되는 신비적 경험으로 말미암아 인간이 구원받는다는 고대의 기독교 영지주의 사상이 형성되었다. 신사도운동가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방출'(releasing)되는 성령의 기름부음에 대한 요설은 바로 이 사상이다. 이 노래의 작곡자도 그러한 사상을 가지고 성령이 하나님으로부터 release된다고 가사를 지었다. 


4)'주의 향기 머무소서'라는 부분도 성경이 말씀하시는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과는 아무 관련이 없는 내용이다. 이 뜻은 하나님이 임하실 때 특별한 향기가 함께 임한다는 내용인데, 성경 어디에서도 하나님의 임재가 향기를 동반한다는 내용이 없다. 이것도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실 때에 안개, 구름, 금가루, 보석 등이 흔적으로 나타나고, 때로 향기도 동반된다는 그들의 요설이다. 이 노래가 칭송하는 신은 우리가 믿는 성경의 하나님이 아니고 작곡자 데이비드 루이스가 하나님으로 믿고 섬기는 거짓된 하나님, 즉 사탄인 것이다. 



무아지경, 황홀경에 빠지게 하는 사탄의 술수 


찬양에 관하여 주의해야 할 또 하나의 사실은 감정적으로 고조되어 무아지경으로 황홀경으로 빠지게 하는 사탄의 음모를 경계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기독교의 진리와 정체성을 실종시켜 버리는 사탄의 또 다른 모략이다. 


사탄이 하고자 하는 가장 중요한 일은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과 분리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마라"라고 사탄이 윽박지르거나 외치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이 있다. 그것은 성도들이 말씀을 중심으로 예배하지 않고 노래나 다른 것을 통하여 감성과 느낌을 탐닉하다가 결국에 종교적 황홀경(ecstasy)을 좇아가는 병든 신앙이 되게 만드는 것이다. 


기독교의 가장 본질적인 DNA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말씀에서 생명과 복이 나온다.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역사와 생명이 시작되므로 언제나 하나님은 말씀을 주셨다. 또한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을 잘 받기를 당부하셨다. 인간이 말씀을 바르게 받아야 생명과 복이 시작된다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강조하셨다. 성경은 수 없이 말씀을 들어야 함을 강조하고 또 강조한다. 


"이스라엘아 들으라"(신 6:4) 

"나의 택한 이스라엘아 들으라"(사 44:1) 

"너희는 내 목소리를 들으라 그리하면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겠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렘 7:23) 

"너희는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겔13:2)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시니나"(마 13:9) 

"또 이르시되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시니라"(막 4:9) 

"부형들아 내가 지금 너희 앞에서 변명하는 말을 들으라"(행 22:1) 

"귀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계 2:11,17,29;3:6,13,22) 


하나님의 생명과 복을 누리기 위해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고 순종하고 회개해야 한다. 개인, 가정, 국가, 민족, 역사 속에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기 위해서는 말씀이 전파되고 사람들은 그 말씀을 듣고 회개하고 순종해야만 한다. 이 과정이 바르게 진행되기 위해서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은 말씀을 중시하는 자세와 말씀을 듣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건강한 기독교인에게 동반되는 당연한 것이 맑고 마음과 건전한 이성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 비추어서 볼 수 있어야 하고, 말씀에서 벗어난 부분을 고치는 회개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구약의 선지자들과 신약의 사도들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심으신 christianity이다. 


사탄은 이 중요한 기독교의 DNA를 변질시키고자 쉬지 않고 일한다.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여전히 예배로 모이되, 거룩한 말씀의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뜨거운 느낌과 주관적인 감정이 충만하게 고조되는 것을 추구하게 만들어 주는 것이다. 종교적 황홀경이 예배의 성공의 척도가 되게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그것을 위한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 찬양이라는 노래이다. 


특히 요즘의 찬양은 동원되는 악기와 가사와 박자의 특성상 사람들에게 쉽게 빨리 감적인 열광을 불러일으킨다. 사실은 술이나 마약으로도 일으킬 수 있는 감정적 고조와 흥분을 예배 시간에, 여러 종류의 악기와 뛰어난 가창력을 가진 사람들의 목소리의 도움을 입어 조금 다르게 경험하는 것이다. 그때 사람들은 기쁨과 행복을 경험하면서 그것이 '성령충만', '은혜', '하나님의 임재'라고 생각하게 된다. 


