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08-19] "미물에게 배워야 할 지혜"
[2012-08-19] "내 평생에 가는 길"
2012년 8월 9일~15일 니카라과 단기 선교
[2012-08-15] 김애자 선교사 피아노 연주
성령이 하시는 객관적 사역
성령이 하시는 객관적 사역
"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니라 "(요 16:7~11)
오늘 이 말씀이 여러분들에게 정말 잘 전달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이 말씀이 저와 여러분들께 큰 희망이 될 겁니다. 그리고 이 말씀이 우리에게 굉장한 소망과 확신을 가져다 줄 것입니다.
오늘 이 본문 말씀이 가지고 있는 비중은 대단히 큽니다. 우리는 그동안에 말씀을 통해 율법 시대가 마감이되고, 새 언약 시대. 즉 성령시대가 도래했다는 점에 대해서 우리가 밝히 깨닫게 되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율법을 폐하시고, 성령을 통해서 오늘 우리를 참된 의의 길로 이끌어 가시길 원하신다는 사실들을 우리가 살펴보았습니다. 그래서 성령시대가 도래하게 되면, 성령은 어떤 특별한 사람들 혹은 간절히 바라는 사람들에게만 임하는 것이 아닌 겁니다. 특별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거나 능력이 임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은 보편적으로 구원받은 사람 누구에게나 내주하시는 시대가 될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성령시대의 성령이라는 것은 과거 구약시대와 같이 하나님에 의해서 특별히 선택되어진 사람들을 위해서만 특별히 역사하시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예수를 믿는 모든 사람 안에 생명으로 거하시고 그 생명이 예수 믿는 모든 사람들 안에 보편적으로 동일하게 역사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지난 수요예배의 말씀이었습니다. 할렐루야.
이 시대에 가장 중요한 것 - 성령
저는 지난 시간에 우리가 성경에 나타난 시대구분을 성부시대와 성자시대와 성령시대로 나눌 수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오순절 이후의 성령시대입니다.
그런데 “그럼 이 성령시대가 대체 어떤 시대냐?”하는 것에 대한 개념들을 잘 모르고 있는 분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저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구약과 신약의 개념으로만 시대를 구분하다 보니, 구약 시대에 성부 하나님과 신약 시대에 성자 예수님만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성령 하나님은 구약에서 어떤 특별한 사람들에게 임하는 능력이고, 신약 시대에 예수님을 통해서 나타나는 능력이라는 개념으로만 이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은 성부와 성자의 보조적 역할을 하는듯한 그런 인상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구약 시대에는 성부, 신약 시대에는 예수가 역사의 주역인 것처럼 생각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실상은 아닙니다. 오히려 지금 저와 여러분이 사는 이 시대에 참 중요한 핵심적인 분은 성령이십니다. 그래서 이 신약 시대를 일컬어서 정확하게 말하면 새 언약 시대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잘 알다시피 새 언약의 내용은 심비에 새긴 법, 즉 “우리 안에 거하시는 영”입니다. (렘 31:33) 새 언약의 핵심은 영이에요. 즉 성령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신약 시대의 예수님은 과거 구약에서 저질러 놓은 인간들의 모든 문제들을 해결하신 것뿐만 아니라,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새 언약 시대를 이루기 위한 근거를 마련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 예수의 사역은 성령의 사역을 초점으로 해서 가고 있는 것이죠.
그런데 사람들은 예수님이 오셔서 구약에서 인간이 죄를 범한 것에 대해 그 죄를 대속하시고, 죄로부터 우리를 구원해 내시는 그 구속사역에만 집중을 하고 있습니다. 이건 물론 중요합니다. 인간이 죄를 범하고 타락했기 때문에, 그 타락한 죄인이 구원을 받아서 천국에 가려면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이 매우 중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미 저질러 놓은 문제를 먼저 해결해야만 하기 때문에, 이 인생의 온갖 문제를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해결하셨다는 것은 매우 귀하고 중요한 사건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이 예수님의 구속사역을 조금도 폄하시키거나 약화시킬 수 없습니다. 이건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함이 없는 절대적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절대적으로 중요한 문제라 이 말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는 예수님의 사역을 통해서 그 안에 있는 양 방향성을 봐야 합니다. 예수님의 사역을 본질적인 하나님의 경륜의 섭리 가운데에서 보게 되면, 죄를 대속하는 것이 본질적 사역의 핵심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본질적 핵심은 예수 안에 있는 생명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안에 생명을 주려고 오신 분이십니다. (요 10:10) 그런데 인간들이 예수님을 통해서 생명을 받기도 전에 죄를 범하고 타락을 했기 때문에, 생명을 주시기 전에 먼저 타락한 죄인들의 죄 문제부터 해결을 해야 했던 겁니다.
그러니까 결국 이 죄 사함이란, 하나님의 생명을 주시기 위한 준비 작업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대속 자체가 죄로부터의 구속이지만, 이것은 소극적인 측면입니다. 궁극적인 목적은 우리 인간에게 생명을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타락한 죄인들에게는 하나님의 생명이 의미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생명은 죄인들안에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이 문제부터 해결하시기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대속사역을 통해서 우리를 죄 가운데에서 구원하신 것입니다.
이해하시겠습니까? 구속 사역은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본질적인 목적이 아니고,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인간이 저질러 놓은 문제를 해결하셔야만 하는 그런 성격의 사건이었다 이 말입니다. 그럼 예수님의 더 궁극적인 사역은 무엇입니까? 앞서 말씀 드린대로 예수님께서는 한 알의 밀알로 이 땅에 오셔서 당신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을 해방하시려고 오신 겁니다. (요 12:24)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토록 계획하셨던 대로 그 생명을 오늘 저와 여러분 안에 나눠주시고, 심어주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겁니다. 할렐루야.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이제 당신 안에 있는 생명을 우리 모든 사람들이 공유할 수 있는 생명으로 해방을 시키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소극적으로는 죄에 대한 해결이고, 적극적으로는 생명을 주시기 위한 근본적인 작업을 예수님께서 행하신 것입니다.
그럼 이 생명을 주시는 근본적인 작업은 누구를 통해서 이뤄집니까? 바로 성령의 사역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는 인간이 저지른 문제를 해결하실 뿐만 아니라, 이제 당신 안에 있는 생명을 해방시키셔서, 앞으로 보혜사 성령을 통해서 이 생명의 역사가 시작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하시고 토대를 마련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생명이 우리 안에서 본격적으로 역사하는 것은 성령시대부터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성령시대가 얼마나 중요하고 성령시대에 대한 깨달음이 얼마나 필요합니까? 단지 우리가 구약과 신약이라는 개념 속에는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만을 생각하기 때문에, 우리가 성령을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있는 것입니다.
구약과 신약에서 성령은 그냥 보조역할만을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새 언약 시대의 본질과 가장 중요시 되어야할 핵심은 생명이란 말입니다. 또 그 생명이 우리 안에 있게 해주시는 성령입니다. 성령이 역사하시는 시대가 바로 새 언약의 시대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러 오셨고, 구원받은 우리 안에 이제 하나님의 생명을 통해서 하나님의 경륜 안에 본질인 의를 실천하고 완성케 하시기 위해서 성령님께서 오신 것입니다.
성령의 객관적인 사역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이 시대에 대한 예고를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러니까 오늘 이 본문 말씀은 단지 “성령께서 오시면 우리의 안에서 무슨 일을 하실 것이냐?”하는 주관적 성령의 사역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신 것이 아닙니다.
“성령이 오시면 성령시대에 어떠한 일이 벌어질 것이냐?”하는 성령시대의 객관적인 상황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신 겁니다. 성령의 주관적 사역과 객관적 사역. 이 개념을 이해하셔야 합니다. 주관적 사역이라는 것은 우리 각 사람 안에서 하나씩 하나씩 역사하시는 그 성령의 개체적인 사역을 말하고 있는 것이고, 객관적 사역이라는 것은 성령시대에 객관적이고 보편적으로 일어날 일들에 대한 것입니다. 이것을 잘 이해하셨길 바라며, 오늘 본문 말씀 보시겠습니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요 16:7)
이 말씀은 아주 중요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가시고난 이후에 성령시대가 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가시지 않으면 성령시대는 오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시대와 성령의 시대는 분명히 다르다는 것을 여기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또한 이 말씀에서 또 한 가지 알 수 있는 것은 성령이 오시는 근거가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모든 성령사역의 기초와 근거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두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가 와서 무슨 일을 하시는지 한번 보십시오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요 16:8)
성령님이 오시면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해서 책망을 한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누구를 책망한다고 하십니까? 세상을 책망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성령의 객관적 사역을 말한다고 말씀드린 이유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오늘 이 말씀을 읽을 때, 1차적으로 너무 쉽게 이렇게 생각합니다. “성령님이 오시면 우리 안에서 죄를 깨닫게 하시고, 우리에게 의가 무엇인지를 알려주시고, 우리에게 심판에 대한 경고를 하실 것이다.” 즉 다시 말해서 성령이 각 사람 안에서 주관적으로 역사하시는 그 성령의 개체적 사역을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을 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8절 말씀은 “성령이 너희를 책망한다”라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세상을 책망한다고 합니다. 책망의 대상이 세상입니다. 예수 믿지 않는 이 세상을 말하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책망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이 세상. 다시 말해 예수를 부인하고, 예수를 못 박았던, 그리고 공중에 권세 잡은 자 사탄이 붙잡고 군림하고 있는 그 세상을 말하는 겁니다. 그 세상을 책망하러 성령님이 오신다는 것입니다. 그 내용은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책망하신다고 합니다. 그럼 이것이 가지고 있는 의미가 무엇인지 자세히 보겠습니다.
8절 말씀에서 “그”가 누구입니까? 성령입니다. 그리고 7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이 성령을 보혜사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보혜사는 두 가지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중 하나는 돕는 자라는 의미입니다.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 보혜사의 의미는 우리를 도와주는 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보혜사에는 또 다른 의미가 있는데, 대언자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럼 오늘 8절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이 성령의 사역은 돕는 자입니까, 대언자입니까? 오늘 예수님이 여기서 말씀하고 계신 것은 예수님에 대한 대언자로서의 그 역사를 감당하기 위한 성령을 말씀하시는 겁니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은 돕는 자로서의 성령의 사역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대언자로서의 성령의 사역을 얘기하고 있는 겁니다. 이해되십니까? 이 사실을 잘 이해하셔야 합니다.
본래 책망한다는 말에는 여러 다양한 의미들이 있습니다. 물론 그 여러 의미 중에는 깨닫게 하다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이 본문 말씀을 주석을 할 때, 성령께서 돕는 자의 역할로 우리 각 사람 안에 오셔서 우리로 하여금 죄를 짓지 않고 의에 대한 추구를 갖게 하고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경고를 하신다. 그로 말미 암아서 우리를 경건한 삶, 성령의 열매를 맺는 삶으로 이끌어간다고 생각을 하시는 분들이 많이 있었던 겁니다. 사실 이 8절만 놓고 본다면 그렇게 생각해도 이상할 게 하나도 없습니다.
근데 이 본문은 주님께서 직접 밑에다가 주석을 달아놓으셨습니다. 주님께서 친히 이 성령의 사역이 무엇을 말하는가에 대한 주석을 달아놓으셨단 말입니다. 그래서 그 주석의 내용을 보게 되면 이 말씀이 의미하는 바는 주관적 성령의 사역이 아니라, 객관적 성령의 사역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즉, “성령께서 이 세상에서 하시는 일이 무엇인가? 성령께서 세상에 대하여 무슨 일을 하실 것인가?” 에 대한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예수님은 이 땅에 모든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아멘. 이것이 바로 객관적인 예수님의 사역이죠. 그러나 이것이 실제로 이루어지는 것은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 주관적으로 우리 안에서 이루어지는 겁니다. 마찬가지로 객관적으로 예수님께서 모든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오신 것처럼, 성령님께서도 이 세상을 책망하기 위해서 오신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 책망의 궁극적인 목적은 결국 모두가 예수님을 믿게 하는 과정으로서의 책망이죠. 그러나 보다 더 중요한 것은 구원받은 사람들이 아니라, 세상에 대해서 책망하기 위해서 성령이 오셨다는 의미입니다.
사실 “책망한다”는 말은 깨닫게 한다는 의미보다는 더 본질적인 의미가 있는데, 증명하여 사실을 드러내고 그 사실에 근거하여 책망한다는 것입니다. 이 책망하다라는 말의 원어상의 의미는 깨닫게 하다라는 의미도 있지만, 그것도 사실은 이 본질적 의미 안에 포함되는 것입니다. 증명하여 사실을 드러내어, 사실을 깨닫게 하고, 그 사실에 근거하여 책망한다는 것이 헬라어 원어상의 본질적 의미입니다. 결국 오늘 본문의 8절 말씀은 성령시대에 성령의 객관적 사역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해서 책망하신다는 것이 무슨 의미냐? 오늘 본문 9절 이하의 말씀을 통해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죄에 대해 책망함
그럼 먼저 성령이 하시는 첫 번째 일에 대해 보겠습니다.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요 16:8~9)
먼저 8절에서 말하는 “세상”의 일차적 의미는 유대인들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을 거부하고 부정했던 유대인들 말입니다. 실제로 오늘 요한복음에서 말씀하고 있는 그 말씀의 대상이 유대인들이기 때문에, 8절의 세상을 책망한다는 말은 유대인을 포함한 예수님을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결국 9절의 죄에 대하여 라는 말은 무슨 뜻이겠습니까? 바로 예수님을 믿지 않고, 도리어 미워해서 십자가에 못을 박는 그 사실이 죄라는 것입니다. 즉, 9절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그대로 예수를 믿지 않는 그 자체가 죄라는 사실을 입증하고 책망하시기 위해서 성령이 오신다는 것을 말씀하고 계신 겁니다.
죄가 무엇입니까? 성령께서 말씀하시는 본질적인 죄의 개념은 바로 예수를 믿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에 대하여 예수를 믿지 않는 것이 곧 죄라는 사실을 드러내고, 믿지 않는 자들을 책망하기 위해서 성령이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령께서는 철저하게 예수에 대해서 말씀하시기 위해서 오시는 겁니다. 분명히 예수님께서는 성령이 예수님의 것을 가지고 말씀하시리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요 16:15) 예수님을 드러내고 예수님을 나타내는 것이 성령의 사역이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만약에 이것이 주관적이고 개체적인 성령의 사역을 말하는 것이라면 9절 말씀이 <죄에 대하여라 함은 나를 믿으면서도 불의를 행함이요>라고 기록되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죄에 대하여 책망하는 것이 예수를 믿지 않는 것이라 말하고 있습니다. 성령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 안에 성령으로 말미암아 밝히 드러나게 되는 죄의 성격은 “예수 믿지 않는 것”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입증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참 대단한 말씀입니다. 오늘 우리가 죄가 무엇이냐 하는 것이 예수가 오시기 전과 예수가 오시고 난 이후가 이렇게 달라지는 것입니다. 예수가 오시기 전에 죄라는 개념은 불의를 행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오시고 난 이후에 이제는 무엇이 죄가 되냐면, 불의보다는 예수를 믿지 않는 것이 더 큰 죄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은 이미 죄로 정죄를 받고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 왜 세상이 심판을 받아야 합니까? 예수님께서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오셨는데도 불구하고 왜 세상이 심판을 받아야 합니까? 그 이유는 예수님의 십자가로 인류의 모든 죄가 사해졌다 할지라도 이제는 예수를 믿지 않는 그 자체가 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은 이미 죄인이다”라는 사실들을 입증하고 드러내기 위해서 성령께서 오셨고,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속에 예수 믿지 않는 것에 대한 깨달음을 주시는 것입니다.
이 사실은 이미 사도행전 2장 이하로부터 입증되었습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다시피 베드로 사도가 성령을 받고 설교를 한 이후에 그들은 마음이 찔리며 “우리가 어찌할꼬?”라고 했습니다. (행 2:37) 그때 그들은 무엇을 깨달은 것입니까? 불의를 행한 것이나, 도덕적으로 죄를 범했다는 걸 깨달은 것입니까? 아닙니다. 그때 그들이 깨달은 죄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보내신 그 예수에 대해서 부정적인 태도를 가지고, 예수님을 믿기는커녕 도리어 그분을 십자가에 못 박았던 그 사실에 대해서 “어찌할꼬”한 것입니다. 그들이 그 죄에 대한 깨달음을 갖게 된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성령의 사역이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이 시대 이 세상에 대해서 어떻게 복음을 전해야 합니까? 그 사람이 거짓말하고, 짜증내고, 그런 비도덕적인 잘못들을 들춰내어 복음을 전하지 않아도 됩니다. 예수 믿지 않는 그 사실이 바로 죄라는 것을 밝히 선포하라는 것입니다. 베드로와 스데반이 그랬던 것처럼 말입니다. 베드로와 스데반의 설교를 보십시오. 그들의 설교는 한결 같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설교였습니다. 예수를 믿지 않는 것이 죄라는 사실입니다.
“너희들이 십자가에 못 박았던 그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었고 너희를 구원하실 구세주였다” 하는 설교였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지 않는 것이 가장 큰 죄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바울이 증거 했던 모든 복음의 내용들을 살펴보십시오. 사도행전에서 바울은 가는 곳마다 예수에 대해서 증거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복음을 전할 때 “예수를 믿을 것이냐? 믿지 않을 것이냐?”하는 이 사실보다는 우리가 가진 도덕적인 관념을 가지고 당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입증하려고 애를 쓰고, 그렇게 해서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예수 믿어라”하는 식으로 복음을 전한다 이 말입니다. 그러나 성령은 오히려 예수를 안 믿는 그 자체가 죄라는 사실을 드러내서 세상을 책망할 것이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복음을 전할 때 담대히 말해야 합니다. “예수 믿으십시오, 당신이 예수를 믿지 않는 것은 죄입니다. 당신은 이미 죄인이기 때문에 예수를 믿어야 하지만, 또한 예수를 믿지 않는 그것이 죄이기 때문에 당신은 예수를 믿어야 합니다.” 우리는 그렇게 선포해야 합니다. 그렇게 복음을 전할 때, 세상을 책망하러 오신 성령님께서 그 복음의 내용과 함께하실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너무나 용기가 없습니다. 예수에 대해 담대히 선포를 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성령께서는 예수를 믿지 않는 죄에 대해서 세상을 책망하십니다. 그리고 실제로 말씀들을 보면, 오순절 이후에 베드로와 바울을 비롯한 사도들의 메시지의 핵심은 예수였습니다. 예수를 믿지 않는 것이 곧 죄라는 것입니다. 아멘.
오늘 이 사실이 저와 여러분 안에 밝아지길 바랍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담대하게 말하십시오. “예수 믿지 않으면 지옥 간다는 말은 당신이 스스로의 죄를 해결할 수 없기 때문일 뿐만 아니라, 당신이 믿지 않는 그 예수가 바로 의이기 때문입니다.”
