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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가 종말론에 무관심하게 된 두 가지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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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래 글은 대부분의 목회자들이 무관심하거나 또는 음모론으로 가볍게 여기고 있는 종말에 관한 성경의 예언들과 이것이 실현되고 있는 사건들에 대해서, 평신도인 자신이 관심을 갖고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혹시 잘못된 것은 아닌지 물어오신 분에게 올린 답글입니다.

 

먼저 분명히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종말에 관한 성경의 예언들이 실현되고 있는 사실에 무지하고 무관심한 것은 한국교회만 가지고 있는 특이한 현상이라는 것입니다.  이미 일루미나티들에 의해 정치와 언론이 장악되어 언제 빅브라더의 세계로 갈 지 모른다는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는 보수적인 미국교회 성도들은 대부분, 지금이 바로 성경이 예언하고 있는 종말의 시대라는데 동감하고 있습니다.

 

또 우리나라에선 이 땅에 적그리스도의 나라를 세우려고 하는 일루미나티들의 정체를 폭로하고, 종말에 관한 성경의 예언들이 실현되고 있음을 알리는 대부분의 사역을 평신도들이 주도하고 있지만, 미국 교회 안에서는 성경을 깊이있게 연구하는 신학자와 목회자들이 주도하고 있습니다.  유투브나 구글에서 이에 관한 내용들을 검색해보면 얼마나 많은 신학자와 목회자들이 임박한 하나님의 심판을 경고하는 사역을 (목숨 걸고) 하고 있는지 알 수 있을 겁니다.

 

한국교회가 종말론에 대해  무관심하게 된 것은 다음 두 가지 원인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봅니다. 

 

1. 1992년 다미 선교회 사건이 교회 안에서 종말에 대해서 말하는 것을 터부시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1992년 10월 28일 '휴거의 사건'이 일어나고 곧 바로 7년 대환난이 시작될 것이라고 주장해서 사회적인 물의를 일으켰던 다미선교회 사건으로 인해, 한국교회 안에서는 휴거 환난 혹은 종말에 대해서 언급하는 것을 터부시하는 경향이 생겨났고, 그 결과 여기에 대한 신학적인 연구도 끊어진 상태입니다.

 

2. 교회성장학과 번영신학에 영향을 받은 많은 목회자들이 종말과 심판보다는 현세에서 물질적으로 복받고 성공하는 것이 곧 신앙생활의 궁극적인 목적인 것처럼 가르치면서, 자연스럽게 종말과 심판에 관한 메시지가 사라진 것입니다.

 

언젠가 인터넷에서 1980년대 조용기 목사님이 다니엘서를 강해하시면서 장차 유럽연합에서 대통령이 탄생하게 되면 그가 적그리스도가 될 가능성이 높고, 이를 전후로해서 휴거의 사건과 7년 대환난이 임하게 될 것이라고 열정적으로 설교하시는 동영상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정작 당신이 설교한대로 유럽연합에서 대통령이 탄생하였고 한걸음 더 나가 유럽연합이 이제 유럽합중국으로 가게 될 것이라는 소식도 들려오고 있는데, 현재 이 사건에 대해서 어떠한 해설이나 설교도 내놓고 있지 않습니다.

본인이 설교한대로 종말에 관한 성경의 예언들이 실현되고 있는 모습을 지켜보면서도 여기에 대해선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고,  그저 이 땅에서 성공하고 축복받아야 한다는 설교만 반복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최근에는 로마 바티칸(일루미나티,프리메이슨)이 기독교를 흡수해서 배도의 길로 이끌기 위해 만든 WCC 운동을 홍보하는 일에 앞장서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영적인 분별력을 잃어버린 한국교회 목회자들의 단적인 일예라고 봅니다.  

 

평신도들은 종말과 심판이 다가오고 있다고 염려하며 깨어서 기도하고 있는데, 정작 목회자들이 이에 대해 무지하고 무관심한 모습,  이것이 바로 안타까운 한국교회의 현실인 것입니다. 


방월석 목사


정말 하나님이 말씀하셨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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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하나님이 말씀하셨을까?



  최근에 들어와 한국교회에 자칭 예언자들이 부쩍 늘어나고 있다. 우후죽순처럼 일어나는 예언훈련학교에서 선무당같이 어설픈 예언자들을 무더기로 배출하기 때문이다. 그들의 공통된 특징은 하나님 또는 주님이 말씀하셨다는 말을 스스럼없이 사용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부터 엄청난 혼란이 야기된다. 자기 안에서 떠오른 생각에서 나온 말이 주님의 말씀으로 둔갑하는가하면 마귀적 음성까지 주님의 말씀으로 위장되기 일쑤이다. 순진한 교인들은 그들이 직통으로 계시된 말씀을 전파하는 것 같아 그들의 예언을 성경말씀보다 더 솔깃하게 된다. 더 심각한 문제는 성경의 진리에 의해 전혀 입증될 수 없는 온갖 허튼 소리들이 주님의 말씀이라는 명분으로 범람하여 교회를 혼란케 한다는 점이다.


  주님이 말씀하셨다는 말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를 받은 구약의 선지자들과 신약의 사도들만이 사용할 수 있었다. 우리는 그 계시가 기록된 성경말씀을 전할 때에 한해서만 주님이 말씀하셨다고 말할 수 있다. 


성경말씀과 다른 말을 하면서 주님이 말씀하셨다고 선언하는 것은 성경 외에 다른 계시를 주장하는 것과 진배없다. 자칭 예언자들은 그들의 예언이 성경말씀과 같은 권위를 가진 것으로 보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는 교인들이 성경말씀보다 그들의 예언을 더 의존하게 만든다. 그러니 성경보다 그들의 예언이 훨씬 더 실질적인 권위가 있는 셈이다. 


  성경말씀을 듣기는 원치 않아도 예언자들의 말을 들으려고 모여드는 이들은 많다. 성경을 강해하는 설교에는 은혜를 못 받아도 직통으로 주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것 같은 예언자의 말에는 엄청 은혜를 받는다. 평소에 늘 설교를 통해 들어도 별 감흥이 없던 말도 예언자의 입을 통해 들으면 큰 감동으로 와 닿는다. 작은 일에 충성하는 것을 하나님이 귀히 보신다는 말을 설교를 통해 수없이 들었을 것이다. 똑같은 말씀을 예언자가 “네가 지금 작은 일에 충성하고 있구나 착한 종아 내가 너를 귀히 여기노라 내가 앞으로 너에게 더 큰일을 맡기리라”는 식으로 말한다면 설교를 통해 누리지 못한 큰 위로를 받는다. 


왜 그럴까? 그들이 만약 하나님이 말씀하셨다고 말하는 대신 내 마음에 이런 감동이 왔다는 식으로 솔직하게 말한다면 교인들이 그렇게 은혜를 받을까? 주님이 말씀하셨다고 단언함으로써 마치 주님이 예언자의 입을 통해 나에게 직접 말씀하신다고 믿도록 교인들의 심리를 교묘히 조종하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그들이 일부러 사람들을 속이기 위해 그렇게 주장한다고 생각하고 싶지는 않다. 그들 중에는 교인들을 위로하고 권면하기 위한 선한 의도를 가지고 그런 예언사역을 하는 이들도 있으리라고 본다. 


필자가 염려하는 것은 그들의 주장이 야기하는 혼란이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사는 그리스도인에게는 특별한 성령의 감동이나 메시지가 마음에 떠오를 때가  있다. 그러나 지혜로운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확신과 마음의 감동이 틀릴 수도 있다는 것을 알기에 섣불리 그것이 주님의 말씀이라고 주장하지 않는다. 우리 마음에는 성령님뿐 아니라 육신적인 욕망과 마귀적인 세력에 의해 자극된 온갖 잡다한 생각과 메시지가 복잡하게 교차되기에 어떤 생각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라고 쉽게 단정해서는 안 된다. 


  요즘 예언하는 이들에게 이런 지혜와 신중함이 결여되어 있다. 자기 마음에 일어난 감동을 주님의 말씀이라고 함부로 확언하는 것은 아주 경솔할 뿐 아니라 진실하지 못한 태도이다. 병고침의 집회에서 자주 “주님께서 지금 눈에 문제가 있는 사람을 만지시고 계십니다. 방금 무릎 관절이 치유 받은 이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신장에 이상이 있는 이를 고치시고 계십니다”라고 말하는 것을 듣게 된다. 몇 천 명이 운집해 있는 모임에 으레 그런 병자들이 있으리란 것은 누구나 예측할 수 있다. 


정말 하나님께서 그 사실을 자신에게 알려주셨기에 그렇게 말한 것인가? 만약 그렇다면 어떤 식으로 알려 주신 것일까? 소리를 들은 것인가 아니면 마음속에 어떤 인상을 받은 것인가? 그 계시가 확실하다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 참으로 하나님께서 알려주신 것이라면 왜 의심의 여지가 없도록 좀 더 확실하게 계시해 주지 않으셨는가? 정확히 누가 어떤 병에서 나았다고 알려주시지는 못하는가? 


  과거 미국의 한 교회에서 열렸던 집회에서 강사가 회중가운데 한 사람의 이름과 그의 사정을 정확하게 말하면서 주님께서 그 사람을 치유하기를 원하신다는 메시지를 전했다. 그 복음사역자는 자신도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일이었다고 한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특별한 방식으로 일하실 수 있는 가능성을 완전히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그런 경우는 아주 드물다. 


대부분의 예언은 마음속에 즉흥적으로 일어난 감동이나 느낌, 또는 예측을 발설하는 것이다. 그것이 과연 백 퍼센트 주님의 말씀인지 사실 자신도 확실히 알지 못하면서 하나님으로부터 온 메시지라고 과감히 믿고 그렇게 선언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담대한 믿음이 아니라 경솔한 믿음이다. 분명한 진리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오류의 위험성을 간과한 믿음이기 때문이다.


  확실치 않은 것을 직통계시를 받은 것 같이 말하는 것은 진실하지 못한 행위이며 청중을 교묘히 조정하고 기만하는 것이다. 비록 자신이 의도하지는 않았을지라도 그런 말을 듣는 사람들은 그를 굉장한 존재로 생각하게 된다. 이런 행위는 미국의 신유집회에서 허풍쟁이 사역자들이 즐겨하던 짓인데 한국의 사역자들이 그것을 아무런 성경적인 검증도 없이 그대로 따라하고 있다.


  예언집회나 예언훈련학교에서 예언 받기를 원하는 이들에게 일일이 예언을 해준다. 수많은 예언집회를 쫓아다니며 예언을 받았던 한 교인은 이렇게 증언한다. “대부분 가서 받아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 형제님의 삶 속에 함께 하시는 데요. 지금 앞에 일곱 가지 빛이 보이고 있습니다.’ 혹은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딸아,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를 축복하고 축복하노라. 네 사업이 번창할 것이다.’ 혹은 ‘네 눈물과 기도를 들었노라’ 혹은 ‘지금 예수님의 모습이 보이고 있는데요, 우리 형제님과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리는 모습이 보이고 있습니다. 우리 형제님께서 지금 답답한 문제 가운데 있는데요, 하나님께서는 결코 외면하지 않으시고 우리 형제님의 삶을 인도하실 것입니다. 계속 꾸준하게 인내하며 기도를 쉬지 말라고 말씀하시는데요. 우리 형제님이 인내하면 그 열매들이 열릴 것입니다. 지금 수많은 포도나무가 보이고 있는데요. 우리 형제님이 지금 물질의 축복을 간구하는 모습이 보이고 있습니다. 우리 형제님이 물질을 심으시고 우리 형제님뿐만 아니라 형제님의 가족도 물질의 궁핍함이 없을 것입니다.’ 라는 등 이런 저런 예언을 많이 받았는데, 그 말들은 순간적인 감동은 되었지만 실제로 현실에서는 전혀 이루어지지 않고 오히려 건강한 몸이 병만 들었습니다.” 


  이 교인의 증언을 액면 그대로 받아드리지 않는다 할지라도 대부분의 예언이 이런 식으로 행해지고 있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예언 받으러 나온 사람을 보고 마음에 떠오르는 대로 즉흥적으로 지껄여대며 그것을 주님의 말씀이라고 하니 얼마나 웃기는 일인가? 


성경에서 예언하는 이는 성령님이 주권적으로 역사하여 자신에게 메시지를 주실 때만 예언을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요즘 자칭 예언자들은 자신이 원하면 아무 때나 누구에게나 예언을 해준다. 이는 성령님을 자기들이 필요할 때 호출하여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 하수인처럼 취급하는 행위이다.

  

이런 식으로 사이비 예언이 범람하게 되면 한국의 기독교는 머지않아 무당종교로 변할 것이다. 이러한 혼란을 막기 위해 주님이 말씀하셨다는 말을 함부로 사용하는 것을 금해야한다. 자기 마음에 떠오른 생각이나 마음속에 일어난 감동을 말하면서 그것을 주님의 말씀이라고 해서는 안 된다. 지금은 그 누구도 구약의 선지자들 같이 하나님이 말씀하셨다고 주장할 수 없다. 그들과 같이 절대적인 권위를 가진 무오 한 하나님의 계시를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서신에서 바울사도는 예언을 사모하라고 했다(고전14:1). 자칭 예언자들은 주로 이 말씀에 근거하여 예언의 은사의 중요성을 역설한다. 그러나 고린도 교회에 나타났던 예언은 구약의 선지자들이 했던 예언과는 다른 것이었다. 하나님의 말씀과 동등한 권위를 가진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오류가 있는 인간의 말이었다. 


그래서 바울사도는 한 사람의 말만 듣지 말고 두 세 사람이 예언하게 하고 다른 이들은 그 말을 분별하라고 했다(고전14:29). 이 말은 예언의 진정성을 달아보고(weight) 잘 분별하여 참과 오류를 가려내라는 말이다. 그들의 예언은 사도들의 가르침과 성경말씀에 의해 항상 점검받아야 했다.  그러므로 성경말씀보다 열등한 권위를 가진 것이었다. 


  고린도 교회에 있었던 예언은 덕을 세우고 권면하며 위로하기 위해(고전14:3), 또는 숨은 죄를 드러내기 위해(고전14:25), 성령이 마음에 순간적으로 떠오르게 한 것을 말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성령이 떠오르게 한 인상과 메시지가 인간에 의해 잘못 이해되고 해석되어 잘못 전달될 수 있었다. 


그러기에 바울은 철저한 검증과 분별을 명한 것이다. 이런 유의 예언이 지금도 존재하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고 아직도 연구되어야 할 부분들이 많이 남아 있다. 확실한 결론이 내려질 때까지 이와 유사한 예언을 하는 이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은 주님이 말씀하셨다고 말하는 것을 자제해 달라는 것이다. 자신의 예언적인 의견과 생각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명명해서는 안 된다. 자신의 예언적인 통찰을 꼭 말해야 한다면 차라리 주님께서 내 마음에 이런 생각이나 인상이 떠오르게 하시는 것 같다는 식으로 말하는 것이 훨씬 솔직하고 진실한 태도이며 많은 혼란을 방지할 수 있다.


  성경말씀을 전하면서는 담대하게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외쳐야 하지만 성경에 기록되지 않은 말을 하면서 그렇게 선언해서는 안 된다. “당신이 지금 하는 일이 번창할 것이라고 주님이 말씀하셨다”는 식으로 말하는 것은 반드시 금지되어야한다. 이런 사이비 예언이 난무할 때 교회에 극심한 혼란을 불러오며 기독교 신앙을 허무는 미혹의 영이 가장 무섭게 역사한다. 아무리 신통한 예언의 능이 있을지라도 주님의 말씀이라고 주장하며 예언할 때 교인들은 성경말씀보다 예언자의 말에 더 귀를 기울이며 그 말을 실질적으로 더 의존한다.


  사람은 자신이 가장 의존하는 것에 의해 주관된다. 하나님의 말씀보다 예언자의 말에 의해 주관되면, 예언자의 오류와 부패성을 통해 역사하는 거짓의 영이 수많은 사람들을 미혹케 할 수 있다. 그러기에 예언은 교회를 허무는 미혹의 영이 가장 교묘하면서도 무섭게 역사하는 영역이며, 교회를 최악의 혼돈으로 몰고 갈 수 있는 위험성을 안고 있다.     


   그러므로 예언에 관한한 아무리 주의를 기우려도 부족하다. 어떤 예언적인 의견이나 통찰은 반드시 성경에 의해 점검되어야한다. 그것을 함부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선언해서는 안 된다. 교인들을 예언자들의 말보다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분명한 말씀에 의존하는 삶을 살도록 지도해야한다. 고린도교회에 예언이 성행했던 이유는 아마도 우리가 지금 가지고 있는 신약성경 전체가 아직 보급되지 않은 상황에서 그 말씀의 공백을 잠정적으로 메우는 역할을 하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조심스럽게 추측해본다. 


  지금 우리는 그들이 누리지 못했던 완전한 성경말씀을 가지고 있다. 이 말씀으로만 부족하여 예언자들의 엑스트라 말씀을 쫓아다니는 것은 참으로 유감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고린도 교회에 있었던 예언의 역할을 지금은 성경말씀을 전파하는 설교가 더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있다. 


예언은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위로하기 위함인데 이 일을 하기에 성경말씀보다 더 적합한 것이 어디에 있겠는가? 성경은 성도를 세우고 위로하고 주의 계명으로 권면할 은혜로운 말씀으로 가득한 진리의 보고이다. 


  또한 고린도 교회에 있었던 예언은 죄를 드러내는 것이었는데 성경말씀은 좌우에 날선 예리한 검처럼 우리의 완악한 마음을 찔러 쪼개어 숨은 죄악을 드러낸다. 성령님의 대표적인 사역은 말씀을 통해 우리의 죄를 깨닫게 하는 것이다. 또한 말씀은 가장 중대한 장래 일을 예언한다. 죽음 후에 심판이 있다는 것과 주님의 재림과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예언한다. 


구약의 선지자들이 율법의 말씀에 근거하여 이스라엘의 멸망과 회복을 예언했듯이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예언적인 메시지를 전한다. 만약 교인들이 성령님을 따라 살면 새 언약의 풍성한 은혜를 누릴 것이나 성령님을 거스르고 육신을 따라 살면 과거 이스라엘 민족과 같이 하나님의 혹독한 징계를 받게 될 것이라고 선포한다. 


  설교를 하고나면 교인들이 목사님은 어쩌면 그렇게 자신들의 사정과 고민을 잘 아는지 모르겠다고 말하곤 한다. 내 일을 훤히 다 아는 것처럼, 내 마음을 꿰뚫어보는 것처럼 말씀하신다는 말도 심심치 않게 듣는다. 또 자신이 처한 상황과 직면한 문제에 꼭 적중한 말씀을 해 주셨다고 고마워하는 교우들도 자주 접한다. 바울사도가 말했듯이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둔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함이라”(딤후3:16-17). 성령님은 이 성경말씀을 통해 역사하심으로 교인들 각 사람에게 꼭 필요한 메시지와 은혜를 공급하신다. 


  그러므로 진정한 영적인 부흥은 말씀의 부흥이다. 예언자의 말이 판을 치고 성경말씀은 뒷전으로 밀려난 최근의 성령운동은 부흥이 아니라 심각한 영적인 탈선이며 쇠퇴이다. 



박영돈 교수

IHOP 24/7 예배가 성경적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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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HOP 24/7 예배가 성경적인가?


미국의 마이클비클이 대표로 있는 IHOP(International House of Prayer)는 24/7 예배를 슬로건으로 사용한다. 24/7 예배란 24시간, 7일, 365일 동안 쉬지 않고 예배를 드린다는 것인데, 현재 우리나라에는 IHOP-Korea를 비롯하여 KHOP(Korea), AHOP(Asia), GHOP(Global), JHOP(Justice)등의 유사 명칭을 모방하는 단체들이 많이 있으며, 이러한 단체외에도 교회와 심지어 기도원들까지 포함하여 수많은 단체들이 24/7 예배를 표방하는 곳이 상당히 많다. 

물론 24시간, 7일, 365일 찬양과 기도를 드린다고 하여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 용어와 사상에 담겨져 있는 개념이 비성경적이며, 그 명칭을 사용하는 단체들은 거의 대부분이 신사도운동과 그 유사단체라는 것이 문제다. 

1. 신사도운동과 유사단체들의 뿌리와 중요교리 
우리가 ‘신사도운동’이라고 하면 넘어지고 쓰러지며 금가루나 금이빨과 같은 현상적인 집회를 하는 것으로만 알든지, 혹은 피터와그너와 관련된 단체만을 신사도운동으로 국한하여 말하는 것으로 아는데, 넓은 의미에서는 그 유사단체와 그들의 사상까지를 모두 포함한다. 

신사도운동은 하나의 Movement를 말하므로 어느 특정한 교회나 교단, 단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상과 교리를 지지하는 광역적인 개념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어느 단체는 신사도운동의 현상적인 집회만 모방하는 곳이 있지만, 어느 단체는 그런 현상적인 집회가 전혀 없지만 신사도운동이 주장하는 교리와 사상을 그대로 따르는 곳도 있다. 또는 신사도운동이 주장하는 교리와 사상을 약간 수정하여 달리 가르치는 곳도 있는 것이다. 

신사도운동의 범주에는 1930년경에 시작된 늦은비운동(윌리엄 브랜넘), 캔서스예언그룹(밥 존스, 폴 케인, 마이클 비클), 빈야드운동(존 윔버), 토론토브레싱(존 아놋), 백투예루살림과 영적도해그룹(신디제이콥스, 조지 오티스, 존 도우슨, 루이스 부쉬)과 신사도연맹(피터와그너)을 모두 포함한다고 보아야 한다. 

그 중에서 특히 마이클 비클은 캔서스예언그룹(KCF)과 빈야드(포도원교회)를 거쳐 IHOP(국제기도의 집)으로 계속 변화했던 장본인이며, 피터와그너의 신사도운동과 동일한 뿌리를 갖는다. 다시 말하여 IHOP은 유사 신사도운동이다. 

브랜넘의 ‘늦은비운동’은 현재 신사도운동의 사상과 동일한 교리를 가르치고 있었다는 점에서 그들의 원조라고 할 수 있다. 현재 신사도운동이 주장하는 임파테이션, 사도와 선지자의 직분, 예언과 계시, 기적과 표적을 강조하는 현상적인 집회 등은 모두 늦은비운동에서 가르치던 내용이었다. 특히 브랜넘은 자신을 계시록의 천사라고 주장하였으며, 하와와 사탄이 섹스를 하여 가인을 낳았다는 통일교와 같은 이단적인 교리도 가르쳤다고 알려져 있다. 그는 1965년 성탄절을 앞두고 운전을 하다가 정면으로 차와 충돌하여 사망하였으며, 그로 인하여 늦은비운동이 와해됐다. 

그 후 늦은비 운동에서 사역하던 폴 케인과 현재 큰믿음교회의 변승우 목사가 영적 아버지라고 부르는 밥 존스가 마이클 비클을 만나면서 함께 예언과 계시를 하는 캔서스예언그룹을 시작하게 된다. 그러던 중에 캔서스예언그룹에서 7년동안 사역하던 어니 그루엔이라는 사람이 그들의 예언이 모두 거짓과 조작이었다는 폭로를 하므로서 캔서스예언그룹도 분열되고 만다. 

그 후에 존 윔버가 피터 와그너를 만나게 되며 빈야드운동이 시작되었고, 부흥을 이루게 되자, 마이클 비클은 포도원교회(빈야드는 포도원이라는 뜻)로 명칭을 바꾸게 되며, 빈야드가 쇠퇴하게 되자, 다시 IHOP으로 변화하게 된 것이다. 

피터 와그너는 2차 로잔회의에서 지역귀신에 대해서 발표한 영적도해 그룹을 만나게 되는데, 그들의 사상은 지역마다 귀신이 있어서 그들을 대적하여 사단의 본거지인 예루살렘으로 진격하여야 한다는 소위 백투예루살렘을 주장하는 곳이며, 그들과 함께 신사도운동연맹을 발족시키게 된 것이다. 

그들은 성행하면 연합하고, 퇴락하면 흩어지고, 비판을 받으면 다른 명칭으로 변모하는 사람들로서 거짓 기적과 표적, 무당과 같은 예언과 계시를 부흥의 수단과 방법으로 이용하는 자들이다. 신사도운동과 이 유사단체들의 교리적 특징은 다음과 같으며, 필자는 이들을 이단종합백화점이라고 부른다 

1) 오중직분과 은사(사도와 선지자) 
2) 기적과 표적의 현상 집회와 영적치유, 내적치유 집회 
3) 예언과 계시 
4) 도미니온(일곱산, 통치신학, 킹덤나우, 트렌스포메이션) 
5) 개방신학(열린신학) 
6) 영적도해(이원론적 지역귀신, 백투예루살렘) 
7) 24/7예배(다윗의 장막) 
8) 종말론적 성취(대추수, 오순절 성취, 신부운동, 요엘의 군대등) 
9) 임파테이션(기름부음, 성령과 은사의 전이) 
10) 새 포도주와 새 가죽부대 
11) 중보기도(중보자와 예언기도, 대적기도) 
12) 요엘서, 다니엘서와 이사야, 계시록 등의 극단적세대주의적 성경해석 
13) 정통기독교에 대한 욕설과 비난(종교의 영, 사탄의 개) 

우리나라에서는 신사도운동에 대해서 고신(2007년)과 합신(2009년)에서 이단성/교류금지로 공식 발표되었으며, 고신에서는 2011년에 별도로 IHOP까지를 함께 규정한 바 있다. 신사도 운동은 그 뿌리가 너무 깊고 너무 넓게 퍼져있지만 반드시 밝혀야만 한다. 특히 우리나라에서 유명한 선교단체들과 대형교회들이 이 운동을 지지하고 있으며 신사도운동과 IHOP 등의 인사들을 초청하여 집회를 하여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 

이러한 신사도운동과 그 유사단체의 여러 가지 교리와 주장 중에서 가장 먼저 이들의 외형적인 예배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24/7 예배에 대해서 살펴보자. 

2. 24/7 예배의 문제점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이 24시간 찬양과 기도가 나쁘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들의 이 개념에는 잘못된 사상이 포함되어 있어 문제다. 그 문제점은 대략적으로 다음과 같으며, 이것을 상세하게 살펴보자.

(1) 하프와 보울 사상 
이들이 주장하는 ‘하프와 보울’을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어떤 상태”라고 부른다는 것이다. 즉 하프는 찬양을 상징하고 보울은 기도를 상징한다는 것이다. 

“책을 취하시매 네 생물과 이십 사 장로들이 어린 양 앞에 엎드려 각각 거문고와 향이 가득한 금 대접을 가졌으니 이 향은 성도의 기도들이라”(계 5:8). 

그들은 계5:8의 거문고가 하프(Harp)이고 금대접(Bowl)은 기도를 뜻한다고 한다. 그러나 성경을 자세히 보면, 기도는 금대접이 아니라 그 대접에 담겨져 있는 향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대접(Bowl)은 무엇인가를 담는 용도 외에 어떤 특별한 의미를 갖지 않는다. 왜냐하면 계 16장의 “하나님의 진노를 쏟는 대접”도 동일한 ‘Bowl’ 이기 때문이다. IHOP에서 Bowl 이라는 단어를 어떤 특별한 임재상태의 기도로 본다면 계 16장의 진노의 대접에 대해서는 어떻게 해석을 할 것인가? 이와 같이 성경을 풍유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원래 이단단체들의 상용수법이다. 

본문은 “하프와 보울”이라는 단어가 어떤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라, 어린양이신 예수께서 찬양을 받기에 합당하신 분이라는 것과 함께, 예수께서 성도들의 기도를 들어주시는 유일한 중보자임을 뜻하는 내용이다. 즉 하프와 보울이라는 단어가 어떤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며, 이들은 이렇게 성경을 엉터리로 인용하면서도 자신들의 주장이 마치 성경적이라는 것을 합리화하고 있는 것이다. 

(2) 다윗의 장막 
또한 24/7 기도라는 용어가 ‘다윗의 장막’과 도대체 무슨 상관이 있을까? 이들은 다윗도 24시간/7일 동안 찬양과 예배를 드렸다고 주장을 하면서 우리도 다윗의 장막을 회복하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들이 주장하는 것은 하나님이 24/7 동안 드리는 예배와 찬양에 임재하신다는 주장이다. 