다음의 찬양 영상을 보고 계속 이야기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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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교회들이 오랜 동안 불렀던 '주의 자비가 내려와'(Mercy is falling)라는 이 노래도 신사도운동가 데이비드 루이스(David Ruis)가 작곡하였다. 이 노래의 가사의 내용도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역사하심이라고 선명하게 이해되지 않는다. 하나님의 '자비'(mercy)가 위에서 내려온다고 반복하고 있다. 작곡자가 무슨 의미로 Mercy라는 단어를 썼는지 우리는 잘 알 수 없다. 하나님이 주시는 은총이 봄비처럼 위에서 내려온다는 내용이 우리가 믿는 성경의 하나님이 행하시는 어떤 사역과 연관될 수 있는가. 모르겠다. 동아줄을 타고 나무꾼에게 내려오는 천상의 선녀와 같이 위에서 내려오는 하나님의 어떤 역사하심이나 성령의 은사가 있는가. 모르겠다. 


물론 노래를 꼭 이런 식으로 따질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 속에서 거하시고, 교회 속에서 거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선물이 왜 굳이 위에서 내려온다고 표현하는 것인지 궁금한 것은 사실이다. "주의 성령이 내려와 나를 덮네" 이런 표현이 어떻게 성경의 성령님의 사역을 묘사하는 것인가. 


작곡자 데이비드 루이스가 이러한 방식으로 나타나는 거짓 하나님의 이적을 경험하고 인정하는 사람이라는 신사도운동가인 점을 생각하면 어렴풋이 실마리가 풀린다. 집회 중에 천정으로부터 금가루가 내려오고, 위로부터 안개와 구름이 내려와 자욱하게 깔리고, 보석이 내려오고, 위로부터 특이한 향기가 내려오는 그들이 가증한 현상을 생각하면 왜 이렇게 표현하는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데이비드 루이스가 위에서 내려오는 '주의 자비'라고 표현하는 것이 실은 신사도운동 집회에 나타나는 거짓된 영들의 역사, 즉 anointing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mercy is falling"이라는 가사가 성경을 통하여 알 수 있는 어떠한 성령의 역사와도 연관되지 않는다. 


우리 도시에서 열린 찬양집회에서도 이 찬양을 불렀다. 그냥 부른 정도가 아니라 일어서서 크게 박수를 치면서, 뛰면서, 웃으면서, 열광하면서 이 노래를 불렀다. 견딜 수가 없어서 나는 그 노래가 다 끝나기 전에 나와 집으로 왔다. 이 노래의 작곡자의 사상도 불건전하고, 이 노래를 가사도 수상쩍은데 그런 노래를 부르면서 성도들이 그렇게 열광한다는 것이 불쾌하였다. 그것보다 더 싫었던 것은 교회의 분위기를 조금 건전하고 술 냄새 풍기지 않고 열광하는 나이트클럽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었다. 


한번 냉철하게 생각해 보자. 그런 노래와 분위기가 과연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인가. 정직하게 말하자면, 하나님을 찬양한답시고 재미나게 노는 것이 아닌가. 아주 흥분하며, 아주 몰입하며, 아주 감정에 깊이 취하여서, 아주 깊은 황홀한 느낌으로 성도들을 몰아가는 것이다. 술, 마약으로 일으킬 수 있는 감정의 흥분을 악기와 조명과 노래를 통하여 교회에서, 예배에서 일어나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 '성령', '주', '자비'라는 단어가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다고 하여 저것이 다 은혜이고 성령충만이고 하나님의 임재인가. 


가창력이 뛰어난 여러 singer들이 앞장서 노래를 부르고, 사람의 감정을 터치하는 위험스럽고 전문적인 악기들이 함께 가동되면 분위기는 하나님도 걷잡을 수 없는 상황이 전개되어 진다. 그 분위기에 자극되어서 함께 흥분하면서 노래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이미 서로에게 최고의 최면제이고 흥분제가 되어 버린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을 찬양한다면서 진행되는 일이다. 