의에 대해 책망함.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요 16:10)
10절의 말씀에서 성령은 이제 예수님이 곧 의라는 사실을 드러낼 것이라 합니다. 의가 무엇입니까? 바로 예수님 자체가 곧 의입니다. 그리고 그 의를 의지하고 믿는 것이 곧 우리의 의입니다. 성령님께서는 예수님이 의라는 이 사실을 드러내어 세상을 책망할 것이라 말합니다. 왜 예수를 믿지 않는 것이 죄입니까? 그것은 예수가 곧 의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거룩해지는 것은 우리의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삶을 인해서 거룩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은 그 의. 그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의롭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입증하고, 드러내어, 책망하기 위해서 성령님은 오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10절 말씀에는 아주 재미있는 표현이 있습니다. 성령은 어떻게 예수님의 의를 입증하여 세상을 책망할 것인가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이런 방식을 통해 내가 의였고 그렇기 때문에 너희들이 나를 믿지 않는 것이 죄라는 사실을 입증할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그것이 뭐냐면, 예수님께서 하나님께로 가신다는 것입니다. 즉 승천하신다는 것이죠.
어떻습니까? 예수님께서 친히 주석해주신 내용들을 살펴보면 볼수록 오늘 본문 말씀에 성령의 사역이 객관적인 사역이라는 것이 더 분명해지지 않습니까? 만약 이 말씀이 주관적 사역을 말한 것이라면, 10절은 <의에 대하여라 함은 너희들의 거룩함이요, 사랑이요>라는 식으로 기록되었어야 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는 것이죠. 성경이 말하는 의에 대한 내용은 예수님께서 하나님께로 가니, 우리가 다시는 주님을 보지 못할 것이라 합니다. 성령은 이것을 가지고 예수님이 하나님의 의라는 사실을 입증하실 것이고 책망하실 것이라고 합니다. 그것이 무슨 말입니까? 부활을 통한 승천을 얘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의가 어떻게 입증되었냐면,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혀진 그 사실. 예수님은 부활해서 승천해 올라갔기 때문에, 우리 인간이 다시는 이 세상에서 예수님을 보지 못한다는 그 사실. 바로 그것이 예수님이 하나님의 의였다는 사실을 입증하고 증명한다고 예수님께선 지금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왜입니까? 부활과 승천은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인정하지 않고는 결코 일어날 수 없는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은 바로 예수그리스도의 의로움을 입증하는 사건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부활의 사건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었고 참된 의였다는 것을 입증한 사건이었다는 것입니다. (롬 1:4)
예수님의 부활로 예수님의 의로움이 입증되었고, 예수님이 승천해 올라가심으로 말미암아서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온전히 받아들이셔서 이제는 예수의 의가 아니고서는 하늘나라에 올 자가 없다는 사실을 예표적으로 보여주셨다는 것입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누가 하늘나라에 갈수 있습니까? 의로운 자만이 하늘나라에 갈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승천을 통해서 하늘나라에 가셔서 하나님 우편에 앉으셨습니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예수님이 의로운 분이라는 것을 입증하신 중요한 사건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그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이러한 내용들을 성령님이 오셔서 밝히 드러내신다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여러분, 실제로 이 사실도 사도행전에서 그대로 입증되었는데, 중요한 것은 베드로나 바울이나, 스데반과 같은 초대교회 설교자들의 설교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었습니다.
『미리 보는 고로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을 말하되 저가 음부에 버림이 되지 않고 육신이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더니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 (행 2:31~33)
사도행전 2장에서의 베드로 설교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너희가 죽인 예수를 하나님은 살리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예수를 살리셔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히신 그 증거가 성령이 오셨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시고 하나님께로 가셔야 성령이 올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요 16:7)
그러므로 성령이 오셨다는 것은 곧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셨다는 그 사실을 입증해 보이신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래서 이 성령의 객관적인 사역으로 말미암아서 이제 온 세상은 예수님이 부활하셨으며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히신바 되었다는 그 사실을 깨닫게 될 거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저와 여러분 안에서 살아계신 성령의 능력과 역사는 갈수록 더 이 세상을 책망하는 책망의 근거가 될 것이고, 책망의 내용이 될 것이며, 책망의 핵심이 될 것입니다. 할렐루야.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신 후 보내주신 그 보혜사 성령이 나를 구원하고, 변화시키고, 의롭게 하고, 이렇게 위대하고, 능력 있는 사람으로 만들었습니다. 보십시오. 그러므로 예수는 부활하셔서 승천하셨습니다. 당신들이 불의하다고 생각해서 죽였던 예수는 불의한 자가 아니고 의로운 자였으며, 그는 하나님이 부활하게 하심으로 의롭다고 입증되었고, 또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셔서 높은 자로 인정되셨습니다. 그 결과로 그 증거로 성령의 보내주셨습니다.”
이 본문의 말씀이 이해가 되십니까? 그래서 세상은 그리스도인 안에 역사하는 성령을 보고, 더 이상 예수에 대해서 부정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저들은 성령에 의해서 결국 책망을 받게 될 것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말씀입니까? 오늘 이 성령시대에 성령이 세상을 책망하는 핵심 방법 속에 저와 여러분이 있습니다. 우리의 삶과 우리의 삶에서 나타나는 그 열매들이 세상을 향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살아계심과 부활하심을 입증하고 증명해서 세상을 책망한다는 사실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말씀입니까?
그러므로 여러분, 오늘 우리는 성령의 역사를 드러냄으로 말미암아 간접적으로 세상을 책망하며 살고 있는 것입니다. 말이 아니라 우리의 삶으로 책망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의 죄로부터의 해방과 그리스도인들의 의의 열매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입증하는 결정적인 증거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말을 뒤집어서 생각하면 오늘 우리가 성령의 역사를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 죄를 이기고 참된 의를 행하는 그 삶을 살아내지 못하게 되면, 예수에 대한 할 말이 없어지고 예수님 스스로도 세상을 책망할 수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맛을 잃은 소금처럼 사는 것은 오히려 우리의 삶이 세상을 책망하러 오신 성령님을 조롱거리로 만들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결코 그런 일이 생기지 않을 것은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서 친히 그 일들을 진행해 가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령이 이 세상을 책망하는 일에 오늘 저와 여러분이 도구로 쓰이고 있다는 일에 감동하십시오. 감격하십시오. 할렐루야.
그리스도인의 의로운 삶.
여러분, 오늘 우리가 어떻게 의롭게 됩니까? 저의 앞서 예수를 안 믿는 것 자체가 죄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즉, 예수를 믿지 않음으로 죄인이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와 같은 맥락에서, 우리가 어떻게 의롭다 함을 얻습니까?
『일을 아니할찌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롬 4:5)
보십시오, 이젠 죄와 의의 개념이 달라졌습니다. 바로 그것을 성령께서 입증하실 거라는 것입니다. 성령이 오셔서 그것을 가지고 이 세상을 책망하시는 것입니다.
죄는 예수를 믿지 않는 게 죄입니다. 의는 예수를 믿는 게 의입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와 의에 대한 정의가 달라졌습니다. 그래서 오늘 성령시대에서는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무엇이 죄고, 무엇이 의인지 선명하게 드러내실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율법은 설 자리가 없는 것입니다. 율법은 죄의 항목들, 의의 항목들을 가지고 오늘 우리들에게 말을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령이 오시면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예수를 믿지 않는 것이 죄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을 받고 난 다음에도 죄라는 건 곧 예수를 믿지 않는 것입니다. 나의 삶의 근거를 예수로 삼지 않는 그 자체가 죄입니다. 그래서 믿음이 없는 것이 죄라는 겁니다. 이러한 죄와 의의 개념이 여러분 안에 선명히 밝아지시길 바랍니다.
이 개념은 예수를 믿기 전이나 믿은 후나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죄는 예수를 부인하는 것이며, 예수를 신뢰하고 믿은 것이 의입니다. 그럼 우리가 오늘 어떻게 의로운 삶을 살아갑니까? 예수를 믿고 신뢰함으로 의로운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착하게 살자, 의롭게 살자”하는 것들을 결심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윤리나, 도덕이나, 율법 아래 있는 사람들이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오늘도 내가 살지 않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살게끔 하기를 결단하고 각오하는 것입니다. (갈 2:20)
죄와 의의 개념이 달라졌습니다. 아니, 본래의 개념으로 돌아왔습니다. 본래 우리는 무엇으로 죄와 의를 깨달을 존재였습니까? 하나님의 생명입니다. 즉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는 하나님의 생명으로 깨닫도록 창조된 존재였습니다. 선악과를 따먹은 후, 인간 스스로의 행동과 어떠한 태도를 통해서 옳고 그름을 따지는 존재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의요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참된 거룩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그 안에서 살아갈 존재로 우리가 지음을 받았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결국 선악과를 따먹고 선악을 우리의 행동의 기준으로 삼는 자들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이제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본래의 자리로 회복되었습니다. 할렐루야. 이제 우리는 의와 죄에 대한 관념이 본래 하나님이 계획하셨던 본래의 의미로 돌아오게 된 것입니다. 죄가 뭐고 의가 뭡니까? 예수가 나타나는 것이 의요, 예수가 나타나지 않는 것이 죄입니다. 예수는 우리의 거룩이요, 의입니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롬 3:21~22)
율법 외에 나타난 한 의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오늘 우리의 의는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예수가 우리의 의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오늘 이것을 깨닫길 바랍니다. 이제 이것을 깨닫게 되면 우리는 행동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의 관계를 재설정하게 될 것입니다.
행동을 바꾸려고 하는 것은 율법이요, 주님과의 관계를 바꾸려고 하는 것은 생명입니다. 이것이 바로 참된 의요, 이것이 바로 참된 복음이라는 말입니다. 오늘 우리가 새 언약 시대를 살아가는 방식은 의문의 묵은 것으로 하지 아니하고, 영의 새로운 것으로 하는 것입니다. (롬 7:6) 그렇다면 그 영의 새로운 것이 하시는 일이 무엇입니까? 죄와 의가 무엇인지를 우리 안에 드러낼 것입니다. 죄는 예수를 믿지 않는 것이요, 의는 예수를 믿는 것이라는 이 사실을 드러낸다는 말입니다. 이 사실이 여러분 안에 밝아지셔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날마다 죄를 짓지 않겠다고 각오하고 결단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우리는 아무리 결단하고 각오해도 언제나 육신의 연약함으로 말미암아 실패의 자리로 들어갔습니다. 그 결과를 우리가 또 다시 반복해야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그런 방식으로 살지 않아도 되도록, 율법으로부터 자유케 되었습니다.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가 곧 의라는 사실을 우리 안에 밝히 깨닫게 하심으로 말미암아서 우리는 날마다 내가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게 할 것입니다. 그 분을 믿는 믿음으로 살 것입니다. (갈 2:20)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의입니다. 이렇게 살게 되면 그리스도의 의가 나타나는 것이요, 이렇게 살게 되면 우리 안에서 성령의 열매가 맺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성령이 세상을 책망하시는 구체적인 방식은, 우리가 예수를 믿고 신뢰함으로 말미암아 나타나는 그 모습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죄와 싸워서 이기려고 몸부림치는 것이 세상을 책망하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세상에는 예수를 믿지 않고도 선한 행실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도 절제하고, 훈련하면서, 자신을 선하게 가꾸어나갑니다. 우리는 그들과는 다릅니다. 오늘 우리는 그런 과정을 통해서 선해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믿는 믿음 안에서 행할 때에 자연스럽게 선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바로 그 행동이 세상과 다른 종교들과 율법과 도덕이나 윤리에 대해서 책망하는 것입니다.
심판에 대해 책망함.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니라』 (요 16:11)
여러분, 이 세상 임금은 누구입니까? 앞서 살펴본 8절에서 세상에게 책망하신다고 했는데, 이때 세상은 세상 임금의 주관 아래에 있는 세상입니다. 그럼 이 세상의 임금은 누구겠습니까? 공중의 권세 잡은 사탄입니다. (엡 2:2)
이 사탄이 이미 심판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사실을 성령께서 오셔서 입증하실 것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이 사실에 근거하여 이 세상 사탄을 심판하겠다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 세상은 절대적인 사탄의 주관 아래에 있지만, 그러나 점차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이 성령의 사역으로 말미암아서 그 사탄의 권세 아래에 있는 사람들이 그리스도 안에 들어올 것임을 얘기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 세상의 임금은 이미 심판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이미 심판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실 때 이미 심판은 시작되었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 절정에 이르게 되었으며 완성된 사건입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창 3:15)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이 타락할 때, 이미 여자의 후손인 예수 그리스도를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여자의 후손이 왔을 때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밟을 것입니다. 짓이겨 버릴 것입니다. 그 뱀의 머리가 짓밟힌 사건이 바로 십자가의 사건이요, 부활의 사건입니다. 바로 이 일로 말미암아 이 세상의 임금이 심판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사탄은 더 이상 이 세상 아래에 있는 사람들을 주관할 수 없습니다. 아멘.
그렇기 때문에 오늘 공중의 권세 잡은 사탄이 아무리 우리를 해하려 하고, 우리 가운데 역사하려해도, 우리가 그리스도의 심판을 가지고 선포해버리면 우리는 사탄의 악의 세력으로부터 능히 승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그리스도인들의 승리는 이 세상의 임금이 이미 심판을 받았다는 사실을 입증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세상 임금인 사탄이 십자가에서 짓이겨졌고, 심판받았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바랍니다. 우리는 바로 그 사명가운데 있습니다. 예전에 우리는 사탄의 그 권세 가운데 사로잡힌 자들이었지만, 성령의 역사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으로 말미암아서 오늘 저와 여러분들은 그 죄와 사망의 권세로부터 건짐 받은 자들 아닙니까?
이전에 우리가 죄 가운데 있을 때, 우리는 사탄을 좇았지만 이제는 우리가 그 죄의 종으로부터 벗어났습니다. 그래서 이제 우리는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고,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요 5:24, 롬 8:17) 이 일이 어떻게 가능할 수 있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사탄의 머리를 짓이겨버렸기 때문에 가능한 사건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께서 오늘 우리들에게 말씀하실 내용이란 말입니다. 이것을 가지고 세상을 책망하고, 이 세상 임금에 대한 그 심판을 선포하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정체성.
그러므로 여러분 성령시대를 살아가는 성도들은 얼마나 위대합니까? 성령시대를 살아가는 성도들은 세상을 향해서 죄가 무엇인지를 나타낼 것이고, 의가 무엇인가를 나타낼 것이며, 그리고 이 세상의 임금이 이미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서 심판받았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사람입니다.
오늘 성령은 우리 안에서 그 일을 하실 것입니다. 오늘 성령은 우리 안에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를 몰아낼 것이고, 우리를 그리스도의 의로 점점 더 세워갈 것입니다. 오늘 성령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어 놓으신 그 심판과 정죄로 말미암아서 악한 영과 싸우는 우리를 승리의 길로 이끌어 가게 될 것이라 이 말입니다. 우리는 이미 세상을 이겼습니다. 할렐루야. 저와 여러분은 이미 세상을 이긴 자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 시대에 일어날 일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내주신 그 보혜사가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심판에 대해서 이 세상을 책망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내용을 가만히 살펴보니, 깨닫게 되는 놀라운 사실이 있습니다.
결국 성령께서는 우리를 통해서 그 일을 이루어 나가신다는 것입니다. 그 성령의 사역의 증거와 열매가 우리입니다, 결국 우리가 이 세상을 향해서 성령이 심판하고 책망하는 그 도구요, 열매요, 빛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성령님께서는 우리 안에서 그리스도의 사역들에 대한 그 값어치를 분명히 드러낼 것이고, 그로 말미암아 세상을 책망할 대언자로서의 사명을 가지고 성령이 오실 것이기 때문에, 성령은 우리를 돕는 보혜사로서의 일들도 충실하게 감당하실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깨어서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그리스도께 주목하고,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서, 우리가 참된 의를 실행해 나간다면 말입니다.
이 말씀으로 살펴보면 우리는 이미 죄에 대해 해방된 자며, 의가 성취된 자요, 세상의 모든 죄의 권세로부터 이미 벗어나고, 승리한 자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입니다. 이 속에서 소망을 얻으시길 바랍니다. 이 속에서 진리를 발견하십시오. 이 속에서 생명과 능력과 담대함과 분명한 그리스도인의 가치를, 위대함을, 그 영광스러움을 발견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정진국 목사
인터콥 최바울 대표의 성서해석은 올바른가?
-마24:14는 비밀의 열쇠인가-
2011년 8월 18일 <미주 뉴스앤조이> 윤영석 기자는 지난 8월 10일부터 나흘 동안 뉴욕신광교회(한재홍 목사)에서 열린 2011 선교 캠프 중에 인터콥 최바울 대표가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전했다.
"성경은 분명하게 말한다. 모든 민족에게 복음이 증거되면 종말이 온다. 놀라운 사실이다. 이 엄청난 역사가 모든 민족에게 복음이 전파되면 끝난다. 예수가 언제 오냐고 물으면 이단 취급한다. 한심하다. 그런 것 물으면 '아버지만 아시지 아들도 모른다'고 답한다." (윤영석, '백 투 예루살렘' 외치는 최바울 대표, 2011.08.18)
위의 최바울 대표의 언급은 마태복음 24장 14절을 근거로 한 것이었다. 인터콥의 최바울 대표는, 이 성서 구절에 따라서 모든 민족에게 복음을 증거해야 한다는 것이고 그 목적은 바로 종말에 있는 듯하다. 여기서 말하는 종말은 예수의 재림을 말하는 것이고 또한 역사의 끝남을 말하는 것으로 그는 이해하고 있다. 과연 이러한 성서 이해가 온당한가? 다시 말해, 온 민족에게 복음을 전하면 종말이 오고 그 종말은 예수의 재림이며 역사의 마침이라는 도식이 올바른 성서 이해인가?
최바울 대표의 <왕의 나라>(펴내기, 2011, 7~8쪽)에서도 위의 마태복음 24장 14절이 대표적으로 등장하며 이 성서 구절은 인터콥이라는 선교 단체를 지탱하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보인다. 기자는 지금까지 인터콥의 최바울 대표가 김기동 목사의 마귀론을 상당수 수용했다거나 신사도 운동에 영향을 깊게 받은 사람으로 취급한 관점과는 다르게 보고자 한다. 바로 성서 해석의 문제를 제기하고 싶은 것이다. 인터콥 최바울 대표의 성서 해석은 올바른 것인가를 묻고 싶은 것이다.
먼저 마태복음 24장 14절은 인터콥 최바울 대표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구절이다. 다음을 보자.