그렇다면 24시간/7일/365일 예배를 드리지 않는 교회는 하나님이 임재하시지 않으며, 하나님이 그 기도를 받아주시지 않는가? 하나님이 받아주시는 기도에 시간 제한이 있는가? 몇분을 기도하면 안 받아주시고, 24시간/1주일/365일을 기도하여야만 받아주시는가? 

과연 기도와 예배를 드리는 시간이 그렇게 중요한 것인가?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기도 외에 또다른 조건이 있어야만 하나님이 기도를 받아 주시는가? 예배를 끊임없이 드려야만 하고, 일렉트릭 사운드의 기타와 드럼으로 찬양을 드려야만 하나님께서 임재하여 그 기도를 받아주는가? 고사리와 같은 손으로 어린아이가 드리는 기도는 하나님이 외면하시는가? 

IHOP이 주장하는 것은 소위 “다윗의 장막의 회복”이다. 다윗의 장막에 대해서 그들이 특별히 인용하는 아모스 9:11-12를 살펴보고, 그 구절을 인용한 사도행전 15:16-17을 살펴보자. 그들이 인용하는 성경구절은 항상 전체적인 내용이 아닌 부분적인 내용뿐이며, 성경이 말하는 내용과 전혀 다른 부분적인 해석일 뿐이다. 

“그 날에 내가 다윗의 무너진 천막을 일으키고 그 틈을 막으며 그 퇴락한 것을 일으켜서 옛적과 같이 세우고 저희로 에돔의 남은 자와 내 이름으로 일컫는 만국을 기업으로 얻게 하리라. 이는 이를 행하시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암 9:11-12). 

“이 후에 내가 돌아와서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지으며 또 그 퇴락한 것을 다시 지어 일으키리니 이는 그 남은 사람들과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모든 이방인들로 주를 찾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행 15:16-17). 

과연 본문이 종말적으로 다윗의 무너진 장막이 실제로 회복된다는 뜻인지 살펴보자. 사도행전 15장 본문을 전체적으로 읽어보면 유대인들 중에서 기독교인으로 개종한 몇 사람들이 예루살렘으로 왔는데, 그들은 기독교인이면서 모세의 율법대로 할례를 지켜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즉 오늘날과 같이 믿음 외에도 율법적 행함이 필요하다고 하는 혼합적 율법주의자들이다. 본문을 살펴보자.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되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 하니 바울과 바나바와 저희 사이에 적지 아니한 다툼과 변론이 일어난지라 형제들이 이 문제에 대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및 그 중에 몇 사람을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에게 보내기로 작정하니라”(행 15:1-2). 

그래서 바울과 바나바를 포함한 몇 사람을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에게 질문을 하기로 하여 보낸 것이다. 바울과 바나바에게 자초지종을 듣고 예루살렘공의회는 변론을 한 후에 최종적으로 베드로가 이렇게 말한다. 

“그런데 지금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여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느냐 우리가 저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 받는 줄을 믿노라 하니라”(행 15:10-11). 

그리고 결론적으로 야고보가 정리를 한 것이 바로 성경본문이다 

“선지자들의 말씀이 이와 합하도다. 기록된바 이 후에 내가 돌아와서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지으며 또 그 퇴락한 것을 다시 지어 일으키리니 이는 그 남은 사람들과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모든 이방인들로 주를 찾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즉 예로부터 이것을 알게 하시는 주의 말씀이라 함과 같으니라. 그러므로 내 의견에는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께로 돌아 오는 자들을 괴롭게 말고 다만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 하라고 편지하는 것이 가하니 이는 예로부터 각 성에서 모세를 전하는 자가 있어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그 글을 읽음이니라 하더라”(행 15:15-21). 

예수의 동생이자 예루살렘교회의 지도자로 알려진 야고보는 아모스 구약 성경구절을 인용하고 있었는데, 이 구절에서 “다윗의 장막”이 언급된 것이다. 즉 쉽게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다. 예수 그리스도 주님의 은혜로만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며 더 이상 구약의 율법으로는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다윗의 장막을 다시 회복하여 율법을 지키자는 뜻과 전혀 반대의 뜻이다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 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 하라”라는 최소한 율법적인 규정만을 지키라고 전하는 이유는 바로 각 성에서 모세를 전하는 자가 있어 안식일마다 그 글(율법)을 읽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4가지의 규정만을 지키라고 전달하는 이유는 두가지인 것이다. 

(1) 이방인들로부터 하나님에게로 돌아오는 자를 괴롭히지 않기 위하여 
(2) 각 성에서 모세를 전하는 유대인들이 있기 때문에 

즉 이방인과 유대인 모두를 위하여 최소한의 규정 4가지를 전하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본문을 다시 살펴보자 

암 9:11-12 그 날에 내가 다윗의 무너진 천막을 일으키고 그 틈을 막으며 그 퇴락한 것을 일으켜서 옛적과 같이 세우고 저희로 에돔의 남은 자와 내 이름으로 일컫는 만국을 기업으로 얻게 하리라. 이는 이를 행하시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행 15:16-17 이 후에 내가 돌아와서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지으며 또 그 퇴락한 것을 다시 지어 일으키리니 이는 그 남은 사람들과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모든 이방인들로 주를 찾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아모스는 ‘그 날’(In that day)이라고 기록하였으나 누가는 야고보의 주장을 인용하면서 ‘이후에’(After this)라고 본문을 바꾸었다. 왜 야고보는 구약본문을 바꾸었을까? 또 "옛적과 같이 세우고"는 "다시 지어 일으키리니"로 바뀐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할까? 즉 야고보는 아모스의 예언이 신약에서 이미 성취되었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즉 율법의 행위로 얻는 구원은 예수를 믿는 은혜로 이미 바뀌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야고보는 허물어진 다윗 왕국을 다시 세우고 퇴락한 것을 다시 지어낸다는 아모스의 예언을 인용하여, 유대인의 율법주의의 배타적 구원관이 무너졌으며, 예수그리스도에 의해 다시 세워진 믿음과 은혜의 구원관으로 전환됨을 강조하기 위하여 본문을 인용한 것이다. 

즉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 이후에 유대인들 중에서 일부 남는 자를 포함하여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이방인들이 기업을 얻게 된다는 것이며, 율법론적인 구원관이 무너지게 되며, 은혜와 믿음으로 얻는 구원관으로 회복된다는 것이다. 구약 아모스 선지자를 통한 예언이 이 날에 성취되었다는 것이다. 

즉 신사도운동에서 ‘다윗의 장막’을 아직 성취되지 않은 것으로 해석하여 다시 종말론적으로 적용시키는 것은 성경을 잘못 해석하는 오류이며, 성경적인 근거가 전혀 없는 것이다. 

(3) 24/7 찬양과 기도 
24/7 찬양과 기도를 주장하는 신사도운동 단체들은 다윗이 24/7 예배를 드렸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필자는 성경에서 그러한 의미를 찾지 못하겠다. 필자는 그들이 인용하는 성경구절을 모두 찾아보았지만 전혀 근거가 없었다. 그들이 인용하는 성경구절을 살펴보자. 

“예루살렘에 모인 이스라엘 자손이 크게 즐거워하며 칠일 동안 무교절을 지켰고 레위 사람들과 제사장들은 날마다 여호와를 칭송하며 큰 소리나는 악기를 울려 여호와를 찬양하였으며”(대하 30:21). 

위 성경본문이 24시간을 쉬지 않고 계속 찬양하였다는 구절인가? 

[공동번역] 예루살렘에 있던 온 이스라엘 백성이 기뻐 어쩔 줄을 모르며 칠 일간 무교절을 지키는데, 레위인과 사제들은 날마다 온 힘을 다 내어 야훼께 찬양을 불러 올렸다. 
[현대인의성경] 예루살렘에 모인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은 누룩을 넣지 않고 빵을 만들어 먹는 명절인무교절을 7일 동안 기쁜 마음으로 지켰다. 그리고 레위 사람들과 제사장들은 날마다 악기를 힘차게 연주하면서 여호와를 찬양하였으며 

성경본문은 무교절 7일 동안에 날마다 하나님을 찬양했다는 뜻이다. 그것도 무교절 7일 동안 날마다 찬양하였다는 것은 맞지만, 24시간을 쉬지 않고 계속하여 찬양을 했다는 의미는 아니다. 

“언약궤가 평안한 곳을 얻은 후에 다윗이 이 아래의 무리를 세워 여호와의 집에서 찬송하는 일을 맡게 하매 솔로몬이 예루살렘에서 여호와의 전을 세울 때까지 저희가 회막 앞에서 찬송하는 일을 행하되 그 반열대로 직무를 행하였더라”(대상 6:31-32). 

그들이 주장하는 글을 읽으니 성가대가 회막 앞에서 24시간을 정해 놓고 순서대로 찬송을 하였다고 해석을 하고 있는데, 웃음을 감추지 못하겠다. 그들은 계속하여 찬송을 한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전을 세울 때까지 한시적으로 찬송하는 일을 행하였으며, 더욱이 24시간 찬송했다는 것이 아니라, 정해진 절차에 따라 수행된 것이다. 더욱이 “반열대로”라는 것은 24시간의 순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일년 동안에 24번의 순서로 교대하였다는 것이다 

[공동번역] 그들은 솔로몬이 예루살렘에 야훼의 성전을 지을 때까지 '만남의 장막' 곧 성막앞에서 성가대원으로서 노래를 불렀다. 그들이 맡은 임무는 정해진 절차에 따라 진행되었다. 
[현대인의성경] 그들은 솔로몬이 예루살렘에 성전을 세울 때까지 거기서 일정한 규정에 따라 그 일을 계속하였다. 

그들은 또 다음 성경구절을 인용하여 레위 지파 성가대는 다른 일을 하지 않고 24시간 주야로 찬송만 하였다고 주장을 한다. 

“또 찬송하는 자가 있으니 곧 레위 족장이라 저희가 골방에 거하여 주야로 자기 직분에 골몰하므로 다른 일은 하지 아니하였더라”(대상 9:33). 

위 성경구절도 24시간을 계속 찬송했다는 뜻이 아니다. 맡은 일에 전담하기 위해 항상 다른 장소에서 대기하고 있었으며 다른 업무를 하지 않았다는 뜻일 뿐이다. 

[공동번역] 이상이 레위 지파 각 가문의 어른들 가운데 합창하는 임무를 띤 사람이다. 그들은 주야로 자기 맡은 일을 할 수 있도록 당번이 아닐 때에도 언제나 별관에 있었다
[현대인의성경] 그리고 성가대원들도 있었다. 이들은 모두 레위 집안의 족장들로서 예루살렘의 성전 구내에 살면서 밤낮 자기들의 직분에만 몰두하고 다른 일은 일체 하지 않았다

또 다음 구절은 악기 연주자들이 24시간 연주를 했다는 뜻인가? 

“또 레위 사람을 세워 여호와의 궤 앞에서 섬기며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칭송하며 감사하며 찬양하게 하였으니 그 두목은 아삽이요 다음은 스가랴와 여이엘과 스미라못과 여히엘과 맛디디아와 엘리압과 브나야와 오벧에돔과 여이엘이라 비파와 수금을 타고 아삽은 제금을 힘있게 치고 제사장 브나야와 야하시엘은 항상 하나님의 언약궤 앞에서 나팔을 부니라”(대상 16:4-6). 

과연 16:6에서 “항상”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므로, 24시간 쉬지않고 하나님의 언약궤에서 나팔을 불렀다는 뜻일까? 

[공동번역] 
“다윗은 레위인 가운데 야훼의 궤를 모시고 이스라엘의 하느님 야훼께 감사 찬양을 드리며 예식을 집행할 사람들을 다음과 같이 임명하였다. 책임자 아삽, 그 밑에 즈가리야, 우찌엘, 스미라못, 여히엘, 마띠디야, 엘리압, 브나야, 오베데돔, 여이엘. 아삽이 바라를 치면, 이들은 수금을 타며 소구를 쳤다. 그리고정해진 때마다 하느님의 계약궤 앞에서 나팔을 부는 사람은 사제 브나야와 야하지엘이었다.” 

[현대인의성경] 
“다윗은 일부 레위 사람들을 뽑아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 노래하고 찬양하며 여호와의 궤 앞에서 섬기도록 하였다. 이 직무를 맡은 책임자는 제금을 치는 아삽이었으며 그를 돕는 자들은 스가랴, 여이엘, 스미라못, 여히엘, 맛디디아, 엘리압, 브나야, 오벧-에돔, 그리고 또 다른 여이엘이었는데 이들은 모두 비파와 수금을 타는 자들이었다. 또 브나야와 야하시엘 두 제사장은 하나님의 궤 앞에서 정규적으로 나팔을 불었다.” 

더욱이 24반열에 대해서 신사도운동과 IHOP은 24시간 교대로 사역을 하였다고 주장하는데, 그것은 무지의 소산이다. 24반열이라는 것은 일주일씩 사역을 담당하였던 제도이며, 일년에 2번씩 돌아오는 순서를 뜻한다. 구약의 성전에서는 제사장을 24반열로 정하여 일년에 두 번씩 차례가 오도록 하였던 것이다. 제사장과 성가대와 파수꾼들은 모두 24 반열의 순서를 정하였다고 성경은 말한다. 주석적인 증거를 보자. 

(호크마 주석) 
[대상24:19] 이와 같은 반차로 ···수종들었더라 : 24반열로 조직된 제사장들은 각기 순번을 좇아한 주일씩 돌아가며 봉사하였다(왕하 11:9). 한편 이러한 제사장의 24반차 제도는 신약 시대에까지 지속되었는데(눅 1:8) A.D. 70년 예루살렘 멸망과 더불어 끝나고 말았다. 

(아가페성경사전 1513쪽) 
- 제사장의 봉사는 그들의 반차에 따라 규정되었다. 대상24:7-18은 비록 다윗이 다스리는 기간 동안의 반차의 근원이 의문시 되어 왔지만, 24 반차를 열거하고 았다. 이 배열을 보면 각 반차들이 매년 2주간 동안 성전을 통해 봉사할 수 있는 특권을 누렸음을 알 수 있다. 

(톰슨주석성경) 
23:1-26:32 다윗은 임종을 앞두고 성전에서 봉사할 레위사람들의 책임을 체계적으로 분담시킴으로서 성전 제사 제도를 더욱 탄탄하게 정비하였다. 원래 레위지파는 하나님의 율법을 맡은 자들로서 성막 봉사등 이스라엘 신앙 공동체 내에서 중추적 역할을 감당하도록 임명되었다. 이러한 체계적 직무 분담은 성전 업무의 능률화는 물론 효과적 인원관리에도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즉 24반차 제도를 통해 대부분의 레위인들은 일년에 두 주씩 봉사하게 되었으며 남는 기간 동안에는 율법 연구나 기타 여러 직무에 두루 전념할 수 있었던 것이다. 

25:1-31 성가대의 조직 : 다윗은 성전에서 봉사할 제사장들과 그들을 돕는 레위인들의 순서를 조직해 놓고 나서, 이제 성전에서 여호와를 찬양할 성가대를 24 반열로 조직한다 

오히려 성전에서 봉사하는 레위자손에서 선출된 성가대는 24시간이 아니라, 새벽과 저녁에 두 번 찬송을 하였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다윗의 유언대로 레위 자손이 이십세 이상으로 계수되었으니 그 직분은 아론의 자손에게 수종들어 여호와의 전과 뜰과 골방에서 섬기고 또 모든 성물을 정결케 하는 일 곧 하나님의 전에서 섬기는 일과 또 진설병과 고운 가루의 소제물 곧 무교전병이나 남비에 지지는 것이나 반죽하는 것이나 또 모든 저울과 자를 맡고 새벽과 저녁마다 서서 여호와께 축사하며 찬송하며 또 안식일과 초하루와 절기에 모든 번제를 여호와께 드리되 그 명하신 규례의 정한 수효대로 항상 여호와 앞에 드리며 또 회막의 직무와 성소의 직무와 그 형제 아론 자손의 직무를 지켜 여호와의 전에서 수종드는 것이더라”(대상 23:27-32). 

그들이 인용하는 성경은 모두 문자적이거나 부분적이며, 자신들의 주장을 성경적으로 짜맞추기 위한 인용일 뿐이다. 

“또 아셀 지파 바누엘의 딸 안나라 하는 선지자가 있어 나이 매우 늙었더라 그가 출가한 후 일곱 해 동안 남편과 함께 살다가 과부 된지 팔십 사년이라 이 사람이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에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섬기더니”(눅 2:36-37). 

“주야로, 밤낮으로”라는 단어가 24시간 쉬지 않고 계속한다는 것을 뜻하는가? 그렇다면 안나라는 선지자는 84년을 계속 금식하였다는 뜻으로 해석되는가? “주야로, 밤낮으로”라는 단어는 하나의 관용구로서 전념하였다는 강조적인 의미를 뜻한다고 보아야 한다. 위 본문은 S 단체에서 인용하는 성경구절이기도 한데, 84년을 계속 금식하고 살아있는 사람이 있다고 믿는가? 

혹시 “쉬지 않고 기도하라”(살전 5:17)는 성경구절에 대해서 24시간 아무 것도 하지 말고, 잠도 자지 말고, 밥도 먹지 말고. 계속 기도만 하라고 해석을 하는지 묻고 싶다.

 

 

출처: http://www.amen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2083

자아가 죽는다는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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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아가 죽는다는 의미

 

그대가 소홀한 취급을 받거나 의도적으로 따돌림을 당할 때,

화내거나 맘 상함 없이 온유함을 유지하고 그것을 가치있는 고통으로 여기면서

상대방을 웃음으로 대하기로 결심한다면,

그것이 자아를 죽이는 것이다.

 

그대가 어떤 어려움, 어떤 귀챦음, 어떤 성가심을 이웃으로부터 받고 있을 때,

예수께서 보여주셨던 사랑스러움과 유쾌한 분위기를 이웃에게 계속 선물할 수 있다면,

그것이 자아를 죽이는 것이다.

 

그대가 어떤 음식, 어떤 외로움, 어떤 직업, 어떤 의복, 어떤 지위,

어떤 방해 하에서도 겸손한 만족과 평안함을 누릴 수 있다면,

그것이 자아를 죽이는 것이다.

 

그대의 최선의 노력이 오해받고 잘못 전달됨으로서 그대의 소원이 좌절되고,

그대의 충고는 무시되고, 그대의 의견이 비웃음을 당할 때,

그대의 마음 속에서 솟구치는 분노와 억울함을 부인하고

그리스도께서 받으셨던 억울함을 생각하면서

그대의 경험을 자신에게 꼭 필요한 교훈으로 생각할 수 있다면,

그것이 자아를 죽이는 것이다.

 

가장 혹독한 시련과 형제의 냉정하고 가혹한 대우로 인하여 생긴 가장 암울하고

우울한 감정이 그대의 영혼을 엄습할 때,

힘찬 찬미를 부르며 오히려 슬픔과 낙담에 빠져있는 가족과 이웃을 위로할 수 있다면,

그것이 자아를 죽이는 것이다.

 

그대가 그대보다 부족해 보이는 사람으로부터 책망과 충고를 받았을 때,

그대의 육체로부터 치밀어 오르는 자존심과 반발심과 고집을 슬픔의 눈으로 내려다 보시는

그리스도께 도움을 청하는 긴급한 기도를 드린 후, 감사와 겸손으로 그것을 받아들인다면,

그것이 자아를 죽이는 것이다.

 

그대가 인생의 황혼기에서 자신의 영혼을 압도하는 듯한 죽음의 그림자와 외로움과

서러움을 힘있게 밀쳐버리고, 오히려 연약하고 우유부단한 젊은 자들을 꾸짖으며,

그들에게 진리를 위하여 자신의 온 힘과 정력을 불사르는 모습을 보여줄 수 있다면,

그것이 자아를 죽이는 것이다.

 

그대가 인생의 청장년기에서,

이기적인 경쟁심과 그대를 자극하고,

물질에 대한 욕망이 그대를 사로잡으려고 으르렁거리며,

세상이 주는 유혹이 그대를 압도하려고 할 때,

또한 그대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그런 것들을 즐기면서 아무런 문제없이

그리스도인의 신앙을 유지하는 것처럼 보일 때,

그대가 그대의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을 무시하고 오히려 진리를 위하여 가난해지고

고난을 당하며 그 가운데서 참된 평화와 행복을 발견하기로 선택한다면,

그것이 자아를 죽이는 것이다.

 

그대의 타락하고 이기적인 본성으로부터 날마다 솟구쳐 올라오는

죗된 욕망과 절규를 무시하고 날마다 하늘의 거룩한 법을 순종하기로 선택한다면,

바로 그것이 자아를 죽이는 것이다. 

 

노아의 시대와 마지막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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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아의 시대와 마지막 시대


 

창세기 6 1-12

 

사람이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는지라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그러나 그들의 날은 백이십 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당시에 땅에는 네피림이 있었고  후에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에게로 들어와 자식을낳았으니 그들은 용사라 고대에 명성이 있는 사람들이었더라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이르시되 내가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들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이것이 노아의 족보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10  아들을 낳았으니 셈과 함과 야벳이라

11  때에  땅이 하나님 앞에 부패하여 포악함이 땅에 가득한지라

12 하나님이 보신즉 땅이 부패하였으니 이는 땅에서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행위가 부패함이었더라

 

오늘 본문을 제대로 해석하기 위해서는 먼저 풀어야 하는 숙제들이  가지 있습니다 숙제에 대해 어떤 답안을 갖느냐에 따라 성경 전체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지가 결정됩니다따라서 대단히 중요한 과제입니다.

 

첫째로 풀어야  숙제는 2절에 나오는 ‘하나님의 아들들 누구인가 하는 것입니다둘째는 4절의네피림은 누구인가 하는 것입니다셋째는 3절에서 사람의 날이 120년이 되었다는 뜻은 무엇인지 풀어야 합니다넷째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을 통해 자식을 낳았는데  자식들이 용사이며고대에 명성이 있던 사람들이라고 하는데  뜻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먼저 하나님의 아들들이 누구인지 살펴 보겠습니다.

먼저 질문 하겠습니다지금도 하나님 곁에 있는 천사들이 타락할  있습니까?  성경을 읽어본 사람이라면 지금은 천사들이 타락하지 않는다고 답할 것입니다천사의 타락은 오직 한번 있었습니다.천사들의 타락은 아담이 지음을 받기 전에 있었습니다요한 계시록 12장을 보면 천사들 중에 삼분지 일이 “    또는 마귀라고도 하는 사탄 중심으로 하여 하나님께 반란을 일으킵니다.그러나 그들은 미가엘과 그의 천사들에게 패하여 하나님의 나라에서 쫓겨나고 하나님과의 관계가완전하게 끊어져서 악령들 귀신들이 됩니다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은 영적인 존재인 사탄과 악령들의 타락은 사람이 지음을 받기 이전 사건이며  이후로는 천사가 스스로 타락하여 악령이 되는 일이 없다는 점입니다따라서 처음부터 성경은 타락한 천사들에 대해 정확하게 귀신 또는악령이라고 표현합니다그러므로 우리는  가지를 확증할  있습니다.

 

첫째사탄을 중심으로  천사의 타락은 사람이 지음을 받기 전에 있었다.

둘째 이후로 하나님 곁에 있는 하늘의 천사들의 타락은 불가능하다선한 천사가 악령이 되는일은 없다.   

 

하늘 나라에 사탄이 쫓겨나고 없는데 어떻게 천사들이 스스로 하나님을 대항하여 각각 타락할  있겠습니까그러므로 인간이 지음을 받은 이후로는 천사는 타락하는 일이 없습니다이미 인간이 존재하기 이전에 타락한 천사들 악령들과 귀신들이 마귀을 중심으로 존재하고 있을 따름입니다.

 

이러한  가지의 분명한 전제 하에 창세기 6장에 언급된 ‘하나님의 아들들 누구인지 살펴봅시다천사입니까아니면 사람입니까만일 ‘하나님의 아들들 하나님의 천사라면 사람이 피조된이후로는 그들은 타락할  없기 때문에 범죄를 저지르는 것이 불가능합니다하나님과 함께 하던하늘의 천사가 하나님의 명령을 거슬러 사람의 딸들을 취하여 타락한다는 것은 있을  없습니다.

 

그렇다면 사람의 딸들을 취한 자들이 타락한 천사들 악령들일  있다는 생각을   있습니다.귀신들이 사람의 딸들을 취하였다고 보는 것입니다그러나  의견도 성경에 어긋납니다성경은 한번도 악령들과 귀신들을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 부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악령을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 부른다면 이는 신성 모독입니다하나님께서  거룩한 성경에 귀신들과 악령들을하나님의 아들들 기록하실리 만무합니다.

 

또한 가장 중요한 사실은 예수님께서 천사들은 장가도 시집도 가지않는다고 분명하게 말씀하셨다는 사실입니다( 22:30). 그런데 본문 2절을 보면 하나님의 아들들이 …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았다 기록함으로서 단순한 성관계가 아니라 결혼을 의미하고 있습니다만일 하나님의 아들들 천사로 본다면 2절은 천사들이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았다는말이 되는데 이는 예수님의 말씀과 정면으로 충돌하게 됩니다따라서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진리로 받는다면 창세기 6장의 하나님의 아들들 천사일  없습니다.

 

또한 천사들의 존재 양식은 영으로서 우리 인간들의 존재 양식과 근본적으로 다릅니다물론 구약에서 천사들이 사람의 몸을 입고  적은 있지만 그렇다고 하여 천사와 사람 사이의 성관계가 용납될 있다고  수는 없습니다그것은 단지 인간의 부패한 상상일 뿐입니다.

 

그럼에도 무리한 가정을 통해 오늘 2절에 대해 ‘하나님의 아들들 천사로   있는 유일한 방법이 있다면 그것은 남자들에게 악령이 들리는 것입니다그리고  남자들이 여자와 결혼하여 아이를낳는 방법이 있습니다이러한 경우는 지금도 가능한 사건인데 남자 무당이 일반 여자와 결혼을 하여 자녀를 두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하지만 창세기 6장이  말을 하는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이유는 성경이 남자 무당을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 부를리 만무하며 또한 2절을 ‘남자 무당들이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는지라 해석하기에는 너무나 무리가 되고 부자연스럽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 학자들 중에는 ‘하나님의 아들들 천사들로 보는 자들이 있습니다그들은 하나님과 함께 있던 천사들이 노아 홍수 이전에 정신이 나가서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그들과 성관계를 맺어 네피림이라는 거인족을 낳았다고 주장하는 자들이 있습니다이들은 성경을마치 공상 과학 소설이나 신화처럼 깎아 내리는 어리석은 자들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주장을 합리화하기 위해 하나님의 아들들이라는 표현이 욥기에 있다고 말합니다.실제로 욥기를 보면 그러한 학자들의 주장대로  군데에 ‘하나님의 아들들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욥기 1 6, 2 1그리고 38 7절입니다욥기 1 6절과 2 1절만 보아서는 ‘하나님의아들들 천사를 지적하는 것을  수는 없지만 욥기 38 7절을 보면  세상의 창조 기사 가운데서 ‘하나님의 아들들 말하기 때문에 사람이 아니라 분명히 천사를 두고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표현한 것임을   있습니다. “ 때에 새벽 별들이 기뻐 노래하며 하나님의 아들들이  기뻐 소리를 질렀느니라.” 그러므로 욥기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들 천사인 것이 맞습니다그러나 ‘하나님의 아들들 표현된 천사들이 타락한 천사일 수는 없습니다타락한 천사들이 하나님의 어전에 함께 있을  없으며또한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귀신과 악령이 ‘하나님의 아들들이라는 호칭을 받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욥기의 ‘하나님의 아들들 하나님과 함께 하는 거룩한 천사들입니다이에 욥기는 마귀와 하나님의 아들들을 구별하여 표현하고 있습니다성경의 ‘하나님의 아들들 결코 마귀와 함께타락한 1/3 귀신들을 의미하지 않습니다욥기 또한 마찬가지입니다이미 우리가 확증한 것처럼하나님과 함께 하는 천사들은 사람이 지음을 받은 이후에 타락할  없습니다마귀가 쫓겨난 하늘나라의 상태에서 하나님과 함께 하던 천사들이  타락할  있다면  사건이야 말로 하나님의 능력과 주권과 영광을 사탄의 타락보다  많이 깎아내리는 사건이  것입니다그러나 그럴  없습니다사람이 지음을 받기 이전에 사탄을 중심으로  천사의 타락 외에 하나님의 천사들이 악령이되는 일은 결코 성경에 암시된 적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2절의 ‘하나님의 아들들 선한 천사이든 악령이든 결코 천사일 수는 없다는 결론을 얻게 됩니다.  