그러나 사실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과는 거의 무관하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들의 감정에 깊이 몰입되어서 즐기는 것이다. 법궤를 맞이할 때 다윗이 바지가 흘러내릴 정도로 춤을 추었다는 성경의 기사를 여기에다 갖자 붙이는 사람들은 자신을 속이는 사람들이다. 그것과는 다르다. 노래를 통하여 하나님이 행하신 은혜와 구원을 칭송하면 찬양과 스스로의 흥분과 감정에 취하여 빨려 들어가는 무아지경과 종교적 황홀경은 구분해야 한다. 


구약의 바알종교가 그랬고, 다른 많은 이방종교들이 저랬다. 고대의 유명한 이방 종교들의 사제들이 술이나 최면제 등으로 황홀경에 빠지면서 그들의 신을 만났다. 무당들도 굿을 시작할 때에 먼저 악기와 노래로 자신들의 감정을 흥분시킨다. 부족하면 술을 마시면서 자신의 정신을 몽롱하게 만든다. 대나무가 흔들리는 신 내림의 환경과 여건을 준비하는 것이다. 


이러한 가증한 일이 교회에서도 일어날 수 있다. 귀신의 장난이 심했던 빈야드 운동과 함께 지금 문제가 되는 찬양운동이 일어났다는 것이 무엇을 말하는가? 귀신의 역사를 부리면서 그것을 anointing이라고 하고 power evangelism이라고 하였던 존 윔버가 그런 노래를 교회에 앞장서 도입했었다. 경배와 찬양이라는 노래 사역을 시작한 온누리교회에도 더러운 빈야드 영성이 자리를 잡아 버렸다. 


문제는 맑은 정신과 건전한 이성의 예배가 빛을 바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그 말씀에 순종하고 행함으로 하나님의 자녀로서 영적성장을 이루어가는 기독교의 진리와 정체성이 사라지고 있다. 그리고 그 자리를 사람의 흥분과 느낌과 주관적인 감정과 황홀경과 무아지경이 대신하고 있다. 그 고약한 사탄의 포도주를 교회 속으로 흘러 들어오게 하는 대표적인 것이 찬양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젊은이들을 붙잡을 수 없다고 하면서 이런 열광주의를 젊은이들을 위한 기독교로 고착시켜 가고 있다. 내일은 더욱 더 이러한 현상이 심해지게 되어 있다. 


"주님을 사랑하는 분들은 다시 한 번 아멘!" 

"여러분 주님을 사랑하십니까? 주님을 사랑하시는 분들은 오른 손을 들고 아멘!" 


세상 광고의 문구보다 더 멋지게 선동하는 말들이 가미되면서 사람들은 더욱 열광하고 뛰면서 노래한다. 찬양이라는 미명하게 기독교의 생명이 자랄 토양을 변질되어 간다. 그래서 미혹하는 귀신들의 장난에 무감각해지고 준비되어진 교회들이 되어 버렸다. 사람들이 좀 모인다는 교회들 대부분이 목사들이 앞장서 기타를 메고 강단에서 뛰거나, 찬양팀을 잘 살려서 뛰고 춤을 추게 하는 교회들이다. 이를 어찌할꼬. 모든 사람들이 마다하지 않는 이 달콤한 늪에서 교회들이 헤어 나올 수 있을까. 그럴 것 같지 않다. 교회들은 더 즐거운 노래를 만들고 부를 것이다. 젊은이들을 위한다면서 더 흥미롭고 즐거움을 주는 사탄의 부어주는 포도주를 마실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알기를 원하신다. 우리의 주관과 감성을 고조시키는 것이 하나님의 소원이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맑은 마음과 이성으로 말씀을 받아 순종하며, 말씀에 합당하게 행동하며, 말씀에 기초하여 믿음의 결단을 내리면서 살기를 바라신다. 이것이 기독교이다. 이것을 훼방하거나 이 진리의 길에서 벗어나게 하는 노래는 찬양이 아니라 사탄이 교회에 부어주는 가증한 포도주이다. 그것을 받아 마시고 먼저 취하여 이마에 땀을 흘리면서 노래를 인도하며 성도들을 열광에 빠지게 하는 찬양인도자들에게서 성령이 역사하신다고 함부로 말하지 말라. 그것이 때로는 참으로 하나님을 모독하는 일이며, 교회를 더럽히는 장난이다. 