"모든 민족에 복음이 증거되면 역사의 종말이 온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매우 충격적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누가 이것을 상상했겠습니까? 누가 스스로 이것을 깨달아 알 수 있었겠습니까? 어떤 탁월한 학자가 연구를 통해 이러한 결론을 도출해 낼 수 있었겠습니까? 이것은 역사상 그 누구도 언급한 적이 없고 간접적으로나마 암시한 적도 없는 매우 의외의 내용입니다. 이것은 그 어떤 문학가의 상상도 초월한 것이며 그 어떤 천재의 지능도 넘어선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결코 알 수 없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을 믿는 그리스도인들만 알 수 있는 하늘의 비밀입니다." (최바울, <왕의 나라>, 펴내기, 2011, 7~8쪽)
기자는 위의 글을 다시금 보면서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다. 마태복음 24장 14절이 정말 어떤 특정한 그리스도인들만이 알 수 있는 하늘의 비밀일까? 기자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인터콥 최바울 대표가 가장 중시하는 마태복음 24장 14절을 그대로 보도록 하자.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개역개정)."
먼저, 위 성서 구절 그대로 이해한다고 해도 인터콥의 최바울 대표식으로 이해하기는 곤란할 듯하다. 마태복음 24장 14절은 우리가 적극적으로 선교를 하면 예수가 재림하고 역사가 끝을 맺는다고 말한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증언되다', '전파되다'라는 말은 자연스럽게 그렇게 된다는 말이지 적극적으로 그렇게 하라는 명령의 언어가 아니다. 한국말에서 긍정태인 '하다'와 '수동태'인 '되다'는 전혀 다른 말이다. 그렇다면 개역 개정만 그럴 수 있는 것 아닐까? 다른 번역본을 확인해 보자.
"이 하늘나라의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어서 모든 민족에게 증언될 것이다. 그때에야 끝이 올 것이다(새번역)."
"이 하늘나라의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어 모든 백성에게 밝히 알려질 것이다. 그리고 나서야 끝이 올 것이다(공동번역)."
위의 새번역에서도 '전파되어서', '증언될 것'이라는 수동태가 쓰이고 있으며, 공동번역도 마찬가지로 '전파되어', '알려질 것'이라고 하고 있다. 이렇게 보자면, 마태복음 24장 14절에 대한 성서 번역본은 다르나 대체적으로 같은 의미를 전했다고 할 수 있다.
요컨대 마태복음 24장 14절은 적극적으로 선교를 해서 끝이 오게 하라는 말이 아니다. 자연스럽게 그렇게 된다는 말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주신 마태복음 28장 19~20절의 선교와 전도의 대위임 구절을 그리스도인의 당연한 임무로서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러나 앞의 마태복음 24장 14절은 그와는 다른 구절이라는 것을 쉽게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게다가 여기서 '세상의 끝'이라는 말도 문제가 된다. '세상의 끝'이 예수의 재림을 말하는 것인가? 그 '세상의 끝'과 요한계시록에서 말한 '새 하늘과 새 땅'의 관계는 어떠한가? 최바울 대표는 이에 대해서 적확하게 말하고 있지 않다.
둘째, 성서 해석의 기본은 문맥적 이해이다. 특정한 한 성서 구절만 가지고 다른 구절들을 의미 없게 만드는 것은 성서를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우리가 마태복음 24장 14절의 의미를 정확히 추론하고 이해하려면 앞뒤 구절의 상황을 정확히 확인해야 한다. 그렇다면 마태복음 24장 14절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마태복음 24장 14절 앞의 상황을 보도록 하자.
가. 제자의 물음 : 주님이 오실 때와 세상이 끝날 때의 징조. (3절)
나. 예수의 대답. (4~14절)
나-1 : '내가 그리스도다'에 대해 속지 마라. (4~5절)
나-2 : 난리, 전쟁, 기근 지진이 일어나는데 고통의 시작이다. (6~8절)
나-3 : 세상 사람들에게 미움받는다, 배반하고 미워한다, 거짓 예언자가 속인다,
무법천지가 되어 사랑이 없다. (9~12절)
나-4 : 끝까지 참는 자는 구원을 얻는다. (13절)
나-5 : 하늘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모든 백성이 알게 된다. 끝이 온다. (14절)
위 마태복음 24장 3~14절을 보면 14절만 따로 보던 것과는 다른 인상을 갖게 된다. 예수께서 성도들이 시험에 들게 되는 상황을 연속적으로 보여 주신 후, 끝까지 참으라고 하는 것이다. 위의 성서 문맥에서 성도에게 더 각인되기 쉬운 성서 구절은 바로 13절 '끝까지 참아야 구원을 얻는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14절은 그 13절까지의 엄청난 고통의 상황이 지난 후에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어 끝이 옴을 말하는 것이다.
또한, 마태복음은 공관복음 중의 하나인데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도 이와 같거나 평행되는 구절들이 나온다. 이 두 복음 모두 마찬가지로 '끝까지 참는 것'이 주제로 나온다. 마가복음 13장 3절~13절과 누가복음 21장 10절~19절이 평행 본문인데, 마가복음에서만 마태복음 24장 14절과 같은 표현이 나온다. 그것은 다음 구절인데, 당위적인 '~아/어야 할 것이다'로 처리되고 있다.
"또 복음이 먼저 만국에 전파되어야 할 것이니라(막 13:10)."
요컨대, 마태복음 24장 14절은 홀로 동떨어져서 예수의 강림과 세계의 역사를 마치기 위한 선교를 위해 존재하는 말씀이 아니다. 그리스도인들 고난의 연속에서 끝까지 참아 낼 것을 부탁하는 예수의 말씀인 것이다.
셋째, 칼뱅을 비롯한 학자들은 마태복음 24장 14절을 어떻게 보고 있을까? 인터콥의 최바울 대표와 같은 입장일까? 먼저 요한 칼뱅부터 보도록 하자.
"내가 오랜 기간 동안 혹독하고 고통스러운 시험들(tentatio)로 나의 교회를 연단하고 시험한 후에야 세상의 끝이 올 것이다." (요한 칼뱅, <칼빈주석 공관복음17>, 크리스챤 다이제스트, 2011, 1035쪽)
칼뱅은 위 성서 구절의 핵심을 '교회의 연단'에서 보고 있다. 문맥적 이해라고 보여진다. 최바울 대표의 성서 이해와는 전혀 다르다.
다음으로 그랜트 오스본의 주석을 살펴보자.
"예수께서는 재림 전에 천국 복음(구원의 소식)이 온 세상에 전파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어떤 이들은 예수님의 예언을 오해하였다.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기 전에 모든 소수 부족에 이르기까지 반드시 복음을 들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러나 이것은 제자들의 사명이었으며 우리의 사명이기도 하다." (그랜트 오스본, 전광규, 김진선 옮김, <LAB주석 시리즈 마태복음>, 성서유니온 선교회, 2009, 715~716쪽, 굵은 글씨는 인용자)
그랜트 오스본은 '온 세상'에 대한 표현에 대해 오해하는 자들에 대해 말하고 있다. 기자가 굵은 글씨로 표시한 것처럼 모든 소수 민족이 복음을 들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라고 설명한다. 그럼에도 선교의 사명은 제자들과 우리의 사명이라는 말도 잊지 않고 있다.
마지막으로 '목회와 신학 편집부'에서 쓴 책을 보도록 하자.
"14절은 세상 끝이 왜 지연되어야 하는지를 밝혀 준다. 세상 끝은 '온 세상에' 복음이 전파된 다음에 올 것이다. 복음 전파의 영역이 온 세상, 모든 민족으로 확장될 것이라는 예수의 예견은 10장 5~6절과 15장 24절에서 복음 전파 대상이 이스라엘에만 제한되어야 한다는 예수의 언급과 좋은 대조를 이룬다. 이는 예수 부활 이후 복음 전파의 새로운 시대가 시작된 것임을 시사해 준다. (참조, 28:18~19). 세상 끝의 도래와 복음 전파 사이의 상관관계가 이처럼 분명하지만, 복음 전파의 정도가 세상 끝의 시점을 계산하는 지침으로 사용될 수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온 세상'과 '모든 민족'의 의미와 범위가 그렇게 정확하게 규정될 수 없기 때문이다. 사실 본문에서 '온 세상'과 '모든 민족'이라는 표현은 그 완벽한 전체성보다는 이스라엘의 한계를 뛰어넘는 제한 철폐 및 포괄성의 의미가 더 강한 것으로 보인다." (목회와 신학 편집부 엮음, <마태복음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 두란노아카데미, 2003, 366쪽,굵은 글씨는 인용자)
위 주석도 '온 세상'과 '모든 민족'의 범위가 정확하게 되지 않은 점을 지적하고 있다. 따라서 복음 전파의 정도가 세상 끝의 시점을 계산하는 지침으로 사용될 수 없다고 지적하고 있다.
위의 '목회와 신학 편집부'의 설명은 인터콥 최바울 대표와는 대조적이다. 다음을 보자.
"그렇습니다! 이것(마태복음 24장 14절-인용자)은 엄청난 천국의 비밀입니다. 하나님의 계시가 아니고는 인간이 감히 상상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인류 종말의 조건이 모든 민족에 복음이 증거될 때라는 것을 누가 감이라도 잡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세계 복음화 상황과 통계에 대해 예의 주시하는 것입니다. 최근 수차례 관련 통계는 세계 복음화 완성이 임박했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최근 들어서 매우 빠른 속도로 수행되는 세계 선교는 이 속도로 계속된다면 2030년경에 그 완성을 볼 것이라고 전망됩니다." (최바울, <왕의나라>, 펴내기, 2011, 8쪽)
최바울 대표는 세계 선교화가 2030년경에 그 완성을 볼 것을 전망하면서 세상의 끝, 예수의 재림을 그리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명백히 잘못된 것이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전도와 선교의 사명은 누구에게나 있다. 그러나 세상을 끝내기 위해서, 예수께서 재림하게 하시기 위해서 전도와 선교하는 것은 아니다. 최바울 대표의 책자를 읽으면 세상을 끝내기 위해서, 마지막 때이므로 선교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이는 성서를 어떤 목적으로 해석하는 것일 뿐이다. 매우 잘못된 것이고 고쳐야 할 부분이다.
요즘 한국교회에는 이단과 사교가 넘쳐 나고 있다. 그들의 대체적인 특징이 어떤 특정한 성서 구절을 사특한 목적을 지닌 채, 자의적으로 해석한다는 데에 있음은 주지하는 바다. 신천지의 마태복음 11장 27절이나 안상홍 증인회의 요한계시록 21장 9~10절이 그와 같은 예이다. 문맥을 따져서 본다면 일고의 가치도 없다.
기자는 묻고 싶다. 인터콥과 최바울 대표가 성서를 해석할 때, 자의적으로 어떤 특수한 목적으로 해석하고 있지 않는가? 그것은 기독교와는 다른 '다른 복음'인가?
기자는 인터콥의 최바울 대표가 왜 이 성서 구절만 집착하여 선교 활동에 임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 최바울 대표는 계시를 성서 해석의 계시를 받았는가? 한국 개신교는 미련하여 모두 최바울 대표의 성서 해석에 따라 모두 선교에만 집중해야 한다는 말인가?
우직하게 지켜보는 독자의 한 사람으로서, 한국교회를 걱정하는 사람의 한 사람으로서 최바울 대표의 진정성 있는 답변을 듣고 싶다.
쉽게 내는 혈기가 인생을 망칠 수도 있다
쉽게 내는 혈기가 인생을 망칠 수도 있다
사람마다 다 타고난 성격이나 성품이 다르다. 차분한 사람도 있고 조급한 사람도있고 느리디 느린 사람도 있으며 불같은 성격의 소유자도 있다. 생각도 안 해보고 말하거나 행동하기도 하며 심사숙고하여 너무나 신중을 기하는 타잎도 있다.
차분하고 심사숙고형이 꼭 좋다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혈기를 말하는데 있어서는 불같은 성격보다는 침착하고 이성적인 사람이 좋다라 할 것이다.
흔히 사고치는 사람들이 우발적인 성격 때문에 즉 혈기 때문에 자기 불같은 성품을 조절, 절제하지 못하여 본의 아니게 죄를 짓고 심하면 형사사건의 주인공이 되기도 한다.
1. 기분이 나빠서 눈에 보이는 식칼로 찔러 죽였습니다.
2. 나를 욕하고 업신여기기에 참지 못하고 한 대 때렸는데 뇌진탕으로 죽었습니다..
3. 눈으로 째려보기에 혼 좀 내어 준다는 것이 이리 되었습니다.
4. 너무 약을 올리기에 확 밀어 버렸는데 그냥 머리를 쳐박고 뇌진탕으로 죽었습니다.
5. 홧김에 또 의분에 가끔은 세상에 대의를 알리기 위해 분신했습니다.(자살)
노동쟁의 중에 분신하거나 투신하거나 뭔가 의로운 일을 한다는 것이 자신을 해하는 사건들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자학이나 자해나 자살이 얼마나 큰 창조주에 대한 죄악인지 저들은 그 단순할 정도의 조급한 논리로 신문지상에 오르내립니다.
가끔은 열사로 불리기도 하고 칭송을 높이 받기도 하지만 어찌 보면 하나님께 대한 큰 죄를 짓는 것이요 혈기의 발산인 셈입니다.
그리고 혈기는 진정 성령의 열매와는 정반대의 죄성의 발로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지성과 이성의 산물이 아니라 감정적 무절제요 인내심의 결여이지요.
회개꺼리를 곰곰 찾다보면 이 혈기에 해당한 일들이 의외로 많음을 발견하고 자칫 조금만 더 지나쳤다면 크게 사고를 칠뻔 했던 일도 우리 인생에 상당히 많았음을 알고는 짐짓 놀라기도 합니다. 특히 부부 싸움에서 흔히 나타나는 현상으로 금실이 좋은 쌍이라 할지라도 사소한 의견충돌이나 자존심 또는 성격차이가 손찌검 한 것이 나아가 이혼으로까지 진전하는 불행을 초래하기도 하지요.
무조건 혈기는 절제해야 하는 것입니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폭력은 금물입니다. 남에게나 자신에게나 행동으로나 말로나 글로나 남에게 심한 상처를 주면 살인하지 말라는 제6계명을 범한 것이 되는 셈이지요.
세계를 복음화할 큰 인물이라면 절대 혈기는 금물이고 리더라면 당연히 가장 좋지 못한 성품으로 절대 고쳐야 하지요. 나는 원래 성격이 급해요. 불같다니까요! 앞뒤 돌아보지 않고 할 말은 다 해버립니다. 가끔은 화끈한 성격인양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말하는 사람을 더러 본다.
요즈음은 모두가 살기가 힘들고 스트레스가 쌓여 있어서 어딘가 조금만 건드려주면 아예 폭발해 버리기도 한다. 걸어 다니는 시한폭탄과도 같은 존재인 셈이다.
1. 어제 누군가 모임 자리에서 황당한 일을 당했다면서 이야기 하는데 바로 이런 유사한 케이스를 경험한 모양이다. 길을 가다가 배달아저씨의 오토바이가 자기를 살짝 치고 지나가기에 자신도 모르게 야 임마! 했단다. 그래도 모른척 하기에 속이 상해서 다시 소리쳤단다. 미안하다고 라도 해야 할 것 아니냐! 그런데 오토바이를 홱 세우더니 적반하장 이 새끼야, 나보다도 어린 넘이 뭐 임마라고? 배달한다고 무시하냐? 그런데 그의 눈에 살기가 돌더란다. 순간 자기도 혈기가 올라 사고칠 뻔 했단다. 만일 돈이나 있었으면! 또 혼자 몸이기라도 하다면! 그래서 내가 이렇게 말해 줬다. 돈이 있어도 홀몸이라도 그래 두 미친 녀석들이 주먹으로 치고 받고해서 무슨 유익이 있다고.. 힐문하였지만 어디 그럴 때 앞뒤 가리냐 한다. 사람은 어떤 경우라도 감정으로 움직여서는 안되고 이성으로 한번 머리로 걸러 생각해 보고 말하거나 행동으로 옮겨야 하는데...
2. 한번은 신문 지상에 난 이야기이다. 어느 고급 아파트에서 인부가 집수리를 하고 있는데 귀부인 티가 나는 유들유들해 보이는 아줌마가 너무 시시콜콜 짜증나게 이것 고쳐라 저것 바로 잡아라 쫄쫄 따라다니며 잔소리하는 바람에 그 일꾼이 안 그래도 세상 살기 힘들고 짜증 나는데 어리어리하게 잘 사는 집을 보니 공연히 심사도 뒤틀리고... 목 마르다고 물 한잔 달라하니 들은 채도 안했단다. 이래저래 야마가 훽 돌아버린 일꾼이 옆에 공사하던 벽돌을 집어 자기도 모르게 깔쯩대는 아줌마 머리를 확 까버렸다는 스토리. 그런데 힘없이 픽 쓰러지더니 꼼짝도 않더라나. 살인사건이 일어난 것이지... 죽은 여자는 교만의 소치로 천벌을 받아 비명횡사했고 이 일꾼은 혈기 때문에 살인자로 인생 종친 것이다.
* 우리 각자를 돌아보자! 살아온 동안 친구 사이나 또는 거래하다가 사기 당하여 울분이 터지는데 배째라 하는 나쁜 넘을 참다 못해 칼로 찔러 죽이기도 하고, 부부싸움하다가 발로 배를 걷어찬 것이 큰 사고를 일으키기도 하지 않은가! 기실 사랑하는데 말이다. 참아야지! 인내해야지! 견뎌야지!
욕하는 것도 혈기도 다소 습관적이기도 하기에 아예 존대말 쓰고 이해하고 용납하고 사랑함으로 미연에 이런 피해자나 가해자가 되지 않도록 연습에 연습을 거듭해야 하려나!