 

그렇다면 창세기 6장의 하나님의 아들들은 사람입니다특히 하나님의 아들들이기에 거룩한 사람들입니다하나님의 택한 백성입니다구원 받은 자들입니다믿음의 사람들입니다성경은 욥기를 제외한 다른 곳에서 ‘하나님의 아들들 말할  믿음의 사람들을 의미합니다성령이 함께 하는 주의백성들을 말합니다 증거는 구약에도 있고 신약에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시편 73 15절입니다내가 만일 스스로 이르기를 내가 그들처럼 말하리라 하였더라면 나는 주의 아들들의 세대에 대하여 악행을 행하였으리이다.” 여기서 주의 아들들은 하나님의 아들들입니다하나님을 로 바꾸었을 뿐입니다또한 호세아 1 10절을 보면 그곳에서는 하나님의 아들들이라는 표현이 정확하게 등장합니다그리고 그 표현은 하나님의 백성을 뜻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의 수가 바닷가의 모래 같이 되어서 헤아릴 수도 없고 셀 수도 없을 것이며 전에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 곳에서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들이라 할 것이라.”

 

신약은 이 사실을 더욱 분명하게 합니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8:14).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8:19).신약에서는 하나님의 아들들이란 오직 그리스도의 보혈로 구원 받은 주의 자녀들을 뜻하는 표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창세기 6장의 하나님의 아들들은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주의 백성인 사실을  있습니다 분명한 증거는 창세기 4장입니다창세기 5장은 족보를 언급하기 위해 삽입한 것이고사건 전개는 창세기 4장에서 6장으로 곧바로 이어집니다그렇다면 창세기 6장을 읽기 전에 창세기4장의 끝부분을 읽어야 자연스러울 것입니다창세기 6장의 하나님의 아들들이 누구인지 창세기4 25절과 26절이 언급합니다. “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여기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는 것은 믿음의 공동체가 형성되었다는 뜻입니다여호와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땅에 존재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구약 시대 초기에 믿음으로 구원 받은 자들이 함께 여호와 하나님을 불렀다는 뜻입니다바로 이들이 자연스럽게 창세기 6장에서하나님의 아들들 일컬음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하나님의 아들들은 성경 전반에 걸쳐 하나님을 사랑하는 거룩한 무리를 말하는데 사용되고 있습니다 무리로는 천사와 사람이 있습니다욥기는 타락하지 않은 천사들을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 불렀고  성경 전반에 걸쳐 하나님의 아들들이라는 표현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은혜의 언약을 믿고 하나님 편에  있는 구원 받은 주의 백성들을 의미합니다그러므로 창세기6 2절의 하나님의 아들들은 노아 홍수 이전에 구약 교회를 구성하고 있던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점을 분명하게 하지 않으면 성경으로 공상 소설을 쓰게 되며 나아가 유다서와 베드로전후서까지그릇된 해석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최근에는 예수님 재림 때가 가까우면 악령이 사람과 다시 성관계를 가져서 인간의 DNA 조작됨으로 과거 네피림처럼 이상한 괴물과 같은 초자연적인 인간들이 만들어질 것이라는 이론들이 나오고있습니다하지만 이러한 공상 과학들은 단지 창세기 6장의 ‘하나님의 아들들 악령으로 믿는데서비롯되는 오해인 것입니다

 

이제  번째 숙제를 풀어 봅시다. 4절의 네피림은 누구인가 하는 것입니다.

창세기 6장의 ‘하나님의 아들들 천사로  학자들은 노아 홍수 이전에 특별하게 타락한 천사들이있다고 보는데이미 말씀 드린 것처럼 하나님과 함께 있다가 스스로 타락할  있는 천사는 없습니다그렇다면 악령들을 의미하는 것인데 성경은 악령을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 부른 적이 없습니다아무튼 성경을 오해한  학자들은 ‘하나님의 아들들 악령들이 사람과 결혼하거나 성관계를맺어서 네피림이라는 존재가 태어났다는 것입니다하지만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천사는 사람과결혼할  없습니다그러므로 네피림은 천사계와 사람계의 혼합 작품이 아닙니다특히 4절을 자세히 보면 ‘하나님의 아들들 사람의 딸들을 취하는 사건 ‘이전부터’ 네피림은 이미 존재하는 것을증언하고 있습니다. “당시에 땅에는 네피림이 있었고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에게로들어와 자식을 낳았는데 그들은 용사이며 고대에 명성이 있는 사람들이었더라.” 하나님의 아들들이사람의 딸들을 통해 자녀들을 낳기 이전에 네피림이 존재하였다고 말합니다 사실은 네피림이 누구인지를 바르게 깨닫는데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단서입니다.

 

더욱 다행스러운 것은 네피림이라는 표현이 구약 민수기에도 등장하는 것입니다민수기 13 33절입니다. “거기서 네피림 후손인 아낙 자손의 거인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이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 만일 네피림이 천사와 사람의 성관계로 만들어진 족속이라면 노아 홍수 ‘이후에도’ 천사가 사람의 딸과 성관계를 갖는 똑같은 사건이 있어야 합니다이유는 노아의 홍수 이후에는 오직 노아와 일곱 사람만 살아남고  인류가  죽었기 때문입니다.그러므로 민수기 13장의 네피림은 창세기 6장의 네피림의 후손일  없습니다.

그렇다면 민수기 13장의 네피림은 누구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는 것은 지구의  땅은 노아의 홍수를 겪으면서 엄청난 격변을 지났습니다따라서 우리는 노아 홍수 이전의 상태를 구하늘과 구땅이라고 부를  있습니다노아의 홍수를 지난   세상에 살아남은 사람은 오직 노아와 그의 가족 밖에 없었습니다 합쳐서 오직 여덟명입니다 여덟명이 새로운 하늘과  땅을 맞이하여 새롭게 인류를 시작하였습니다현재 우리가 사는 지금 하늘과 땅입니다.

 

노아의 홍수가 있기 이전 시대는 지금  세상과는 다른 세상이었습니다. 완전히 다른 세상이었습니다그때는  깊음의 샘물과 하늘의 창문 샘이 터지기 이전 세상이었습니다하늘에서 비가 내리는 일이 없었습니다습기만 땅에서 올라와  지면을 적시던 때였습니다제가 과학을  모르지만노아의 홍수 이전은 자외선이 거의 없거나 약한 시대였습니다그래서 노아 홍수 이전의 사람들은천년 가까이 살았습니다자녀를 낳는 것도 지금처럼 20-30 낳은 것이 아니라 수백년 동안 자녀를낳을  있었습니다그러므로우리는  아담과 하와와 몇명의 자녀를 낳았는지   없습니다노아이전 사람은 거의 대부분   가까이 살았습니다노아도 950년을 살았습니다그러면서 계속 자녀를 낳았으니   위에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겠습니까또한  세상의 땅이 서로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노아의 때에  땅에 얼마의 인구가 있었는지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많게는 90억까지 보는 사람도 있고 적게는 수억 명으로 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아무튼 대단히 많은 사람들이  땅에 살고 있었습니다 땅에 사는 사람들은 거의  살까지 살면서 계속 자녀들을 낳았습니다동물들도 수백년씩대단히 오래 살았습니다.

 

또한 노아 홍수 이전 시대는 대부분의 동물들과 사람들이 기후 조건이나 환경 때문에 컸을 것입니다  네피림은 가장  사람들이었습니다동물도 노아 홍수 이전의 것들은 대단히 컸습니다.

 

그렇다면 네피림은 특이한 거인족 인간입니다돌연변이 거인족이라고 하면 분명할  같습니다이러한 족속이 어떻게 출현하게 되었는지는 우리는   없습니다분명한 것은 천사계와 사람계의연합에 의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4절은 분명히 ‘하나님의 아들들 사람의 딸들을 취하기 이전부터 네피림이 존재하고 있다고 말하며민수기가 의미하는 바는 그들은 거대한 거인 족속을 뜻할뿐입니다그런데 중요한 사실은 네피림은 노아 홍수 이전 시대에서 세상 권력을  자들이었습니다그들이 나타나기만 하면 일반 사람들은 덜덜 떨었습니다그들을 이길  있는 사람들은  땅에없었습니다.

 

아무튼 우리는 네피림이라는 족속이 노아 홍수 이전에도 있었으며 또한 노아 홍수 이후에도 존재했음을 봅니다그러므로 네피림은 부패하고 타락한 무질서한  세상에서 나타나는 돌연변이 현상으로 보면   같습니다아무튼 천사와 사람들 사이의 성관계를 운운하는 성경 학자들  목사들은자신들의 사견을 버려야  것입니다.

 

우리는 노아 홍수 이전에도 지금 세대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 불리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있고 반면에 하나님을 믿지 않는 불신자들이 있었다고 보면 하자가 없습니다.

 

우리가  알듯이,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만 받으시자 이에 분노한 가인은 아벨을 돌로  죽이고 사건 때문에 가인은 하나님 앞에서 물러가 세상으로 나아가 자기 멋대로 살게 됩니다그리고 가인의 후예가 만들어집니다가인의 후예들은 하나님 없이 자기 힘으로 사는 인간들이 되었습니다. 후예들 중에는 라멕과 같은 무자비한 무사들이 우두머리가 되었습니다가인의 후예는 무력으로권력을 소유하고 무력으로 그들의 사회를 통치했습니다힘있는 자가 살아남는 사회를 만들어 냈습니다가인의 후예들은 하나님이 없는 세상 공동체를 형성했습니다.

 

반면 우리가 이미 살펴본 것처럼 셋의 후예들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었습니다여호와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관계라는 뜻입니다그러나중요한 사실은 노아의 홍수 때에는  계열에 속한 자들 중에서도 노아 외에는 아무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없었다는 사실입니다이는 노아의 홍수가 시작되기 전까지 하나님의 아들들의 대가 끊어지면서 급격하게 신자들이 줄게 되는 현상이 나타났다는 뜻입니다 와중에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불신자 여인들과 결혼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창세기 6장이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세상 여인들의 아름다운 외모만 보고 그들이 가인에게 속한 불신자들임에도 불구하고 그들과 결혼하여 자녀들을 낳았다는 뜻입니다신자가 불신자와 연합하였다는 뜻입니다그리고  이유는 세상의 힘과 권력과 인기를 추구하기 위해서였던 것입니다하나님의 아들들이 세상의 힘으로 네피림과 맞서고 싶었던 것입니다현재 창세기6장은 부정적인 의미에서 용사 명성 기록하고 있습니다노아 홍수 이전 당시 네피림은 가장 용사이며 가장 명성이 높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이유는  당시 권력을 잡는데는 남자의 힘이가장 필요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그런데 하나님의 아들들이  세상에서 용사가 되고 명성이 있는사람들이 되기를 원하였습니다결국 그들은 세상에서 권력을 갖고 세상에서 성공하기 위해 외모가아름다운 여인을 보고 불신자와 연합함으로써 하나님의 자녀된 정체성을 버렸다는 뜻입니다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대신에 하나님이 맡기신 사명을 저버리고 세상에 속한 것을 얻기 위해 세상 사람들과 연합해 버린 것입니다 결과가 무엇입니까하나님의 아들들이  세상에서 힘과 권력과성공을 얻었을 수는 있었어도 신앙을 잃은 것입니다그리고 그들에게서 나는 자녀들은 신앙이 없는불신자들이 태어나게 되었던 것입니다또한 그들은 아무리 노력해도 네피림만은 못하였습니다그것이 롯과 같은 신자들의 인생이 아니겠습니까?

 

따라서 2절에서 4절까지의 사건은  노아의 홍수 때에 오직 노아와 그의 가족 외에 아무도 방주를타지 않고  멸망하였는지를 설명하는 배경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노아 때에 홍수로 죽은 자들은 어떻게 되었습니까그들은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을 기다리면서 어둠속에 있다고 합니다노아는 복음을 증거하였지만  복음을 듣고 믿은 자가   사람도 없었습니다 수없이 많은 인류 가운데 복음을 받아들인 자들이 없었습니다노아의 때에 홍수로 쓸려 죽은불신자들은 현재 어둠 속에 있습니다이제 앞으로 주의 재림 때에 다시 심판을 받고 영원한 지옥에들어가게  것입니다어둠에 있던 자들마다 영원한 불못으로 들어가게  것입니다.  

 

그렇다면 노아 홍수 이전에 하나님을 믿었던 하나님의 아들들은 몇이나 있었으며 그들에게는 어떤일이 있었습니까창세기 5장에 에녹이 등장합니다에녹 때까지는 아직 많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있었으며 제대로 신앙의 가문이 이어지는  합니다그럼에도 에녹은 심판을 예언합니다. “아담의 칠대  에녹이  사람들에 대하여도 예언하여 이르되 보라 주께서  수만의 거룩한  함께 임하셨나니 이는  사람을 심판하사 모든 경건하지 않은 자가 경건하지 않게 행한 모든 경건하지 않은일과  경건하지 않은 죄인들이 주를 거슬러  모든 완악한 말로 말미암아 그들을 정죄하려 하심이라 하였느니라”( 14-15). 에녹은 이미 노아의 홍수 심판을 예언하였습니다 땅에 하나님의자녀들이 급속하게 줄어들 것을 예언한 것입니다하나님의 자녀들이 세상을 부러워하고 세상과 연합할   세상 전체가 불경건한 세상이 되어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게 됩니다.

 

따라서 노아의 홍수가 발행하는 때에는 오직 마지막 신자로서 므두셀라만 있었습니다그리고 므두셀라는 노아 홍수가 터지는 해에  세상을 떠났습니다하나님의 아들인 노아의 아버지 라멕은 노아의 홍수가 터지기 5 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그리고 노아의 홍수가 터지던 날에는 아무도 노아의 방주를 타지 않았기 때문에  땅에 살던 인류는  죽습니다 사람도 빠짐없이  인류가  홍수에 쓸려 죽었습니다.

 

과연 노아가 방주를   믿음을 지닌 하나님의 자녀들은  땅에 있었습니까 답변은 없었다는것입니다본문 5 이하를 읽겠습니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이르시되 내가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들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은혜를 입었더라이것이 노아의 족보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아들을 낳았으니 셈과 함과 야벳이라 때에  땅이 하나님 앞에 부패하여 포악함이땅에 가득한지라하나님이 보신즉 땅이 부패하였으니 이는 땅에서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행위가 부패함이었더라.”  인류 가운데 구원 받을 자가   사람이라는 사실이 슬프지 않습니까하나님의슬픔이 본문을 읽으면서 느껴집니까?

 

예수님께서 누가복음 18장에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인자가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18:8). 예수님께서는 노아의 시대를 상기하시며 마지막 시대에 대해 이렇게 요약하셨습니다. 앞으로 믿음이 있는 자들은 더욱 줄어들 것이다 이유는 마지막 시대는 노아의 시대와 같을 것이기 때문이다.” 구원의 길은 좁은 길입니다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인도하는 문은 크고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7:13-14). 노아의 홍수 때에 인류는  멸망했습니다예수님 재림 때에 믿는 자들이 많지 않을 것입니다예수님 재림의 때에  인류가  불에 타서 죽게  것입니다.나아가 노아의 때의 인류와 지금  땅의 인류 가운데 누구든지 예수님의 방주를 타지 못한 자는 영원한 불못으로 떨어지게  것입니다그러나 노아는 여호와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은혜를 입은 자의 특징이 무엇입니까네피림을 부러워하지 않는 것입니다주님을 너무나 사랑한나머지 네피림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네피림처럼 세상에서 성공하고 싶은 욕구를 극복한 사람들이기에 세상과 타협하지 않는 것입니다은혜 입은 자의 특징은 하나님과의 동행입니다그분과동행하며 주의 말씀을 순종하는 것입니다그래서  앞에 부끄러움이 없이 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노아 시대의 사회 상태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그들을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 (24:37-39).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노아 시대의 세상 사람들의 삶의 특징은 정신없이 먹고 마시고 장가가고 시집가는 것입니다그런데  그렇게 합니까창세기 6장과 함께 보면  세상에서 힘을 얻고 싶은 것입니다네피림이 되고 싶은 것입니다그래서 날마다 정신없이 먹고 마시고 장가가고 시집가는 것입니다이는 평범한 일상 생활을 나타내는 표현입니다그러나 문제는 세상을 바라보기 때문에 하나님을 잊고 살더라는 것입니다 마음 속에는 세상을 향한 탐욕이 가득하여 있습니다.

 

노아 시대의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집을 짓고 시집가고 장가가는 아주 일상적인 생활을되풀이 하며 살아갔지만 그들의 인생 가운데 한번도 하나님께서 경고하신 홍수에 대해 대책을 세워준비한 일이 없습니다장차 다가  심판을 믿지도 않았고 마음에 두지도 않았습니다베드로후서 2 5절을 보면 오직 의를 전파하는 노아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의미는 노아는  시대 사람들을 향해 하나님의 복음과 심판을 알렸다는 뜻입니다. “여러분하나님의 경고를 들으시기 바랍니다함께 방주를 예비합시다 세상에 홍수가  것입니다신속히 방주 안으로 들어가기 바랍니다.” 노아는 수백수천수만번을 외치며 전하였을 것입니다그러나 사람들은 대답합니다. “지금까지  세상에는 세상을 휩쓰는 전세계적인 홍수가 없었는데  정신 나간 노아가 무엇을 말하는거야너나 믿어라나는 홍수에 망하면 망하겠다그러니  삶에 대해 경고하지 말고 너나 잘해라너는 정신 나간 사람처럼 홍수를 준비하며 바보같은 노아의 방주나 만들며 살아라나는 먹고 사느라정신이 없다.” 이렇게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에 관심이 없는 상태 하나님이 보시기에 항상 악한상태 것입니다.

 

결국 창세기 6 12절을 보면, “하나님이 보신즉 땅이 부패하였으니 이는 땅에서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행위가 부패함이었더라라고 말합니다부패라는 단어의 원어 의미는 타락파괴낭비라는 뜻입니다모든 사람들이 타락하더니 인생을 낭비하였다’. 그래서 그들의 삶은 파괴되었다’ 라는 뜻입니다하나님을 잊은 삶은 어떤 인생을 살아도 타락과 낭비의 인생입니다그리고  인생의 결국은파멸입니다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 팔고 심고 집을 짓는 일에만 신경을 쓰며 하나님을 잊고 사는 인생은 낭비되는 인생으로서 타락한 인생이고 파괴된 인생이라는 뜻입니다.

 

창세기 6 11절을 보니노아의 때는  땅이 하나님 앞에 부패하여 포악함이 땅에 가득했다고 말합니다부패라는 원어의 뜻은 불의와 폭력을 말합니다먹고 마시며 돈버는 일에 눈이  사회는 결국부정부패불의와 폭력의 공동체로 전락합니다사람들의 마음이 먹고 마시는 일에  욕심을 내면서 사나와지고 거칠어집니다 먹고  마시기 위해 권력과 돈과 인기와 명성을 쌓아 놓는 일에 전념하게 됩니다세상의 것들을 쌓는 것이 그들의 인생관이 됩니다폭력이란 주먹이나 몽둥이를의미하기도 하지만  넓은 뜻으로 보면 인간이 사회 속에서 가진 권력을 이용하여 다른 사람들의것을 빼앗아 망하게 하는 것을 뜻합니다다들 네피림이 되는 것을 뜻합니다따라서 폭력 사회는불공평이 많아지고 억울한 일들이 넘치게 됩니다강도도둑질 등도 폭력일  있지만오히려 네피림처럼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불법을 법으로 만들어 사람들을 착취하는 사회가 폭력 사회라고  있습니다노아 시대는 하나님께 무관심한 사회로서 불의와 폭력이  특징인 사회였습니다세상의권력을 가진 자가 가장 부러움과 명성을 얻던 시대였습니다네피림이 가장 부러움을 받던 시대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멸망한 노아 시대의 사람들에 대해 결론을 내리시기를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그들을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 24:38-39) 라고 하셨습니다예수님의말씀에 의하면 노아의 때의 사람들의 특징은 정신없이 먹고 마시고 장가가고 시집사는 것인데 어느정도였는가 하면 그들이 멸망을 받는 순간까지 인생의 주어진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망하였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들의 날은 120년이 되리라.” 하나님께서는 노아 홍수 이전에 존재하던  인류를 앞으로 120년이되던 해에 물로 쓸어버리기로 하셨습니다 기간이 지나면 노아 홍수 이전에 살던 인류에게는 이상 구원의 기회가 없습니다지금 우리에게도 120 내에 죽음의 심판이 예고되어 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이상의 기회는 없습니다현재 우리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 예고는 노아 시대에 세상을 물로 심판하시겠다는 예고만큼이나 확실합니다. “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 9:27).

 

우리의 인생은 노아의 심판이 선언된 때처럼 최대한으로  합쳐서 120 미만입니다그리고 우리는 120 내에 노아의 방주를 준비해야 합니다그렇지 않으면 영원한 멸망입니다죽음과 함께 어두움에 처하였다가 영원한 불못에 떨어지는 것입니다우리의  때문에 죽음의 홍수가 반드시 임할것입니다노아 시대의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홍수에 대하여 예고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대책을 마련하지 않았습니다지금  시대의 사람들은  때문에 멸망 받을 것이 예고되어 있지만 죽음이후에 대하여 아무런 대책을 세우지 않고 있습니다노아 시대를 향하여 하나님께서 내리신 하나님의 심판의 경고는 지금 우리에게 120 내에 우리 인생에 죽음의 심판이 내린다는 경고와 일반입니다노아 때의 준비는 멸망을 피하기 위해 믿음으로 방주를 준비하는 것이었습니다지금 우리가 죽음의 멸망을 피할  있는 준비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언젠가 주님의 심판이  세상에 임할 것입니다하지만 이미  개인을 향한 심판은 선포되었습니다. 120 이상   없다는 사실을 선포하시고  기간 내에 회개하고 돌아올 것을 경고하셨습니다우리의 인생이 120 미만인 것을 깨닫고 신속하게 에녹처럼노아처럼 구원의 방주를 타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동행하기를 바랍니다현재 우리가 먹고 마시고 장가가고시집가는 목적이 무엇입니까혹시 우리 자신도 네피림이 되기 위해 힘쓰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세상을 바라면서 외모만 보고 여자들을 취하며 세상의 권력과 인기와 명성을 붙들고자 신앙의 정절을팔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오랜 기간 방주를 예비했던 노아 처럼우리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방주를 지어야 합니다쏜살같이 지나는 우리의 인생이 주님을 모시고 새하늘과 새땅을 준비하는 과정이   있어야 합니다. 마지막 시대 가운데 구원의 방주 되시는 우리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저와여러분이 되기를 우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스데반  목사

(인천 그리스도의 보혈 교회)

장미란의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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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란의 기도



지난 올림픽에서 역도로 금메달을 땄던 장미란 선수가 이번 올림픽에서는 자신의 기록에 훨씬 못 미치는 성적으로 메달을 획득하는데 실패했다. 교통사고를 당해 몸이 온전치 못한 상태에서 그나마 자신의 최선을 다 한 것이다. 


예전 같았으면 가뿐히 들어 올렸을 무게의 역기조차 감당치 못하고 무너져 버리는 그녀의 모습이 참으로 애처로워 보였다. 그녀는 쓰린 가슴을 쓸어내리며 눈물을 머금고 단에서 내려와야 했다. 그런 와중에서도 그녀는 기도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녀는 지난 올림픽에서 최고의 기록을 세운 후에도 기도했다. 그러나 이번에 실패와 좌절의 한복판에서 그녀가 드린 기도는 보는 이들의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운동선수들이 대중 앞에서 기도하는 모습을 세상 사람들이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는데 이번에는 좀 다른 것 같다. 


한 TV아나운서는 그녀가 기도하는 모습을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축구선수가 골을 멋지게 넣은 후 세러머니를 하듯이 기도하는 모습이나 운동경기에서 통쾌한 승리를 거운 후 드리는 기도보다 실패의 쓴 잔을 마시고 눈물을 흘리며 드리는 기도가 보는 이들에게는 더 의미있고 감명 깊게 와 닿는 모양이다.


그런 기도가 좀 더 참된 기도를 반영한다고 본다. 골을 넣은 후에 드리는 기도는 하나님을 그런 행운을 안겨주는 여신이나 재미있게 관람해야 할 스포츠까지 끼어 들어 한 쪽 편을 들어주는 얄궂은 신으로 오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그렇게 기도하는 선수는 하나님께 진정으로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했을 것이니, 그런 개인적 신앙의 표현을 꼭 비판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그러나 그런 기도보다는 장미란의 기도가 좀 더 기독교적인 기도의 특성을 반영했다고 보는 것은 승리의 행운이 따른 것에 대한 감사가 아니라 비참한 실패에도 불구하고 범사에 감사한 기도였기 때문이다. 그녀는 기적과 같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무거운 역기를 번쩍 들어 올릴 수 있기를 내심 바랐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녀는 감사를 잊지 않았다. 결과에 상관없이 자신의 최선을 다 하게 해 주신데 대한 감사이니 올림픽 정신과도 부합한 자세이다.


이제는 올림픽까지 자본주의 사회의 치열한 경쟁체제와 가치관에 포로가 되어 그 근본정신이 퇴색되어 버렸다. 일등만 알아주는 더러운 세상의 연장이 되고 금덩이를 향해 혈안이 되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자신의 최선을 다하고 승패에 상관없이 감사하는 장미란 선수야말로 진정한 금메달리스트인 셈이다. 


그녀는 국민들에게 실망을 안겨주었을까 가장 염려가 된다고 했다. 그런 염려 일랑 내려놓으시라. 국민들이 오히려 그녀에게 큰 위로와 격려의 박수를 보내는 것을 보면 참 훈훈한 정이 느껴진다. 우리 국민들도 이제는 많이 성숙해진 것 같다.


박영돈 목사

2012년 8월 12일 주일 주보 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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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니카라과 단기선교
15일(수)까지 진행되는 니카라과 단기선교팀의 사역을 위해 기도 바랍니다.
릴레이 금식기도는 계속됩니다. 
선교팀: 윤바른 전도사, 김주언, 정승일, 허윤정, 한은수, 김 혁
* 전도폭발 무장사역  
오늘 오후 1시에 전도폭발 무장사역이 중보기도실에서 있습니다.
1기부터 6기까지 모두 참석해 주시기 바랍니다. 
* 2012 메시야 잔치 준비
오는 수요예배 후에 새가족실에서 메시야잔치 준비위원회로 모이겠습니다.
또한 매주 금요기도회를 마친 후 10시부터 12시까지 메시야잔치를 위한
심야기도회로 모이겠습니다. 그리고 각 구역은 배정 받은 전도 지역에서
구역장의 인도에 따라 노방전도에 힘써 주시기 바랍니다.
* 메시야 잔치 칠행시 공모  
금년 메시야 잔치의 표어는 “꿈은 이루어진다”입니다. 이 표어로 7행시를 
공모합니다. 7행은 물론 자유롭게 행을 선택하여 제출하셔도 좋습니다.
(문의 및 제출: 심미형 권사)
* 김애자 피아노 연주회 및 간증 집회  
이번 주 수요예배는 피아니스트 김애자의 피아노 연주회 및 간증 집회로
드리겠습니다.
* 친교실 자리 배치   
주일 점심식사와 친교시 구역별로 자리를 배정하오니 배치표를 참고하시어
친교를 나누시기 바랍니다.
* 시찰회  
14일(화) 오전 10:30에 본 교회에서 버지니아 시찰회가 있습니다.
* 교우 동정
* 한국방문: 김정숙(A) 권사, 김정숙(B) 권사, 김진영(B)집사, 오석영 청년
* 결혼: 이경상, 이성순 집사 딸 결혼 (8월 17일; 하와이)
* 장례: 최인돈 집사 모친상, 14일(화) 7:00 pm, 15일(수) 10:30 am, 패어팩스 메모리얼

2012 가을학기 메시야 평생교육원 안내 광고


신사도운동의 기름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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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도 운동의 기름부음(1) 


신사도 운동의 기름부음(1)
빈야드 운동의 존 윔버와 피터 와그너가 시작했다


"그러나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케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좇으리라 하셨으니
"(딤전 4:1)

신사도 운동은 기름부음 운동이다. '기름부음'이라는 개념이 없었다면 신사도 운동은 지금과 같이 널리 퍼지지 못했다. 사람들에게 그 기름부음이 너무나도 매혹적이었기 때문에 급속히 온 세계 교회로 확산될 수 있었다. 그들에게 그 기름부음이 너무 심해서 그런지 신사도 운동 집회 홍보지들은 다른 종이보다 더 반짝이는 것 같다.       