새로이 그리스도인이 되는 사람의 숫자는 급속히 감소하고 있다. 그런데 남아 있는 교회들은 이러한 노래를 더 열심히 부르며 취하여 간다. 말씀과 이성이 조화되고 화합되는 참 믿음의 영성이 약해지면서 감성과 느낌과 찬양의 황홀경이 가치가 되는 교회로 변해가고 있다. 


하나님의 교회들의 미래가 참 어둡다. 이러한 때에 목회로 부름 받아 진리의 길을 간다는 것이 무엇일까. 이러한 분위기에 합류하지 않고 복음의 진리를 좇아 외로운 길을 간다는 것이다. 결국 자신과 자신의 가족을 살릴 방주를 외로이 지어갔던 노아처럼 외로이 좁게 살아간다는 것이다. 그러한 목회와 삶을 살기로 작정한 사람이 얼마나 될까. 


찬양을 없애자는 것이 아니다. 찬양에 합당한 노래를 부르면서 하나님을 바르게 찬양하고, 예배를 더욱 온전하게 만들고, 우리의 신앙을 더욱 건강하게 만들어 가자는 것이다. 찬양을 잘 인도하고, 찬양을 잘 부르는 분들이 앞장서 주시면 좋겠다. 



정이철 목사 / 반석장로교회

천주교•NIV•개역개정의 위험성 - 말세의 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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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NIV•개역개정의 위험성 - 말세의 징조



구영재 선교사.


동부개혁장로회신학교 총동문회(회장 손한권 목사)가 3월 14일부터 16일까지 뉴욕새천년교회(담임 장규준 목사)에서 3일간 구영재 선교사를 초청, ‘말세의 징조’라는 주제로 세미나를 진행했다. 


구영재 선교사는 이번 세미나에서 평소 목회자들이 잘 이야기 하지 않았던 천주교 및 종교다원주의의 이단적 실체과 NIV성경, 개역개정 성경의 위험성을 강조했다.


구영재 선교사는 이번 세미나를 통해 “천주교는 기독교가 아니다”라며 경계를 요청하는 한편, WCC 교회일치운동이 뉴에이지운동과 연결돼 있으며, NIV, 개역개정 성경에 뉴에이지 사상이 스며들어 있다고 강조하면서 말세에 믿음을 지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또 ‘중보기도’라는 용어에 대해 “천주교 신부를 중보자로 만들기 위한데서 기인한 신복음주의적 용어다. 우리가 감히 중보자이신 예수님의 자리에 설 수 없다”며 현대 사회 가운데 유일신 사상을 해치고 범신론 사상을 퍼뜨리는 뉴에이지운동을 막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구영재 선교사는 이러한 다양한 분야에 걸쳐 나타나고 있는 말세의 징조들에 대해 밝히 볼 것을 요청하며 강의를 진행했다. 다음은 이번 세미나 자료의 주요 내용.



로마 카톨릭의 실체와 WCC


우리는 사탄의 최후 보루인 천주교에 대한 무지 때문에 하루살이 이단들은 걸러내고 오히려 이단들의 어미 초대형 이단(Super-Cult) 천주교는 섬기는 일치운동에 깊이 빠져 있다. 로마 카톨릭은 성경에 없는 하나의 유사종교다. 로마 카톨릭은 기독교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몸에 두 혼 곧 종교와 정치를 공유한 바벨론 조직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오늘날 우리교회의 모든 지도자들도 로마 카톨릭이 이단 중의 이단이라는데 대해서 아무 감각이 없다. 그저 종교 개혁 전에 있었던 기독교의 큰 집 정도로 이해하는가 하면 로마 카톨릭이 윤리적으로 부패했기에 루터나 칼빈 등이 종교개혁을 해서 오늘에 이르렀다는 식으로 이해하면서 공존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명백한 것은 카톨릭은 이단 중의 이단이며 로마 카톨릭은 마귀의 최대의 걸작품이라는 사실이다. 로마 카톨릭은 바티칸의 베드로 광장에 바벨론 종교의 상징인 오벨리스크를 세우고, 꼭대기에 세계 통치를 꿈꾸던 시저의 재를 담은 청동 지구본을 올려놓았다. 그리스도의 지상 대리자로 자처하고 지상의 세속 통치권을 주장해 온 로마제국의 후예들은 그 재위에 십자가를 세우고 세속권세를 추구해왔다. 