십계명[1]생명을 다하여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하라
생명을 다하여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하라
신명기 5:1-7
1 모세가 온 이스라엘을 불러 그들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아 오늘 내가 너희의 귀에 말하는 규례와 법도를 듣고 그것을 배우며 지켜 행하라
2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호렙 산에서 우리와 언약을 세우셨나니
3 이 언약은 여호와께서 우리 조상들과 세우신 것이 아니요 오늘 여기 살아 있는 우리 곧 우리와 세우신 것이라
4 여호와께서 산 위 불 가운데에서 너희와 대면하여 말씀하시매
5 그 때에 너희가 불을 두려워하여 산에 오르지 못하므로 내가 여호와와 너희 중간에 서서 여호와의 말씀을 너희에게 전하였노라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6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라
7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지니라
이 땅에서 내게 내 생명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습니다. 각 개인에게 있어서 천하의 모든 것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이 자기 생명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용기가 있는 것 같고 배짱이 있는 것 같아도 막상 생명을 잃는 처지에 이르면 두려워 떨며 아쉬워합니다. 만일 구원을 받지 못한 자들이 그들은 죽음을 지나 영원한 불못에 들어간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지금 누리는 생명은 우주보다 귀할 것입니다. 사실 우리 인간들에게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 가운데 주 안에서 누리는 그 끝없는 지복보다 더 무한한 가치를 가진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가장 큰 사랑은 다른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주심에 있습니다. 그 영생을 가지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예비하신 영원한 기업, 바로 천국을 누리는 것이 우리 인간에게 주어진 최고의 선물입니다. 하나님은 영생의 선물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셨습니다. 이에 성경은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요 17:3)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 영생을 주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아들의 생명을 희생하셨습니다. 그것이 십자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기 위해 아들의 생명을 주셨고, 아들은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기 위해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구원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이 주신 그리스도의 생명, 즉 영생의 생명을 가지고 세상 사람과는 다르게 살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영원한 생명을 주시며 이 땅에서 하나님의 백성답게 영광스럽게 살 수 있도록 하시기 위해 그 많은 사람 중에 아브라함을 택하여 그를 믿음으로 인도하셨습니다. 그후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언약으로 이어지면서 결국 모세를 통해 야곱의 자녀들로 이스라엘 나라를 만들어 그들을 이 땅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셨습니다. 이는 이 작은 이스라엘을 통해 온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이며 엄청난 사랑이었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이 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가도록 “법”을 주셨습니다. 그것이 율법이고, 율법을 함축한 것이 십계명입니다. 따라서 십계명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입은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순종입니다. 이때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분의 백성들에게 주신 십계명은 주의 자녀들을 굴레를 씌우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 땅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드러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즉 그들이 율법을 순종할 때 이 땅에서 그들의 품위가 드러나고, 나아가 주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특징이 나타나 영화롭게 되도록 하기 위한 것이 십계명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십계명을 주시기 전에 말씀하시길,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라” (신 5:6)고 하십니다. 곧, 이 십계명은 “너희가 나의 구원을 통하여 나 여호와 하나님과 백성의 관계, 나 하나님 여호와와 자녀의 관계를 맺게 되었으니 이제는 나의 백성답게, 나의 자녀답게 다음의 계명대로 살도록 하여라”는 말씀입니다. 즉, “너희는 이미 구원을 받았으니 십계명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가끔 교인들 중에 보면 십계명을 지켜서 구원 받으려는 사람이 있는데 이러한 사람은 완전히 어리석은 사람이요 하나님의 계획과는 거꾸로 행하는 사람입니다. 십계명은 구원을 위해 주신 것이 아니라 주의 십자가의 은혜로 구원을 받은 사람들에게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라고 주신 것입니다.
아무튼 십계명을 지킬 때마다 우리 주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십계명을 지킬 때마다 그 행위는 다름아닌 여호와 하나님을 의식하는 가운데 행하는 순종이기 때문에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임을 확신하게 됩니다. ‘주님,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어 대속의 십자가를 지게하신 하나님! 제가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대로 살기를 원하시는구나. 내가 오늘 하나님을 생각하며 그 분의 기쁨이 되고자 이렇게 주님의 말씀을 순종합니다.’ 이때 십계명을 지키는 자녀들은 자신의 의를 쌓기 위함이 아니라 자신을 구원하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며 그분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십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십계명의 1-4계명은 인간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으며
5-10계명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세상 공동체를 향해 어떻게 나타나야 하는지를 말한 것으로써 이웃 사랑이 그 중심 사상이 되는 것입니다. 이때 이웃 사랑은 그 자체로 서는 것이 아니라 주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 사랑을 입중하는 차원에서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즉,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어린이 찬양 중에 “예수님 때문에 형제를 사랑합니다”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우리가 이웃을 사랑해야 하는 이유는 다름 아닌 오직 예수님 때문입니다. 아내 사랑, 남편 사랑, 친구 사랑, 이웃 사랑… 이 모든 사랑은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는 “예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의 절정은 언제나 영혼 구원입니다. 즉, 이웃 사랑은 그들로 하여금 주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만드며 주 안에서 함께 가장 큰 기쁨과 평안과 만족을 누리도록 돕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이웃 사랑은 영생을 알리고 그들로 하여금 영생을 누리도록 하는 것이 가장 큰 사랑입니다.
먼저 오늘 십계명의 첫 번째 계명,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지니라”를 상고해 보겠습니다.
첫째, 이 계명은 지금 홍해를 지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는 과거 애굽에서 다른 세상 신들에게 마음을 빼앗겼던 그 마음 가짐을 청산하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족속은 430년간 애굽에서 생활했습니다. 총리였던 요셉의 요청으로 그곳으로 내려간 야곱의 가족은 70명이었지만, 나중에 출애굽할 때에는 남자 장정만 60만이었으니까 약 2백만이나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애굽에서 요셉이 살아있는 동안에는 풍족하게 살았습니다. 하지만 요셉이 죽고 난 후에 요셉을 알지 못하는 바로 왕이 등장하게 되면서 이스라엘 민족은 심한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 요셉을 알지 못하는 바로 왕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왕성하게 번성하는 것이 두려워 그들을 노예로 삼았고 심지어 이스라엘에서 나는 남자아이는 출생 때부터 죽이도록 명령하였습니다.
그러나 모세에 의해 이스라엘 백성은 해방을 얻습니다. 또한 홍해가 갈라지는 극적인 기적을 지나면서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를 지나 하나님이 약속하신 가나안 땅을 향하게 됩니다. 그러나 광야 생활이 힘들고 나아가 가나안 땅에 거하는 사람들에 대한 두려움이 생기면서 오히려 애굽의 삶을 동경하게 됩니다. 그런데 애굽의 삶이라는 것은 우상문화였습니다. 애굽은 그 당시 셀 수 없이 많은 우상을 섬겼습니다. 곧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을 그리워 한 것은 우상의 문화와 함께 우상에 마음이 빼앗겼던 것입니다. 이에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그러한 우상을 마음에 두고 여호와 하나님을 함께 섬기는 것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행위임을 알려 주신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거룩한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 위해서는 가장 첫 번째로 과거의 우상을 청산할 것을 촉구하였습니다. 이는 과거의 우상을 청산하는 것이야말로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첫걸음이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신약에서 요한일서를 보면 그 귀한 사랑의 서신을 마치면서 그 결론이 참 재미있습니다. 요한일서 5장 21절에, “자녀들아 너희 자신을 지켜 우상에게서 멀리하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왜 그러하겠습니까? 바로 우상에게서 멀리하는 것만이 하나님을 바르게 사랑하며 따를 수 있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우상을 제거해야만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장 먼저 원하시는 것은 과거의 우상 문화를 정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보다 더 사랑했던 모든 것들을 포기하는 것이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신앙입니다. 우리는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징계하시는 것을 종종 보게 되는데 그 원인은 이스라엘이 하나님께서 싫어하는 우상을 숭배하였기 때문입니다. 사사시대가 그러했고, 분열왕국시대의 북이스라엘이 우상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이에 하나님은 그들이 우상에서 돌아오도록 이방나라를 통해 고통을 주기도 하셨고 심지어 3년 6개월간 비를 내리지 않게도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한번 빠진 우상에서 돌아오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그들은 하나님께 틈만 나면 다시 우상을 섬겼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상이 무엇입니까? 우상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면서 추구하는 것이 우상입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그의 음성을 듣는 것보다 더 바쁘게 되는 요인이 우상입니다. 내 마음 속 깊은 곳에서 가장 추구하는 것이 우리 주 하나님이 아니라면 그것이 바로 우상입니다. 우상은 우리가 죄를 짓게 되는 가장 중요한 원인입니다. 가장 무서운 우상은 실제로 악령을 섬기는 것으로써 이방 신, 즉 이방 종교를 함께 섬기는 것입니다. 지금의 종교 다원화는 가장 무서운 우상 숭배입니다.
오늘날 우리도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과거를 청산해야 합니다. 하나님보다 더 사랑했던 모든 것들을 다 포기해야 합니다. 우상은 우리의 자녀일 수 있습니다. 세상 경력일 수 있습니다. 학위일 수도 있습니다. 쾌락일 수도 있습니다. 또한 돈 일수도 있습니다. 성공일 수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칭찬을 듣고자 하는 것이 우상일 수 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나는 무엇으로 가장 기뻐하는가? 만일 그것이 여호와 하나님과의 사랑이 아니라면 바로 그것이 우상입니다. 또한 나는 어디에서 가장 죄를 많이 짓는가를 생각해 보십시오. 언제나 죄가 많은 곳에는 그 사람의 우상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 사람의 마음을 사로 잡고 있는 것이 여호와 하나님이 아니라면 바로 그것이 우상인 것입니다.
바울은 우리가 예수님를 알기 전의 불신 상태에 대하여 지적하길,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엡2:2-3)라고 하였습니다. 안목의 정욕, 육신의 정욕, 이생의 자랑이 우리의 마음을 사로 잡으면 우리는 우상에 빠진 것이며, 우리가 우상에 빠지면 사탄은 그 사람의 마음을 다스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각종 욕심과 욕망들이 우리의 마음을 지배하면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으며 주기적으로 하나님을 불순종하게 됩니다. 따라서 십계명의 첫계명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보다 더 사랑하는 모든 과거의 우상들을 과감하게 청산하라고 명합니다.
둘째로, 첫째 계명은 모든 거짓 신들을 버리고 온전히 여호와 하나님만을 섬기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에서 있어서 이 계명은 실제로 여호와 하나님께 마음을 드리지 않고 우상을 섬긴다는 것은 다른 종교의 신들을 받들며 섬기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다른 신들은 귀신들을 말합니다. 지구상에는 수천 개의 신이 있지만 최종적으로 둘로 구분됩니다. 하나는 여호와 하나님이시고, 다른 하나는 마귀입니다. 이름만 다를 뿐 여호와가 아닌 신은 다 마귀를 숭배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고 각기 다른 신을 숭배하면 그것은 마귀에게로 향하는 것입니다. 기독교 외에 다른 종교에서도 각기 자신들의 신들을 다 섬깁니다. 그러나 성경에 의하면 이 신들은 다 피조물로서 거짓 신이요 따라서 귀신들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종교는 궁극적으로 마귀를 섬기는 것입니다. 이 마귀는 자신을 하나님이라고 칭하기를 좋아합니다. 이슬람 한글 코란을 보면 알라는 전부 하나님이라고 번역해 두었습니다. 그래서 코란을 읽어주면 거의 한국 목사들 설교와 같습니다. 이에 저는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부르기를 좋아합니다. 사실 여호와 하나님은 구체적으로 신약에 있어서 주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로 나타나신 오직 유일하신 하나님, 우리 주 여호와 삼위 일체 하나님이십니다.
목사들 중에는 다른 종교를 두둔하며, 진실하게 종교를 믿으면 어떤 종교에 몸 담든 사람들이 바르고 착하게 된다고 하면서 타종교의 구원을 인정하는 가짜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가르침은 주 여호와 하나님의 첫째 계명에 노골적으로 도전하는 것입니다. 주 여호와 하나님은 주의 십계명의 첫 번째에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지니라”고 했습니다. “나의 자녀들아, 너희의 마음은 오직 내게만 있으며 나만을 온 땅의 유일한 하나님으로 알아야 한다”라는 뜻입니다.
또한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는 말은 눈에 보이게도 말고, 생각하지도 말라는 뜻입니다. 적극적인 표현으로는 ‘나를 온전히 섬기기 위하여’ 우리의 마음을 주께로부터 빼앗는 모든 것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멀리하라는 것입니다.
이사야 43:21을 보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주의 백성을 만드신 목적은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고 말합니다. 주의 백성의 신분과 가치는 주 여호와 하나님을 찬송하는데 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주의 백성의 최고의 의무는 주 여호와 하나님만을 예배하고 찬양하는 것입니다. 그 예배와 찬양이 아름다운 이유는 배타적이기 때문입니다. 오직 여호와 하나님께 마음을 다 줄 때, 그것이 가장 아름다운 찬양이며 예배입니다. 기독교의 신앙은 여호와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분을 높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언제나 어떤 상황에서나 주 예수 그리스도로만을 구세주와 주와 하나님으로 모시고 섬기고 순종하고 높이고 찬양하는 것입니다. 그 특징이 여호와 하나님께서 가장 점수를 많이 주시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께만 향할 때 우리 여호와 하나님은 춤을 추시며 기뻐하십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 자기 마음을 알려 주셨습니다. 출애굽기 34:14에 “너는 다른 신에게 절하지 말라 여호와는 질투라 이름하는 질투의 하나님임이니라” 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주의 백성들이 우상이나 다른 신을 섬기는 것을 질투하신다고 했습니다. 질투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내가 가장 좋아하는 사람이 나보다 다른 사람을 더 사랑할 때 갖게 되는 마음 아닙니까? 여호와 하나님의 질투는 아비로부터 자식까지 3, 4대로 저주가 임하게 하고(출 20:5), 진노 가운데 주의 백성을 지면에서 멸절시키시기도 합니다 (신 6:15). 그러나 이것은 우리를 지독히 사랑하시게 때문에 나타나는 여호와 하나님의 질투의 표현입니다. 주 여호와 하나님은 주의 백성을 향해 질투하십니다. 따라서 무서운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여호와 하나님은 주의 백성들과 함께 언약의 관계 속에 있습니다. 따라서 여호와 하나님의 질투는 불법적인 것이 아니라 합법적인 것입니다. 자식이 나쁜 행동을 하거나 나쁜 길로 빠지게 되면 부모는 매로 때리면서까지 그 길에서 돌아서게 하듯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 또한 우리가 우상을 섬기고 다른 신을 경배하며 하나님의 뜻을 거스릴 때 거룩한 질투가 타오르면서 사랑의 매로 우리를 채찍질 하시는 것입니다.
구약의 많은 선지자들이 이스라엘의 우상의 죄를 보고 여호와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하나님의 채찍이 임박했으니 돌이켜 회개하라고 경고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선지자들의 경고를 듣지 않고 무시했으며 따라서 많은 고통과 어려움을 당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사랑은 100%의 순수한 사랑입니다.
결혼의 언약으로 사랑해야 할 사람이 여럿이라면 그 마음이 나누어져서 아무도 진실하게 사랑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결혼은 한 사람과 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마귀와 우상을 사랑하고 세상의 것들을 사랑하면서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100%가 될 수 없습니다. 최고의 우선 순위가 될 수 없습니다.
바울의 동역자 데마는 세상을 사랑하여 바울 곁을 떠나 데살로니가로 갔습니다(딤후 4:10). 예수님의 제자 가룟 유다는 돈을 사랑하여 은 30에 스승을 팔았습니다. 오늘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데마처럼 세상의 쾌락을 사랑하여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치 못하며, 가롯 유다처럼 돈을 사랑하여 하나님께로 멀어지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에게 절대적인 사랑으로 다가왔습니다. 세상이 줄 수 없는 영생의 복을 그의 아들의 생명을 지불하시고 우리에게 값없이 베푸셨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절대적인 사랑으로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희생이 아니라 우리에게 최고의 행복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출발은 마귀와 우상과 세상에서 우리의 마음을 떠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 삶에 있어서 최고의 거룩과 사랑의 행위는 바로 온 맘을 다해 오직 ‘하나님만을 사랑하는 것’임을 절대로 잊지 말아야 합니다.
참 선지자 모세의 외침입니다.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을 사랑하는 것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 간절하게 외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로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할지니라” (신 6:5-9).
이 시간 주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큰 영광과 축복이 이 우주에 없습니다. 지금 우리에게는 주 예수 그리스도만을 사랑하면 됩니다.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행복은 주 예수 그리스도만을 100%로 사랑하려고 노력하는데서 시작됩니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런 생각 해 본 적이 있습니까? 우리는 도적질, 살인, 간음의 죄악들에 대하여 대단히 많이 분노하고 흥분하며 양심의 가책을 느낍니다. 그러나 그 보다 더 앞선 첫째 계명, “우상을 섬기지 말고 오직 주 여호와 하나님만을 온 맘을 다해 사랑하라”는 계명에 대하여 어긴 것에 대해서는 왜 흥분도 하지 않고 화도 내지 않는 것입니까? 사실 여호와 하나님을 망각하며 우습게 여기는 삶이 이 시대 가운데 얼마나 많은지 사람들의 삶의 스타일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러나 첫계명을 100% 어긴 상태임에도 아무런 마음의 가책을 느끼지 않고 있습니다. 따라서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주를 사랑하지도 않고 섬기지 않는 그들을 법에 따라 심판하실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성경 한 구절을 찾아 봅시다. 고린도전서 16:22절입니다.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우리 주여 오시옵소서.” 진심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려는 의도가 없다면 그 사람은 거듭난 사람이 아니며 여호와 하나님의 율법에 의해 영원한 멸망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시간 결단하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모든 것을 우리 주 예수님께 ALL-IN 하겠습니다” 라고 ALL-IN 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마음을 주님께 다 드리기 원합니다. 성령께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을 무한하게 사랑하시는 영이십니다. 따라서 주의 영으로 충만케하여 달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아버지, 주의 성령을 충만하게 보내주소서. 하나님 아버지를 가장 사랑하게 하소서. 마음과 뜻과 힘과 생명을 다해 주를 사랑하게 하소서. 제 마음을 활짝 엽니다. 제 마음을 바꾸어 주시고,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모든 것들을 주님께 드리옵나니 불로 태우시고 피로 씻기셔서 오직 하나님만 사랑하는 마음으로 가득차게 하소서.”
이러한 마음을 가지는 것이 십계명의 제 1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하므로 말미암아 주의 가장 큰 기쁨이 되시고 나아가 영육간에 여호와 하나님의 복을 누리는 참된 그리스도인들이 되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작성자: 스데반 황 목사 (인천 그리스도의 보혈교회 담임)
말세의 배교를 주도하는 바티칸
말세의 배교를 주도하는 바티칸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이대로라면 개신교는 세계의 다른 종교들과 더불어 종교개혁 이후로 조금도 달라진 것이 없이 오히려 개악에 개악을 거듭해왔던 바티칸에 의해 흡수합병 될 것입니다. 지금은 강제력이 없으나 말세의 적그리스도가 출현하여 전체주의적인 세계독재정부를 출범시키면 본격적으로 종교재판이 재개될 것입니다. 물론 종교재판의 주역은 적그리스도의 앞길을 예비하는 거짓선지자의 역할을 충실하게 감당해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할 바티칸이 될 것입니다.
공신력 있는 기독교 기관인 ‘천주교 정보 연구국’(Catholic Research Information Bureau, CRIB)에서는 다음과 같은 경고의 나팔을 불었습니다. “속지 말라. 천주교회는 카멜레온과 같다. 천주교는 개신교 국가들 내에서는 관용적이고 우호적이며 도덕적 권위가 지고한 듯 보이지만 국민 다수가 천주교인 곳에서는 전혀 딴판이다. 그들은 결코 자유의 수호자가 아니다. 그들은 상황에 따라 색깔을 바꾸지만, 겉으로 드러나는 색깔은 절대로 천주교이 진짜 색깔이 아니다.” [유석근, 『밝혀진 적그리스도의 정체』, 367.]