손기철 장로님으로 인해 한국에서도 기름부음에 대한 관심은 최고조에 달했다. 그의 치유집회에서는 사람들이 거의 대부분 쓰러진다. "하나님의 강력한 임재로 쓰러지고, 그리고 성령의 기름부음이 혼절한 사람에게 속으로 흘러들어가고 ..." 라는 쓰러지는 이유에 대하여 말하는 손기철 장로의 대해 설명에 사람들은 반신반의한다.     

기름부음은 구약시대에 제사와 다양한 의식에서 행해졌던 실제의 일이다. 왕을 세우시는 예식에서, 선지자와 제사장의 임직식 등에서 기름을 붓는 예식이 있었다. 이제 각 성도에게 임재하여 내주하시는 성령은 구약의 기름부음을 온전히 이루시는 분이다. 성령 안에서 구약의 기름을 부었던 행위의 이유와 목적이 다 이루어짐으로 인하여 이제 실제로 기름을 붓는 예식은 필요하지 않다. 그럼에도 우리는 성령의 신령한 임재와 역사하심을 표현하는 언어로서 “성령의 기름부음”이라는 용어를 여전히 사용하고 있다. 신약성경에 나타나는 기름부음이라는 표현은 모두 성령의 인격적 임재와 내주를 의미하는 용어이다.  

구약시대에 기름부음의 가장 중요한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하나님의 선택과 사명이었다. 사무엘 선지자가 소년 다윗에게 기름을 부었던 것은 하나님이 그를 왕으로 선택하였다는 것이 그 중심적 의미였다. 그러므로 사울이 그 사실을 알면 죽일 것이므로 몰래 사무엘을 다윗에게 기름을 부었던 것이다. 또한 기름부음의 핵심적 의미는 사명이었다. 제사의 사역을 시작하는 제사장에게 기름을 붓는 예식은 선택받은 사람으로서 사명을 감당하게 되었다는 의미였다. 그 외에도 기름은 하나님이 주시는 치유를 의미했고 또한 풍성히 임하는 복을 상징하였다. 그러나 가장 중심적인 의미는 하나님의 선택과 하나님이 주신 사명이었다.  

기름부으심을 받은 가장 대표적인 분은 예수 그리스도였다. 그 분의 그리스도라는 이름은 "기름부음 받은 자"라는 히브리어 "마쉬아" 가 바울에 의해 "크리스토스" 라는 헬라어로 변하여서 우리에게 알려진 이름이다. "예수"라는 이름은 "구원"이라는 뜻의 실제 히브리어 이름 "예수아"가 "예수스"라는 헬라어 단어로 변하여서 우리에게 알려진 이름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은 "구원자로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이다. 우리의 구주는 우리를 구원하실 대속자로 선택되어지셨고 그 사명을 감당하시도록 천상에서 기름부으심을 받으셨던 것이다.   

빈야드 운동의 기름부음 운동의 태동

언제부터 신사도 운동에 기름부으심이라는 개념이 등장했을까? 신사도 운동의 기름부음은 대략 1980년대 초에 시작되었다. 1997년에 사망한 존 윔버라는 인물로 대표되는 “빈야드 운동”, 또는 “거룩한 웃음운동”, “Toronto Blessing”이라고 하는 이상한 성령운동으로부터 이것이 시작되었다. 빈야드 운동은 시작될 때부터 엄청난 논란을 동반했다. 집회 중에 성령의 감동(?)을 받은 성도들이 바닥에 벌렁 넘어져서 낄낄거리고, 뱀처럼 기고, 미친 망나니처럼 소리를 지르면서 떨고, 구르고, 뛰고 ... 그리고 바로 여기서도 금이빨이 생겨났다.  

마치 오늘 날 캔자스시티가 신사도 운동의 전진기지 IHOP 기도원으로 인하여 유명해진 것처럼, 그 당시 토론토도 빈야드 집회로 인해 유명했다. 세계 여러 나라에서 능력을 받으려는 목사들이 줄을 이었고, 특히 한국의 목사들도 많이 토론토를 찾았다. 그러나 곧 예배 중에 일어나는 그 괴이하고 설명할 수 없는 현상들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지를 고민하게 되었다. 한국교회들도 몇 년 동안 고민하다가 그 이상한 일들이 도저히 성령의 사역이라고 볼 수가 없어서 소속목회자들에게 더 이상 참여하거나 도입하지 않도록 결정하였다.  

그러나 미국에서는 여전이 그 운동이 진행되고 있었다. 미국교회들은 한국교회처럼 이단에 대해서 빨리 일치된 경계의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약점이 있다. 이는 개인의 자유를 존중하는 미국 사회의 문화적 토양과 상관이 깊은 일이다. 공익과 타인의 자유와 사생활에 직접적으로 해가 되는 일이 아니면 좀처럼 표현하지 않는 나라가 미국이다. 그래서 미국 교회가 빈야드 운동의 모판이 될 수 있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캘리포니아의 빈야드 교회의 담임목사 존 윔버였다. 그리고 또 한 사람이 당시 퓰러신학교에서 교회성장학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누리고 있었던 피터 와그너였다. 존 윔버는 1978년 애너하임에서 교회를 개척하였는데, 일찌감치 빈야드 운동을 도입하여 빠른 시간에 개척교회를 6천명이 모이는 대형교회로 성장시켰다.   

성장하는 교회에 대한 소문을 들으면 반드시 찾아가서 연구하는 피터 와그너는 존 윔버의 빈야드 교회에서 일어나는 특이한 성령의 역사에 많은 관심을 가졌다. 서로 친분을 쌓기 시작하다가, 1982년에 피터 와그너는 존 윔버를 공동강사로 초청하여 “기적과 교회성장”이라는 과목을 퓰러신학교에 개설하였다. 

한국의 손기철 장로의 기름부음 치유사역을 경계의 눈으로 지켜보는 이유는 의외로 단순하다. 바로 빈야드 성령운동의 대표자 존 윔버의 영향이 컸기 때문이다. 알파 코스의 대표자 니키 검블처럼 존 윔버의 집회에서 직접 예언을 받고 기름부음도 경험했는지에 대해서 스스로 명확하게 밝히시지를 않으신다. 그나마 최근에 나온 책에서는 이전에 밝혔던 이름들도 다 지워버리고 "어떤 목사님", "어느 예언 사역자", "신령한 목사님 한분" ... 라고 본인께서 영향을 받은 해외의 인물들의 이름을 모호하게 바꾸어 버리셨다. 

손 장로님이 존 윔버 외에도 빌 존슨, 릭 조이너 ... 등의 신사도 운동가들과도 직간접적으로 만남과 영향을 받으신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모든 운동에는 근원이 있다. 현재 위세를 떨치는 그 운동의 정체를 알려면, 근원을 파보는 것이 가장 현명하다. 바로 이런 측면에서 손기철 장로님께서는 우리의 의심으로부터 벗어나시지를 못하는 것이다.   

퓰러신학교의 피터 와그너가 존 윔버를 초청하여 함께 치유사역에 대한 강의를 개설할 때부터 거짓된 사탄의 이적이 "성령의 기름부음"이라고 추앙되기 시작했다. 도저히 일어나서는 안 될 참으로 한심한 일이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세계적인 교회성장학자 피터 와그너가 전면에 나섰기 때문에 된 일이다. 세계 교회가 공인하는 실천신학의 전당 퓰러신학교에서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에 가능했었다. 

결국 이 때부터 피터 와그너는 대다수 복음적인 신학자들의 공적으로 전락하기 시작했다.  나중에는 동료교수들로부터 심한 비난과 수모를 당하면서 일생을 명예롭게 봉사했던 그 학교에서 더 이상 강의를 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생각은 전혀 달랐다. 

훗날 그가 출판한 <신사도적 교회로의 변화>의 한 부분을 보면, 그는 당시 죽은 종교의 영에 사로잡혀있는 플러를 개혁하기 위한 영적전쟁을 수행했었다고 한다. 그래서 사탄으로부터 무수한 공격을 당했지만 승리했다고 한다. 그리고 결국 참된 교회개혁 운동인 신사도 운동을 전개하기 하나님의 새로운 부르심을 따랐다고 한다.  

모든 이단들을 정죄당할 때에 절대로 고분고분하지 않다. 별의 별 소리를 다하면서 자신에게 다가오는 정죄를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비유한다. 모두가 같은 말을 한다. “죽은 사탄의 종들이 사탄에게 두통거리가 되는 나를 죽이기 위해 일치단결하였구나!” 피터 와그너도 결국 비슷한 말을 하면서 일평생 봉직했던 퓰러신학교에서의 교수 사역을 불행하게 접었다.  

당시 빈야드 운동에서 일어나는 괴상한 현상을 성령의 역사로 단정
하고, 그것을 신학적으로 정립하기 위해 피터 와그너가 선택한 용어는 “성령의 제 3의 물결”(The third wave of Holy Spirit)이라는 용어였다. 제 삼의 성령의 물결이라는 용어를 고안한 것은 1900년대에 미국에서 일어난 두 번의 성령운동에다 빈야드 집회에서 나타난 괴상한 정체불명의 현상들을 관련시키려는 음모였다.  

피터 와그너는 1900년대 초에 일어난 최초의 오순절 운동을 성령의 제 1의 물결이라고 했다. 이때의 중심이슈는 성령세례와 방언이었다. 그리고 1960년대부터 70년에 다시 한 번 강하게 나타난 은사주의 운동을 성령의 제 2의 물결이라고 했다. 이 두 번째의 은사주의 운동은 오순절 계통의 교회가 아닌 성공회에서 시작한 운동이었다. 이때의 부흥운동에서는 방언과 성령세례에 대한 관심이 첫 번째 오순절 운동 때보다는 매우 약화되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많이 나타나고 있었다. 그리고 80년대의 빈야드 운동의 이상한 현상들을 성령의 제 3의 물결이라고 부르면서 그 연장선상에 둔 것이다.  

그러나 빈야드 집회에서 일어나는 현상과 그 이전의 성령운동에서 일어난 일들은 근본적으로 달랐다. 빈야드 부흥회에서는 은사주의자들이 중시하는 방언이나 성령세례는 전혀 나타나지 않았다. 듣도 보도 못한 이상한 현상들만 일어났다. 낄낄거리고, 뱀처럼 기고, 정신을 잃고 쓰러지고, 금이빨도 생기고 ... 이전의 어떤 성령운동에서는 본적이 없는 것들이었다. 그래서 피터 와그너는 성령의 제 3의 물결의 성령세례의 핵심은 방언이 아닌 기름부음이라고 했다. 성령의 기름부으심 때문에 그 이상한 현상들이 나타난다고 했다.    

바로 이 부분에 관해서도 손기철 장로님은 피터 와그너의 이론과 거의 일치된 견해를 보이신다. 그 분의 책 <고맙습니다 성령님>을 보면, 기름부음은 성령세례의 가시적 현상이라고 설명한다. 전통적 은사주의자들과는 달리 성령세례시에 방언은 나타날 수도 있고 나타나지 않을 수도 있다고 한다. 그리고 확실하게 나타나는 성령세례의 핵심은 "기름부으심"이라고 한다.  

와그너의 성령의 제 3의 운동 신학과 그대로 일치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더욱 손기철 장로가 신사도 운동가라고 더욱 의심하게 되는 것이다. 기름부으심 때문에 사람들이 쓰러진다는 손기철 장로의 핵심 주장과 기름부음 때문에 사람들에게서 쓰러짐, 낄낄거림 ... 등의 이상한 현상이 나타난다고 주장하는 피터 와그너의 이론과 전혀 다름이 없다. 그래서 우리는 그의 집회에서 사람들이 대량으로 그리 흔하고 쉽게 쓰러지는 현상의 원인이 그를 통하여서  빈야드 운동의 그 영적인 힘이 나타나기 때문이라고 심각하게 의심하는 것이다.    

피터 와그너의 창조적인 신학작업을 통하여 그 이상한 현상들이 “성령의 기름부으심”(Anointing)이라는 개념으로 완전히 그럴싸한 새로운 옷을 지어입고서 세계 교회에 화려하게 등장하였다. 그리고 빈야드 운동의 상징어가 되었다. 성령의 기름부으심의 결과는 “능력”(Power)이므로 능력이라는 단어도 더불어 빈야드 운동의 핵심 언어가 되었다. “능력전도”(Power Evangelism), “능력치유”(Power Healing), “능력축사”(Power Encounter)와 같은 용어가 전면에 등장했던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었다. 그러면서 “기름부음이 가득한 예배”, “기름부음이 넘치는 설교”, “기름부음 받은 사역자”, “기름부음 받은 찬양” ... 이런 Anointing ministry가 대단한 능력의 사역인 것처럼 각광 받으면서 급속히 세계 교회에 확산되었다. 

이것이 요즘 도처에서 홍수를 이루는 기름부음 운동의 태동이다. 토론토의 해괴한 일들이 피터 와그너의 “성령의 제 3 물결”, “성령의 기름부으심”이라는 새로운 거짓된 용어로 포장되어 전 세계 교회에 빨리 스며들기 시작했다. 그 당시에는 그것이 거대한 신사도 운동의 중심적인 물줄기 중의 하나라는 사실을 대부분 몰랐다. 

복음적인 교회들의 지도자들이 교회성장에만 너무 몰두하다가 사탄의 미혹하는 더러운 영들이 그 기름부음 운동을 통하여 교회들과 성도들 속으로 신속히 침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하면서 문을 열어주기 시작했다. 마치 구약 시대에 이스라엘에 바알과 아세라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여호와로 둔갑되어 하나님으로 섬김을 받았던 것과 같은 일이 벌어진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이미 시작된 영적전쟁이었는데, 교회성장과 부흥에 대한 지나친 욕심으로 인하여 복음주의 교회들이 아무 손을 쓰지 못했었다.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기는커녕 오히려 들어오도록 협조해주면서 교회를 병들게 하였다. 이제라도 우리 목회자들은 이런 웃기는 기름부음 운동에 성도들이 물들지 않도록 단호하게 경계해야 한다. 기름부음 운동을 경계해야 하는 분명한 이유에 대해서는 다음에 계속 살펴보도록 하자!




신사도 운동의 기름부음(2)


신사도 운동의 기름부음(2)

: IHOP의 신부운동 등으로 변모하며 더욱 확산되고 있다

"그러나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케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좇으리라 하셨으니"(딤전 4:1)

왜 우리는 신사도 운동의 “성령의 기름부으심”(?) 이론이 거짓이라고 확신하는가? 왜 성도들이 신비감을 느끼고 동참하는 것을 단호하게 막아야 하는가? 그 중요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기름부음 운동은 성령에 대한 왜곡이다

그 첫 번째 이유는 신사도 운동의 기름부음 이론이 성령님에 대한 왜곡된 가르침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기름부음 운동은 성령의 Second Blessing 이론을 당연시하면서 나타났다. 바로 이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지난 반세기 동안 복음주의 교회들은 바로 이 거짓된 이론과 투쟁하였다. 성도들 중에 더 사랑받고, 더 은총을 입고, 더 영적으로 성장한 사람들에게만 별도의 영적축복으로서 성령세례가 임하고, 그 증거가 방언이라고 하는 이론이다. 복음주의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의 바른 가르침으로 인해  이제는 더 이상 위력을 떨치지 못하게 있다.  

그런데 그 사상이 조금 새롭게 변모하였다. 더 세게 역동하며 등장하고 있다. 신사도 운동의 기름부음 사상이다. 이전에는 방언이 성령세례의 증거라고 했었는데, 바로 그 점이 달라졌다. 방언은 나타날 수도 있고 나타나지 않을 수고 있다고 한다. 오직 “기름부으심”(?)이 성령세례의 명확한 현상이라고 주장한다. 기름부으심으로 인하여 지난 2,000년 교회사에서 듣도 보도 못했던 괴상하고 희한한 각종의 현상이 새로이 나타난다고 한다. 빈야드 집회에서 처음 나타난 사람들의 미친 짓거리들이 그 시작이었다. 피터 와그너의 “성령의 제 3의 물결”이라는 새로운 Theory로 그 모든 것을 정리하였다. 한국의 기름부음 운동의 대가 손기철 장로도 그의 책에서 꼭 같은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다. 

진리라면 적어도 천년은 가야한다. 방언은 저 멀리 밀려났다. 기름부음이 진리의 표적이고, 지금의 대세이다. 불과 50년 만에 하나님의 영적진리가 달라진 것이다. 그러면 이 후에 또 다른 어떤 것이 기름부음을 짓누르고 새로 등장할 것인가? 그들은 더 이상 새로운 것이 없다고 한다. 온전한 것이 지금 왔고, 기름부음이 성령세례의 최종 버젼이라고 한다. 

신사도파들은 사도행전 2장의 오순절 성령강림 때에 구약 요엘서의 예언이 다 이루지 못했다고 한다. 지금 그들의 성령의 기름부음 운동을 통해 요엘서의 예언이 완전히 이루지고 있다고 한다. 기름부음이 임함으로 환상, 예언, 꿈 ... 등의 종말적 성령사역의 도구가 되어 구약 요엘서의 예언이 완전하게 이루어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는 잘 조직된 사탄의 거짓이다. 요엘서 2:28, 29절의 “장래 일”, “꿈”, “이상”은 구약 시대에 하나님의 신을 받은 구별된 선지자들에게서만 나타났던 성령의 사역이다. 그리고 “자녀”, “늙은 이”, “젊은 이” “남종”, “여종”은 모든 사람을 의미하는 표현들이다. 신분과 나이를 초월한 모든 사람들을 의미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조성된 새 인류, 즉 교회에 하나님의 신이신 보혜사 성령께서 보편적으로, 인격적으로 임하실 것을 예언한 내용이다. 사도행전 2장의 오순절 날에 성령이 이 땅의 교회에 강림함으로 다 이루어졌다. 

그러나 신사도파들은 성취되지 않은 남은 부분이 있다고 한다. 재림을 목전에 둔 지금 영혼의 대추수를 감당하기 위한 교회의 혁신적 변혁을 위해 종말적 성령세례가 부어지고 있다고 한다. 그것이 바로 “성령의 기름부으심”(?)이라는 것이다. 기름부음을 받고서 사도행전 2장에서 못다 이루어진 요엘서의 예언을 모조리 다 이루는 “요엘의 군대”가 되었다고 자부한다. 그래서 그들은 어린 자녀들이 예언하고, 어른들이 꿈을 꾸고, 젊은이들이 환상을 보는 것을 지극히 당연한 신앙이라고 여긴다.

그들의 이론은 정말 성경적 진실일까? 그렇다면 예수님의 보혜사에 대한 말씀이 지금 현재의 성경의 내용과는 달랐어야 한다. 십자가의 보혈로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조성된 새로운 인류인 그리스도인들에게 공히 임하는 “보혜사Ⅰ”을 먼저 말씀하였어야 한다. 그리고 보혜사Ⅰ을 받은 보통의 일반 성도들 가운데 더 선별된 사람들에게만 임하는 “보혜사Ⅱ”에 대해서 후에 추가로 말씀하셨어야 한다. 그리고 성경의 다른 어느 곳에서 재림이 임박한 종말의 때에 임하는 또 다른 성령 “보혜사Ⅲ”에 대해서도 또 다른 언급이 있었어야 한다. 그래야 요즘 IHOP의 마이크 비클이 이야기하는 “친밀한 신부의 정체성”, “대 환난을 통과하는 엘리트 교회” ... 이런 변화를 일으키는 기름부음이 인정될 수 있다. 

그러나 요한복음 14장, 15장에서 예수님은 단 한 종류의 보혜사에 대해서만 말씀하셨다. 이 땅의 교회에 임하시는 성령은 오직 한분 보혜사이시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한 분이시다. 성경은 죄 사함을 입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성도들에게 임하시는 보혜사에 대해서만 말한다. 그리고 성도에 대한 기름부으심이란 오직 그 분의 임하심이다. 메시야로 기름부으심을 받으신 부활의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기름부으심이 있었다. 그리고 그를 주로 믿고 받은 우리들에게까지 기름부으심이 임했다. 주께서 보내신 보혜사가 임한 것이다. 

지금 이 때에 신사도 운동이라는 것을 통해 더 권능을 입은 성도가 되도록 특별한 성령의 기름부음이 있다는 것은 영혼을 사냥질하는 마귀의 궤계이다. 원래 마귀의 가장 뛰어난 재주는 거짓을 사실보다 더 사실처럼 꾸미는 것이다.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 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장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요 8:44)

말씀 없이 감정으로 믿는 사람들이 더 쉽게 빠진다

성경을 바르게 배우고 가르치는 교회에서는 이런 사상이 설 자리가 없어야 한다. 성경을 바르게 배우고 건전한 신학으로 훈련된 사람이라면 절대로 이런 이론에 빠질 수가 없다. 그 거짓된 이론에 현혹되고, 실제로 그들에게서 기름부음을 받아 신앙이 변질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에게는 어떤 공통적인 특징이 있다. 바른 목회자에게서 바르게 말씀을 바르게 배우지 못했다. 감정적으로 뜨거워지기를 잘하여 찬양과 기도에는 두각을 보였지만, 말씀 속에 굳게 뿌리를 내리지 못했다. 그런 분들이 지금도 기름부음을 잘 받는다.  

목회자들 중에서 그런 분들이 있다. 비슷한 특징이 보인다. 바른 신학교에서 건전한 신학훈련을 잘 받지를 못한 분들이거나, 좋은 신학교를 나왔을지라도 성품이 너무 유순하고 평화를 지나치게 추구하시는 분들인 경우가 많다. 그래서 옳고 그름에 대해 싸움을 피하시다가 그만 혼미한 곳에 발을 딛는 경우도 있다. 

IHOP의 마이크 비클은 정규 신학공부를 하지 않은 분이라고 한다. 어찌된 영문인지 모르겠다. 어떻게 그러고서도 지금처럼 유명한 목회자가 될 수 있었는지 모르겠다. 그래서 일반 목회자의 반열을 뛰어넘어 피터 와그너가 조직한 국제사도연맹(CIA)에 소속된 사도가 되었나 보다. 그래서 사도와 선지자를 육성하는 IHOP의 대장이 될 수 있었나 보다. 그렇게 생각하니 이해하기가 더 쉬워진다.  

기름부음은 그리스도의 영광을 훼손하고 있다

둘째로, 신사도 운동의 기름부음 운동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훼손하기 때문에 거절되어야 한다. 최소한 신사도파들은 그 기름부음이 성령으로부터 임한다고 확실하게 말한다. 그렇다면 그 기름운동의 결과는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더 높이 세워야만 한다. 그래야만 성령의 역사라 인정받을 수 있다. “그(보혜사)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니라(요 16:14).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성령이 오셔서 예수 그리스도 자신의 영광이 드러낼 것이라고 하셨다.  

성령의 사역의 최종적 목표는 그리스도의 영광과 그리스도의 비젼이다. 그리스도가 하시고자 하는 일을 이루시는 성취하시는 분이 성령이다. 신사도 운동의 기름부음이 성령으로부터 임하는 것이 분명하다면, 그들의 기름부음 운동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세상의 찬송이 더 크게 울려야 한다. 기름부음을 받아 쓰러지고, 구르고, 뛰고, 히죽거리고, 사지를 달달 떨었던 사람들을 통하여 구원 받는 새로운 영혼의 급증해야 한다. 그리고 그들로 인하여 교회들이 더욱 하나가 되고 강건해져서 복음을 위해 매진해야 한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뜻이며 소원이다.  

그러나 현실은 전혀 다르다. 이미 믿는 성도들이 그들의 집회에 갔다가 온 후에 이상하게 변했다며 걱정하는 말들이 더 많이 들려오다. 믿지 않던 불신자들이 그들을 보고서 무더기로 예수 믿었다는 소문은 들리지 않고, 오히려 요즘 교회가 이상해졌다는 빈정거린다고 한다. 그들에게서 기름부음을 받았다는 사람들 때문에 교회가 어려워지고 갈라진다는 소문이 많다. 기름부음을 경험한 사람들과 거기에 가보지도 않은 성도들이 서로 더 잘 화합하여 더 힘써 교회를 섬긴다는 이야기는 들리지 않는다. 

어떤 부부는 함께 기름부음을 받기 위해 손기철 장로의 집회에 갔다. 그런데 아내에게는 기름부으심(?)이 임했다. 아내는 쓰러졌다. 그러나 남편에게는 기름부음이 임하지 않았다. 남편은 끝까지 반듯하게 서 있었다. 눈을 말똥말똥하게 뜨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간 후에 아내는 속이 상해서 화를 내면서 쓰러지지 않는 남편을 구박했다고 한다. 기름부음 때문에 부부싸움이 일어났다고 한다. 이런 모습들이 그리스도의 영광일까? 그들의 기름운동이 과연 성령의 역사일까?

사람에게서 사람으로 직접 전이 된다

셋째로, 신사도 운동의 기름운동은 사람에 의해서 조절되기 때문에 거절되어야 한다. 먼저 기름부음을 많이 받은 사람은 아직 받지 않은 사람에게 전달할 수 있다고 그들은 가르친다. 믿는다. 실제로 그렇게 하고 있다. 간절하게 바라고 소원하면 기름부음이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직접 이동된다고 한다. 실제로 그렇게 하고 있다. 손을 머리에 얹어서 기름을 흘러 보내는 모양은 그래도 점잖다. 강사가 손을 내리지르면, 살짝 미는 시늉을 하면, 중국 무협영화처럼 장풍을 쏘는 시늉을 하면, 심지어 옷을 벗어서 휘두르면 ... 그들의 기름은 술술 잘도 흘러들어간다.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의 분신이다. 그래서 성령이 "Another Jesus"이다. 그러하신 성령이 사람의 뜻대로 맘대로 다루어진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일을 실제로 행하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반열에 선 존재이어야 한다. 그래야만 성령을 다룰 수 있다. 

결론은 그들의 기름운동이 사탄적 술수라는 것이다. 정상적 신앙체계에서는 그럴 수가 없다.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요 3:8). 예수님은 성령을 바람에 비유하셨다. 사람의 입장에서는 볼 수도 없고, 임의로 조절할 수도 없다는 것이다. 성령은 그러하신 분이다. 

그런데 그들은 성령의 기름부음을 일으키는 프로그램을 잘도 운영한다. 알파코스, G12, 두날개 ... 이런 프로그램에는 중간에 “산상수련회”, “성령수련회” ... 이런 시간이 있다. 그때 지도자가 안수하면 성령의 기름부으심(?)이 실제로 일어난다. 사람들이 진동하고, 방언하고, 손과 상체로만 추는 성령춤이 나타나고, 환상을 보고 .... 정말 그런 일이 일어난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 지도자에게 더욱 충성하고 맹종한다. 손기철 장로님이 책을 보니까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기름부음이 전이된다는 사실을 동일하게 인정하고 있다. 다만 “하나님의 계획안에서” 라는 조건이 추가되었었다. 그래서 더 그 분이 수상쩍다.     

사람들이 한 동안 그렇게 플로리다로 찾아다녔던 이유도 기름부음이었다. 온 몸을 문신으로 도배한 그 사람에게서 한 동안 그 기름이 흘러넘쳤다. 착각이 아니라 실제로 뭔가 일어났다. 요즘 펄펄나는 대표적인 한인 신사도 운동가가 있다. 그 분과 부인이 플로리다에서 기름부음을 받는 장면을 생생하게 찍은 영상이 돌아다니고 있다. 나도 보았다. 얼마나 뜨겁게 받았는지, 그 부부는 견디지를 못하고 구르고 팔짝거리셨다. 그러더니 지금 그 능력이 나타나서 팔팔 날고 있다. 교회도 엄청 부흥(?)하고 있다. 그런 기름부음이 좋게 보이는 목사가 또 있다면, 당장 목회를 중단하기를 바란다. 분별없이 쫓아다니다 또 한 사람이 더 사탄의 도구가 되면 더 많은 영혼들이 사탄에게 상할 것이다.  

기름부음은 IHOP에서 새롭게 변모하고 있다  

사람들은 IHOP과 마이크 비클의 해악이 오직 불건전한 예언과 사도, 선지자 운동이라고만 생각한다. 나도 그랬다. 그런데 최근에 신사도 운동의 기름부음 개념이 IHOP에서 “친밀한 신부” ... 라는 신비주의 운동과 결합되어 더욱 교묘하게 확산되고 것을 보았다. 지난 해에 쓴 IHOP에 대한 나의 글을 읽고서 어떤 분이 “기름부음을 받지 못한 체 죽은 교리와 신학에 매여사는 바리새인 같은 나”(?)에 충고하는 글을 올리셨다. 