로마 카톨릭의 사제인 플레처는 그가 편집한 기관지에서 “만일 교황이 그리스도의 대리자가 아니라면 그는 적그리스도임이 틀림없다”고 말했다. 이그나티우스 사제로 불렸던 스펜서 경도 “로마 교회가 그리스도의 교회가 아니면 그것은 마귀의 걸작품이다”고 했다. 


카톨릭 사상은 결국 오늘의 뉴에이지 운동이나 프로테스탄트의 자유주의 사상가나 진리 지식이 부족한 인본주의자들에게는 더 없는 반려자다. 모든 것은 하나라는 새 시대운동, 새 세계 질서에 맞장구를 치는 거대한 공룡이 모든 교회와 성도들을 파멸로 몰아가고 있다. 모든 종교는 그 근원이 같다는 종교다원주의가 에큐메니즘의 기본 골격이고 그것을 통합, 조종하는 배후는 로마 카톨릭이다.


지금 통일 유럽 건국의 실무 관리들의 자녀 1만3천명이 유럽의 아홉 나라에 흩어져 있는 로마 카톨릭 교회의 예수회파가 운영하는 학교에 정규 교육을 받고 있다. 또 예수회파 소속들은 아비와 마스터(지도자)의 명칭을 다 소유했다. 종교개혁 이후 프랑스 혁명, 18세기 유럽의 합리주의 철학운동인 계몽주의 사상을 이끌었던 자들은 대부분 이 예수회 교육을 받았던 자들이었고 이들은 유럽 사회를 지배하고 있다. 세계교회협의회(WCC)는 인류역사상 가장 무서운 단일종교가 될 에큐메니즘 종교의 모체의 하나다.



뉴에이지 운동의 실체


복음적인 시각에서 볼 때 뉴 에이지운동은 반기독교적 이단종교운동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또 뉴에이지 운동은 바로 사탄의 운동이란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 이유는 일찍이 창세기 3장에서 사탄이 말한 네 가지 거짓말이 그들의 사상의 주축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즉 너희가 하나님 같이 되리라, 너희가 정녕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선악을 알리라, 너희 눈이 밝아지리라는 내용이 뉴에이지 운동의 핵심이다. 그들의 주장은 기독교 진리를 뒤집어서 인간의 정신력은 무한하다던지 인간은 죄가 없다며 상황윤리를 만들고 모든 진리를 상대적인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결국 이런 뉴에이지 운동은 인본주의의 부활이며 하나님 없는 인류평화와 하나님을 배제한 평등사회 구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교회도 알게 모르게 뉴에이지 운동에 감염되어가는 사람이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뉴에이지 운동에도 로마 카톨릭이 배후 세력이란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유럽 공동체의 대부 노릇을 해 온 로마 교황청은 유럽 통일 뿐만 아니라 세계 통치를 목적으로 하는 새 시대 운동과 새 세계 질서를 추진해 왔으며 이 둘은 별개가 아니라 한 세력의 조종하에있음을 알아야 한다. 


질서(Order)로 알려진 이 단어는 세계에서 가장 완전한 피라미드 체제를 유지하고 있는 로마교회에서 사용하는 명령용어다. 유럽공동체 본부에서 홍보용으로 발행한 엽서나 우표에는 한 여자가 짐승의 등에 올라앉아 있는 그림이 있다. 이 음녀와 짐승은 뉴에이지운동의 심볼로 연결된다. 


복음의 내용을 버리고 정치적 세력과 통일을 위해서 범신론적 사상, 인본주의 사상을 조종하는 이들은 분명히 뉴에이지운동의 배후 조종자들이다. 그보다 오늘날 기독교 안에 있는 좌경 신학운동과 모든 종교는 다 같다는 식의 종교 다원주의자들은 한결같이 뉴에이지 운동의 추종자들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사탄은 수시로 자신의 모습을 바꾸면서 능수능란한 변장술로 성경적 신앙을 파괴하는 공작을 하고 있다. 