팀 리하이(Tim Lahaye) 목사 역시 다음처럼 경고하고 있습니다. “내가 아는 한도 내에서 천주교는 개신교도들에게 가한 핍박을 죄로 자인한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우리를 ‘분열된 형제’라고 부르는 것은 개신교도들에게 인정을 얻기 위한 방편에 불과합니다. 천주교의 권력이 재차 강화되면 다시 한번 종교재판이 일어나리라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오늘날 천주교 지배적인 국가 콜롬비아, 스페인 등을 보면 개신교도들을 이방인처럼 취급하여 교회를 불사르는 등 종교적인 자유를 박탈하고 있습니다.” [팀 리하이, 김의자 역, 『요한계시록 해설』(서울: 보이스사, 1980), p.426.]
강정훈 목사도 동일하게 지적했습니다.
“어떤 이들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로마 카톨릭 교회는 변화되어 가고 있다고 말한다. 무엇이 변했단 말인가? 그들의 교리가 변했는가? 사실상 변한 건 아무것도 없다. 오직 기독교와의 대화를 시도하고 있다는 것 밖에는 달라진 것이 없다. 그들의 기독교와의 대화는 '타종교와의 대화' 이상의 아무것도 아니다. 그들은 기독교와의 대화를 통해 '떨어져나간' 기독교를 다시 교황청의 지배권 아래 넣으려 하고 있고, 타종교와의 대화를 통해서는 혼합 종교를 만들어 세계를 통치하려는 야욕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그들은 기독교와의 연합과 대화를 가장하여 기독교를 혼란시키며 파괴시키려 하고 있을 뿐이다.” [강정훈,『로마에서 시작된 카톨릭교회』(서울: 푸른초장,1991), 203.]
일찍이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 역시 천주교의 음모를 간파하여 『경보를 발하라』(Sound and alarm)라는 제목의 연설 가운데 다음처럼 경고했습니다. [마틴 로이드 존스,『진리로 하나』(서울: 목회자료사, 1998), 118-119.]
로마 카톨릭 교회는 복음주의적인 개신교 입장을 받아들이는 쪽으로 교리적인 변화를 가져오지 않았습니다. 전혀. 그러나 오늘날 사람들은 이 점을 깨닫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물론 그것은 로마교회의 공식적인 대변자들이 전략을 바꾸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우호적인 태도를 보입니다. 그들은 우리를 분리된 형제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이 이런 종류의 상황을 다루신 일을 기억하십시오.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마 7:15).
다가오는데 우리의 복음주의자들은 이것을 모르고 로마 카톨릭 교회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에큐메니칼 운동의 가장 위대한 권위자 중 한 사람인 스티븐 닐 감독은 어떤 점에서는(사회적인 면에서) 로마가 과거 그 어느 때보다도 우리에게 가깝다고 말했습니다. 이 말은 그들이 우호적으로 접근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는 덧붙여서 사실상 교리적으로는 로마 카톨릭 교회가 종교개혁이 일어나기 전보다 지금 우리와 더 멀리 떨어져 있다고 말합니다. 그가 에큐메니컬 운동과 세계교회협의회를 믿는다 하더라도 그는 상황을 솔직하게 시인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전쟁에서 중립을 지킬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은 로마교회와 마리아 숭배라는 이 의심스러운 태도에 대해 중립적인 입장을 취할 것입니까? 교황은 10월 한 달 동안 특별히 마리아에게 기도하라고 교인들에게 부탁했습니다. 그것이 옳은 일입니까? 그것이 사소한 문제입니까?
것이 더욱 좋습니다. 그러나 이런 변화가 일어나고 평신도들이 동요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일어서서 말하고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것을 사람들에게 알려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독교회의 전반적인 미래를 위해 대전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때에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교회가 무엇입니까? 이 세상은 무엇을 기다리고 있습니까?
일을 하고 있다."고 말해봐야 소용없습니다. 나팔이 불분명한 소리를 내면 아무도 전쟁을 준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함께 이 말을 해야 하며 우리는 죽은 자들을 깨울 수 있는 목소리를 필요로 하기 때문에 우리는 크게 외치고 경보를 발해야 합니다. 이것은 사도들의 영광의 외침이었습니다.
정반대의 생각을 가진 다른 사람들과 연합할 수 있겠습니까? 그럴 수는 없습니다. 또한 진리를 수정하거나 적들과 연합하는 것이 아닙니다. 일찍이 분명한 나팔 소리가 들려야할 때가 있었다면 지금이 바로 그때입니다. 우리 모두 함께 협력합시다! 함께 헌신합시다.
초대교회를 수립하라는 분명한 소리를 모든 사람에게 분명하게 외쳐야만 합니다. 이 악하고 왜곡된 세대들 가운데서 우리는 하나님의 진리를 수호해야만 합니다.
하여금 이것으로 말미암아 고통당할 준비를 하게 합시다. 주님의 편에 누가 서 있나요? 여러분이 어디에 있는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주님을 하나님으로 모신다면 그분을 따르십시오. 그러나 바알을 섬긴다면 그를 따르십시오. 여러분이 신약 성경적 교회가 복음주의 교회임을 믿는다면 확고하게 그 입장에 서십시오.
|
실제로 교황청에서는 오늘날에도 개신교를 이단으로 간주하고 있음을 천주교의 교리문답을 통해 쉽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변기영, 『뜨리뗀 공의회 간추린 교리문답』(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1983) ,24-25.]
천주교의 교리에 다르면 이단에 대한 합당한 반응은 화형시키는 것입니다. 다만, 지금은 세속권이 뒷받침되지 않아서 참고 있는 것뿐입니다. 천주교가 제2차 바티칸 회의(1962-65) 이후 개신교회의 성도들을 향해 ‘분열된 형제’라고 부르며 부지런히 ‘화해’와 ‘일치’를 외쳐온 것은 강정훈 목사의 지적처럼, 오직 개신교회를 교황권 아래로 흡수하여 중세 암흑기의 위상을 되찾고자 하는 야심 때문입니다.
오늘날 ‘음모론’이라는 이름으로 경시되는 음모의 진짜 주체는 바로 바티칸입니다. 중세시대에서의 세속권을 다시 회복하기 위해 꾸미고 있는 음모인 것입니다. 실제로 음모론에 등장하는 다양한 세력들(프리메이슨, 빌더버그 그룹(엘리트), 로스차일드 가문, 패이비언 사회주의, CFR, UN, IMF, 연방준비은행 등등)은 바티칸의 장기말일 뿐입니다. 이는 바티칸이 일루미나티(교황청의 친위대인 예수회의 비밀이름)의 창설 이후로 지금까지 치밀하게 진행되어온 음모이며 그 키워드가 바로 ‘신세계질서’(New World Order)입니다.
현재 천주교가 주축이 되어 진행되는 ‘세계종교통합운동’이란, 실제로는 바티칸의 휘하에 세계의 모든 종교를 흡수합병 시키는 과정입니다. 종교다원주의란, 실제로는 로마카톨릭 안으로 모든 종교를 흡수합병 하는 과정일 뿐입니다. 지금은 우호적 흡수합병의 모양새를 취하고 있으나 머지않아 적대적 흡수합병으로 바뀔 것입니다. 전 세계 종교계의 지각변동이 일단락되면 또다시 종교재판이 부활될 것이며 중세 암흑기와 같은 처참한 마녀사냥이 시작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첫 번째 대상은 바로 우리 개신교도들입니다.
바티칸은 지금 현재 종교다원주의에 근거하여 세계의 모든 종교를 급속하게 천주교 안으로 통합시키는 작업에 박차를 가하고 있습니다. 개신교 안에서는 이미 W.C.C.가 그 일을 진행하고 있으며 빌리 그래함의 공작으로 인해 W.E.A까지 넘어간 실정입니다. 바티칸이 만약 세속권을 다시 거머쥐게 된다면 종교재판의 부활은 필연적입니다. 그리고 변함없는 교리 그대로 천주교로의 개종을 거부하는 모든 개신교도들에 대한 무참한 고문과 학살이 자행될 것입니다. 이는 과거에 그들이 저지른 행적을 통해 충분히 짐작해볼 수 있는 일입니다. [Baron Porcelli, 생명의서신 편집부 역, 『성전에 앉아 있는 죄의 사람』(서울: 생명의서신, 2004) 참조.]
A.D. 1215년, 라테란(Lateran) 제4차 종교회의의 종교법령은 이교도와 이단의 제거에 더욱 정열을 쏟았습니다. 천주교 성직자의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세속권력들이 두드러지게 뭉쳤습니다. A.D. 1227년 나본(Narbonne) 종교회의가 동일한 노선을 밟았고 그 이후 톨로스(Toulouse) 종교회의에서는 아이들이 부모를 이단자로 비난하도록 강요받았고 성경읽기가 평신도에게는 금지되었습니다. 이어지는 종교회의마다 동일한 노선을 취했습니다.
성경대로 믿는 크리스천에 대한 교황의 학살은 예수회 신부 그레트져(Gretzer)가 자신의 저서에서 인정하듯이 역사에 또렷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1360년부터 1380년까지 종교개혁자 위클리프(Wycliff)와 그를 따르던 롤라드인들에게 퍼부어졌고, 약 40여년 후엔 보헤미아에서 신앙개혁가 후스(John Huss)를 처형했습니다. 교황은 1464년부터 1498년까지 보헤미안인들과 영국 사람들을 박해한 것뿐만 아니라, 이탈리아에서 사보날로라(Savonarola) 같은 사람들에게 박해를 가했습니다. 왈덴시스(Waldemses) 크리스천들에 대한 학살사건, 볼 루이스(Vll Louis) 크리스천들의 학살사건 등은 어느 누구의 피라도 응결시킬 수 있도록 치밀하게 계산된 잔학한 행위의 반복이었습니다.
보수적인 견해에 의하면 15세기 동안 로마 천주교의 손에 죽임을 당한 사람들의 숫자는 대략 2,500,000명으로 보는데, 다울링(Dowling)은 스코트(Scott)의 교회사를 인용하여 프랑스에서 1,000,000명의 왈덴 크리스천들이, 네델란드에서 36,000명의 크리스천들이, 또 스페인 종교 재판소에서 150,000명, 그리고 제수이트(예수회)가 죽인 성경대로 믿는 크리스천들 900,000명을 언급합니다.
종교재판과 박해와 살육의 도구로써 더욱 유효할 수 있게 하기 위해 1478년에 개편되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역사가 로렌트(Lorent)에 따르면, 스페인에서는 1480-1498년에 8천 명의 크리스천이 화형 당했고 9만 명의 크리스천이 다른 형벌에 처해졌으며 1499-1506년 사이에는 1,600명 이상이, 또 1515-1570년에는 2,536명이 화형 당했습니다. 1524년에는 2만 명 이상이 처형되었고 이들 중 천 명가량이 트리아나 세빌르(Triana Seville)라는 한 도시에서 화형 당했습니다.
이처럼 애당초 대량학살(Genocide)은 히틀러와 나치가 만들어낸 아이디어가 아니라 바티칸의 교황이 만들어낸 공식교리였습니다. 이교도, 그러니까, 모든 개신교도들에 대한 대량학살에 대한 교리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천주교의 공식교리로 남아있습니다. 쉽게 말해, 그들은 언제든지 상황만 변하면 과거처럼 개신교도들을 잔혹하게 학살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머지않아 그 시기가 도래할 것입니다. 천주교가 주도하고 있는 종교통합운동이 이미 전 세계의 모든 종교를 다 집어삼키고 있습니다. 참된 개신교도들만이 남을 것이고 그때부터 천주교는 다시금 종교재판을 부활시킬 것입니다.
과거의 종교재판소는 독창적인 기관으로 천주교에 대항하는 유럽의 모든 사람을 말살할 목적으로 세워졌습니다. 이것은 프랑스, 밀라노, 제네바, 아라곤, 그리고 사르디니아에서 폴란드까지(14세기), 그리고 다시 니헤미아에서 로마까지(1543) 퍼져나갔습니다. 스페인에서는 1820년까지 존속했습니다. 종교 재판소는 1229년, 1233년, 1234년에 절정을 이루었습니다. 이 천주교 도살장은 13세기를 거쳐 14세기 말에도 그 살인과 약탈, 고문을 멈추지 않으며 15세기에서 16세기까지 지속되었습니다.
이를테면, 17세기(1641)에 아일랜드의 천주교는 10월 23일(이그나티우스 로욜라 기념일)을 개신교도들에 대한 학살의 날로 정하여 하루에 150,000명을 죽였습니다. 성경대로 믿는 크리스천들은 땅에 모가지만 내놓고 매장된 채로 굶어 죽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몸이 찢어져서 유혈이 낭자한 몰골로 미사에 끌려갔습니다. 한 사람은 톱으로 켜져서 몸이 둘로 쪼개졌고 그의 부인은 목청이 잘려 나갔고, 그의 어린 아들은 골이 깨어져 버렸는데 그 시체가 돼지우리에 던져졌습니다. 어떤 크리스천들은 허리에 줄을 묶어 말이 시궁창을 달리는 동안 질질 끌려 다니다가 죽기도 했습니다. 수천 명이 팔과 손, 다리를 잘렸으며 그 상태로 피를 흘리며 죽어갔고, 티로(Tyrone) 지방에서는 하루에 삼백 명을 익사시켰고, 오륙십 명이 한 집에 감금시켜 놓고 태워 죽였습니다.
1655년 1월 25일 교황 클레멘트 8세의 재임 기간에 무장한 폭도들은 성경대로 믿는 크리스천들이 사는 삐에드몽으로 갔습니다. 지오반니 앙드레 미샬랭(Giovanni Andrea Michialine)은 그의 앞에서 세 아들이 칼에 베임 당하는 것을 목도해야만 했는데, 한 폭도가 그의 넷째 아들 다리를 잡고 벽에 내동댕이쳐 머리가 깨졌습니다. 천주교 폭도들은 10살짜리 소녀를 나무 곳간에 몰아넣고 불을 피워 그녀를 불에 달군 후 그녀의 어머니와 함께 죽였습니다. 지오반니 로스타그날(Giovanni Rostagnal)은 80세의 노인인데 코와 귀를 잘랐고 숨이 끊어질 때까지 그의 몸에서 살점을 베어내었습니다.
야콥 비로네(Jacob Birone)는 학교 선생님이었는데 벌거벗겨서 뜨겁게 달군 족집게로 그의 손톱과 발톱을 뽑고는 허리에 줄을 묶어 양쪽에서 두 폭도가 거리에 끌고 다니는 바람에 몸에는 깊은 상처가 나고 거의 죽을 지경이 되었습니다. 그 둘은 매 순간 그에게 “자 이래도 미사를 드리지 않겠는가?”하고 물었는데, 그는 모든 폴리시안즈나 보고마일즈가 믿었듯이 미사는 마귀에게 속한 것임을 믿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의 목을 베었고 시신은 강에 던져버렸습니다.
야콥 로제노(Jacob Roseno)는 성인들에게 기도하라는 강요를 받았으나 어떤 마니캐안도 불가리안도 또 소위 다른 ‘이단들’도 그런 가증스런 일을(딤전2:5) 하지 않았기에 천주교 폭도들은 그를 심하게 매질하고 여러 발의 총알을 쏘아댔습니다. 그의 숨이 끊어지는 순간에 그들은 또 “성인들에게 기도해라!”하고 악을 썼으나 그의 대답은 “No”였습니다. 그들은 그의 목을 칼로 끊어버렸습니다. 천주교 폭도들은 야균도 미살리노(Jacopo Michalino)라는 종의 생식기를 떼어냈는데 그 떼어낸 부분의 출혈을 막는다고 불을 켠 양초를 갖다 댔습니다. 그 다음에는 족집게로 손톱, 발톱을 뽑고 끈으로 그의 머리를 묶어 조였는데 어찌나 조여 맺는지 눈알과 골이 빠져나왔습니다.
이와 같이 로마가톨릭은 어떠한 이견이나 반대도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천주교가 지배한 수세기 동안 로마교가 참된 성도들을 죽인 수는 이전에 로마제국이 죽인 수보다 더 많았습니다. ‘암흑시대’라고 후세의 사가들이 명명한 로마가톨릭 지배하의 약 1,200년 동안 5,000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교황권의 박해를 받아 죽었던 것입니다. 이는 100년마다 평균 400만 명 이상의 비율로 죽은 셈인데, 당시의 세계 인구를 감안할 때 상상을 초월하는 수치입니다. 당시의 100만 명은 어림잡아 지금의 1000만 명에 상응하는 수치이기 때문입니다.
천주교가 지배하는 신성로마는 그 잔인성에 있어서 이교도들의 로마를 훨씬 압도하고도 남음이 있었습니다. 소위 말하는 암흑시대는 주후 약 312-1517년 종교개혁이 시작될 때까지 약 12세기 동안 지속되었으며, 오늘날에도 백성과 무리와 열국과 방언들 위에 앉아서 만만치 않은 권세를 떨치고 있습니다. 머지않아 신세계질서(New World Order)가 달성되면 바티칸은 성경의 예언대로 다시금 세속권을 거머쥐게 될 테고 종교재판을 부활시켜서 동일한 만행을 자행할 것입니다(계시록 17장). [유석근, 『알이랑 고개를 넘어 예루살렘으로』(서울: 도서출판 예루살렘, 2011), 276.]
끝까지 배교하지 않는 개신교도들에 대해 바티칸이 어떤 식으로 박해할지는 충분히 짐작이 가고도 남는 일입니다. 그들은 1,200년 동안 인류 최고의 고문 기술을 축적시켜두었기 때문입니다.
『폭스의 순교사』에 따르면 중세시대 때 성경대로 믿는 성도들은 천주교에 의해 이단으로 정죄되어 온갖 종류의 처참한 고문을 당하다 참혹하게 순교했습니다. 천주교 사제들은 그들에게 끓는 기름을 붓거나 관절을 잡아 비틀었습니다. 창자를 끄집어내거나 온 몸을 창으로 찔렀습니다. 채찍질을 통해 살점을 뜯어냈으며, 이마를 쇠사슬로 죄여서 눈알이 튀어 나오게 만들었습니다. 인두로 남성과 여자의 성기를 지졌으며, 가위로 여성의 가슴을 잘라내기도 했습니다. 갈고리로 살을 긁어내거나 철판 위에 생사람을 올려놓고 삼겸살 굽듯이 굽기까지 했습니다. 나사로 손가락을 죄어 부러뜨리고 혀를 뽑아냈으며 펄펄 끓는 기름과 타르를 퍼붓기도 했습니다. 생매장하거나 익사시키는 것은 다반사였습니다. 생살을 바늘로 꿰매거나 산 채로 맹수들에게 뜯어 먹히도록 만들었습니다. 심지어는 창을 여성의 성기로 찔러 넣어 정수리까지 통과시켰습니다. 그야말로 꼬치를 꿰듯이 꿰어버린 것입니다.