그런데 그 내용이 참 의외였다. 마태복음 25장에서 기름을 준비한 슬기로운 다섯 처녀에 대한 이야기가 중심이었다. 참 이상했다. IHOP의 문제를 지적하는 나에게 왜 미리 기름을 준비하여 잔치에 참여한 슬기로운 다섯 처녀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걸까? IHOP과 그 기름이 무슨 상관일까? ... 이후 나는 IHOP과 그 처녀들의 “기름”이 도대체 어떤 관계인지를 열심히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뭔가를 발견하였다. 마이크 비클이 IHOP에서 있었던 어떤 큰 집회에서 마태복음 25장의 기름을 준비한 처녀들에 대한 비유를 택스트로 하여 “친밀함을 양성하는 기름부음”이라는 제목의 설교를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온누리 교회에서 운영하는 CGN TV 싸이트로 들어가서 <해외말씀강해>로 들어가서 마이크 비클을 찾아서 들어가면 그의 설교들이 있다. 최근의 설료 몇 편을 들었더니 과연 마태복음 25장의 비유의 기름에 대한 내용이 들어있었다. 마이크 비클이 설교 중에 어찌나 자주 Oil! Oil! Oil ... 하는지 ... 듣기만 해도 기름이 뒤범벅되는 설교였다. 

중심 내용을 파악하면서 들어보니 과연 희대의 명설교였다. “똥이라도 미국 것이라면 좋다!”라는 태평양 시대의 신 사대주의가 아니고서는 좋아할 만한 이유가 없는 설교였다. 그런데 그게 좋은 설교라고 난리다. 기도와 찬양이 아무리 뜨거워도 말씀이 바르게 선포되지 않는 곳의 이적은 결코 하나님의 역사일 수 없다는 진리를 다시 확인했다. 

그의 설교의 요지는 종말의 성도들이 하나님과 친밀하게 하는, 그리고 삶과 영혼에 에너지가 되는 Oil을 얻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마태복음 25장의 비유에서의 기름은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모든 사람들이 사전에 준비해야 할 것을 의미하는 상징이다.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가능하게 하는 신앙 그 자체를 의미한다. 기름을 미리 준비해 두지 못한 어리석은 5명의 처녀는 불신자들이다. 기름을 미리 준비하여 혼인잔치에 들어간 5명의 처녀는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성도를 의미한다. 

그러나 그는 모두를 이미 그리스도인 된 사람으로 해석했다. 그리고 등불을 하나님과 다른 사람을 위한 봉사와 사역으로 해석했다. 어리석은 5명의 처녀는 열심히 사역을 하고 있지만, 기름부음을 받지 못한 성도들이라고 했다. 그리고 등불의 기름을 미리 넉넉히 준비하여 다른 5명의 처녀는 사역을 할 뿐 아니라 하나님과 친밀하게 연결된 성도를 의미한다고 했다. 즉 기름부음을 입은 사람들이다. 그리고 밤중에 신랑이 불현듯 왔다는 것은 권능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역사에 개입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하였다. 그때가 대 부흥의 때라고 했다. 

듣는 사람들에게 신앙적 감정을 잘 촉발시키지만, 그 날의 성경본문은 전혀 그 설교자와 듣는 성도들의 흥분과 기쁨을 지지하지 않는다. 그런데 전하는 자는 자신만만하고 듣는 자들은 충만히 은혜를 받고 새로이 결단한다. 이런 설교를 알레고리 설교라고 한다. 요즘 한국의 시골에서도 보기 어려운 장면을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미국의 캔자스시티의 IHOP이라는 기도원의 원장 목사님을 통하여 보았다. “저런 사람은 대단한 목사라고 좇고 따르는 사람들이 왜 이렇게 많을까? ... 한숨이 절로 났다. 

마이크 비클은 하나님과 친밀하게 하는 신부가 되게 하는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아야 한다고 극히 강조한다. 전 세계의 하나님의 모든 사람들이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아 신랑되신 하나님의 신부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게 되어야 재림하실 것이라고 가르친다. 요즘 IHOP에서 나오는 용어들이 대부분 신랑과 신부에 대한 말들이다. “친밀한 신부”, “신부로서의 정체성”, “신랑되신 예수님과 신부된 성도의 열정”, “신랑 하나님의 계시”, 그리고 “환난을 극복하는 엘리트 교회” ... 등이다. 그 중심에 성령의 기름부으심이 있다. IHOP에 가서 기름부음을 받아야 신랑이신 하나님께 합당한 친밀한 신부가 된다는 논리이다.   

원래 마이크 비클은 예언파였지 기름운동파가 아니었다. 그런데 80년대 초에 대예언자 폴 케인의 예언을 따라서 존 윔버의 사역에 합류하였다. 그래서 빈야드 기름운동파에게 캔자스시티의 예언운동이 소개되었다. 그리고 캔자스시티의 예언파에게는 빈야드의 기름운동이 소개되었다. 다시 후에 성향의 차이로 인해 마이크 비클은 빈야드 파를 떠나 캔자스시티에 IHOP를 세웠다. 그러나 이미 그에게도 기름운동에 대한 기본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빈야드의 기름운동은 징그러웠다. 누가 보아도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그것이 캔자스시티로 이동한 후로는 아주 고상하게 변신했다. IHOP으로 들어가서는 너무 세련되게 새로이 발전했다. 24시간 동안 쉬지 않고 이어지는 찬양과 중보기도로 감싸졌다. 누가 쉽게 의심하겠는가? 빈야드 운동에서 쉽게 보였던 촌스럽고 웃기는 장면들도 거의 없다. 지금 더욱 고상하게 변모한 기름이 IHOP에서 흐르고 있다.

그러나 사람들의 영적성향이 변질된다는 면에서 IHOP의 기름과 빈야드의 기름은 동일하다. 한번 맛본 사람들은 거기만 좋다고 한다. 거기가 최고라고 한다. 반드시 거기에 가 보아야 한다고 한다. 거기라는 장소를 고집하는 것 자체가 반 기독교적이 아닌가? 언제 기독교에서 기도가 잘되는 장소, 은혜가 잘 내리는 장소를 추앙했던 적이 있었는가? 그랬던 자들은 모두 위험스러운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더 경계한다. 왜 IHOP의 24시간 이어지는 찬양과 기도회는 위험할까? 영혼을 변질시키는 뭔가가 분출되기 때문이라고 의심되기 때문이다. 그것을 성령의 기름부음이라고 그들은 우긴다. 24시간 이어지는 찬양과 기도가 왜 거절되어야 하는가? 결국 그 기름을 잘 끼얹기 위한 작업이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그들의 찬양의 음악과 조명 등에서 나오는 분위기가 매우 위험스럽다고 말 한다. 심리학적 관점에서 볼 때에 지극히 위험스럽다는 것이다. 서서히 무아지경에 도달해 접신하는 신비종교의 분위기가 IHOP에 있는 것이 아닌지 ... 전문가들은 염려한다. IHOP은 단순히 사도, 선지자 운동만 하는 곳이 아니다. 그곳에는 “친밀한 신부”(?)되게 하는 기름부음(?)이 있다. 그 기름을 얼마나 뜨겁게 많이 받느냐에 따라서 신부들이 사도, 선지자, 특수요원 ... 각각 다른 사명을 받는 모양이다. 

왜 캔자스시티로 가서 24시간 이어지는 찬양과 기도에 빠져 보라고 하는지 아직도 모르겠는가? 그 이상한 기름부음을 받아서 “하나님과 친밀한 신부”(?)로 변화되라는 것이다. 우리는 이렇게 외쳐야 한다. "이미 보혜사를 받아 아무 부족함이 없는 하나님의 “친 백성”(딛 2:14)이 된 우리에게 왜 갑자기 “친밀한 신부” 타령을 하면서 그곳에서만 나온다는 무슨 기름을 따로 받으라는 것이냐?"  

요즘 위험스러운 사람들은 새로운 용어를 창조하는 귀재들이다. “친밀한 신부”, “신부의 정체성”, “신부의 열정” ... 얼마나 그럴싸한 말들인가? 이 시대의 최고의 광고 카피라이터들도 선뜻 생각하지 못할 기막힌 언어의 유희들이다. 

정신을 똑 바로 차리고 사랑하는 우리 자녀들이 그곳에 가지 못하게 막아야 한다. 그곳으로 가는 길이 마귀에게 시집가는 길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친밀한 신부가 되기 전에 먼저 믿음이 혼미해져 버릴 수도 있다고 본다. 어떤 위험스러운 점들이 있는지 사람들이 잘 모르는 것 같다.     
  
서울의 000 교회도 이미 동참하였나?

나는 미국 유학을 위해 한국을 떠나기 전 마지막 한 달 동안 서울의 000 교회에서 예배드렸다. 당시 담임 목사님은 신병치료차 미국에 체류하셨고 주일설교는 한 부목사님이 하셨는데, 부목사님의 설교도 너무 좋았다. 당시 한 살이었던 딸이 지금 11살이 되었으니 많은 시간이 지났다. 그 뒤로 한 번도 한국에 가 보지 못했고, 000 교회에 대해서는 더 본적도 들은 적도 없다. 찬양이 그처럼 좋을 수가 없었고, 예배와 모든 것이 너무 훌륭한 교회였다. 그런데 지금 내가 그 교회에 대해서 염려스런 말을 하게 되었다.  

여기서 그 교회를 언급하게 만든 것도 IHOP에 대한 내 글에 반대하는 분들이 올리신 글들이다. “미담”이라는 필명을 가지신 분이 시애틀 000 교회의 성도이고 의사이신 서정주 시인의 아드님에 대한 신문기사를 첨부해 주셨다. 그 분이 2008년부터 000 교회의 파송선교사로서 IHOP의 디렉터가 되시어 IHOP의 한국어 예배를 섬기고 있다는 기사를 보여주셨다. 다소 길 글이었지만 그 뜻은 “세계적으로 훌륭한 000 교회도 IHOP과 깊은 유대를 맺고 사역하고 있습니다. 000 교회의 성도들이 큰 유익을 얻고 있습니다. 정이철 목사님이 그 교회의 목사님보다 더 목회를 잘 하십니까?” ... 그런 뜻이었던 것 같다.  

“교회사랑”이라는 필명을 가지신 분도 000 교회와 IHOP의 더 긴밀한 관계를 보여주는 신문기사를 첨부하셨다. 그 교회의 세계선교센터에 대한 기자의 질문에 담임목사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내용이었다. “아직 결정된 사항은 아니지만 선교센터의 명칭을 ‘열방비전센터’라고 할 예정입니다. 선교는 물론 사회적 책임을 감당하는 곳으로 그곳을 사용한다는 의미입니다. 미국 캔사스 시티에 있는 아이합(IHOP: International House of Prayer in Kansas City)은 400명이 넘는 자원 봉사자가 하나님을 향해 24시간 365일 기도드리는 곳입니다. 아이합과 같이 이 센터에서 은퇴한 장로님들을 비롯해 헌신된 하나님의 일꾼들이 24시간 기도할 수 있도록 할 것입니다 ... ” 

이 기사를 첨부하여 주신 분의 말없는 주장도 “000 교회의 000 목사님도 IHOP를 좋아하신다. 000 목사님도 이러시는데, 왜 당신은 IHOP을 싫어하십니까? 뭘 모르시고 계시는 것 같습니다!”라는 의미였다. 나는 좀 멍해졌다. 사람들에게 000 교회가 하는 모든 일은 진리의 Sample처럼 여겨진다. 그  교회가 하면 다 옳은 것이다! 라는 분위기는 아직까지 분명히 한국 교회 안에 존재하는 것 같다.  

만일 000 교회가 미국의 IHOP을 모델로 새로운 사역을 펼친다면, 그것은 실로 엄청난 일이 될 것이다. 미국의 IHOP의 중심사역은 예언이었고, 이제는 성령의 기름부으심(?)이 더해지고 있다. 그곳에서 기름부으심(?)을 받게 되면 사람들이 환상을 보고, 예언하고, 꿈을 꾼다. 그것 때문에 교회에서 소란이 일고 분란이 일어나고 있다. 종말의 온전한 성령의 역사라고 우기는 쪽과 사탄으로부터 임하는 배교의 물결이라고 주장하는 쪽이 서로 싸우게 될 것이다. 

과연 000 교회에서는 미국의 IHOP에서 무엇을 한국으로 가지고 갈 것인가? 미국의 IHOP에서 지금 진행되고 있는 예언운동과 기름부음 운동일까? 그렇다면 정말 큰 걱정이 아닐 수 없다. 아니라면 무엇을 한국으로 가지고 갈 것인가? 우리가 모르는 어떤 새로운 참신한 것이 따로 있는 것일까? 우리는 조심스레 지켜보아야만 한다.  

다음은 “과객”이라는 필명을 쓰시는 분이 올리신 글의 일부이다. 앞으로 이러한 염려가 사실로 다가오지 않기를 바라면서 읽으면 좋겠다. 그리고 사람들이 목소리를 높이지 않더라도 얼마나 온누리 교회에 대해서 염려하고 있는지 느꼈으면 좋겠다. 

“이제 한인교계는 IHOP의 대공습을 당하는 형국입니다. 하지만 사실 IHOP은 상당히 오래전부터 한국의 초대형교회인 O교회를 통해 뉴욕 뉴저지 교회에, 특별히 청년들에게 광범위하게 침투해 왔었습니다. O교회는 한국의 가장 큰 장로교 소속이기 대문에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지요. 

IHOP, NAR(신사도운동), Toronto Blessing, YWAM, 트레스 디아스, 알파코스 등의 은사주의 계열이 아주 친숙한 얼굴로 한국교회에 깊숙히 침투해 있습니다. 이제 잘못하면 그들이 다수가 될지도 모름니다 ... 너무 안타깝습니다. 참으로 지금은 우리가 옷을 찢고 회개하며 기도할 때입니다. 주여 주의 몸 된 교회를 불쌍히 여기시고 지켜 주소서,,,”  
 

정이철 목사

[2012-08-12] "하나님의 지혜"

[2012-08-12] "알렐루야"

[찬양] 주의 나라 / 조성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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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 계신 아버지
이름이 거룩히 여김 받으시며
뜻이 하늘에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뤄지게 하옵소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
이름이 거룩히 여김 받으시며
뜻이 하늘에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뤄지게 하옵소서

주의 나라 주의 영광
이 땅에 임하소서
모든 영광 모든 찬송
받기 합당하신 우리 왕

하늘에 하늘에 계신 아버지
이름이 거룩히 여김 받으시며
뜻이 하늘에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뤄지게 하옵소서

죄악에서 우리 돌이키니
주의 성령 우리에게 임하소서
악한 길에서 우리 떠나오니
주의 말씀 우리에게 임하소서

주의 나라 주의 영광
이 땅에 임하소서
모든 영광 모든 찬송
받기 합당하신 우리 왕

[찬양] 거룩하신 주의 보혈 / 최성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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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하신 주의 보혈
귀하고 존귀 하네
완전하신 주의사랑
영원히 송축되리
소망의 증거 그 십자가
소망의 증거 그 십자가
온 열방의 유일한 소망
생명을 더 풍성히 얻게 하네
자유안에 거하게 하는
그 이름 예수


모든 영광과 존귀와 능력
찬송과 지혜와 감사
거룩하신 만왕의 왕 예수

모든 영광과 존귀와 능력
찬송과 지혜와 감사
거룩하신 만왕의 왕 예수

2012년 8월 19일 주일 주보 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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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니카라과 단기선교 보고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선교팀이 사역을 잘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돌리며, 물심양면으로 지원해 주신 모든 성도님들께 감사 드립니다.
* 전도회 월례회  
2부 예배 후 각 전도회 월례회가 있습니다. 
* 2012 메시야 잔치 준비: 준비위원회, 특별새벽기도회, 전도집회
오는 수요예배 후에 새가족실에서 메시야잔치 준비위원회로 모이겠습니다.
8월 마지막 주에는 특별새벽기도회로 모이고, 31일(금)부터 9월 2일(주일)까지는
유현숙 선교사님을 모시고 전도 집회와 세미나가 있습니다. 이 밖에 각 기도회는
기도 카드를 참조하시고, 칠행시 공모에도 적극적인 참여 부탁드립니다.
* EM, 중고등부 수련회 & 가족 새벽 기도회  
23일(목)부터 25일(토)까지 EM과 중고등부가 연합으로 수련회를 갖습니다.
수련회 관계로 8월 가족 새벽 기도회는 쉽니다.
* 워십팀원 모집  
몸 찬양(워십 댄스)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기 원하시는 분들을 모집합니다.
(문의: 홍임선 집사 571-527-9745)
* 메시야 여름 학교 감사  
메시야 여름 학교를 은혜 가운데 마치게 하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이를 위해 수고하신 모든 분들께 감사 드립니다.
* 기독 축구 리그  
기독 축구 리그가 시작됩니다. 선수들을 위해 기도와 격려 부탁 드립니다.
* 생명의 삶 신청  
생명의 삶 9월호를 원하시는 분들은 오늘까지 강영옥 전도사에게 신청 바랍니다.

* 교역자 동정  * 휴가: 한세영 목사 (8월 20일~22일)
* 교우 동정   * 한국방문: 김정숙(B) 권사, 김진영(B)집사, 오석영 청년
* 새가족 소개  * 김영기 집사 (아브라함 전도회), 김진희 집사 (아비가일 전도회)
  * Hanna Han (7구역, 드보라 전도회)

종교다원주의의 진짜 배후, 바티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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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교개혁으로 인하여 천주교만으로 이어져오던 기독교가 크게 네 개의 교파로 갈라지자 천주교 안에서는 ‘예수회’라는 조직을 중심으로 자체적인 쇄신운동이 일어났습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예수회는 영성훈련을 위시하여 선교활동, 자선사업, 청년교육, 신학연구 등 다방면에서 왕성하게 활동하며 천주교의 개혁을 이끌어왔습니다. 이들의 활약 덕분에 거의 몰락했던 지금은 천주교의 신도수가 2008년을 기준으로 전 세계에 걸쳐 무려 11억 6,600만 명에 달할 정도로 교세를 회복했습니다. 비록 예전과 같은 세속권력을 되찾지는 못했지만 국제적으로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며 위상을 드높이고 있는 실정입니다.

 

   적어도 외견상으로는 천주교의 이러한 부흥이 뼈를 깎는 자체적인 쇄신의 결과처럼 보입니다. 특히, 사회에서 아주 좋은 일들을 많이 실천하고 있는 예수회의 활약상을 지켜보고 있노라면 천주교는 더 이상 심각하게 타락했던 예전의 천주교가 아니라는 생각이 절로 듭니다. 실제로 천주교에서도 개신교를 향해 “더 이상 과거를 들먹일 필요가 뭐가 있겠는가? 중요한 것은 지금이다.”라는 식으로 자주 어필하는 것 같습니다. 지극히 옳은 말입니다. 다만, 여기에는 천주교가 진심으로 반성하고 진정으로 변화되었다는 증거가 전제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변화는 반드시 성경적인 진리로 향해 있어야 합니다.


   종교개혁 이후 천주교가 좀 더 성경적으로 바뀐 부분이 과연 조금이라도 있을까요? 하지만 바티칸의 실상을 들여다보면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실제로 천주교는 종교개혁 이후에도 교리나 신학적 입장이 바뀐 것이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바뀌기는커녕 오히려 성경적 진리에 역행하는 쪽으로 오늘날까지 흘러왔습니다. 그렇다면 천주교가 스스로를 개혁했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그것은 정작 중요한 신학이나 교리와 같은 본질은 전혀 바꾸지 않고 오히려 개악을 거듭해오면서도 자선사업이나 근검절약처럼 그럴듯한 중립 활동만을 강화해왔을 뿐입니다. 물론 이것이 잘못되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다만, 문제는 덜 좋은 것으로 가장 좋은 것을 교묘하게 대체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의외로 수많은 개신교인들이 천주교의 교리나 신학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는 것 같습니다. 그 실상을 조금이라도 안다면 사소한 것 하나까지도 트집을 잡아서 이단정죄를 남발하는 오늘날의 개신교계가 천주교에 대해서는 어째서 유구무언인지 도무지 이해가 되시지 않을 겁니다. 만약 우리 주변의 어떤 교회가 천주교와 같은 가르침을 펼친다면 대번에 이단으로 낙인찍히고 교계 전체에서 매장당할 정도로 비성경적인 가르침이 천주교 안에서는 날마다 가르쳐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대표적인 것이 외경에 의해 뒷받침되는 ‘연옥 교리’입니다. 천주교에 따르면 천국에 가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연옥을 거쳐야 합니다. 이 때문에 천주교 신자들은 평소부터 연옥을 맞이할 준비를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천주교에서는 누군가가 죄를 지으면 반드시 신부에게 낱낱이 이실직고해야 합니다. 신부라는 제사장을 통하지 않고서는 죄를 사함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죄에 대한 고백을 마치면 신부는 그와 관련된 몇 가지 명령을 내립니다. 죄인이 신부의 명령을 수행하는 것을 ‘보속’(penance)이라고 하는데, 보속을 완료해야 고백한 죄가 용서됩니다. 그런데 보속만으로는 안전하지 않습니다. 미처 씻기지 못한 죄의 얼룩이 남아있을 수 있기 때문인데 이런 여죄는 연옥에서 고통당함으로 상쇄됩니다. 수백 년은 기본인데, 여죄가 크면 클수록 연옥에서 더 오랜 기간을 고통 받아야 합니다.


   천주교에서는 이와 같은 여죄를 경감시킬 수 있는 방책을 제시해주는데 이른바 ‘대사’(indulgence)입니다. 교황이나 주교가 보속으로도 씻지 못한 여죄를 사면해주면 여죄가 탕감된다는 겁니다. 소위 종교개혁을 촉발한 면죄부 사건 역시 바로 이 대사 교리에서 기인한 것입니다. 과거에는 대사를 위해 엄격한 참회행위가 강요되었는데 소위 자신의 몸을 학대하는 고행을 의미합니다. 그러다가 이것이 점점 완화되어 돈으로 대체되었습니다. 급기야 ‘대사’와 교환하는 쿠폰으로서 면죄부를 대량으로 발행하여 판매하기까지 했습니다. 물론 오늘날의 천주교가 면죄부를 팔지는 않지만, 고행의 개념이 내재된 대사의 교리는 여전히 존속되고 있습니다.


   천주교에 따르면 연옥을 면하기 위해서는 고해성사나 대사, 참회와 같은 행위가 일평생 끊임없이 이어져야 합니다. 더군다나, 천주교에서는 이미 죽은 사람들을 대신해서 대사와 참회를 감당할 것을 강요합니다. 만약 누군가가 죽어서 연옥에 가있다면 살아남은 가족들이 그 사람을 대신하여 대사와 참회를 감당해주어야 그 기간이 단축된다는 겁니다.


   천주교의 수많은 비성경적 가르침 가운데 고작 ‘연옥 교리’ 하나만을 예로 들었을 뿐이지만, 이에 대해 잘 모르고 계셨던 대부분의 크리스천들은 상당한 충격을 받으셨을 겁니다. 너무나 명백하게 비성경적이어서 구태여 성경을 통해 반박할 가치조차 느껴지지 않을 정도이지 않습니까? 보통 크리스천들이 별것 아닌 것처럼 흘려 넘기는 연옥의 교리는 이렇듯 기독교의 핵심적인 복음진리 자체를 완전히 뒤집고 있습니다. 만약 어떤 교회가 위와 같은 가르침을 펼치고도 과연 교계에서 살아남을 수 있겠습니까? 당장 이단으로 낙인 찍혀서 퇴출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이것은 단지 시작일 뿐입니다.


   많은 크리스천들이 천주교 역시 개신교처럼 십자가를 단순한 상징으로 사용할 뿐이지 설마 그것 자체를 우상화하여 거기에다가 절을 하며 경배할 리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천주교에서는 실제로 십자가 자체를 향해 절하고 기도하며 분향까지 합니다. 즉, 십자가 자체를 숭배합니다. 사실 이미 335년 9월 14일부터 십자가는 숭배의 대상으로 인정되었고, 692년 트룰라늄 공의회를 통해 강화되었으며, 787년 제2차 니체아 공의회에서 공식적으로 인정되어 오늘날에까지 이르고 있습니다.


   물론 천주교에서는 ‘십자가 숭배’라는 단어 대신 ‘십자가 공경’이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그런데 이 공경이 십자가 자체를 향해 절하고 기도하고 분향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과연 ‘공경’과 ‘숭배’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게다가 천주교 안에는 십자가 자체를 의인화하여 그것이 마치 죄를 용서해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분신인 것처럼 여기고 찬양하는 기도문까지 존재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미리 짚어둘 것은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어떠한 형상을 만들어놓고 그것을 숭배하지 말 것을 엄숙하게 경고하셨다는 사실입니다.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출 20:4-6).


   물론 “우리는 십자가를 예수 그리스도와 동일시하는 것이므로 다른 어떤 신의 형상을 만들어놓고 숭배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문제이다.”라고 변명할 수도 있습니다. 이렇다면 이것은 어떻습니까?


   “아론이 그들의 손에서 금 고리를 받아 부어서 조각칼로 새겨 송아지 형상을 만드니 그들이 말하되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의 신이로다 하는지라 아론이 보고 그 앞에 제단을 쌓고 이에 아론이 공포하여 이르되 내일은 여호와의 절일이니라 하니 이튿날에 그들이 일찍이 일어나 번제를 드리며 화목제를 드리고 백성이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놀더라”(출 32:4-6).


   모세가 자리를 비운 사이 아론은 금송아지를 만들어서 그것을 하나님이라고 지칭하며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숭배했습니다. 이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그래도 바알 신이나 다른 우상을 섬긴 게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으로 숭배했기 때문에 칭찬하셨습니까? 아니면, 적어도 하나님을 공경하려는 동기에서 그랬기 때문에 정상을 참작하여 그 정도는 괜찮다고 묵인하셨습니까?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내려가라 네가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네 백성이 부패하였도다 그들이 내가 그들에게 명령한 길을 속히 떠나 자기를 위하여 송아지를 부어 만들고 그것을 예배하며 그것에게 제물을 드리며 말하기를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라 하였도다 여호와께서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백성을 보니 목이 뻣뻣한 백성이로다 그런즉 내가 하는 대로 두라 내가 그들에게 진노하여 그들을 진멸하고 너를 큰 나라가 되게 하리라”(출 32:7-10).

  
   하나님께서는 애지중지하며 애굽으로부터 간신히 탈출시킨 이스라엘 백성을 모조리 진멸하신 다음, 모세를 통해 새로운 민족을 이루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성경 전체를 통틀어서 하나님께서 이 정도로 분노하신 것을 과연 몇 번이나 목격하셨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단순히 다른 신의 형상들에 대한 숭배를 금지시킨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을 위해 만든 형상일지라도 그것을 숭배하는 것 역시 금지시키시되, 더욱 엄격하게 금지시키셨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더욱 크게 미혹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이 부분만 아예 따로 꼬집어서 명령하셨습니다.


   “너희는 나를 비겨서 은으로 신상이나 금으로 신상을 너희를 위하여 만들지 말고”(출 20:23).


   그런데 지금 천주교에서는 금송아지를 만들어 하나님이라는 이름을 붙임으로써 무지한 백성들에게 숭배하도록 만든 아론과 동일한 걸림돌의 죄를 범하고 있습니다. 물론 천주교에서 사용하는 성경을 보면 이런 부분의 내용이 변개되어 있습니다. 십계명 가운데 우상숭배 금지에 대한 제2계명을 아예 삭제시키고 마지막 계명을 둘로 쪼개어서 구색을 맞추어두었습니다. 천주교에서는 단순히 십자가만이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다양한 조각상이나 그림을 준비해놓고 그것 자체를 숭배합니다. 심지어 성찬식에서 사용되는 빵과 포도주, 그리고 신부가 직접 소금을 녹인 물까지도 ‘성수’라고 부르면서 그것 자체를 향해서도 분향하고 절하고 기도합니다.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롬 1:23).