개역개정 성경의 문제점


다니엘 3:17 중 개역한글 성경은 “만일 그럴 것이면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서”라고 표현하고 있지만 개역개정 성경은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서”라고 표현했다. ‘하나님이 계시다면’이라고 번역해서 우리 신앙에 극심한 혼란을 주고 있고 자칫 잘못하면 하나님이 안 계실 수도 있다는 인상을 줄 수 있다.


이사야 38:15 중에서 개역한글성경은 ‘내가 종신토록 각근히 행하리이다’라고 돼 있으나 개역개정성경은 ‘내가 종신토록 방황하리이다’라고 번역, “히브리어 원문은 ‘내가 부지런히 행하리라’는 의미가 있음에도 원문을 왜곡하고 ‘개역’을 ‘개악’함과 동시에 내용적으로 정반대의 의미가 됐다.


요한계시록 2:10 중 개역한글성경 ‘생명의 면류관’이라는 표현은 개역개정에서는 ‘생명의 관’으로 번역했다. 이에 대해서 구영재 선교사는 “우리에게 주시는 상급을 너무나 단조롭게 표현함으로써 기존 개역 한글 성경의 아름다운 표현을 제거해 버렸다”고 강조했다. 


마태복음 5:12 중 개역한글성경은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고 기록돼 있으나 개역개정성경은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고 표현, “선지자들이 핍박을 받은 것이 아니라 도리어 핍박한 것으로 개악했다”고 지적했다. 


민수기 13:23 중에서는 개역한글성경 ‘포도 한 송이’(KJV, one cluster)를 개역개정에서는 ‘포도송이’라고만 번역했고 이에 대해서는 “원문에 기록된 단어를 빼버려 포도송이가 10송이나 100송이도 될 수 있으므로 크게 비옥함의 증거가 사라지고 원문의 의미를 심각하게 훼손했다”고 지적했다. 


이 밖에 구영재 선교사는 개역개정 성경의 오류가 있는 구절과 관련, 창14:16, 출19:1, 민23:20, 신28:9, 렘49:17, 시111:2, 눅2:13, 요7:7, 행2:3, 롬4:17, 고전1:30, 고후7:6 등을 제시했다.



NIV 성경 등 현대어 성경의 문제


1962년 미국 역사상 첫 ‘로마카톨릭’ 대통령으로 당선된 JFK 대통령 재임시에 미국공립학교의 성경과정이 폐기됐고 권위역성경(AV/KJV)이 아이들의 손에서 수거된 후, 지난 35년동안 사탄은 90% 이상의 신학교를 점령하고 있는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추종자들과 말씀의 잡상인들과의 합작을 서둘게 해 90여 종류가 넘는 ‘조악한’ 성경들을 만들어 냈고, 특히 불신자들이 번역한 ‘NIV', 로마교황청과 합작으로 번역한 에큐메니칼성경 NRSV, 전 성경에 166번 언급된 ‘은혜’라는 단어를 완전히 제거한 미국성서공회의 성경 CEV를 내놓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기만해 왔다. 


NIV성경은 신약성경에서 8천여 곳 이상을 변개했다. 또 68,000개 이상의 단어를 제거함으로서 성경의 작은 책들 30권(룻기, 잠언, 아가서 호세아 등)에 해당하는 양보다 더 많은 하나님의 말씀이 삭제돼 사라지게 했다. 예수님을 프리메이슨 두목으로 만들어 놓았고, 뉴에이지와 보조를 맞추기 위해 구약에 31번 언급된 지옥(hell) 단어를 100%, 신약에서는 50%를 제거했다. 현대판 성경들은 전 성경을 통해서 단 한번 언급된 루시퍼(사14:12)와 갈보리(눅23:33)을 제거하고 그 자리에 ‘계명성’과 ‘해골’로 둔갑시키고 있다.



기독일보 뉴욕=김대원 기자

마귀가 제안한 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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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귀가 제안한 신앙



하나님이 욥의 신앙을 자랑하고 칭찬하자 마귀가 곧바로 반박하고 나섭니다. " 욥이 어찌 까닭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욥1:9) 하나님이 뭔가 착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 욥이 순수하게 당신을 경외하는 줄 압니까? 무언가 다 꼼수가 있어서 그러는 겁니다. 사단은 이렇게 뒤틀린 심보로 욥의 신앙을 폄하합니다. 