이처럼 천주교는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상상을 초월하는 고문으로 성경대로 믿고자 하는 성도들이나 개신교도들을 박해하고 학살했습니다. 무엇보다 천주교의 종교재판을 대표하는 것은 바로 화형입니다. 산 채로 죄인을 태워 죽이는 화형은 원래 이로교마가 초대교회의 성도들을 박해할 때 사용하던 형벌인데 바티칸이 그대로 답습한 것입니다. 단순히 성경을 소지했다는 이유만으로, 단순히 라틴어 대신 다른 언어로 성경구절을 낭독했다는 이유만으로, 단순히 교황권의 정책을 부정했다는 이유만으로 무수한 사람들이 화형에 처해졌습니다.
화형 집행 방법에 있어서 프랑스의 사례를 좀 더 실감나게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유석근, 『밝혀진 적그리스도의 정체』, 281-283.]
화형에 처할 죄수가 있을 경우 미리 선정된 장소에 화형집행대에 해당하는 기둥을 설치했습니다. 그리고 사람의 키 높이까지 짚과 장작을 몇 겹씩 쌓아올립니다. 물론 기둥 주변에 죄인이 들어갈 수 있는 입구와 죄인을 묶기 위한 공간을 별도로 만들었습니다. 죄수에게는 불에 잘 타게 하기 위해 죄수복 대신 유황이 칠해진 셔츠를 입혔습니다. 이윽고 죄수를 줄과 쇠사슬로 기둥에 단단히 묶은 후에는 죄수가 들어가던 입구 통로까지도 짚과 장작으로 채워 넣었습니다. 그런 다음에 불을 붙이면 사방의 장작더미가 일시에 불이 붙었다고 합니다.
산 사람을 화마 속에 넣는 행위가 얼마나 잔인한 일입니까! 이것이 그리스도의 대리자를 자처하는 로마 교황이 개신교도들을 처형하는 방식이었습니다. 『고문실의 쾌락』(자작츨판사, 2001)이라는 책자에 보면 1796년 1월에 이단자에 대한 화형 집행 장면을 목도한 사람의 편지가 실려 있습니다. 편지에는 화형이 얼마나 참혹했던가를 실감나게 표현하고 있는데, 내용은 이렇습니다.
“처형은 정말 잔인했습니다. 여자는 화염에 휩싸여 한 시간 반, 남자는 한 시간 이상 산 채로 고통 속에 몸부림쳤습니다… 죄인이 계속해서 갈구하는 것은 단지 몇 더미의 장작을 더 태워달라는 것뿐인데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화염은 타버린 만큼의 장작만 보충하면 똑같은 온도를 유지하며 탔습니다. 그의 간절한 탄원에도 불구하고 고통이 줄지도 않았고 땔감이 더 많이 허락되어 죽음이 앞당겨지지도 않았습니다.” |
어떻습니까? 이것이 바로 머지않아 세속권을 다시 거머쥘 바티칸이 배교를 거부하는 개신교도들에게 가해올 핍박의 방식입니다.
실제로 바티칸에서는 고도로 훈련된 예수회의 신부들을 개신교 진영의 곳곳에 침투시켜서 온갖 종류의 교란 및 파괴 공작을 벌여왔습니다. 이에 관한 역사적 증거들도 얼마든지 있거니와 오늘날에도 사정은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특히, 예수회 소속 신부로서 개신교회들을 와해시키는 데에 혁혁한 공을 세워서 초고속 승진을 했던 알베르토 리베라(Alberto Rivera) 신부가 회심한 다음, 양심고백을 통해 바티칸의 적나라한 실상을 여실하게 보여주었습니다.
전직 천주교 사제인 알베르토 리베라 박사는 스페인에서 출생했습니다. 7세부터 천주교 신부학교에 입학하여 14년간 제수이트(예수회) 요원으로 훈련을 받은 그는 27년 동안 교황청을 위해 철저하게 충성했던 인물입니다. 바티칸의 개신교 말살음모에 전적으로 헌신하던 그는 비빌리에 성경을 공부하게 됩니다. 그 결과, 천주교의 교리와 성경의 진리가 엄청난 차이가 있음을 깨닫고 많은 갈등 끝에 그는 결국 회심하여 거듭나게 됩니다. 그 이후 천주교를 박차고 나온 그는 바티칸의 음모에 그 실체에 대해 폭로하기 시작했습니다.
교황청 직속 예수회의 신부로 있다가 회심한 리베라 박사는 이후 교황청과 예수회의 음모에 대해 낱낱이 폭로하여 더 이상 사람들이 천주교회의 어두운 수렁으로 빠지지 않도록 헌신했습니다. 그는 1997년 1월 20일 주님께로 부르심을 받기까지 천주교회 및 그에 연계된 기관들의 성경 예언에 따른 역사적, 성경적 연구에 전적으로 몰두했습니다. 리베라 박사는 전 세계의 수많은 교회들과 학교들을 방문하여 설교하면서 많은 천주교도들에게 구원은 교황이나 성모 마리아나 천주교회 제도가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음을 역설했습니다.
알베르토 리베라 박사의 양심고백 때문에 수많은 천주교도들이 개신교로 개종하게 되자, 카톨릭 신문사에서 알베르토는 목사였다고 은폐하는 기사를 발표했습니다. 그러나 스페인에서는 목사가 없다는 사실도 모른 기자의 거짓 기사에 불과했습니다. 그 이후로도 바티칸에 의해 통제되거나 매수된 거짓증인들의 네거티브 공세가 이어졌으나 리베라 박사의 정확한 증언 및 그것을 뒷받침하는 객관적인 물증들로 인하여 교란정보에 휘둘리는 사람들 이상으로 많은 이들이 그를 신뢰하고 있습니다.
리베라 박사의 간증은 총 8권의 만화로 제작되어 전 세계 151개 국가에서 출판되었으며 27개국에서 카톨릭의 압력에 의해 출판이 거부되었습니다. 한국에서도 번역되어 출간되었으나, 역자가 이단시비에 휘말리면서 제대로 판매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역자의 사정과는 무관하게, 리베라 박사의 간증 자체는 바티칸의 실체를 드러내는 강력한 증거가 됩니다. 특히, 레바라 박사는 죽음(순교)를 통해 자신의 증언이 진실임을 마지막으로 증명했습니다.
알베로토 리베라 박사의 아내인 누리 리베라는 자신의 남편이 바티칸의 하수인들에 의해 살해되었다고 다음처럼 확신있게 증언했습니다. “그들은 그를 독살하였습니다. 나는 이것을 확신합니다.” 생전의 리베라 박사는 전 제수이트(카톨릭 예수회) 제너럴 페드로 아루피 밑에서 사역하며, 주로 개신교회에 침투하여 파괴하는 공작을 수행했습니다. 회심한 리베라 박사는 목숨을 걸고 바티칸의 정체를 폭로했으며, 바티칸은 모든 수단과 방법을 다하여 그의 입을 막으려 했습니다.
생전에 리베라 박사는 예수회의 암살자들로부터 공격받으며 여러 차례 죽을 고비를 넘겼습니다. 바티칸의 에이전트들은 여러 차례 그녀의 집에 찾아와 집기를 부수며 리베라 박사의 물건들을 압수해갔습니다. 드디어 리베라 박사를 암살하는 데에 성공한 바티칸은 그의 아내에게 만일 남편이 정신병자였다는 문서에 서명하면 1,000,000달러를 주겠다고 제안했습니다. 이런 제안을 단호하게 거부하자, 그녀 역시 여러 차례 생명의 위협을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오히려 이런 사실을 그레그 시만스키 라디오 쇼를 통해 증언했습니다. 이는 아래의 링크를 통해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 http://www.arcticbeacon.com/articles/20-Feb-2007.html
특히, 알베르토 리베라의 간증서 제1권 『거듭난 알베르토』의 내용을 살펴보면, 은사주의 진영의 개신교도들에 의해 천주교가 크게 위협받던 20세기 중후반에 바티칸이 이를 막기 위해 어떤 공작을 벌였는지 잘 나와있습니다. 그 당시, 바티칸에서는 예수회의 신부들을 은사주의 진영의 구심점이라고 할 수 있는 ‘하나님의 성회’ 소속 교회로 대거 침투시켜서 수많은 교회들을 교란시키며 무너뜨렸습니다. 이는 초창기의 은사주의 진영이 하나님께서 세우신 것에 대한 반증이기도 합니다. 그것이 오염되고 부패한 것이었다면, 즉, 처음부터 그것이 뉴에이지 영성운동이었다면, 바티칸이 그렇게 무너뜨리려고 애쓸 리가 만무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바티칸이 사주하여 활성화시킨 뉴에이지적 영성운동 때문에 은사주의 진영 전체를 매도해서는 안 됩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알베르토 리베라 박사 역시 은사중단론적인 사고에 사로잡혀 뉴에이지 영성운동을 빌미로 개신교 은사주의 진영을 도매금으로 취급해버렸다는 사실입니다. 그의 간증만화 여덟 권을 접할 때는 이 부분만 분별하면 될 것입니다. 리베라 박사의 간증으로 최초로 출간한 칙출판사에서 한국어 버전으로 1권을 무료로 제공하고 있습니다. 웹상에서 바로 읽기를 원하시면, 아래의 링크를 참조해주세요.
☞ http://www.chick.com/reading/comics/1302/1302_allinone.asp
나머지 책을 구매하시기를 원하시면, 다음의 링크 주소를 참조해주세요.
☞ http://www.aladin.co.kr/shop/common/wseriesitem.aspx?SRID=24364
리베라 박사의 간증 만화책 여덟 권에 담긴 핵심적인 내용을 요약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예수회 신부들은 바티칸 제국(바티칸이 통치하는 세계단일정부)의 건설을 위해 전 세계 각지에 수백 년 전부터 지금까지 스파이로 파송되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온갖 종류의 비밀공작을 수행해왔다. 뇌물, 중상모략, 이간질, 누명씌우기, 고문, 암살 등 그들은 바티칸을 위해서라면 어떠한 사악한 짓도 서슴치 않는다. 이는 콜럼버스 기사단 서약의 내용을 통해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이들에 의해 수많은 개신교회들이 파괴되거나 변질되었고 수많은 정부기관과 기업들이 파괴되거나 변질되었다. W.C.C.와 같은 모든 종교다원주의 운동의 배후에도 이들이 있다. 리베라 박사가 예수회의 신부로 암약할 당시 그가 스페인에서 무너뜨린 개신교회의 숫자만 해도 19개에 이른다. 이미 전 세계 모든 나라와 모든 분야에는 이들이 침투하여 세계단일정부(큰 성 바벨론) 수립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2) 바티칸과 천주교 안에는 독신을 강요당하여 욕구불만에 휩싸인 사제들끼리의 동성애가 만연하며 수도승과 수녀들 사이에도 문란한 성관계 역시 비일비재하게 발생하고 있다. 또한 이렇게 태어난 사생아들의 다수가 살해당하여 암매장되는 실정이다. 실제로 수도원의 정원에서는 유아들의 유골이 출토되는 경우가 많다.
3) 역사상 바티칸에 의해 무려 6,800만 명 이상의 성경대로 믿으려는 선량한 성도들이 온갖 형태의 끔찍한 고문과 고통 가운데 학살당했다.
4) 이슬람교는 유럽 지역에서의 패권을 공고히 하려는 교황청의 사주로 중동지역에서 탄생한 유사기독교이다. 그러나 이슬람교는 나중에 바티칸의 손아귀를 벗어나서 독자적인 길을 걸어갔고 이로 인해 십자군전쟁이 발생했다. 그러다가 성모 마리아의 거짓기적으로 유명한 파티마 사건 이후, 바티칸과 이슬람교는 다시 동맹을 맺고 신세계질서(New World Order) 확립을 향해 걸어가고 있다. 바티칸과 이슬람교의 연결고리는 성모 마리아이다.(자세한 내용은 제6권 중동의 음모를 참조하세요.)
5) 공산주의는 오랫동안 바티칸과 대립하며 기독교 진리를 수호해온 동방정교회를 비호하던 러시아 황실을 무너뜨리기 위해 고안하고 후원한 이데올로기였다. 그러나 러시아에서 공산주의 혁명이 성공한 이후 그들은 교황청을 배신하고 독자적인 길을 걸어갔다. 하지만 스탈린의 사망 이후 공산주의는 다시금 교황청과 손을 잡고 신세계질서 확립을 향해 함께 걸어가고 있다. 여기에는 W.C.C.가 핵심적인 가교 역할을 하고 있다.
6) 히틀러와 무솔리니는 처음부터 교황청이 기획하고 후원하여 만들어낸 독재집단이다. 이들에 의한 제2차 세계대전 역시 교황청이 종교개혁 이후 잃어버린 세속권을 되찾기 위한 시도였다.
7) 대부분의 천주교도들 및 등급이 낮은 성직자들은 프리메이슨이 천주교의 적이라고 배우지만, 이는 위장일 뿐이다. 바티칸의 간부가 되면 프리메이슨이 교황청의 충실한 심복임을 누구나 알게 된다. 왜냐하면 그 프리메이슨을 수족으로 부리는 일루미나티가 예수회의 비밀이름이기 때문이다. 즉, 일루미나티가 곧 예수회다. 소위 음모론에 등장하는 빌더버그그룹, 엘리트, 연방준비은행 등도 모두 예수회가 부리는 장기말에 불과하다. 진짜 배후는 예수회(일루미나티)이다. 프리메이슨이 바티칸의 하수조직이라는 사실은 이미 공공연한 비밀이다. 실제로 1983년 1월 25일 교황의 칙령에 따라 천주교 신도들이 프리메이슨에 자유롭게 가입할 수 있도록 조치했다. 원래는 은밀한 한통속이었으나 이제는 구태여 숨기려고 하지도 않을 정도로 상황이 심각해진 것이다.
8) 바티칸의 실세는 교황이 아니라 검은교황이라 불리는 예수회의 수장이다. (편집자 주-예수회의 수장은 공식적으로 드러나는 총회장이 아니라 숨겨진 보스가 따로 있을 것이다. 교황이나 공식적인 예수회 총회장 역시 얼굴마담일 뿐 진짜 보스는 따로 있을 것이며, 그가 아마도 계시록에 기록된 적그리스도일 가능성이 크다. 이런 가정이 사실이라면 아마도 교황(혹은 명목상 예수회 총회장)은 그의 앞길을 예비하는 거짓선지자일 것이다.) 미국외교협회(CFR), 삼변회, 빌더버그클럽, 연방준비은행, 보헤미안 그로브, 로스차일드가문 등등 소위 'NWO 음모론'에서 거론되는 주요 세력들 역시 진짜 배후가 아니라 예수회가 부리는 장기말에 불과하다. 따라서 바티칸이 빠져 있는 NWO 음모론은 바티칸을 향한 주의를 분산시키고 엉뚱한 곳(엘리트 등)에 집착하도록 만들기 위해 그들이 의도적으로 흘린 교란정보(역정보)의 일종이다.
증언자인 리베라 박사 자체에 대한 네거티브 공세를 통해 이상의 내용을 거짓말로 치부하려고 해도, 또 다른 수많은 증거들이 이상의 내용이 진심임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는 앞에서 제시한 많은 자료들을 통해서도 방증됩니다. 보다 자세한 내용은 직접 리베라 박사의 간증서를 구입하여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이단시비에 걸린 역자 및 단체에 의해 출간된 것이 안타깝기는 하지만, 그런 외적은 요소는 접어두고 내용만으로 분별하시기 바랍니다.
추가적으로 알베르토 리베라 박사의 증언과 맥을 같이 하는 또 다른 두 사람(Svali와 John Todd)의 양심고백 간증을 소개하겠습니다. 이 두 사람 모두 양심고백 이후 리베라 박사에 마찬가지로 암살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Svali는 일루미나티 출신의 킬러로서 예수님을 영접한 이후 그곳을 빠져나와서 양심고백을 했다가 실종되었으며, John Todd는 프리메이슨의 고위급 마법사로서 고(古) 데이비드 윌커슨(David Wilkerson) 목사님의 실화로 만든 영화를 계기로 회심한 이후 그곳을 빠져나와서 양심고백을 했다가 누명을 쓰고 투옥된 이후 실종되었습니다. 이 두 사람이 목숨과 맞바꾸어 남긴 이 두 간증이 알베르토 리베라 박사의 간증이 사실임을 방증합니다.
1) John Todd 간증 : Web-Book으로 보기 | 전자책 다운로드
2) Svali 간증 : Web-Book으로 보기 | 전자책 다운로드
정리하면, 하나님의 안배에 따라 종교개혁 이후의 그리스도의 몸은 수많은 사역공동체들의 집합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즉, 사역생태계가 형성된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언어의 혼잡 사건을 통해 바벨탑으로 표상되는 니므롯의 세계단일정부를 무너뜨리시고 사람들을 언어에 따라 열방으로 흩으신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하지만 말세의 마지막에 세상은 다시 세계단일정부로 통합될 것입니다. 이것의 예표가 교황이 유아독존 하는 천주교입니다.
▲살아있는 교황을 향해 엎드려서 경배하는 사제들
▲교황의 동상이나 사진을 향해 경배하는 신도들
사실 전면적인 배교는 불과 70여 년 전에 한국에서도 이미 있었던 일입니다. 신사참배가 바로 그것입니다. 신사참배란 일제강점기(1910∼1945) 동안 태양여신과 천황을 추앙하는 일본의 국교인 신도의 사원, 곧 신사에서 이루어진 우상숭배를 지칭합니다. 1935년 12월, 안식교단이 신사참배를 최초로 결의했습니다. 1936년 5월에는 천주교가 교황청으로부터 지시를 받아 신사참배를 시행했으며 성공회도 동참했습니다. 뒤이어 성결교, 구세군, 감리교까지 신사참배를 승인했습니다. 급기야 1938년 9월 10일에는 다수를 점하며 한국교회의 대표성을 가졌던 조선예수교장로회 제27회 총회에서 신사참배가 가결되고 말았습니다.
신사참배를 결의한 한국교회의 목사들과 장로들은 그 즉시 신사에 가서 참배를 드렸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한국교회의 목사들이 일본의 두목 귀신인 천조대신의 이름으로 서울의 한강과 부산의 송도 등에서 신도침례를 받았습니다. “천조대신이 높으냐? 여호와 하나님이 높으냐?”는 일본 제국주의의 질문에 천조대신이 더 높다고 답변하는 문건에 서명을 하여 관청에 제출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한국교회의 장로교 총회장이 이른바 ‘전향성명서’라는 공식적인 배교 신앙고백서까지 발표했습니다.