   더 심각한 문제는 죽은 성인들의 유물(시체와 유품)들에게까지 절하고 기도하고 분향한다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유물숭배는 787년 니케아회의에서 선포되었습니다. 가톨릭 백과사전 제12권 734페이지에서는 다음처럼 유물숭배를 강조할 뿐만 아니라, 유물숭배를 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죄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신실한 자들은 거룩한 순교자들의 시체들을 숭배하여야 한다. 하나님께서 이들의 시체를 통해 사람에게 축복해주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의 유물을 향해 합당한 경의와 존귀를 돌리지 않은 자들은 전적으로 정죄해야 한다. 교회가 오래 전부터 정죄하였고, 현재도 또한 정죄하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정말 기가 막히지 않습니까? 이것의 연장선상에서 ‘성인 공경’이라는 교리도 있습니다. 여기서 ‘성인’이란 마리아와 천사를 필두로 하여 사도, 순교자 등 천주교에서 지정한 온갖 위인들을 통칭합니다. 천주교에서는 수많은 성인들의 형상, 곧 성상을 만들어놓고 거기다가도 절하고 분향하고 기도합니다. 이쯤 되면 천주교가 어째서 조상에 대한 제사제도를 그토록 쉽게 인정하는지 납득되지 않으십니까? 그렇습니다. 그들은 벌써부터 제사와 비슷한 의식을 자체적으로 행해왔습니다. 그래서 제사에 대한 거부반응이 없는 겁니다.


   문제는 이것만이 아닙니다. 특히, 성인을 향해 자신의 어떤 기도를 하나님께 대신 전해달라고 요청할 것을 가르치는데 이것을 ‘전구기도’라고 합니다. 한마디로 마리아나 천사나 기타 먼저 죽은 신앙 위인들을 향해 하나님께 대신 말 좀 전해달라고 요청하라는 겁니다. 천주교는 이러한 전구기도가 하나님께 직접 기도드리는 것보다 더 유익하다고 가르칩니다. 이 역시 명백하게 비성경적입니다.


   “어떤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기를 주절거리며 속살거리는 신접한 자와 마술사에게 물으라 하거든 백성이 자기 하나님께 구할 것이 아니냐 산 자를 위하여 죽은 자에게 구하겠느냐 하라”(사 8:19).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죽은 사람에게 무언가를 요청하는 행위에 대해 엄격하게 금하셨습니다. 기도는 누군가를 통해서가 아니라 반드시 하나님께 직접 드릴 것을 엄격하게 명령하셨습니다. 죽은 영혼에게 기도드리는 것은 사실상 신접하는 무당들처럼 사술을 펼치는 것과 다를 바 없기 때문입니다.


   “진언자나 신접자나 박수나 초혼자를 너희 가운데에 용납하지 말라”(신 18:11).
   “너희는 신접한 자와 박수를 믿지 말며 그들을 추종하여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이니라”(레 19:31).
   “또 자기의 아들을 불 가운데로 지나게 하며 점치며 사술을 행하며 신접한 자와 박수를 신임하여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악을 많이 행하여 그 진노를 일으켰으며”(왕하 21:6).
   “아무도 꾸며낸 겸손과 천사 숭배를 이유로 너희를 정죄하지 못하게 하라…”(골 2:18).

  
   지금 소개한 교리들은 종교개혁 당시의 천주교가 가르치던 옛날 교리가 아니라 지금 이 시대의 천주교에서 가르치고 있는 교리들입니다. 이래도 천주교가 바뀌었습니까? 비록 같은 것을 가르쳐도 좀 완화되지 않았냐고요?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천주교의 대표적인 가르침 가운데 하나인 마리아 숭배 교리의 변천사만 보더라도 천주교가 성경적으로 바뀌기는커녕 오히려 점점 더 성경에서 멀어져가고 있음을 여실히 알 수 있습니다.

 

 

   마리아 숭배의 기원에 대해서는 바벨론 문명과 연관 지어 이미 충분하게 설명했습니다. 설령 그것이 사실이 아닐지라도 마리아 숭배는 그 자체적으로 성경의 가르침에 정면으로 위배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주교에서는 종교개혁 이후로도 마리아 숭배사상을 오히려 더욱 강화시켜왔습니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로마제국은 원시 바벨론이 업그레이드된 형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로마인들은 사실상 바벨론으로부터 이어져온 모든 태양신 숭배사상과 각종 이교도적 문명을 고스란히 답습한 상태였습니다. 그 와중에 기독교가 국교로 선포되었습니다. 이질적인 기독교가 그들에게 파고들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접촉점을 찾아야 했습니다. 그 대표적인 수단이 마리아의 적극적인 활용이었습니다.


   그 당시 대부분의 로마인들에게 익숙한 이교도적 풍습은 태양신 숭배와 더불어 여신 및 그 아들 신을 동시에 섬기는 것이었습니다. 로마교회는 이미 태양신을 하나님과 동일시했습니다. 그 다음 작업은 여신 및 그 아들 신을 마리아 및 예수님과 동일시하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여기에서 마리아 숭배사상이 태동했습니다. 실제로 431년의 에베소 공의회에서 마리아가 하나님의 어머니냐 아니냐에 대한 논쟁이 처음으로 시작되었습니다.


   비록 결론은 내려지지 않았지만 그때부터 마리아에 대한 숭배신앙은 천주교 안에서 확고하게 굳어져갔습니다. 이것이 종교개혁 이후 조금이라도 나아졌을까요? 완전히 비성경적일 뿐만 아니라 배교적인 이 마리아 숭배신앙이 조금이라도 수그러졌을까요? 안타깝게도 실상은 전혀 그렇지 못합니다. 마리아 숭배사상은 더욱 강화되었기 때문입니다.


   1517년에 종교개혁을 시작한 루터는 1546년에 죽었습니다. 바로 그해에 있었던 트렌트 공의회에서 외경을 정경화했으며 교회의 전통도 성경과 동일한 권위를 지니고 있음을 확정지었습니다. 외경을 도입하는 것을 통해 경전으로서의 성경의 권위는 허물어뜨리면서도 교황과 전통의 권위는 성경과 동등한 수준으로 격상시킨 것입니다. 이는 그전까지 암묵적으로 이어져온 마리아 숭배사상을 공식신학으로 만들기 위한 기초작업이기도 합니다.


   종교개혁으로부터 많은 세월이 흐른 뒤, 유명한 천주교 저술가 알폰수스 리큐오리(Alphonsus Riquuori)는 예수님께 기도하는 것 보다 마리아에게 기도하는 것이 훨씬 더 효과적이라는 취지의 이론을 발표했습니다. 그에 따르면 죄인이 감히 예수님께 직접 나아가면 그분의 분노를 사게 됩니다. 그러나 마리아를 향해 기도하면 과거에 그녀가 물렸던 젖가슴을 아들인 예수님께 보여주어 노여움을 가라앉힐 수 있습니다. 그 덕분에 마리아에게 먼저 기도한 사람은 보다 쉽고 안전하게 예수님께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이런 해괴망측한 이론을 펼친 덕분에 리큐오리는 1839년에 교황 그레고리 14세에 의해 성인으로 시성(諡聖)되었으며, 교황 비오 9세로부터는 박사로 공인받았습니다. [Lorain Boettner, 이송훈 역,『로마가톨릭 사상평가』(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1992), 147.]

 

   1854년에는 교황 비오 9세가 마리아의 ‘무원죄 잉태설’을 선언했습니다. 가톨릭 백과사전 제7권 674페이지에 따르면 복된 동정녀 마리아는 자기 어머니의 몸에 수태되었을 때 원죄의 모든 오염으로부터 면제되어 완전하게 보존되었습니다. 즉, 마리아는 원죄 없이 완전히 순결한 상태로 태어났다는 겁니다.


   1870년의 바티칸 공의회에서는 믿음 및 도덕적인 모든 문제에 있어서 교황은 전혀 오류가 없으며 절대적으로 옳다는 교황의 무오설을 선언했습니다. 성경과 동등한 권위를 지닌 교황이 마리아의 무원죄 잉태설을 가르쳤다면 그것은 무조건 진리라는 뜻입니다.

 
   1917년에는 마리아가 은총의 중재자임을 확정지었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듯 또한 마리아를 통해 예수님께 나아가는 것이 정석이라는 뜻입니다.


   1931년에는 마리아를 하나님의 어머니로 확정지었습니다. 마리아가 완전한 인간으로서의 예수님의 어머니일 뿐만 아니라 완전한 하나님으로서의 예수님의 어머니도 된다는 뜻입니다. 마리아가 성부 하나님과 더불어 예수님을 낳았다는 뜻입니다. 마리아가 성부 하나님처럼 성모로서의 신적 권위를 지니고 있다는 뜻입니다.


   1950년 11월 1일에는 비오 12세가 마리아의 몽소승천을 교리로 선언했습니다. 가톨릭 백과사전 제2권 632페이지에 따르면 마리아의 몸이 결코 부패되지 않았고 승천하여 하늘에 있습니다. 마리아가 하늘의 황후(천상모후)가 되었다는 사실을 확정지은 것입니다.

 
   1962년에는 생전에 7명 이상의 자식을 낳았던 마리아의 종신 처녀설을 주장했습니다.


   1965년의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통해 반포된 교회헌장 제8장에서는 마리아가 교회와 맺는 관계에서 어머니가 된다는 교리를 확정지었습니다. 즉, 마리아는 교회의 어머니입니다.


   정리하면, 천주교는 마리아가 자기 어머니의 태중에서 원죄 없이 잉태되었고, 죽을 때 몸과 영혼이 하늘로 승천하여 교회의 어머니이자 하나님의 어머니, 곧 하늘의 황후(모후)가 되었다고 주장합니다. 자녀를 7명 이상 가졌던 마리아가 평생 처녀로 살았다는 터무니없는 거짓말을 기정사실화하고 모든 인간들 가운데 가장 존귀한 자로 떠받듭니다. 또한 바로 그 마리아를 통해 예수님과 하나님께 나아가야 함을 설파합니다. 이처럼 천주교가 적극적으로 가르치고 있는 마리아 숭배사상 안에는 일개 인간을 신격화하고 우상화할 뿐만 유일한 구원자이자 중보자로서의 예수 그리스도를 폐기하는 배도적 교훈이 담겨 있습니다.


   물론 마리아가 육적인 측면에서 완전한 인간으로서의 예수님의 어머니인 건 사실입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결코 완전한 하나님으로서의 예수님의 어머니가 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당신을 다윗의 자손(아들)이라고 부르는 것조차도 그릇된 것임을 날카롭게 지적하시면서 바로잡아 주셨습니다.


   “예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실새 대답하여 이르시되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 하느냐 다윗이 성령에 감동되어 친히 말하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에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니라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니…”(막 12:35).


   예수님께서는 만유보다 먼저 계시고 만유를 창조하신 하나님입니다. 마리아가 이 세상에 존재하기 전부터 영존해 오셨던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어찌 감히 한낱 인간을 하나님의 어머니라고 칭할 수 있단 말입니까? 실제로 예수님께서 하나님으로서의 면모를 본격적으로 드러내시기 시작하셨던 공생애 이후로는 마리아를 향해 한 차례도 어머니라고 부르시지 않았을 뿐 아니라(요 2:4, 요 19:26), 오히려 상당히 냉정하게 대하셨습니다.


   마리아가 자신이 낳은 다른 자식들과 더불어 예수님이 미쳤다는 헛소문에 속아 넘어간 나머지 예수님을 말리려고 찾아왔을 때 만나주시지도 않았습니다. 그때 제자들이 마리아와 예수님의 동생들을 모친과 형제자매라고 부르자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발끈하시면서 혈육은 아무것도 아니요,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자들만이 당신의 모친이요 형제요 자매라고 분명하게 선언하셨습니다.


   “예수의 친족들이 듣고 그를 붙들러 나오니 이는 그가 미쳤다 함일러라”(막 3:21).
   “그 때에 예수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와서 밖에 서서 사람을 보내어 예수를 부르니 무리가 예수를 둘러 앉았다가 여짜오되 보소서 당신의 어머니와 동생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찾나이다 대답하시되 누가 내 어머니이며 동생들이냐 하시고 둘러 앉은 자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내 어머니와 내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막 3:31-35).

 
   무엇보다 성경에서는 성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낳았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 내게 구하라 내가 열방을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 끝까지 이르리로다 네가 철장으로 저희를 깨뜨림이여 질그릇 같이 부수리라 하시도다”(시 2:7).


   그런데도 마리아에게 하나님의 어머니라는 망령된 호칭을 붙이는 것은 그녀를 성부 하나님 수준으로 신격화하려는 언동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런 견지에서 천주교는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 하나님이 아니라 성부, 성자, 성령, 성모의 사위일체 하나님을 섬긴다고 보아도 무방할 정도입니다. 물론 이것이 지나친 확대해석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천주교에서 인간에 불과한 마리아를 성부, 성자, 성령이라는 호칭에 대응하여 성모라고 부르면서 신격화하여 신처럼 떠받들고 있는 것만은 명백한 사실입니다.

 
   마리아가 일반인들보다 존귀한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녀는 심지어 세례 요한보다도 덜 존귀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세례 요한을 지칭하여 여자가 낳은 자 가운데 가장 큰 자라고 선언하셨습니다(마 11:11, 눅 7:28). 그러므로 마리아는 이 땅에서 세례 요한보다도 덜 존귀한 자입니다. 그렇다면 하늘에서는 어떨까요? 이에 대해서도 성경에서는 분명히 밝히기를, 비록 세례 요한이 이 땅에서 여자가 낳은 자 가운데 가장 클지라도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지극히 작은 자라고 했습니다. 하물며, 이 땅에서 세례 요한보다도 덜 존귀한 마리아가 대체 뭐라고 하늘의 황후입니까? 그것도 모자라 유일한 중보자인 예수님을 대신하여 또 다른 중보자가 된단 말입니까? 성경에서는 이에 대해 단호하게 선언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마리아가 원죄 없이 태어났다는 주장도 터무니없는 거짓말입니다. 이는 다음의 말씀에 정면으로 위배됩니다.


   “그러면 어떠하냐 우리는 나으냐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에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롬 3:9).

 
   마리아의 무원죄 잉태설은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분으로 몰아세우는 배도적 교리입니다.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요일 1:10).


   성경은 단호하게 선언합니다. 마리아를 포함한 모든 사람이 원죄 가운데 태어났기 때문에 결코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수 없습니다. 마리아를 비롯한 모든 인간들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속량에 기초한 이신칭의를 통해서만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 3:23-24).


   이 세상에서 죄 없이 태어난 유일한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입니다. 그분만이 첫째 아담을 통해 마리아를 포함한 전 인류에게 들어온 원죄를 속량하시기 위해 원죄 없이 태어나신 둘째 아담입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롬 5:12).


   천주교에서는 마리아가 그녀의 어머니(안나)의 뱃속에 있을 때부터 예수님의 공로와 하나님의 특은을 힘입어 아담의 저주가 끊어지면서 원죄가 사라졌다고 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분명히 선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는 오직 ‘믿음’을 통해서만 우리에게 적용될 수 있다는 사실을. 마리아가 자기 어머니의 뱃속에 있을 때는 아직 예수님께서 세상에 태어나시지도 않는, 그야말로 구약시대와 동일한 상황이었습니다. 더군다나, 예수님께서 설령 세상에 계셨다고 하더라도 마리아는 ‘믿음’을 취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배아상태였습니다.


   이처럼 마리아의 무원죄 잉태설은 비성경적일 뿐만 아니라 비상식적이고 비논리적입니다. 몽소승천설의 경우에는 무원죄 잉태설로 인해 파생된 자체적 모순을 해결하고자 탄생한 교리입니다. 만약 마리아가 원죄 없이 태어났다면 어떻게 죽을 수가 있겠느냐는 천주교 안에서의 반문에 대응하고자 지어낸 또 하나의 거짓말인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더 이상 거론할 가치조차 없습니다. 지금까지 확인한 것처럼 천주교는 종교개혁 이후 성경적인 진리에 가까워지기는커녕, 오히려 성경적인 진리로부터 점점 더 멀어져왔습니다. 이런 사실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도표를 첨부합니다.

 

 

   이래도 정녕 천주교가 과거와는 달라졌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물론 달라지기는 했습니다. 다만, 개선이 아니라 개악이라는 것이 문제입니다. 만약 여기서 그쳤다고만 해도 천주교를 더 이상 성토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마리아 숭배사상이 터무니없기는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삼위일체 하나님을 인정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이자 유일한 구세주라는 고백하는 가장 중요한 진리만큼은 개신교와 공유하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천주교는 마리아를 신격화시키는 데에만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천주교가 기독교일 수 있었던 최소한의 정체성마저도 스스로 파괴해버렸기 때문입니다.

 
   공신력 있는 기독교기관인 카톨릭 정보 연구국(CRIB, Catholic Research Information Bureau)는 다음과 같은 경고의 나팔을 불었습니다.


   “속지 말라. 바티칸은 카멜레온과 같다. 바티칸은 프로테스탄트 국가들 내에서는 관용적이고 우호적이며 도덕적 권위가 지고한 듯 보이지만 국민 다수가 천주교도인 곳에서는 전혀 딴판이다. 그들은 자유의 수호자도 결코 아니다. 그들은 상황에 따라 색깔을 바꾸지만, 겉으로 드러나는 색깔은 절대로 천주교의 진짜 색깔이 아니다.” [유석근, 『밝혀진 적그리스도의 정체』, 367.]


   실제로 1965년 바티칸 공의회 때의 ‘비 그리스도교 선언’은 충격 그 자체였습니다. 그것은 사실상 ‘배교선언’이었습니다. 타종교와의 화해라는 명분으로 사실상 다른 종교에서의 구원을 인정했기 때문입니다. [Ibid., 433.]


 그 이후에도 천주교는 타종교에도 구원이 있을 수 있다는 종교 다원주의적 발언을 지속해왔습니다. 이는 세계의 종교를 천주교 아래로 흡수합병하기 위한 전략입니다. 종교다원주의란 천주교가 개신교를 포함한 세계의 모든 종교를 그들의 품 안으로 끌어들이기 전까지 한시적으로 내세우는 기만책에 불과합니다.


   2008년을 기준으로 전 세계의 천주교 신자의 숫자는 11억 6,600만 명이라고 합니다. [위키 백과사전(http://ko.wikipedia.org).] 수많은 교단으로 갈라진 개신교와는 달리 천주교는 교황청을 중심으로 하는 철저한 중앙집권체제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신자들에 대한 교황의 영향력은 실로 엄청납니다. 실제로 천주교 신도들에게 있어 교황은 살아있는 신과도 같은 존재입니다. 따라서 교황의 사상이 곧 천주교의 사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지금 현재 교황청에 거하고 있는 교황의 이름은 베네딕토(Benedictus) 16세입니다. 그는 2005년에 죽은 요한 바오로(Joannes Paulus) 2세의 뒤를 이어 교황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1978년 10월 22일에 교황으로서의 직무를 시작한 요한 바오로 2세는 “사람이 곧 그리스도다. 이 새로운 진리를 밝히고자 이 자리에 올랐다.”고 선언했습니다. 이것은 “사람이 곧 신이다.”고 가르치는 뉴에이지 교회의 교리를 방불케 합니다. 그래도 여기에서만 그쳤다면 단순히 역설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넘어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 이후 수많은 설교를 통해 “사람이 곧 그리스도다.”라는 선포가 역설적 표현이 아니라 직설적 표현임을 스스로 증명했습니다. 그는 대놓고 뉴에이지 교회의 핵심적인 가르침인 종교다원주의를 표방했기 때문입니다.


   《LosAngeles Times》지 1984년 12월 12일자에는 “죄를 용서 받으려면 하나님께로 가지 마라. 내게로 오라.”는 요한 바오로 2세의 신성모독적인 발언이 실렸습니다. 그 요약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개신교 신자들과 점점 늘어나는 로마가톨릭 신자들 사이에 널리 퍼진 신념을 반박하며, 지난 화요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죄사함을 받을 수 있다는 널리 알려진 견해’를 일축하고 고해성사를 더 많이 하도록 카톨릭 신자들을 촉구했다.”

 

 

   1986년 10월 27일 요한 바오로 2세는 전 세계에서 무려 100여 개가 넘는 수많은 종교의 지도자들을 이탈리아의 아사시로 초청하여 세계평화를 위한 기도모임을 주최했습니다. 거기에는 이슬람교, 힌두교, 불교는 물론이고 세계 각지에서 만연하고 있는 온갖 종류의 토속종교와 사이비종교, 심지어는 사탄숭배 계열의 종교들의 지도자까지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요한 바오로 2세는 모든 종교는 결국 같은 신을 향해 기도하는 것임을 천명함으로써 자신의 종교다원주의 사상을 만천하에 드러냈습니다. 특히, 이교도들과의 합동 기도는 애당초 요한 바오로 2세가 직접 제안한 아이디어였습니다.

 

 

   좌측 사진은 천주교에서 발간하는 잡지 《30일》의 표지(1989년 8/9월호)입니다. 표지에는 한쪽에는 십자가를 다른 쪽에는 부처상을 달고 있는 천주교의 묵주와 불상의 모습이 삽입되어 있습니다. 실제로 요한 바오로 2세는 심지어 달라이 라마를 불러들여 성 베드로 성당의 제단 위에 불상을 올려놓고 스님들과 함께 불경을 외우고 불가를 부르면서 부처를 숭배하는 의식에까지 직접 참여했습니다. 우측 사진은 성전 제단 위에 놓은 불상의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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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0년 10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도미누스 예수스’ 선언을 통해 천주교에만 구원이 있으며 개신교의 교파들은 구원도 없는 떨거지들일 뿐임을 역설했습니다. 그는 천주교가 다른 모든 교파보다 우위에 있으며 기독교 통합의 토대가 돼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성 베드로 광장에서 천주교의 신도들에게 “로마가톨릭이 여타 교파에 견주어 우위에 있다는 사실이 기독교 통합의 기초가 되어야 한다.”면서 “이같은 사실을 명확히 하지 않고서는 교파 통합을 위한 대화는 말의 성찬으로 전락할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당시 교황청 신앙교리성 이름으로 발표된 선언문에서 “세상에는 카톨릭 교회에 기반을 둔 유일한 기독교회만이 존재하며, 한 교파가 다른 교파와 같다는 생각은 기독교회 본래의 메시지를 위험에 빠뜨리는 것”이라는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유석근, 『밝혀진 적그리스도의 정체』, 428.]

 

 

 

   지금 현재의 교황인 베네딕토 16세는 여기에서도 배도를 향해 한 발자국 더 전진했습니다. 교황청 신앙교리성 장관의 직책을 맡고 있을 당시의 그는 방대한 책들을 편찬했습니다. 또한 그는 수많은 연설과 자신의 저서를 통해 충격적인 이단사설들을 만들어내고 그것을 천주교의 교리에 그대로 반영시켰습니다. 문제는 그 가운데 기독교신앙의 정체성을 원천적으로 뒤집는 교리까지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마리아 숭배나 연옥처럼 이단성 짙은 교리들을 가지고 있는 천주교가 그래도 개신교와 일치했던 한 가지는 예수 그리스도를 완전한 신이자 완전한 인간으로 고백했고, 구원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해야한다는 진리를 붙들고 있었다는 점이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천주교를 기독교로 받아들일 수 있게 만들어준 유일한 공통분모였습니다. 이 한 가지만큼은 지금까지 고수해온 탓에 비록 많은 부분에서 혼탁할지라도 천주교 안에서도 예수님을 바로 믿고 구원받은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었습니다. 그런데 현임 교황인 베네딕토 16세는 이 마지막 보루마저 무너뜨리고 말았습니다.


   베네딕토 16세는 자신의 저서인 『Milestones』(1998), 『GOD and the WORLD』(2000), 『The Jewish people and their Sacred Scriptures in the Christian Bilbe』(2001) 등을 통해 예수님을 구약성경에 예언된 그 메시야로 받아들이지 않아도 된다고 선포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요 구약에 예언된 메시아라는 사실을 믿지 않아도 무방하다고 선언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받는 것을 정당화했던 유대교의 해석이 맞을 수도 있고 반드시 기독교의 믿음이 옳다고 장담할 수 없다는 내용도 담겨 있습니다. 즉, 유대교의 주장처럼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며 구약성경에 예언된 메시야는 더더욱 아닐 수 있다고 인정한 것입니다. 믿어지지 않으신다면 직접 위 책들의 내용을 확인해보시기 바랍니다. 이처럼 요한 바오로 2세가 종교다원주의로 닦아놓은 터 위에서 베네딕토 16세는 천주교의 마지막 보루인 베드로와 마르다의 고백마저 무너뜨려버렸습니다.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
   “이르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요 11:27).


   베네딕토 16세는 요한 바로오 2세의 배턴을 이어받아 종교다원주의에 근거한 세계종교통합운동을 계속해서 이어가면서도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며 구약에 예언된 메시아가 얼마든지 아닐 수도 있다는 가르침을 더욱 심화시켜가는 중입니다. 기독교의 정체성을 완전히 뒤집는 이 엄청난 배도적 교리가 가져올 파장을 고려하여 가급적 우회적으로, 그리고 은밀하게 적용시키고는 있으나 본질은 다르지 않습니다. 베네딕토 16세의 천주교는 더 이상 기독교가 아닙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개신교를 가짜 교회로 매도합니다.


   2007년 7월 10일 교황 베네딕트 16세는 개신교는 교황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올바른 교회가 아니라고 선언했습니다. 그는 천주교 이외의 기독교 교파들을 ‘올바르지 못한 교회’로 규정한 문서를 발표했습니다(2007년 7월 10일). 16쪽 분량의 그 문서를 통해 “그리스도는 지구상에 오직 하나의 교회를 세웠고 이는 천주교회로 존재한다.”며 “다른 교파들에 과연 교회의 자격이 있는지 알기 어렵다.”고 밝혔습니다. 이 문서는 또 그리스 정교회에 대해서도 “교황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아 결함이 있다.”고 묘사했고, 개신교 등 16세기 종교개혁으로 생겨난 기독교 공동체들도 “교황의 존재를 시인하기를 거부하고, 성찬식에 대한 견해를 달리하는 등 올바른 의미에서 교회라고 볼 수 없다.”고 발언했습니다. [유석근, 『밝혀진 적그리스도의 정체』, 426.]

 

 

 

 <교황청 발표 문서 주요내용>

● 그리스도는 지구상에 오직 하나의 교회를 세웠고 이는 카톨릭 교회로 존재한다.”

 

● 그리스 정교회는 교황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아 결함이 있다.”

 

● 개신교 등은 교황의 존재를 시인하기를 거부하고성찬식(예수의 수난을 기념해 빵과 포도주를 먹는 의식)에 대한 견해를 달리하는 등 올바른 의미에서 교회라고 볼 수 없다.”

 

   2009년 1월 18일 오후에 서울 올림픽공원 내 올림픽 홀에서는 개신교와 천주교 신도 4천 명 이상이 모여 소위 ‘그리스도인 일치 기도회’라는 행사를 개최했습니다. ‘그리스도인 일치 기도회’는 세계교회협의회(WCC)에 속한 개신교회들과 로마 교황청 아래의 교구들이 연합하여 진행하는 기독교 일치운동입니다. 이 얼마나 위선적인 집회입니까? 바티칸은 교황의 존재를 부정하는 개혁교회는 올바른 교회가 아니라고 선언했습니다. 그런 망언을 사과한 적도 없고 취소한 적도 없습니다. 그러면서도 겉으로는 분열된 형제라는 유화의 제스처를 취하며 이중 플레이를 하고 있습니다. 쉽게 말해, 양의 탈을 쓴 늑대입니다. [유석근, 『밝혀진 적그리스도의 정체』, 429.]


   아니나 다를까요? 2009년에는 다윈의 진화론을 사실상 인정했습니다. 2009년 2월 12일자 한국일보 보도자료를 그대로 인용하겠습니다.

 

 

    교황청이 찰스 다윈의 진화론을 인정하려는 자세를 보이고 있다고 영국 일간 

더타임스가 보도했다. 더타임스는 교황청 부속 기관의 신학자가 진화론이 교회의

창조론과 상호 보완적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교황청이 다음달 다윈 탄생 150주년 

기념 학술회의를 개최하는 등 진화론을 수용하려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고

11일 보도했다.


   교황청 문화평의회 의장인 지안프랑코 라바시 대주교는 10일 "다윈의 진화론이

교회 신앙과 양립할 수 있다"고 선언, 진화론이 교회의 창조론과 상호 보완 

관계라는 점을 사실상 인정했다. 그는 교회가 진화론에 적대적이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진화론을 공식 비판한 적은 없었다는 점도 강조했다.