이어서 그는 하나님께도 문제가 있다는 식으로 말합니다. "주께서 그와 그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물을 울타리로 두르심 때문이 아니니이까 주께서 그의 손으로 하는 바를 복되게 하사 그의 소유물이 땅에 넘치게 하셨음이니이다."(욥1:9) 욥이 그렇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하나님이 미끼로 욥을 꼬드겼기 때문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사단의 논리에 의하면, 욥의 진짜 관심은 하나님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을 섬겨줌으로 얻어낼 수 있는 축복과 혜택에 있었다는 것이지요. 그러면 하나님은 그 유익을 얻는 수단에 불과한 셈이지요. 하나님은 욥을 복이라는 미끼로 꼬드기시고 욥은 미끼를 빼먹기 위해서 하나님을 교묘히 이용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성도간의 관계가 하나님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숭고한 사랑과 헌신으로 맺어진 관계가 아니라 오히려 아주 천박한 저작거리의 인간관계와 같다는 말입니다. 즉 자신의 유익을 위해 서로를 교묘히 이용하는 관계라는 것이지요. 


사단은 지금 아주 치밀하면서도 교활하기 짝이 없는 논리로 참된 신앙의 근간을 뒤흔들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정하신 가장 탁월한 신앙이 그렇다면 이 세상에 하나님에 대한 순수한 신앙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이 사단의 논리가 우리에게는 잘도 먹혀 들어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 신앙이 마귀가 제시한 신앙에 더 가깝다는 것을 발견하며 섬뜩해집니다. 우리는 우리가 순종해야 할 하나님은 원하지 않고 우리의 필요를 위해 이용할 수 있는 하나님을 원합니다. 우리는 우리를 다스리는 하나님보다 우리가 편리하게 관리할 수 있는 하나님을 원합니다. 우리는 자신의 욕망과 권리를 그 앞에 포기해야 할 하나님을 원치 않고 우리의 소원을 성취해 주고 우리의 욕망을 채워줄 하나님을 원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행하는 것은 질색을 하며 싫어하면서도 복 받는 데에는 환장합니다. 행함의 열매를 맺는 믿음은 전무하면서 하늘의 복을 끌어내리는 믿음은 충천합니다. 우리의 행함이 없는 믿음이 우리의 신앙이 얼마나 마귀적인 신앙에 근접한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대목인 것 같습니다.


한국교회에 만연한 기복신앙, 번영신학은 마귀가 제안한 신앙의 길을 은밀히 따라가고 있는 것이지요. 이런 신앙이 버젓이 교회안에 자리를 잡고 교인들의 생각과 삶을 주관하며 한국교회의 양적 부흥을 견인하는 강력한 동인으로 작용하셨습니다. 지금 우리는그 쓴 열매들을 거두고 있는 셈입니다. 이런 왜곡된 신앙위에 세워진 교회가 급속히 몰락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입니다.


욥은 하늘과 땅의 모든 존재들이 지켜보는 우주의 시험대 위에 올라가 하나님만을 순수하게 사랑하며 그를 경외하는 신앙이라는 것은 도무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단의 도전을 물리치고, 그런 참된 신앙이 분명히 존재하며 가능하다는 사실을 확증해 주었습니다. 여기에 욥이 당한 고난의 한가지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이 시대는 그 어느 때보다 욥이 고난을 통해 입증한 참된 신앙의 회복이 절실합니다. 우리가 비록 이 땅에서 세상적인 축복과 평안을 누리지 못하고 오히려 고난과 시련속에 살지라도 주님으로 만족하고 그 분을 변함없이 섬긴다면 우리도 아주 미약하나마 욥이 보여준 참된 신앙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것입니다. 


왜곡된 신앙이 범람하는 시대에 하나님을 순수하게 섬기는 신앙이 여전히 존재한다는 것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 시대에 참된 복음 증거라고 생각합니다. 이 고독한 신앙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는 모든 분들께 주님의 위로와 은총이 있기를 바랍니다.



박영돈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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