이처럼 한국교회는 목사들과 장로들의 주도 하에 주님을 버리고 집단적으로 배교했습니다. 한국교회의 지도자들은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을 타락시켰던 발람처럼 성도들을 기만하여 음란하게 일본 태양신을 숭배하게 만들었습니다. ‘가미나다’(神棚)라고 하는 우상단지를 예배당 안 동편에 두고 그것을 향해 예배했습니다. 기도, 소원간구, 찬양 및 손뼉, 예물 바치기, 황국신민서사 낭독 등의 순서로 1부 신도예배를 드렸습니다. 주일예배 중에 12시 정오 사이렌 소리가 나면 동쪽을 향해 절을 하는 동방요배도 드렸습니다.
장로교회는 1938년부터 3년간 국방헌금 158만원, 휼병금 17만 2천원을 거두어 바쳤으며, 무운장구기도회 8,953회, 시국강연회 1,355회, 전승축하회를 604회, 위문 181회를 가졌습니다. 1942년에는 ‘조선장로호’라는 이름의 해군함상전투기 1기와 기관총 7정 구입비 15만 317원 50전을 바치고 미군과 싸워서 이겨달라는 신도의식을 거행했습니다. 감리교 역시 1944년 교단상임위원회의 결의로 ‘감리교단호’라는 이름의 애국기 3대 값인 21만원을 헌납했습니다.
그것도 모자라 한국교회는 적극적으로 ‘신사참배 인식운동’과 ‘신사참배 권유운동’을 전개했습니다. 한국교회의 신사참배와 친일행각은 다분히 자발적이었고, 점차 솔선수범했으며, 나중에는 경쟁적으로 열성을 다했습니다. 한국교회는 우상숭배를 거부하지는 못할망정 주기철 목사님처럼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목회자들을 파직시켰습니다. 하나님께서 1907년 평양에서 대부흥의 축복을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바로 그 땅에서 하나님을 배신하고 우상에게 절하기로 결의하고 결행했던 것입니다. 그로 인해 동방의 예루살렘이라고 불리던 평양은 사탄의 앞잡이인 북한정권의 수도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일제강점기 당시 한국의 거의 모든 성도들을 배교의 길로 이끌었던 장본인은 한국교회의 목회자들이었습니다. 주기철 목사님과 같은 극소수를 제외한 모든 목회자들이 앞장서서 배교를 주도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한국교회에서도 동일한 현상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종교다원주의에 감염된 목회자들과 신학자들이 또다시 한국교회를 배교의 길로 이끌어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그것은 바로 W.C.C.입니다. 그리고 이 W.C.C.를 배후에서 조종하고 있는 실체가 바로 바티칸입니다. 다음 단원부터는 이 부분을 집중적으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작성자:레마위버
사랑한다고 말하지 말라!
사랑한다고 말하지 말라!
심심치 않게 연예인들의 이혼 소식을 접하게 된다.
처음 결혼 할 때는 천년만년 살 것같이 요란을 떨다가도 몇 년 지나지 않으면 이혼하였다고 한다.
결혼을 할 땐 그렇게 사랑한다고 해 놓고선 왜? 이혼할까?
좋아서 이혼하는 사람은 없다.
모두가 싫어서 이혼을 한다.
결혼 할 때는 상대방이 나를 사랑한다고 하였는데
막상 살다보니 나를 사랑하지 않고 자기를 사랑한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그래서 이혼하는 것이다.
맞다.
인간은 타인을 사랑할 수가 없다.
오직 자기를 사랑한다.
그러니 누가 나를 사랑한다는 말에 속아선 안 된다.
결혼은 사기당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상대방이 자기를 사랑하는 줄 알고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막상 결혼 하고 나면 자기를 사랑하는데 나를 이용한 것이란 것을 깨닫게 된다.
나를 사랑한 줄 알았는데 나를 자기 사랑에 이용한 것임을 알게 되고
배신감을 느끼고 이혼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서로가 동일하다.
결국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서로를 이용하려다가 이용당하지 않으니 갈라서는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흔한 말이 사랑이라는 말이다.
인간들은 사랑이라는 의미도 모른채 사랑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다.
내가 누구를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은 언어적으로 보면
그 사람을 사랑한다는 말이다.
언어적 의미라면 누구를 사랑한다고 한다면 내 기쁨과 상관없이 상대방을
기쁘게 해주어야 한다.
상대방이 기뻐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어야 진정으로 상대를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정반대이다.
상대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나를 기쁘게 하기 위하여 이용하고 있을 뿐이다.
언어적 의미로서의 사랑이란? 나를 위한 것이 아니고 상대를 위한 것이다.
사랑이란 이타적인 것이다.
상대를 기쁘게 하는 것이 사랑이다.
상대가 기뻐하는 일이라면 나의 모든 것을 포기하여서라도 상대를 기쁘게 해주는 것이 사랑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상대를 나를 위하여 이용한다.
그럼 우리는 여기서 묻지 아니할 수가 없다.
죄인이 과연 상대를 사랑할 수가 있을까?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죄인은 자기를 사랑하는 자이기 때문이다.
죄란? 항상 자기중심으로 움직인다.
그러므로 죄인은 무슨 일을 하여도 자기가 기뻐하는 일을 하게 되어 있다.
그렇다면 죄인에겐 사랑이라는 말은 적절치가 않다.
좋아한다고 하여야 한다.
고양이가 쥐를 좋아하는 것처럼 좋아할 뿐이다.
자기 유익을 위해서 좋아하는 것이다.
직설적으로 말하면 “난 당신을 내 기쁨으로 이용하고자 합니다” 라고 해야 한다
생각해 보라.
내가 저 사람을 만나서 결혼을 하여 내가 불행해진다면 어느 누가 결혼을 하겠는가? 모두가 결혼을 할 때는 상대방이 나를 기쁘게 해 줄 것이라고 믿기 때문에 하는 것이다.
그런데 결혼해 보면 서로가 서로를 자기 행복을 위하여 이용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래서 이기주의로 싸우고 급기야는 이혼을 하게 되는 것이다.
맞다.
죄인에게 있어 모든 것들은 자기를 기쁘게 하는 이용대상일 뿐이다.
그러므로 좋아하는 것들이지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죄인은 누구를 사랑할 수가 없다.
부모든 자식이든 남편이든 아내이든 모두가 자기를 사랑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자기 자신을 행복하게 하기 위한 도구일 뿐이다.
부모 자식이라 할지라도 자기를 힘들게 하면 미워하게 된다.
인간에겐 누구라도 자기를 힘들게 하고 아프게 하면 배척의 대상일 뿐이다.
그러므로 인간들이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라는 말은 나는 당신을 이용하고자 합니다! 라는 말이다.
나는 당신을 이용해서 내가 기뻐지고 싶습니다! 라고 해야 옳은 말이 된다.
남녀 간에 프로포즈를 할 때 난 당신을 내 행복의 조건으로 좋아합니다.
그러니 나와 결혼해 주세요! 라고 해야 옳다.
인간은 서로가 서로에게 이용대상일 뿐이다.
그러니 누군가가 나를 사랑한다고 하면 나를 통해서 자기 유익을 구하고자 하는구나! 라고 생각해라.
이용가치가 없으면 언젠가는 등을 돌리겠구나! 생각하라.
그래야 실망하지 않는다.
그런 자세로 결혼을 하라.
서로 서로 이용한다고 생각하고 결혼하라.
그래야 나중에 후회하고 이혼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상대방은 나를 사랑해서 결혼을 한다고 생각하면 그 결혼은 오래가지 못한다. 반드시 이혼하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누군가가 나를 사랑한다고 하여도 기뻐하지 말라.
그것은 기뻐할 일이 아니고 경계해야 할 일이다.
이용가치가 없으면 언제든지 등에 비수를 꼽을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라고 말하지 말라.
당신도 그런 사랑을 하고 있다.
당신은 아내나 남편을 사랑하는가?
그럼 아내나 남편이 무슨 짓을 해도 이해 할 수가 있겠는가?
우리는 상대와 사귐을 가질 때에는 이미 자기가 정한 법이 있다.
당신 마음에는 이해 할 것과 이해하지 못할 것이 이미 정해져 있다.
당신이 정한 것에 벗어나 나를 힘들게 하는 것은 용납하지 못한다.
그러니 그건 사랑이 아니라 이용하고 있는 것이다.
당신은 남편이나 아내가 바람을 피워도 사랑할 수가 있는가?
남편이나 아내가 바람을 피운다면 배신감이 들고 죽고 싶을 정도로 미워진다.
이건 본능적으로 일어난다.
왜? 미워지는가?
내 기쁨을 앗아갔기 때문이다.
나를 슬프게 하고 힘들게 하기 때문이다.
결국 남편이나 아내는 나를 기쁘게 해 주어야 하는 기쁨조였던 것이다.
이게 인간이다.
모두가 모두를 자기 기쁨을 위하여 이용할 뿐이다.
그러므로 남편이나 아내를 사랑한 것이 아니고 내 기쁨을 위하여
이용한 것뿐이다.
인간은 내가 기뻐지지 않는 그 어떤 것도 사랑하지를 않는다.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하여도 자기가 기뻐지기 위함입니다.
흔히들 가수나 영화배우나 스포츠 선수나 팬클럽이 있다.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을 응원한다.
그 사람이 좋아서가 아니라 그 사람을 통하여서 내가 기쁘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상대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다.
자기 사랑을 상대에게 전이시켜 놓은 것뿐이다.
연예인들을 보면 자기 팬들을 사랑한다고 한다.
팬 역시 자기가 좋아하는 연예인을 사랑한다고 한다.
자기를 좋아하기 때문에 사랑한다고 한다.
그러나 그 사랑은 이미 자기를 사랑한다는 전제로 하는 사랑이기 때문에
사랑이 아니고 좋아하는 것일 뿐이다.
언제든지 나를 좋아 하지 않으면 내 사랑도 변한다.
이처럼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 좋아함이다.
그러니 사랑한다고 말하지 말고 좋게 지내자고 하라.
우리 서로 서로의 유익을 위해서 좋게 지냅시다! 라고 하여야 옳다.
부부 간에도 사랑한다고 말하지 말고 좋게 지내자고 하라.
서로 기쁜 나쁘게 하지 말고 좋게 지내자고 말해라.
남편은 아내에게! 내가 기분 나쁜 일을 하지 말라고 하라.
아내 또한 남편에게! 내가 기분 나쁜 일을 하지 말라고 하라.
서로 간에 기분이 나쁜 일들을 자제하는 쪽으로 정치적으로 타협해 놓고 살아라
그래야 이혼하지 않고 살 수가 있다.
당신이 상대를 사랑할 수가 없다면 상대방에게 사랑을 기대하지 말라.
상대방도 당신과 동일하다.
사랑은 죄인은 할 수 없다.
그래서 성경은 사랑은 여기 있나니! 라고 하여 하나님만이 사랑 할 수 있다고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사랑이라는 단어는 하나님께 속한 단어이다.
예수 안에서만 사용할 수 있는 말이다.
예수 안에 들어가면 사랑 할 수가 있어진다.
예수 안에서 자아를 십자가에 못 박은 자만이 사랑 할 수가 있다.
자아가 죽은 자만이 상대를 사랑할 수가 있어진다.
자아가 죽어야 상대를 이용하고자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죽었다는 사실이 믿어질 그 순간엔 사랑이 된다
그런데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죽었다는 사실이 깨달아 진다는 것이 늘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이다.
그러니 우리는 온전한 사랑을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도 온전한 것이 되지 못한다.
그럼 우리는 주님 앞에서 주님 우리는 주님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라고 하여야 솔직한 것이다.
아니 주님을 사랑 할 수가 없습니다! 라고 하여야 한다.
우리가 아무리 주님을 사랑한다고 하여도 주님은 속지 않는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한다고 하면 주님은 또 무엇을 이용하고자 하는데! 라고 하신다.
이는 야곱이 이삭에서 장자의 축복을 받기 위하여 에서의 옷을 입고 나올 때
이삭은 야곱인 줄 알면서도 축복한 것과 같다.
이삭이 몰라서 속아 준 것이 아니라 에서가 아니라 야곱인줄 알면서도 축복하였다.
이삭처럼 속아 주시는 그 하나님의 마음을 깨달을 줄 알아야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 할 수가 있어진다.
부디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알아가는 은혜가 임하시길 기도한다.
고전 13:5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Secret Sunshine
2012년 8월 26일 주일 주보 광고
유식한 척 하다가 무식이 탄로 난 설교/ 박영돈 목사
유식한 척 하다가 무식이 탄로 난 설교
기독교 TV 방송에서 방영되는 설교를 듣다보면 은혜받기보다는 시험들 때가 많습니다. 얼마 전에도 몇 만 명이 모이는 대형교회의 저명한 목사가 설교하는 것을 잠시 들었습니다. 그런데 설교 중에 유명한 실존주의 철학자이며 소설가인 장 폴 사르트르에 대해 언급하면서 "그가 노벨상까지 받은 사람인데도 믿음이 없는 허무주의자였기에 죽음 앞에 두려워 떠는 비참한 말로를 맞이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사르트르가 노벨상을 받지 않은 것은 웬만큼 상식이 있는 사람이면 익히 아는 사실입니다. 그는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확정되었으나 그 상을 거부했습니다. 그래서 세계적인 화제가 된 사실을 기성세대 중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듯이 행세하는 그 목사는 그런 기본 상식조차 갖추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잘 모르면 설교를 준비하면서 한 번 확인이라도 해봤어야 하는데 그런 조심성도 없이 자신의 무지를 그대로 드러낸 것입니다. 그 목사는 확실한 근거도 없이 어디서 주워들은 얘기를 장황하게 늘어놓으며 허무주의의 괴수를 단죄하였습니다.
물론 사르트르는 극단적인 무신론자입니다다. 우리가 설교의 맥락에서 꼭 언급할 필요가 있다면 그의 잘못을 지적할 수 있습니다. 필자도 인간론 강의에서 그의 사상을 신랄하게 비판합니다. 그러나 그런 비판은 최소한 그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에 근거한 것이어야 합니다. 사르트르같이 일반대중들에게도 널리 알려진 저명한 인물을 강단에서 언급할 때는 각별한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자칫 잘못하면 목사의 무식이 들통 나 세간의 웃음거리가 될 뿐 아니라 개신교 강단에서 드러난 지적인 천박함이 한국교회 전체의 얼굴에 먹칠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 목사의 설교를 시청한 사람이 백만이 넘을 것입니다(그렇게 들었는데 실제 시청률이 얼마나 되는지는 확실히 모릅니다. 혹시 아는 분이 있으면 알려주기 바랍니다). 그 목사는 이번만이 아니라 자주 그와 유사한 실수를 범합니다. 이런 과오는 듣는 이들에게 그가 전하는 설교의 다른 내용까지 그 신빙성을 의심케 합니다.
사르트르 같은 허무주의자를 기독교의 입장에서 비판할 때도, 올바른 지식의 바탕위에서 최대한 공정하게 문제점을 지적하며 정중하고 온유한 비판의 자세를 잃지 않는 품격 있는 기독교의 이미지를 세상 사람들에게 전달해야 합니다. 강단에서 신앙과 하나님의 이름으로 너무도 무식하고 경솔하게 함부로 판단하고 정죄하는 무례함의 극치를 보일 때가 있는데, 이것은 일종의 영적 횡포이며 독선입니다다.
기독교인들이 신앙의 이름으로 세상을 향해 너무도 무례하게 굴 때가 많습니다. 성경은 존경할 자를 존경하라고 했다. 무신론자라고 해서 무조건 다 몹쓸 인간으로 매도해서는 안 됩니다. 신앙인들로부터 절대 본받지 말아야 할 것이 많은 반면 불신자들로부터도 배우고 도전받아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우리는 신앙의 입장에서 사르트르의 무신론적이고 허무주의적인 사상을 철저히 배격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같은 인간의 입장에서 사르트르가 인간의 불안한 실존의 문제를 끌어안고 치열하게 고민하며 자신의 철학과 신념에 충실한 삶을 살려고 몸부림친 사람이라는 점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세상 사람들의 고뇌와 생각을 알아야 세상에서 효과적인 증인의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사르트르가 노벨상 수상을 거부한 이유도 작가는 스스로 제도화되기를 거부해야 한다는 자신의 신념을 실천에 옮긴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면에서 그는 인간적으로 매력적인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들, 목사들 중에서도 명예와 감투에 껄떡거리는 위인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확실한지는 모르지만 어떤 대형교회 목사는 노벨상 수상을 겨냥하고 그에 이르는 수순으로 여러 가지 자선사업과 사회사업 등을 펼친다고 합니다. 참으로 어이없는 일입니다. 사르트르는 이런 목사들을 한없이 부끄럽게 합니다. 그는 극단적인 무신론자, 허무주의자였음에도 그의 허망한 신념에 충실한 삶을 살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존귀한 하나님의 자녀인데도 팥죽 한 그릇 같은 허망한 세상영광을 얻기 위해 영광스러운 하늘의 대의를 헌신짝처럼 내팽개쳐버립니다.
위에서 언급한 목사는 학식이 부족한 사람이라는 것을 자타가 인정합니다. 지금 그 점을 걸고넘어지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좀 무식한 사람도 귀하게 사용하시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목사가 다른 것에는 무식할지라도 성경에는 유식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과 마음을 아는 지혜에는 탁월해야합니다. 자신이 잘 모르는 것을 가지고 유식한 척하다가 낭패를 당하느니 자신이 능통한 성경말씀을 바르게 전하기만 하면 됩니다.
30분이라는 짧은 설교 시간에 성경본문을 기본적으로 강해하기도 벅찬데 왜 쓸데없는 애기를 늘어놓으며 소중한 시간을 태우고 있는지 참으로 안타까울 다름입니다. 그 목사의 설교에 성경강해라는 것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도대체 어떤 성경본문을 가지고 설교하는지조차 알 수 없을 정도로 설교본문과 내용은 완전히 제각기 따로 놉니다. 그런데 교인들은 그의 설교가 은혜롭다고 합니다. 요즘 교인들은 주님의 말씀을 들을 귀가 없는 모양입니다. 아니면 그 귀에 심각한 이상이 생긴 걸까요?