   라바시 대주교는 1950년 교황 비오 12세가 "진화론은 인간의 발전에 유용한 

과학적 접근"이라고 말했던 것을 상기하며 다윈의 복권이 이미 시작됐다고 말했다.

그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도 진화론을 "가설 이상의 것"으로 평가했다며 변화한

교황청의 입장을 드러냈다.


   교황청 부속기관인 로마 산타 크로체 대학의 신부이자 교수인 주세페 탄젤라

니티도 4세기에 활동한 히포의 성 아우구스티누스나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책에서도 진화론의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며 교황청과 입장을 같이 했다. 

히포의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진화론이라는 용어를 직접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생물의 형태가 세월이 지나면 점차 변한다는 점을 알고 있었고, 성 토마스 

아퀴나스도 중세에 관찰을 통해 이와 비슷한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탄젤라 니티 교수는 지금은 과학자 뿐 아니라 신학자도 “생물의 다양성이 종의 

경쟁 때문인지 아니면 협력 때문인지 알아내려고 노력하는 시기”라며 “진화론은

기독교 신학에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고 말했다.


   3월 중 다윈 탄생 150주년 기념 학술회의를 개최하는 그레고리안 대학의 자연 

철학자 마르크 르클레르크도 “다윈 탄생 200주년에 무관심한 학자는 있을 수 

없다.”며 “교회가 다윈을 단호하고 객관적으로 평가할 시기가 왔다.”고 말했다.

 


   물론 위에서 진화론이란 전통적인 진화론이 아니라 유신진화론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유신진화론은 기본적으로 뉴에이지 교회의 가르침입니다. 즉, 기독교신앙과는 정면으로 상치되는 배교적 사상이라는 뜻입니다. 개신교 안에서 활동하는 대부분의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바로 이 유신진화론을 수용하고 있습니다. 종교다원주의와 유신진화론이라는 뉴에이지 교회의 핵심사상을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진리까지 부정하는 지금의 천주교가 과연 정상이란 말입니까?


   그래도 과거에는 그렇게 혼탁한 와중에도 그 안에 담긴 핵심적인 진리를 제대로 붙들고 구원받는 천주교 신자들이 많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제는 종교다원주의가 공식화되었을 뿐만 아니라 베드로의 고백마저 허물어뜨림으로 인하여 그마저도 어렵게 된 것 같습니다. 물론 아직까지 대부분의 천주교도들은 이런 내막까지는 제대로 알지 못합니다. 이는 바티칸에서 전략적으로 은폐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그 오랜 세월 동안 바티칸이 진리를 왜곡시키는 방식은 언제나 ‘점진주의’였습니다. 마치 개구리를 찬물이 담긴 냄비에 넣고 서서히 가열시키듯 그런 식으로 부지불식간에 변질시켜왔던 것입니다.

 

 

 

 

 


늦은비의 유산[목차와 서문]/ 찰스 S. 그레이브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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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름부음인가? 배교인가? 늦은 비의 유산

(Anointing - or Apostasy? The Latter Rain Legacy)

찰스 S. 그레이브즈 (Charles S. Graves) 저  

 

[번역에 들어 가며]

 

서문 (INTRODUCTON)

1장  물 없는 구름 (CLOUDS WITHOUT WATER)

2장  새 일 (A NEW THING)

3장  선십(아들됨)과 반역 (SONSHIP AND REBELLION)

4장  죽지 않는 것 (THE THING THAT WOULDN’T DIE)

5장  복스러운 소망을 날려버림 (BLASTING THE BLESSED HOPE)

6장  과대망상 (DELUSIONS OF GRANDEUR)*

7장  새로운 품종 (THE NEW BREED)

8장  기적들, 표적들, 그리고 큰 실수들 (MIRACLES, SIGNS, AND BLUNDERS)*

9장  가인의 길 (THE WAY OF CAIN)

10장 새로운 패러다임 (A NEW PARADIGM)*

11장 내 백성아 거기서 나오라 (COME OUT OF HER MY PEOPLE)

(* 표시된 3개의 장은 TLT의 들풀님께서 번역하신 부분입니다. 감사합니다.)



서문                            
 
시온의 자녀들아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로 말미암아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 그가 너희를 위하여 비를 내리시되 이른 비를 너희에게 적당하게 주시리니 이른 비와 늦은 비가 예전과 같을 것이라 (요엘 2:23) 

누가 어떻게 하여도 너희가 미혹되지 말라 먼저 배교하는 일이 있고저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기 전에는 그 날이 이르지 아니하리니 (데살로니카후서 2:3) 

사도 바울이 경고한 바 예수께서 돌아오시기 전에 생길 큰 배교의 기초가 되는 움직임이 1948년 태동되었다. '늦은 비의 새 질서 (New Order of the Latter Rain)' 또는 단순히 '늦은 비 운동'으로 알려진 이것은 1948년 이후 오순절계열과 은사주의계열 교회들 안에서 점점 큰 영향을 미쳐왔다. 오늘날, 여러가지 '부흥'의 영향을 통해 이 누룩은 심지어 복음주의 세계에까지 퍼져가고 있다.

배교 또는 '떨어져 나감'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사람들에 의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반역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마지막 큰 배교가 탄생된 1948년 노스배틀포드(North Battleford, Saskatchewan)에서 일어난 늦은 비 부흥 안에 있었다. 나는 사도 바울이 오리라 한 그 배교를 바로 이 운동이 불러들였다고 믿는다.

마지막 시대에 휴거까지 버티는 충성된 자들의 멸시받는 '남은 자'로서의 교회라는 신약의 그림에 반역하여, 그들은 세계를 정복하고 그리스도의 왕국을 가져오는 승리하는 교회라는 이단적인 교리를 발전시키기 시작했다. 교회가 이런 신학을 처음 받아 들였던 결과 로마 카톨릭이 발전하게 되었고 암흑기를 불러 들였다. 이번에도 결과는 매우 비슷하겠지만 훨씬 단기간에 이루어질 것이다. 그 결과 하나의 세계적 에큐메니칼 교회, 즉, "예수의 성도와 순교자들의 피에 취한", 적그리스도 밑에서 잠시 승리할 '큰 음녀'를 만들 것이다.

1948년의 '늦은 비' 부흥은, 사탄이 교회로부터 빼앗아간 모든 진리를 교회에 회복시키는 "하나님의 회복운동" 시리즈 중의 처음 것이라고 가르쳐왔다. 사도와 선지자들의 오중사역도 교회에 회복될 것이며, 이 회복된 '사도'들과 '선지자'들은 교회를 '현대 진리'와 '하나님의 마지막 위대한 움직임' 안으로 이끌어 갈 것이다. 궁극적으로 교회가 충분히 성숙해지면 휴거가 일어날 것이다..라고. 그러나 늦은 비의 휴거는 이전에 교회가 배웠던 휴거와는 매우 다른 것으로, 그리스도가 그의 교회, 그의 '집단적 몸(corporate body)' 속으로 '영적으로' 들어오는 것이라고 한다. '집단적 기름부음(corporate anointing)'말이다. 성도들은 바로 이 땅에서 '영광'을 받고, 심지어 '신'과 같이 될 것이라고 한다. 이 성도들의 승리군대는 앞으로 나아가 대환난의 모든 적들을 정복하고 물리칠 것이다. 그들이 일을 마치면, 그들이 세운 왕국에 와서 다스리기 위해 그리스도는 '하늘에서 놓여질(풀려날)' 것이다.

이 교리는 '나타난 하나님의 아들들(Manifest Sons of God)' 또는 '선십(Sonship, 아들됨)'으로 알려졌으며 은사주의와 왕국/주권주의 운동을 통해 복음주의 교회에 번져 나갔다. 토론토, 펜사콜라를 비롯한 여러 곳에서의 늦은 비 '부흥'들은 놀랄만한 속도로 이 이단교리를 대중화하고 전파시켰다. 이는 오늘날 '요엘의 군대'로 잘 알려져 있다. 수많은 사람들이 진리의 사랑을 받지 못해서 강력한 미혹 속으로 들어오고 있다. 그들이 비록 진리를 받았더라도 이를 사랑하지 않음으로 그로부터 떨어져 나간 것이다. 그들은 축복된 소망을 버리고 대신 세상의 미혹을 택한 것이다.

아래에서 늦은 비 운동의 역사와 그의 뿌리에 대해 간략하게 소개한다. 이 운동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하나님의 성회(Assemblies of God)로부터 정죄받은 후 어떻게 투쟁해 왔는지, 그리고 오늘날 1980년 이후로 다시 공개적으로 드러나서 오늘날 어떻게 승리했는지를 연대순으로 적을 것이다. 

오순절 날에 하나님이 '이른 비' 성령을 부어주심으로 교회를 시작하셨다는 믿음으로 인해 '늦은 비'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마지막 시대에 마지막 '대추수'를 준비하기 위해 1948년 '부흥' 기간에 교회에 '늦은 비'를 부어 주셨다고 그들은 믿었다. 오늘날 늦은 비 '사도들'과 '선지자들'은 외치기를 우리가 곧 이 추수에 들어간다고 한다. 그들은 곧 전세계적인 부흥이 일어나 수 많은, 아마 수십억의 사람들을 교회로 끌어들일 것이라고 선포한다. 불행히도 신약 그리고 구약 어디에도 이런 가르침은 없다.

늦은 비 지지자들의 가르침과 목적을 가능한 한 그들의 언어로 표현하도록 노력하려고 한다. 그들 스스로 말하게끔 하는 것이 내용을 전하기 가장 좋은 길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하더라도 많은 이들은 내가 '문맥과 동떨어진 인용'을 한다고 비난할 수 있음을 안다. 또한 많은 이들이 내가 사랑이 부족하고 '종교의 영'을 가졌다고 비난할 수 있음도 안다. 원래 이런 책을 쓸 의도는 전혀 없었으나 이 운동을 수년간 연구하는 중에 주께서 강권하심을 느낀다. 이 책이 사람들에게 전해짐으로 그들이 다시 성경적 소망-[공중에서 주님을 만나게 되는 휴거의 축복된 소망]-으로 되돌아 가게 하는 것이 나의 소망이다.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가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너희가 아니냐 (데살로니카전서 2:19)
 
[강조한 부분은 저자의 원서에 따름]

작성자 청춘

늦은비의 유산[1장: 물없는 구름]/ 찰스 S. 그레이브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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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없는 구름

CHAPTER 1    CLOUDS WITHOUT WATER

 

 (빨간색 글씨는 신사도권 사람들의 황당한 주장입니다ㅎㅎ)

그들은 기탄 없이 너희와 함께 먹으니 너희의 애찬에 암초요 자기 몸만 기르는 목자요 바람에 불려가는 물 없는 구름이요.. (유다서 1:12)

 

1940년대 후반 늦은 비 운동의 탄생에 기여한 중요한 영향력이 몇 있었다. 첫째는 오순절 교단 내에서의 영적 수위에 대한 일반적으로 불만족스러운 상태었다. 많은 평신도뿐 아니라 지도자급 인사들도 오순절교회가 이전의 교파들의 길을 걷고 있다고 생각했다. 다시 말해서, 그들 가운데 계신 원래의 강력한 성령의 임재를 경험하기에는 그들이 조직적 절차적 기능에 너무 몰두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영광이 떠나고 있다! 빌 해몬(Bill Hamon)에 의하면:


1930년대와 1940년대 초반 오순절 기관들은 끝없는 토론과 논란이 되는 교리에 대해서 컨퍼런스를 열곤 했다. 앞서의 영광을 모르는 2세대, 3세대의 오순절 교인들이 생겨 났다. 평범한 모임에서는 원래 나타났던 초자연적 나타남들이 사라졌다. 초자연적 은사가 적용되고 초자연적 예배가 나타나는 것은 더 이상 '법칙'이라기보다 '예외'에 해당되었다. 오랜 교회 멤버들은 좋았던 시절에 대해 간증하곤 했다. 새 교역자들과 젊은 세대 성도들은 하나님의 새로운 방문에 대해 배고파 했다. 요엘 2:15-17, 호세아 6:3, 호세아 10:1 구절이 많은 오순절 성도들의 설교제목이 되었다.


"금식을 선포하라, 제사장들은 낭실과 제단 사이에서 울며 이르기를 여호와여 주의 백성을 불쌍히 여기소서 하라.. 휴경지를 부수라.. 늦은 비 때에 비를 구하라..그러면 너희가 주를 아는 것에 따르고 있는지 알게 될 것이다.. 그가 우리에게 비로 오실 것이다. 땅 위에 늦은 비로."


리차드 리스(Richard Riss)는 쓰기를:


1930년대 중반부터 오순절 교인들 사이에는 깊은 영적 배고픔이 있었다. 칼 브럼백(Carl Brumback)에 의하면, "지난 십년간 너무나 분명했던 예배의 깊이와 성령의 은사의 작용이 30년대 40년대에는 더 이상 두드러지지 않았다."


하나님의 새로운 움직임에 대한 영적인 배고픔과, 그리고 프랭클린 홀과 윌리엄 브래넘이라는 두 사람의 영향으로부터 늦은 비 운동이 탄생되었다. 늦은 비 운동과 그의 독특한 교리의 발전에 큰 영향을 끼친 첫번째 사람은 프랭클린 홀(Franklin Hall)과 그의 저서 "금식과 기도를 통한 하나님과의 원자력(Atomic Power With God Through Fasting And Prayer)"이었다.

 

 

             프랭클린 홀 (FRANKLIN HALL)

 

 

1946년, 프랭클린 홀이라는 사람이 캘리포니아 샌디에고에 대형 금식기도 매일부흥센터를 설립했다.

교회가 간절히 필요로 하는 부흥과 회복을 가져오는 방법으로써의 금식에 대해 가르치는 것이 이 부흥센터의 중심 목적이었다. 홀은 전형적인 은사주의자였음은 센터에서 터져 나온 거친 주장과 과장된 표현으로 알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홀은 뉴스레터에서 주장하기를:


한두번 윗층 창문에서 나온 거룩한 연기와 불꽃 때문에 소방서에 신고가 들어간 적이 있었다. 그들은 불을 끄려고 호스를 가지고 계단을 뛰어 올라 갔다. 소방대원 중에는 이것이 자연적인 불이 아님을 보고 부흥센터의 커다란 홀에 앉아서 하나님께 경배드리며 구원을 받은 사람들도 있었다.


'메리 소머빌(sister Mary Sommerville)'이란 나이 든 자매가 음식 없이 83일을 금식했다고 홀은 주장한다. 그녀가 "이 뛰어난 금식으로 인해 너무 튼튼해져서, 고귀한 성령의 내외적 충만함에 취해서 여기저기를 달리고 춤췄다"고 주장한다. 예수께서 사탄에 유혹을 받기 위해 성령에 이끌리어 광야에서 금식하신 기간의 두 배가 넘는 기간이다. 이런 식의 주장과 함께 수백 명이 구원을 받고 그 중 많은 이들이 여러 병으로부터 나음을 받았다는 일상적인 주장들이 있다.

 

을 유명하게 만들어 준 '금식과 기도를 통한 하나님과의 원자력'이란 책이 쓰여진 것이 이 즈음이다.

이 책은 하나님의 방문을 바라며 찾던 오순절 교인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제목이 제안하는 것 같이, 이 책은 금식과 기도로 영적 능력을 바라며 하나님을 충성되게 찾는 이들에게 폭발적인 영적 능력을 약속한다. 홀의 뉴스레터에 따르면:


캐나다 성회 감독이었던 월터 프레드릭 목사는 캐나다에 있는 모든 오순절 목사들에게 홀의 자료를 보냈으며, 우리의 글을 보고 40-50년 대에 금식을 한 후 유명해진 사역자로 다음과 같은 사람들이 있다: 윌리엄 프리만, 고든 린제이, A.A. 알렌, O.L. 재거스, 게일 잭슨, 오랄 로버츠, 데이빗 논, 윌리엄 브래넘, W.V. 그랜트, 윌리엄 하겐, 데일 헨슨, 토미 힉스


홀은 책에서 "금식 없이는 기도의 효과가 없다"고 주장한다. 심지어 이교도들도 금식과 함께 기도를 하면 하나님으로부터 응답 받는다고 주장한다:


전부는 아니더라도 많은 아메리칸 인디언 부족들이 기도와 금식을 통해 위대한 영혼이 나타나기를 구했다. 기근과 식량부족이나 비가 부족할 때, 그들은 기도와 금식을 통해 위대한 영혼을 찾았으며, 그들의 기도는 응답받았다.


배너 미니스트리의 트리샤 틸린(Tricia Tillin)은 홀의 책 '금식과 기도를 통한 하나님과의 원자력'에 대해 쓰기를:


이 책을 읽다 보면 그 시대 그리스천들의 성경지식에 대해 의심하게 된다. 여기에는 매우 이상하고 이단적인 문장들이 가득하며 기독교 서적이라기 보다 오컬트 책자 같아 보인다. 홀은 크리스천들이 오랫동안 금식을 하면 강력한 기름부음을 받음으로써 영적 변환(transformation) 과정을 거쳐 죄없는 온전함과 죽지 않는 상태를 이루게 된다고 믿었다. 이밖에도 그의 가르침 몇가지는:

 

. 완전하게 된 신자는 중력을 이기는 힘을 경험하게 된다.

. 그들은 원하는 곳으로 순간이동을 하게 된다.

. 그들의 옷은 낡지 아니하며, 몸냄새가 나지 않아서, 결코 씻을 필요가 없게 된다.

. 그들은 결코 아프지 않게 된다.

. 예수로부터 받은 불멸의 물질, 모두가 볼 수 있는 금색 물질이 그들 몸에 나타나서, 그들을 영화롭게 하고, 사람들은 성령의 불을 보고 느끼게 된다.

. 모든 사람은 눈을 뜨고 기도해야 한다.

. 체험되는 구원-하나님의 불, 영광-이 몸에 30일 동안 적용돼야 하며, 이는 육체의 질병, 피로, 연약함을 제거할 것이다.

. 책의 초판에는 '집단 남자아이(corporate manchild)' 교리가 있었었다.


홀의 가르침은 그가 틀림없이 모종의 오컬트의 영향을 받았음을 보여 준다. Jewel van der Merwe는 쓰기를:


그의 나중 저서 '불멸로의 회귀'는 크리스천들이 UFO, UHO(비상천상물체), IHO(불멸천상물체)와의 경험을 통해 죽지 않게 되며, 중력제어와 부상제어가 가능하게 되어 불멸에 이른다고 시사한다. 홀은 또한 '뜬눈' 기도를 만들었다. 그는 눈을 감으면 믿음이 파괴되므로 (눈을 떠야) '불멸의 축복'이 더 잘 오게된다고 말했다.


로저 오클랜드(Roger Oakland)는 쓰기를:


홀은 점성술에 기초한 12궁도(별자리, Zodiac)가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계시를 설명하는 타당한 방법이라고 믿었으며, 이런 그의 믿음을 보여주는 몇가지 아이디어를 그의 가르침을 통해 제시한다. 그는 책에서 말하기를: "궁도의 8번째 싸인(sign)인 전갈자리에서 우리는 쏘려고 침을 세우고 있는 전갈의 모습을 본다. 이것은 죽음의 싸인이며, 이것은 성(sex)의 영역을 다스도록 되어 있다. 하늘(들)의 싸인 바로 앞에 심판자의 싸인이 있다. 생명을 주는 예수가 죽음을 향해 다가 가서 '사망의 쏘는 것'을 뽑았다.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홀의 가르침에 대한 또 다른 주된 포인트는 그가 말하는 불멸설에 있다: ""잠자는, 기초 없이 지어진 교회"를 "참 뜻과 부르심으로 속으로" 깨워야 하며,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온전히 지켜질 때 뒤늦게 쏟아지는 억수같은 의의 비를 내리게 할 것이다". "수 많은 선지자들이 예언 속에서 말해 왔던 땅에 내리는 영생불사(Immortality)의 비."


크리스천들이 이 세상의 삶에서 불멸을 얻을 수 있다는 홀의 가르침은 늦은 비 운동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어서,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남"이라는 이단적 교리를 세우게 된다. 홀의 시대의 '거듭난', '성령세례를 받은' 오순절 크리스천들이 프랭클린 홀의 가르침의 비성경성과 오컬트를

분별하지 못했다는 당황스러운 사실에 대해 우리는 트리샤 틸린의 의견에 동의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프랭클린 홀과 그의 가르침이 노스 배틀포드(North Battleford, Saskatchewan)에 일어났던 늦은 비 '부흥'에 영향을 미쳤음은 분명하다. 그 '부흥'의 주된 리더 중 한 명이었던 언 호틴(Ern Hawtin)은 쓰기를:


금식에 대한 진리는 부흥에 기여한 큰 요인이었다. 부흥이 있기 일년 전 우리는 프랭클린 홀의 '금식과 기도를 통한 하나님과의 원자력'을 읽었다. 우리는 바로 금식을 연습하기 시작했다. 이전에는 오랜 기간 금식하는 것에 대한 가능성을 알지 못했다. 우리의 선한 형제 홀을 통한 큰 진리의 회복이 없었다면 이 부흥은 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

 

 

                    윌리엄 M. 브래넘 (WILLIAM M. BRANHAM)

 

 

아마도 늦은 비 운동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사람은 윌리엄 M. 브래넘이었다. 켄터키 버크빌(Berksville Kentucky)의 산장에서 태어난 윌리엄 매리언 브래넘은 9남 1녀의 맏이었다. 그는 매우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쿠르트 코흐(Kurt Koch)에 의하면 그의 부모는 점을 믿었으며, 그는 어릴 적부터 오컬티즘(occultism/신비주의)을 통해 눌려 지냈다. 초자연적 사건과 강령(방문)들이 윌리엄 브래넘의 일생을 수놓았다. 앨 데이거(Al Dager)는 쓰기를:


다음 기술한 것이 사실이던 전설이던 간에 처음부터 브래넘의 간증의 일부였다. 그가 태어난 날 산파는 그를 씻기고 엄마 팔에 누인 후 창문을 열려고 창가에 갔다. (그 시절 브래넘의 집에는 유리가 없었다.) 동이 터서 몇 가닥의 빛이 방으로 들어오자 엄마 팔에 누운 윌리엄의 침대 위로 직경 30cm 정도의 작은 원모양의 후광(halo)이 보였다. 1950년 1월 텍사스 휴스턴 치유집회에서 촬영된 사진에 나타난 것으로 되어 있는 이 후광은 수많은 사람들이 본 것으로 알려졌다.


윌리엄 브래넘의 아주 어린 시절부터 친숙령(familiar spirit)이 그에게 나타나려고 한 것으로 보인다. 빌 랜들즈(Bill Randles)는 쓰기를:


10남매의 맏이었던 브래넘은 그의 어린 시절에 대해 기록하기를,  "누군가 가까이 서서 내게 말을 걸려고 하는 듯한 이상한 느낌이 있었다. 특히 혼자 있을 때에"라고 한다. 기실 그는 7살 때 이상한 방문(강령)을 맞이한다. "어느 오후 집에 물을 나르려고 한 블럭 쯤 떨어진 헛간에 가고 있었다. 집과 헛간의 중간 쯤에 늙은 포플러 나무가 서 있었다. 나는 학교에서 막 돌아 왔고 나머지 아이들은 연못에 낚시하러 가려는 참이었다. 나도 울며 따라가려고 했지만, 아버지는 내게 물을 채우라고 했다. 나무 밑에 쉬려고 멈췄을 때 갑자기 나뭇잎들 사이로 바람부는 소리 같은 것이 들렸다. 바람은 어디에서도 불지 않았고 고요한 오후였다. 나무에서 뒷걸음질 치자 나무통 크기의 어떤 특정한 곳에서 바람이 나뭇잎을 통과해 지나가는 것 같아 보였다. 그러고는 이런 소리가 들렸다. '절대 술과 담배를 하지 말고 네 몸을 어떻게든 더럽히지 말라. 네가 자라면 네게 줄 일이 있다.' 브래넘은 이 출현으로 인해 두려웠다. 이 일은 그가 회심하기 이전에 일어났다.


브래넘이 이 방문자를 일컬은 '그 음성'은 평생 그와 함께 했으며, 종국에는 '천사'로 나타나 남은 일생동안 그와 함께 하며 치유사역을 지휘하곤 했다. 빌 랜들즈는 쓰기를:


이십대 초반, 목숨을 위협하는 병에서 나은 후 브래넘은 그의 삶을 하나님께 바쳤다. 그는 침례교 설교자가 되었고 인디아나 재퍼슨빌(Jeffersonville)에서 천막 집회를 열고, 교회(브래넘 장막교회, the Branham Tabernacle)를 시작했다. 어느 날 우연히 찾아 간 한 오순절계 장막집회에서 그들은 브래넘에게 설교를 부탁했고, 그의 삶에 하나님의 소명이 있음을 인식했다. 그 장막집회는 브래넘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다. 그는 나중에 그들이 내게 없는 것을 가졌다고 했다. 그가 그의 경험을 아내와 가족, 친구들에게 말했을 때 사람들은 '그들'과 어울리지 말라고 했고, 그래서 그는 물러섰다. 그가 목회와 함께 수렵감시인으로 일하던 1937년, 오하이오 강의 범람으로 인해 그의 아내와 어린 아기가 죽었다. 브래넘은 이것이 그 오순절 사람들과 함께 하기를 거절한 것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믿었다.


바로 직후, 브래넘은 이단적 오순절 분파인 연합오순절교회(The United Pentecostal Churches)에 가입한다. 이들은 '오직 예수' 사람들로, 삼위일체의 성경적 교리를 부정하고 이를 '마귀의 교리'라고 일컫는 사람들이다. 브래넘은 그들의 반삼위일체 이단에 개종했고, 삼위일체 신앙에 따라 세례받은 신자들에게 오직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을 것을 요구했다. 그가 나중에 자신은 단일신론(oneness doctrine)를 믿지 않는다고 했지만, 이 교리의 그 나름대로의 다른 형태, 즉, '세 분으로서의 하나님 대신, 아버지와 아들 그리고 성령의 세가지 속성으로 나타나는 한 분으로서의 하나님'을 가르쳤다.

어느 날, 브래넘이 오하이오 강에서 사람들의 침례를 준비하고 있을 때 '그 음성'이 다시 브래넘에게 말했다. 브래넘의 말이다:


오하이오 강가에 내려가서 나의 첫 신자들에게 침례를 베풀고 있을 때, 하늘 위로부터 소용돌이가 내려오고 빛이 아래로 비춰 내려와서... 내가 있는 바로 그 곳에 걸쳤다. 거기에서 음성이 들려 "세례 요한이 그리스도 초림의 선각자로 보내졌듯이, 너는 그리스도 재림의 선각자를 낳게할 메세지를 가졌다"라고 말했다. 나는 매우 두려웠다. 내가 돌아 갔을 때 사람들은 그 빛이 무슨 뜻이었는지 물었다.


브래넘은 이 음성 때문에 괴로워했고 하나님께 이런 강령으로부터 해방시켜 달라고 기도했다. 브래넘의 말:


그리고는 사는 동안 죽 그것을 보고, 그것의 움직임을 보고, 그 환상을 보고, 어떤 일이 일어날 지를 보았다. 그 이후 이것은 나를 너무 괴롭혔고, 사람들은 이것이 잘못된 것이라고 했다... 이것이 나타나지 않기를 아무리 기도해도 이것은 계속 나타났다... 나는 인디아나 수렵감시원이었다... 나는 "여보, 난 이렇게는 살 수가 없어. 나는 갇혔어."라고 말했다. "항상 이 일이 일어나고, 이런 일이, 이런 환상이, 그런 등등이, 뭔지 몰라도"라고 말했다. "넋이 빠지고.. 뭔지 모르겠어. 여보, 난 이것과 함께 하고 싶지 않아. 사람들은 이게 악마라고 해. 난 주 예수를 사랑해."라고 말했다.


명백하게도 브래넘은 어떤 오컬트에 단단히 속박되어 있었다. 1946년 5월 7일, 브래넘이 수렵감시원으로 근무하고 있을 때, 그의 '천사'가 처음으로 그 앞에 나타나서 그를 치유집회로 불렀다. 브래넘은 이 경험을 아래와 같이 말한다:


나는 점심을 먹으러 집에 와서 총을 풀며 집모퉁이를 돌아서는데 친한 친구가 다가와서는 오후에 매디슨에 함께 가자고 했다. 나는 순찰을 가야하기 때문에 안된다고 말하고 집을 돌아 단풍나무 아래로 걷던 중, 나무 윗부분 전체가 풀어졌다... 어떤 물체가 강한 바람같이 나무 속으로부터 내려 왔다... 아내가 놀라며 집에서 나와 무슨 일이냐며 물었다. 이상한 느낌을 받아온 지난 20년의 세월 후에 마침내 나는 이것이 무슨 일인지를 알아내고야 말 때가 왔다고 아내에게 말했다. 위기가 온 것이다! 나는 아내와 아이와 작별인사를 하면서, 내가 만약 며칠 안으로 돌아오지 않으면 영원히 돌아오지 못할 지도 모른다고 경고했다!.. 밤 11 경 나는 기도를 그치고 앉아 있는데 방에서 깜빡이는 빛을 발견했다. 누군가 플래시를 들고 오는 줄 알고 창문 밖을 내다 보았지만 아무도 없었다. 뒤를 돌아 보았을 때 빛은 마루에 점점 넓게 퍼지고 있었다. 이상하게 생각되겠지만, 그 땐 나 자신도 이상하다고 생각했었다. 빛이 퍼지자.. 나는 흥분되어 의자로부터 위를 올려다 보았더니, 커다란 별이 걸려 있었다. 그러나 오각형의 별은 아니고, 불이나 빛의 공같아 보이는 것이 마루를 비춰 내리고 있었다. 바로 그 때, 나는 누군가가 마루를 건너오는 소리를 듣고 놀랐는데, 그 곳에 있을만한 사람은 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이제 빛으로부터 나와서 나에게 다가오는 발을 보았는데, 사람이 다가오는 것 같이 매우 자연스러웠다. 남자로 보이는 그는 몸무게가 90Kg정도 나가는 사람 같았고, 흰 겉옷을 입고, 부드러운 얼굴로, 턱수염은 없이 짙은 머리가 어깨까지 늘어졌으며, 약간 짙은 혈색의 기분 좋은 표정이었고, 그리고 더 다가오자 그와 눈이 마주쳤다. 내가 두려워하는 것을 보고는 "두려워 말라. 나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임재로부터 보내졌으며, 너의 이상한 삶과 이해하지 못한 길들은 하나님이 너를 치유의 은사를 받게 하여 세상 사람들에게 보내셨다는 사실을 알려주기 위한 것이었다. 네가 성실하게 하고, 사람들로 하여금 너를 믿게 할 수 있으면, 네 기도를 막을 것은 아무 것도 없을 것이다. 암조차도"라고 말했다. 그는 많은 말을 했는데 여기 모두 적을 수는 없다. 내 손 위의 진동으로부터 병을 알아내는 방법을 알려 주었다. 그는 사라졌지만, 그 후로도 몇 번 그를 보았다. 그는 6개월 정도마다 한두번씩 나타나서 나와 얘기했다. 몇번은 다른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도 나타났다. 그가 누군지 나는 모른다. 다만 하나님의 메신저라는 것만 안다.


이 방문이 있은 얼마 후 브래넘은 치유전도단으로 사역을 시작했고, 그는 곧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브래넘의 사역은 이 기간에 일어난 오랄 로버츠(Oral Roberts)나 T.L. 오스본(Osborn) 같은 치유전도자들에게도 촉매제가 되었다. 빌 랜들즈는 쓰기를:


브래넘의 사역을 정말 놀라웠다. 브래넘의 비디오 테입들을 봤는데 하나는 1950년 중반 순복음경영자연맹(Full Gospel Business Men’s Fellowship) 특별집회의 것이다. 브래넘과 대중들은 이적은사집회를 시작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무엇을 기다리는지 아시죠? 내 주의 천사입니다. 그가 없으면 시작할 수 없습니다." 점차 그는 이런 말은 하곤 했다. "그가 이제 왔습니다" 그러고는 이적은사집회를 시작하고는 했다. 그는 조용히 개인들을 대중 속에서 불러내어 그들 마음 속에 있는 비밀과 그들 몸 속의 병, 의사의 진단, 그들의 아내가 어젯밤에 한 말을 알려주고는 침착하게 치유를 선언했다. 종종 치유가 일어났다! 기실, 브래넘에게 그의 기적들이 성령께서 하시는 것인지 물었을 때, 그는 "아니오. 나의 천사가 하는 것입니다"라고 답했다. 브래넘을 아는 사람들은 모두 아래 두가지에는 동의했다. 첫째, 그는 진정으로 겸손과 긍휼의 성품을 가졌다. 그에게는 과장이나 쇼맨십은 결코 없었다. 모두 동의한 나머지 하나는 그의 지식과 지혜의 말씀에 있어서의 절대적인 정확성이었다. 근자의 언 박스터(Ern Baxter, 1970년대 포트 러더데일의 다섯 목자의 하나로 알려짐)는 브래넘과 한동안 함께 여행한 교사였다. 박스터는 브래넘이 누구에게도 지식의 말씀을 부정확하게 전한 적이 없다고 지적한다. 브래넘은 수만명, 어쩌면 수십만명을 돌봤다! 얼마든지 더 말할 수 있지만, 실로 그의 삶과 사역은 놀라웠다. 조용히, 신중하게 그는 놀라운 치유와 놓임을 작용시켰다. 그는 영으로 사람들의 이름, 주소, 대화, 문제점, 병, 때로는 죄, 친구들 등등을 매우 정확하게 알려주고 또 알려 주었다. 신성모독과 위협적인 말을 뱉어내는 미치광이들이 브래넘 앞에 가면 피하거나 회개하는 일들이 대중 앞에서 공개되었다. 오순절 사람들은 이런 일을 이전에도 이후로도 보지 못했다. 지금까지도 오순절 매체는 그를 존중하고 있다.


정말로 브래넘을 통해 작용하는 어떤 영적인 큰 힘이 있었다. 그러나 이것이 하나님의 능력이었나, 아니면 그의 영적 안내자인 '천사'의 능력이었나. 브래넘 자신에 따르면 이것은 하나님이 한 것이 아니라 '천사'가 한 것이었다. 브래넘은 그의 '천사'가 곁에 없으면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능력이 없어 보였다. 알프레드 폴(Alfred Pohl)과 데이비드 클라우드(David W. Cloud)에 따르면:


어느 저녁 집회가 시작하기 바로 전, 브래넘은 그의 통역에게 "나의 오른쪽에는 천사가 서니까 그곳에는 서지 마시오"라고 말했다. 브래넘은 천사를 건장하고 짙은 머리색과 접힌 팔을 가진 사람으로 묘사했다. 천사가 바로 브래넘 옆에 있어서 천사가 시키는 것은 모두 브래넘이 따라야 했다. 브래넘은 천사가 밤낮으로 그와 함께 하며, 그가 없이는 설교할 권능이 없다고 했다. 쿠르트 코흐(Kurt Koch)는 "브래넘의 천사가 하나님의 천사라기보다 심령현상적 천사임"을 확인해 준다. 사역자임에도 불구하고 심령집회와 마술 그리고 오컬티즘(신비주의)에 연관된 시동생을 가진 여인의 이야기를 그가 말한다. 브래넘이 처음 그 사람에게 소개되었을 때, 브래넘은 "당신은 매일 나에게 나타나는 천사와 똑같이 생기셨군요"라고 자연스럽게 말했다. 그 이상한 심령목사는 그를 아는 크리스천들을 섬뜩하게 했다... 우리는 브래넘이 악령의 영향을 받았다고 믿는다. 그가 묶여 살았던 것은 오컬트의 속박이었다. 그의 능력은 점쟁이들의 힘이었다. 그의 치유능력은 마술적인 것이었다. 그를 괴롭히던 목소리, 그의 손에서 올라오는 진동, 그 빛, 그의 집회장소에서 춤을 추었다는 불의 공, 집회 후에 경험하는 그의 완전한 고갈 - 이 모든 것이 신비적인 힘의 증거이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사람들이 그에게 경고하던 바이다. 기실 브래넘이 점쟁이들을 만났을 때 그들은 브래넘이 초자연적인 힘에 의해 영향을 받고 있다고 했다: "무엇보다 나를 겁나게 한 것은 내가 점쟁이를 만날 때마다 그들은 무었인가가 일어났음을 느꼈고, 이것이.. 나를 정말 죽일 것만 같았다. 예를 들어, 어느 날 나는 사촌들과 함께 카니발 장소를 걸어 지나가고 있었다. 우린 그저 지나가는 소년들이었다. 거기에는 천막치고 자리잡고 앉아 있는 작고 늙은 점쟁이가 있었는데, 그녀가 "너 이리 좀 와" 해서 우리 셋이 돌아 보니 "줄무늬 세타 입는 너"(나였다)라고 해서 나는 "네. 아주머니. 무슨 일이죠?"라고 했다. 그녀는 "너를 따라오는 빛이 있는 것 아니? 너는 특정 궁도 아래서 태어 났어."라고 했다. 내가 무슨 뜻이냐고 묻자 그녀는 "너는 특정 궁도 아래서 태어 났어. 너를 따라오는 빛이 있어. 너는 하늘의 부름을 받고 태어난 거야"라고 했다. 브래넘은 점쟁이들이 그에게 비슷한 말을 한 경우들을 얘기한다. "그들과 어울리면 항상 그렇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목사들은 말한다. "그건 마귀야! 그건 마귀야!" 슬픈 이야기이다. 안 됐지만 브래넘은 그를 찾아 온 것이 악령이라는 경고하는 지혜로운 소리를 듣지 않았다. 그가 성경의 소리를 듣지 않은 것은 안 된 일이다. 결과적으로 보면 그는 지혜의 음성을 듣지 않았다. 그 대신 그는 악령의 능력이 그의 삶을 지배하게 하였고, 그는 또 수많은 사람들은 온갖 오류와 혼동 속으로 몰아 넣었다.


그러면 윌리엄 브래넘의 가르침은 어땠는가? 어떤 오류와 혼동을 그는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에 뿌리고 있었나? 우리는 이미 그가 삼위일체를 부정했음을 보았다. 그러나 이것은 그의 기괴하고 이단적인 가르침 중에서는 비교적 가벼운 것이었다. 윌리엄 브래넘의 다른 가르침은 다음을 포함한다:

 

※브래넘은 하나님의 말씀이 다음 세가지 형태로 주어졌다고 믿는다: 12궁도(점성술의 별자리), 이집트의 피라미드, 기록된 말씀. 12궁도 이론은 위에서 봤듯이 프랭클린 홀에 의해서도 신봉되었다.

 

※ "뱀의 씨앗" 교리는 하와가 하나님께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라고 한 창세기 3장 13절의 그의 해석을 기초로 하고 있다. 브래넘은 '꾀다(beguiled)'라고 번역된 단어가 '성적으로 유혹하다(seduced sexually)'라는 의미라고 주장했다. 그는 사탄이 하와를 성적으로 유혹했고 그 결과가 가인이라고 주장했다! 그 때부터, 브래넘에 따르면, 죄는 대대로 여자를 통해 건네졌다고 한다. 확실히, 브래넘은 여자들과 무슨 문제가 있었음에 틀림이 없다. 어떤 설교에서 그는 말하기를:


내가 기억하기로는 아버지는 계속 뛰고 있었고, 나는 물(긷기) 그런 일 때문에 밖에 나가 있었습니다. 17살 18살밖에 되지 않은 젊은 여자들이 지금 내 나이의 남자와 취한 채로 함께 있었습니다. 그 여자들은 집에 돌아가 남편에게 저녁을 만들어 주기 위해 스스로 술이 깨려고 블랙 커피를 준비했습니다. 뭐 그랬습니다. 내가.. 그 당시 나는 "그들은 죽이기 위해서는 깨끗한 총알을 사용할만한 가치도 없는 사람들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맞습니다. 나는 여자들을 미워했습니다. 맞아요. 나는 지금도 그렇게 생각을 하지 않도록 항상 조심해야 합니다.


※브래넘은 또한 일곱교회의 사자들(요한계시록 2, 3장)은 하나님이 실제로 역사를 통해서 때에 따라 미래를 위한 계시를 주어 이끄시려고 교회에 보낸 사람들이라고 주장한다. 브래넘은 자신이 일곱번째, 라오디게아 교회 시대에 보내어진 사자라고 가르쳤다. 이런 그의 주장은 심지어 그의 묘비에도 적혀 있다.

 

이제 브래넘과 그의 괴상한 교리들에 관해서, 우리는 트리샤 틸린이 프랭클린 홀에 관해서 느꼈던 그 정서를 다시 반향(反響)해야 한다! 성령충만한 사람들이 어쨰서 이 사람의 삶과 사역 속에 있었던 신비주의/오컬트적 성격을 분별하지 못했었는지 고민해 봐야 한다. 비참하게도 오직 도달할 수 있는 결론은 브래넘 시대의 평범한 크리스천들은 오늘날의 크리스천들과 마찬가지로 말씀에 무지했다는 것이다. 다른 방법으로 설명할 수 있는가? 아마 수 많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영적 은사와 경험, 그리고 이적과 기사에 대한 배고픔 떄문에 조심과 분별을 바람에 날려 버리고 거기에 휩쓸려 갔을 것이라는 것 외에는 설명할 길이 없을 것이다. 그들이 오늘날 "내버려 둬. 하나님이 하시도록"이러고 말하는 것 같이... 우리 주께서 하신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한다"는 말씀을 기억하라. 


아무리 비성경적이고 이상해도 이적과 기사가 따르기만 하면 그런 가르침은 받아 들이겠다는 오늘날의 교회를 쥐고 있는 그 마음이 이미 1940년대 후반 시절의 교회를 쥐고 있었던 것 같다. 지금 상황은 걷잡을 수 없게 되었다. 오순절과 은사주의 크리스천들은 초자연적인 능력이 나타나기만 하면 됐지 그 능력의 원천이 무엇이든지 상관하지 않는 것 같아 보인다. 스스로 '하나님의 바텐더'라고 하는 로드니 하워드 브라운(Rodney Howard-Browne)은 말하기를:


... 부흥이 오면 다음 세가지가 만나서 나타나는 것을 볼 것이다: (1) 성령 (2) 육체(정욕) (3) 마귀. 하지만 나는 사람들이 무엇이 나타나는 것을 두려워 한 나머지 아무 것도 일어나지 않는 교회보다는 마귀와 정욕이 나타나는 교회에 있고 싶다... 너무 걱정하지 말라. 혹시 마귀가 나타나도 걱정하지 말라. 기뻐하라. 어쨌든 뭔가는 일어나지 않았는가!


뭔가가 일어나고 있는 한 마귀의 것인지 염려하지 말라! 하나님의 사람들이 도대체 얼마나 바보 같고 분별 없게 될 수 있는가? 이런 자세는 좋게 봐야 무모한 것이고 최악의 경우 영적 자살에 해당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이것이 오늘날 오순절과 은사주의 크리스천들 중 사이의 주된 의견으로 보인다. 오순절계 동료인 래리 토마스(Larry Thomas)는 지적하기를:


지미 스웨거트(Jimmy Swaggart)가 그의 대원들과 함께 남미를 찾은 1980년 대, (케빈에게 묻기를) 1986년이었나? 86년 말이나 87년 초 매일 밤 8만명의 사람들로 채워진 아르헨티나의 대형 스태디움에서 예배와 설교 도중 모임의 수백 명의 사람들이 발작적으로 웃으며 땅바닥에 자빠지기 시작했다. 그들은 개와 같이 울부짖고, 개와 같이 짖고, 사자 같이 으르렁거렸고, 모든 사나운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이런 이상한 현상이 나타나자 기도(안내원)들은 나가서 그들을 제어하고 콜리세움 밖의 천막으로 데리고 나와 그들에게서 마귀를 쫓아 냈다. 그러나 지금 당신이 그렇게 하면 그것은 성령이 당신 삶에서 일하신다는 증거가 된다.


나는 토론토공항 빈야드교회의 목사인 존 아놋(John Arnott)이 그의 기름부음을 1993년 아르헨티나에서 받았다는 사실에 대해 흥미와 깨우침을 받는다.

 

토론토와 펜사콜라 같은 곳에서 일어나는 소위 '부흥'이란, 1948년 노스배틀포드(North Battleford, Saskatchewan)에서 일어나서 '늦은 비' 또는 '늦은 비의 새 질서'로 알려졌던 '부흥'의 지속에 불과하다. 늦은 비 운동에서 나타났던 비성경적이고 이상한 교리들과 경험들이 오늘날 '부흥'에서 많이 재포장되어지고 있는 것이다. 윌리엄 브래넘과 프랭클린 홀은 노스배틀포드에서 생겨서, 온 오순절계로 단기간에 퍼진 이 '새 일(new thing)'을 고취하도록 한 원천적인 사람들이다. 이 두 사람이 '늦은 비'를 내리게 한 구름이었고, 오컬트적 영향을 받은 이 두 사람이 유다의 예언의 성취였음을 나는 당당히 말할 수 있다. 그들은 기실로 '물 없는 구름'이었다.


그가 괴상한 교리를 계속 주장한 덕분에 50년대 말과 60년대에 브래넘의 인기는 약간 시들해졌지만, 

그는 지속적으로 받들여져 왔고 지금도 오순절/은사주의 세계에서는 많은 리더들에 의해 하나님의 큰 사람으로 받들여지고 있다. 브래넘과 함께 사역한 '캔저스시티 선지자' 폴 케인(Paul Cain)은 그를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선지자'라고 불렀다. 윌리엄 브래넘과 그의 유산에 대해 빌 랜들즈는 이렇게 쓴다:


오늘날 이 사람이 왜 중요한가? 윌리엄 브래넘이 중요한 이유는, 1940년대의 오순절교회가 만났던, 그리고 오늘날 더 큰 교회가 만나려고 하는 갈림길을 그가 보여 주기 떄문이다. 다른 선지자들은 놀라운 이적과 기사를 행한다. 사람들은 감동하고 많은 경우 '선한 결과'가 이루어진다. 예언들은 정확해 보이고 많은 사람들이 '내적 상처'와 '상처받은 심령'을 치유 받는다. 문제는 그들의 가르침이 괜찮은가?이다. 우리는 교리를 기초로 판단해야 하는가? 아니면 현상으로 판단해야 하는가? 우리는 신명기 13장 1-5절로 돌아 가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도대체 이적과 기사를 어떻게 판단할 것인가? 독일의 작가이자 오컬트 전문가인 쿠르트 코흐는 그의 '오컬트 ABC(Occult A-B-C, [사탄의 전술전략]으로 번역됨)'에서 브래넘의 방법론에 대해서 적으면서 영국의 심령술사 해리 에드워즈(Harry Edwards)를 논한다. "에드워즈는 그의 활동의 심령술적 성격에 대해 확실히 말하기를 '나의 천사들 없이는 나는 병을 고칠 수 없다'고 했다. 윌리엄 브래넘의 치유사역을 보는 관점에 대한 재미있는 유사점이다... 또 다른 증거는 에드워즈와 브래넘 공히 그리스도의 지켜주심에 의탁한 거듭난 성도들에게는 치유를 행할 수 없었다는 사실이다... 그(브래넘)가 말할 때... 나(코흐)를 비롯한 몇 명의 신자들이 청중 속에 있어서 이렇게 기도했다: '주님. 이 사람의 능력이 주께로부터 왔으면 그를 축복하고 사용하소서. 만약 그의 치유은사가 주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면 그를 막아 주옵소서' 결과는? 두번에 걸쳐서 브래넘은 강단에서 이렇게 말했다. '여기 방해하는 능력이 있어서 아무 일도 못합니다.'"(오컬트 ABC P. 235) 나는 오순절운동이 브래넘에 관한 면에서 갈림길에 서 있다고 확신한다 - 복음의 진리에 대하여 충성함으로 이 이단을 심판할 것인가? 아니면, 실용적인 면에서 보고 이렇게 말할 것인가? "사람들을 보라! 그는 사람들을 하나님께 이끌어 온다! 이것이 어찌 사탄의 일일 수 있는가? 사탄도 치유를 하는가? 우리는 하나님께 이적과 기사를 보여 달라고 탄원해 왔고, 이제 그것이 나타났다! 그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아무 것도 아니다. 그들에게는 선한 열매가 없고, 아마도 성령충만조차 하지 않을 것이며, 기름부음이 없고 비판만 있을 뿐이다." 토론토에서 회자되듯이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축복의 능력보다 사탄의 속이는 능력을 더 믿고 있다." 비록 브래넘의 이단적 가르침에 대한 많은 소리가 있었지만, 대체적으로 보면, 브래넘은 영향력 있는 오순절계 리더들에게 크게 받아 들여지고 있었다. (알다시피 오늘날까지 많은 이들로부터 그는 이적과 기사의 선구자와 선지자로 여겨지고 있다.) 그가 죽을 당시 그의 명성은 쇠퇴하였고 그의 가르침은 더 뻔해졌지만, '나타난 하나님의 아들들' 운동권, 기독 매체, 심지어 요사이 '기적사역자'들과 은사주의 리더들에게는 아직도 그에 대한 깊은 존중과 함께 많은 경우 그를 모방하려는 욕구가 있다.


1965년 12월 18일, 윌리엄 매리언 브래넘은 아리조나로 가던 중 음주운전자의 차와 정면으로 충돌했다. 의식없는 상태로 6일간 누워있다가1965년 크리스마스 이브에 윌리엄 매리언 브래넘은 죽었다. 충실한 추종자들은 그가 죽음으로부터 부활할 것으로 믿고 장례를 며칠동안 미뤘다. 그들은 지금도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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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청춘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 의 바른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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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 8:7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

 

인간의 욕망을 만족시키기 위해 성경을 왜곡하는 구절 중에 가장 많이 쓰이는 구절이 위 구절일 것이다. 각 개인의 마음 속에 '창대함'이 부러워서 위 구절을 빼내어 현수막에 붙인다. 특히 많은 무지한 교회들이 위 구절을 현수막에 써서 교회 대문에 붙혀 놓았고, 무지한 성도들 역시 기념패나 부적처럼 위 구절을 돌이나 판자에 적어 액자에 걸어 놓은 집도 많다.

 

하지만 우리가 욥기의 배경을 알고 끝까지 쉬지 않고 욥기를 읽으면 위 구절은 빌닷이 욥으로 하여금 자기 죄를 시인하도록 강요하고 부추기는 과정에서 나오는 악의의 말인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빌닷의 뒤에는 사탄이 도사리고 있다. 사탄의 목적은 욥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불의하게 여겨 저주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를 위해 첫번째 사용한 도구는 욥의 아내로서 그녀는 "그의 아내가 그에게 이르되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온전함을 굳게 지키느냐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욥 2:9)라고 말하며 욥으로 하나님을 저주하도록 부추겼다. 그러나 우리가 알 듯이 욥은 자신의 믿음의 정절을 잘 지킨다. 하지만 욥기 3장부터 31장까지 세 친구가 등장하여 끈질긴 대화를 통해 욥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저주하도록 한다. 이것이 위 구절의 큰 배경이다. 이러한 배경을 알지 못한채 한 구절을 뽑아 인간의 더러운 욕망을 채우고자 현수막에 자주 쓰이는 구절이 또한 위 구절이다. 

 

당장 욥기 8장만 보더라도 빌닷은 욥을 다구치고 있다. 즉, "네 더러운 죄를 자백하라"는 것이다. 욥의 자녀들이 죽고 망하고 쓰러진 것은 욥의 '죄값'이라는 것이다. 쉬운 성경으로 보자.    

 

욥8:1 <빌닷이 욥에게 말하다> 그러자 수아 사람 빌닷이 욥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욥8:2 “자네는 언제까지 이런 말을 계속할 작정인가? 자네의 말은 마치 태풍 같군.

욥8:3 하나님께서 잘못 판단하실 것 같은가? 전능자께서 실수라도 하실 것 같은가?

욥8:4 자네 자녀들이 죄를 지은 것이 분명하네. 그래서 그 죄값을 받은 걸세.

욥8:5 그러니 지금이라도 하나님을 찾고, 전능자에게 자비를 구하게나.

욥8:6 만일 자네가 깨끗하고 정직하다면, 그분이 자네를 도와 주실 걸세.

욥8:7 그러면 지금은 보잘것 없이 시작하겠지만, 나중에는 위대하게 될 걸세.

욥8:8 제발 조상들의 일을 기억하고 선조들에게서 배우게나.

욥8:9 어제 태어난 우리가 안다면 얼마나 많이 알겠나? 땅에 사는 우리는 그림자 같은 존재가 아닌가?

 

우리의 모든 자녀가 광풍 때문에 단숨에 전부 죽었다고 하자. 또한 내가 평생을 욥처럼 순전하고 온전하며 정직한 삶을 살았다고 하자. 그런데 빌닷이라는 친구가 와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대의 자녀가 광풍 때문에 몰살한 것은 죄값이오. 이제 당신의 죄악을 실토하시오."라고 말한다고 하자. 그러면 그때 당신은 빌닷이 대표하는 하나님을 향해 어떤 마음이 들겠는가?  바로 이러한 배경이 빌닷이 위 구절을 말하는 배경이다.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 즉, 하나님이 잘못 판단할 리 없으니 당신 자녀가 다 죽었다. 하지만 이제라도 죄를 실토하고 새롭게 시작하라. 그러면 "지금은 비참하지만 다시 이 세상에서 성공하지 않겠는가"라는 뜻이다.

 

아마 필자라면 이러한 말을 하는 빌닷의 목아지를 잡아 그의 머리카락이 다 뽑혀질 때까지 미움과 증오가 터져나올 것 같다. 만일 빌닷이 하나님이 보내신 사람이라고 믿게 된다면 하나님을 향한 혼동은 무한할 것이다.

 

우리는 빌닷이 하나님이 보낸 사람이 아니라 마귀가 이용하기 위해 보낸 자임을 알아야 한다. 물론 욥기 42장에서 빌닷마저 그리스도의 상징이 되는 욥의 중보를 통해 하나님의 심판인 죽임을 면하게 된다.


 "내 종 욥이 너희를 위하여 기도할 것인즉 내가 그를 기쁘게 받으리니 너희가 우매한 만큼 너희에게 갚지 아니하리라"(욥 42:8). 이로 보건대 위 구절은 악의에서 나온 말이지 우리가 교회나 믿음을 위해 사용할 수 있는 구절이 아닌 것이다.

 

그럼에도 위 구절이 각 가정과 교회에 차고 넘치는 이유는 그만큼 우리는 나의 사욕을 위해 신앙 생활을 하고 있다는 증거이며 그만큼 성경에 무지하다는 증거이다.

 

독자들은 위 내용을 바로 이해하고 위 구절을 오용하는 자들로 하여금 시정하도록 도와야 할 것이다.


스데반 황

영원에서 보는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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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에서 보는 눈


로마서 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바울이 이 말을 할 때 그는 현재의 눈으로 가까운 사건들을 보고 말한 것이 아니다. 바울은 모든 사건을 먼 장래에서, 특히 영원에서 보고 있다. 따라서 지금 발생하는 모든 일들에 관하여 나는 다 알 수 없으나 단 한 가지 아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선하신 뜻을 이루기 위하여 내게 발생하는 모든 일들을 허락하셨다는 사실이다.


우리 인간들의 가장 큰 문제는 언제나 조급함이다. 쉽게 경솔하게 판단함이다. 이는 자신의 어리석은 흐릿한 눈으로 모든 사건을 경솔하게 판단하는 어리석음이 문제인 것이다. 그러나 믿음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안경을 갖게 된다. 그 안경은 영원에서 볼 수 있는 눈을 갖는 능력을 준다. 이 안경을 끼고 우리에게 발생하는 모든 사건을 볼 때 바울의 고백처럼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라고 고백한다.

 

이 허망하고 죄로 가득찬 세상에서 우리가 믿을 수 있는 유일한 것은 무엇일까? 우리에게 소망을 주는 것은 무엇일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향하여 선한 계획을 가지고 계시다는 것 아니겠는가? 우리는 우리에게 발생하는 모든 사건을 다 이해할 수 없다. 하지만 하나님의 선하심, 이 한 가지를 믿고 살 때 우리는 그 어떤 상황에서도 목표를 잃지 않고 가장 기쁘고 가장 가치 있고 가장 보람된 삶을 살아가게 된다.

 

오늘 하루가 내 뜻대로 되지 않더라도 낙심하지 말라. 일이 잘 된다고 너무 신나서 들뜨지 말라. 언제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최고의 표현을 나타내며 순간순간을 걷다보면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룰 것이다. 조급하지 말라.


스데반 황

빚으로서의 돈(Money as Debt) full version @일루미나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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