이 목사뿐 아니라 이런 유의 실수는 우리 목사들이 부지기수로 범하는 것입니다. 설교에 단골메뉴로 등장하는 록펠러, 조지 워싱턴, 링컨, 제시 페니등에 대한 일화는 확실히 검증되지도 않은 이야기들입니다. 한 번 유명한 목사가 그런 예화를 설교에 사용하면 다른 목사들도 덩달아 써먹기 시작해서 온 한국교회의 강단에 엉터리 얘기가 퍼지고 맙니다. 그렇게도 전할 메시지가 없어 교인들의 귀에 수없이 맴돌았던 식상하기 짝이 없는 예화 부스러기로 영혼들의 허기진 배를 더 허하게 만들어야 하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상당히 유식한 목사들도 예외는 아닙니다. 수만 명이 모이는 교회의 목사는 공부도 많이 했는데 설교 중에 조나단 에드워즈가 데이비드 브레이너드의 장인이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인디안 선교사로 활동하다가 중병에 걸린 데이비드 브레이너드를 자기 집에 기거하게 하고 자신의 딸 여루샤에게 간호하게 하였습니다. 여루샤는 브레이너드가 죽을 때까지 극진하게 그를 보살폈고 브레이너드가 사망한지 넉 달 후 꽃다운 나이에 자신도 열병에 걸려 사망했습니다.
여루샤와 브레이너드가 순수한 영적 사랑을 나누었다는 설화가 있고 여러 가지 추측이 무성합니다. 일설에 의하면 브레이너드가 죽기 직전에 그녀와 약혼을 했다고도 하는데 확실한 증거는 없는 얘기입니다. 그 목사가 조나단 에드워즈가 브레이너드의 장인이었다고 한 것은 분명히 틀린 말이며, 떠도는 풍설을 듣고 한 말이라 할지라도 확실한 근거가 없는 말을 한 것입니다.
그의 설교도 기독교 TV를 통해 방영되었으니 백만명이 넘는 사람이 들었을 것인데, 그 방송을 시청한 불신자나 평신도 중에는 그 사실을 아는 이들이 거의 없을 것이니, 앞에서 언급한 사르트르에 대한 무식한 발언같이 기독교를 우세스럽게 하지는 않아 다행인 셈입니다. 그러나 정확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는 강단에서 허위보도에 가까운 실언을 남발하는 것을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될 일입니다.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목사라는 어떤 이는 설교하면서 "유대인들이 미국과 세계의 경제계와 학계를 리드하는 탁월한 인물들이 된 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잘 섬기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무슨 망발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지금까지 거부하고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그들이 하나님을 잘 섬겨 복을 받았다니 이 목사가 과연 복음의 기본을 아는 자인지가 의심스럽습니다. 그런 사람이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교회지도자라니 말입니다.
유식한 척 하다가 무식이 탄로 난 전형적인 사례가 목사들의 설교를 비평한 정용섭 목사의 책에 잘 소개되어있습니다. 설교에 현대 신학자들을 자주 언급하는 비교적 박식한 목사가 한 번은 '존 로빈슨'이라는 신학자가 쓴 『신에게 솔직히』라는 책을 인용하며 "하나님을 정직히 이해하고 하나님 앞에 정직해지는 것이 신앙의 기본도리"라는 식으로 설교했습니다. 그러나 이 책은 하나님 앞에 정직하자는 단순한 내용을 담고 있지 않습니다. 그 당시 유행하던 사신신학에 가까운 극단적인 내재주의(자유주의)신학을 그 바탕에 깔고 있는 책입니다. 하나님의 초월성을 강조하는 전통적인 신개념을 배격하고 하나님의 전적인 내재성을 강조한 새로운 신개념을 주창한 책입니다.
현대신학에 깊은 조예가 없는 대부분의 목회자들은 이런 사실을 모를 것입니다. 일선에서 바쁘게 사역하는 목회자들이 방대하고 복잡한 현대신학에 능통하기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할 것앱내다. 그렇다면 차라리 존 로빈슨이라는 신학자를 언급하지 말고 그냥 '하나님 앞에 솔직하자'는 식으로 설교했다면 훨씬 나을 뻔 했습니다. 그랬다면 잘 알지도 못하면서 괜히 유식한 척 하다가 오히려 무식이 들통 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물론 많은 교인들이야 전혀 눈치 채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방송을 통해 널리 알려진 목사들은 자신의 설교를 듣는 귀가 많고, 그 중에는 유식한 척하나 무식한 것을 금방 알아채는 예리한 귀들이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유명세를 타는 목사일수록 강단에서 하는 말에 각별한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자신의 실수로 자기 자신만이 아니라 한국교회 전체를 웃음거리로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두 모르는 것이 많습니다. 필자도 그런 실수를 많이 합니다. 무명하기에 탄로가 나지 않았을 뿐입니다. 유식해질수록 자신이 무식하다는 지식에만 더 유식해질 뿐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확실히 모르는 사안을 설교에 언급해야 할 경우 반드시 책이나 인터넷을 통해 사실을 확인해야 합니다. 잘 알지도 못하는 현대 신학과 철학을 어설프게 읊어 유식한 척 하느니보다 십자가의 어리석음을 자랑하는 설교자가 되는 것이 백번 낫습니다.
십자가의 어리석음을 통해 계시된 하나님의 지혜의 부요함과 탁월함을 밝히 드러내는 설교가, 심오한 철학사상을 곁들여 멋들어지게 자신의 유식함을 뽐내는 설교보다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훨씬 더 유식하고 탁월한 설교일 것입니다.
박영돈 목사
성취지향의 신앙의 문제
기독교 신앙이 변질되고 타락하는 원인은
성취지향의 신앙을 교회가 가르치기 떄문이다
아래의 성취지향의 신앙 프로그램을 보라
1. 40일의 목적이 이끄는 신앙
2. 일천번제
3. 백일작정기도
4. 특별새벽기도
5. 수험생을 위한 특별기도
6. 365일 철야기도
7. 제자훈련
8, 단기 선교팀 ( 선교가 뭔지도 모르고 선교 여행이나 하는 일들 )
9. 고난주간
10.사순절
11. 총동원 전도주일
12. 전도특공대
13. 알파코스
14. G12
15 .뜨레스디아스
16. 영성훈련
17, 성령운동 (방언운동 .은사주의 운동 , 신사도운동 )
18. 교회성장운동
19. CCM 경배와 찬양
이런 것들이 사실상 교회 안에서 신자들에게 성취지향의 신앙으로 변질시켜서 참된 영적 신앙생활을 하지 못하게 하는 대단히 나쁜 프로그램들이다
물론 이것들이 교회안에서 신자들을 활력있게 하고, 능동적으로 신앙생활을 하도록 이끄는 요소가 어느 정도 있다는 것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또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이 바른 신앙, 참된 교회라는 것도 아니다
참된 신앙의 요소는 활기차고, 힘있고, 활동적인 요소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지금 진리가 없는 설교,. 성경적 신앙의 표류, 교회의 배도와 배교 ( 에큐메니칼 운동, ) 교회가 길을 잃어버렸다
이런 상태에서 교회가 . 신자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성취지향, 어떤 목표를 세워 그곳으로 돌격 앞으로 하는 신앙으로 교인들을 몰아대는 것이다, 기도원으로, 부흥회로, 단기선교로. 은사집회로, 00 특별 집회, 00, 특별 새벽기도 등등
교인들은 참된 성경적 진리가 없는 상태에서 성취지향의 신앙으로 뭔가를 이루고, 체험하고, 느끼는 잘못된 신앙으로 자신들이 신앙이 있다는 것을 스스로가 확인받고 다른 사람들과 교회에서 그렇게 보여주는 것에 즐거움과 기쁨을 가진다,
그것들은 심지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을 믿는 신앙이 아닌
자기 의, 자기 선으로 율법주의적이고, 비복음적인 신앙을 형성하게 된다
마치 로마천주교와 같이 자기의에 기반을 타락한 종교 생활로 이끌게 된다,
진정한 기독교 신앙이 없음에도 성취지향 프로그램만 열심히 하면 다 되는 줄 알고 있는 교인들이 얼마나 많은가?
목회자들은 더 비참하다
성경과 신학에 무지한 자신들의 공허하고 천박한 수준을 감추기 위해서 쇼, 개그, 프로그램, 밀어붙이식 목회와 신앙, 기복주의와 은사주의 혼합, 등으로 성취지향과 목표지향의 목회로 교회를 타락의 길로 이끄는 주범들이다,
그러나 성경에서 과연 교회나 그리스도인들을 어떤 사람인가?
진리에 굳건하게 선 교회, 신앙이어야 한다,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진리지향적인 길에서 하나님을 경외히고 예배하기를 요구하신다,
그렇기 떄문에 하나님은
구약의 이스라엘에 율법을 주시고,
그 율법을 순종하고 계명을 지키라고 강력하게 명령하셨다
신약에서도 복음은 진리이며, 서신서 역시 진리에 줄기차게 가르치고 명령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는 진리는 거의 희미하고
온통 성취지향의 싸구려 3류 패스트푸드 프로그램만 잔뜩 차려놓고 교인들에게 먹이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교회가 배도, 배교, 타락하고 교인들은 거짓된 성경과 교리에 무지한 신앙으로 교회를 출석만 하지 진리의 신앙이 없어 좁은길, 진리의 길, 십자가의 희생과 수고, 올바른 헌신이 없는 무지하고, 편리주의적인 신앙, 편안한 신앙, 문화 수용적인 교회를 수용하는 것이다,
성취지향의 신앙을 가르치고, 그런 신앙을 추구하는 교회는
결코 진정한 교회라고 할수가 없다
자신들의 신앙이 진리를 믿고 진리에 근거한 것인지
자아 성취 신앙 프로그램에 근거한 것인지 깊히 생각해보라
오인용 목사
밥 한 끼에 인색한 대형교회들
밥 한 끼에 인색한 대형교회들
무상급식이 가장 필요한 곳은 대형교회들이다
대형교회와 중소형교회를 구분하는 차이는 무엇일까? 사람들은 교회의 외형적인 규모와 성도들의 수에 따라 구분하려고 할뿐 예배형식과 교회운영 방식에서는 큰 차이를 느끼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대형교회와 중소형교회를 방문해 주일 하루를 보내다보면 눈에 잘 띄지 않지만 분명한 차이를 발견하게 된다. 예배를 마치고 바로 식당으로 달려가 보라.
대부분의 대형교회는 사역자나 교회 봉사자가 아니라면 식사비용을 지불해야 점심식사를 할 수 있다. 반면 대부분의 중소형교회는 교인들에게 무료로 식사를 제공한다. 사회적 갈등으로 주민투표까지 치른 학교 상황에 빗댄다면 중소형교회는 무상급식을, 대형교회는 부분적 무상급식을 실시하는 것과 같다.
지난 24일 치러진 서울시 무상급식 주민투표를 앞두고 대형교회 목회자들이 주민투표 참여를 독려하거나 무상급식을 반대하는 발언을 쏟아냈다. 이와 더불어 무상급식 주민투표를 독려하는 문자가 기독인들에게 대량으로 발송되면서 교회에 대한 사회적 비판이 잇따랐다. 목회자들에 대한 불법 선거운동 개입 논란까지 불거졌다. 목사가 예배 시간에 신자들에게 주민투표 참여를 설교하는 것이 종교상 특수관계 또는 지위를 이용해 주민투표에 부당한 영향을 끼치는 불법 선거운동에 해당한다고 선관위가 유권해석을 해왔기 때문이다.
왜 대형교회 목회자들은 무상급식에 대해 반대의 목소리를 높이는 걸까? 그들이 사역하는 교회의 주일 급식에 그 모든 것이 함축되어 있다. 대형교회의 급식에 대한 인식은 오세훈 서울 시장만도 못하다. 무상급식에 대해 보수와 진보가 모두 동의하는 것은 가난한 아이들에게는 무상급식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차이가 있다면 보수는 강남 3구의 투표율이 대변하듯이 부잣집 아이들은 돈을 내고 밥을 먹으라는 것이다. 진보는 부잣집 아이들까지 돈 내지 않고 밥을 먹게 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교회 급식은 학교 급식에도 미치지 못한다. 중소형교회들은 경제적 수준에 상관없이 누구나 밥을 먹을 수 있게 한다. 대형교회는 돈 있는 사람만 밥을 먹게 한다. 대형교회에서는 보호받아야 할 경제적 약자들이 오히려 식사자리에서 배척당한다. 대형교회들은 “그 많은 성도들에게 무료로 식사를 제공하려면 얼마나 많은 돈이 드는지 아느냐”고 반문할 것이다. 그토록 어려운 일을 넉넉하지 못한 중소형교회들이 실천하고 있는 것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대형교회의 경우 주일 예배가 5부, 6부까지 진행되어 전체 교인에게 식사를 제공할 필요도 없는데 말이다. 대형교회 목회자들은 교회의 식사문제에도 경제논리를 도입했다. 교회가 시장인가?
한 대형교회 담임목사는 교회가 커지면 교인들의 다양한 요구에 따라 먹을거리도 차별화되어야 한다면서 커피숍과 고급 카페테리아를 교회 내에 만들었다. 그의 논리를 덮고 있는 화려한 포장을 걷어내면 돈이 있는 사람은 교회 안에서 더 비싸고 좋은 음식을 먹을 수 있어야 하고, 돈이 없는 사람은 값싼 음식에 만족해야 한다는 주장에 불과하다. 사도바울은 고린도전서 11장에서 교회의 이런 행위가 주의 만찬의 진정한 의미를 훼손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故대천덕 성공회 신부(사진 좌측에서 두번째)가 세운 예수원은 매년 이곳을 찾아오는 순레자들과 공동으로 무상 식사교제를 나누는 오랜 전통이 있다
“17 내가 명하는 이 일에 너희를 칭찬하지 아니하나니 이는 너희의 모임이 유익이 못되고 도리어 해로움이라 18 먼저 너희가 교회에 모일 때에 너희 중에 분쟁이 있다 함을 듣고 어느 정도 믿거니와 19 너희 중에 파당이 있어야 너희 중에 옳다 인정함을 받은 자들이 나타나게 되리라 20 그런즉 너희가 함께 모여서 주의 만찬을 먹을 수 없으니 21 이는 먹을 때에 각각 자기의 만찬을 먼저 갖다 먹으므로 어떤 사람은 시장하고 어떤 사람은 취함이라 22 너희가 먹고 마실 집이 없느냐 너희가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빈궁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무슨 말을 하랴 너희를 칭찬하랴 이것으로 칭찬하지 않노라”(고전11:17-22)
초대교회 당시 주의 만찬은 ‘애찬’과 '성만찬‘이 결합된 형태였다. 교인들은 자신들의 경제적 수준에 따라 먹을 것을 준비해 와 교회에 모여 공동으로 식사교제를 나누었다. 이렇게 애찬을 진행한 후에 성만찬이 이어졌다. 그런데 고린도교회의 경우 부유한 일부 교인들이 음식을 준비하지 못한 가난한 사람들을 배제한 채 자신들끼리 식사교제를 했다. 바울은 이들의 행위가 주의 만찬을 심각하게 훼손한 행위임을 지적하면서 그들의 만찬은 주의 만찬이 아니라고 단언한다.
한 대형교회는 진정한 교회공동체를 회복한다는 취지하에 매달 성찬식을 진행한다. 주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심으로 예수님을 기념하는 성만찬의 경우 빈부격차에 상관없이 세례요인이면 누구나 참여할 기회가 주어진다. 그러나 예배를 마친 후 진정한 애찬은 이루어지지 못한 채 각각의 경제적 수준에 맞는 식당으로 뿔뿔이 흩어져야 하는 것이 현실이다. 교회 안에서 결코 주의 만찬이 될 수 없는 모습이다.
한 지방의 대형교회는 많은 식사를 준비하기가 시간적으로 물리적으로 힘들었는지, 매주 동일하게 칼국수만을 제공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료 급식의 원칙을 지키고 있다. 음식의 질을 낮출지언정 경제적 약자를 애찬으로부터 소외시키지 않으려는 노력이다. 규모와 상관없이 성경적인 교회를 지향하는 올바른 태도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주의 만찬을 온전하게 하기 위해서는 애찬과 성만찬에 걸림돌이 되는 교회의 규모를 줄이는 것이 보다 더 올바른 접근일 것이다.
교회에서는 경제적 능력과 상관없이 모든 성도가 동일하게 음식을 나누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차라리 집에서 식사를 하는 편이 낫다고 바울은 권면한다. 또 교회의 애찬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배려하지 않는 태도는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가난한 사람들을 부끄럽게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대형교회 목회자들이 귀 기울여야 할 말씀이다.
한국의 대형교회들은 거대한 외형을 유지하기 위해 초대교회의 아름다운 전통을 깨 버렸다. 더 나아가 초대교회가 보여준 유무상통의 전통을 사회 전체적으로 확산시킬 책임을 망각한 채 반성경적인 태도로 사회적 진보의 걸림돌이 되고 있다.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떠오른다.
The Voice/ 이은창
욥의 처와 롯의 처
믿음의 사람들이라도 아내가 반드시 함께 믿음을 갖게 되는 것은 아닌가 보다.
욥은 하나님께서 인정하실만큼 순전하고 의로운 삶을 '평생' 살아온 사람이지만 그의 아내는 도리어 어리석은 여자인 사실이 성경에서 나타난다.
물론 욥이 형통하고 이 세상에서 승승장구할 때에는 욥의 아내에게 욥은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하고 사랑스러웠을 것이다. 그러나 욥이 망하고 고난이 임하자 그의 아내는 당장 욥이 믿는 하나님을 떠난다. 어리석은 욥의 아내는 욥에게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온전함을 굳게 지키느냐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욥 2:9)라고 핀잔을 준다. 그 여인이 지금껏 욥과 함께 하나님을 믿은 척 한 것은 사탄의 말대로 이 세상의 축복 때문이었으리라.
롯의 아내 마찬가지로 소돔과 고모라를 사랑한 여인이었다. 그는 거의 강제적으로 유황불의 심판에서 구원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매우 작은 부탁, 즉 '뒤로 돌아 소돔과 고모라를 바라보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부탁을 멸시하고 뒤를 돌아본다. 그리고 소금 기둥이 되어 멸망한다. 그녀의 마음 속에는 하나님의 구원이 별 것 아니었나 보다. 멸망하는 이 세상이 너무나 아까와 뒤로 돌아보았으니 말이다.
계시록 18장을 보면 세상을 사랑하던 인간들의 절규가 들린다. "불타는 연기를 보고 외쳐 이르되 이 큰 성과 같은 성이 어디 있느냐 하며 티끌을 자기 머리에 뿌리고 울며 애통하여 외쳐 이르되 화 있도다 화 있도다 이 큰 성이여 바다에서 배 부리는 모든 자들이 너의 보해로운 상품으로 치부하였더니 한 시간에 망하였도다"(계 18:18-19).
여인들이여! 정신 차리라. 혹시 그대들이 롯의 아내는 아닌지, 욥의 아내는 아닌지 확인하라. 멸망할 세상의 허영과 사치에 마음이 가 있는 것은 아닌지, 하나님을 믿는 이유가 사탄의 주장대로 이 세상에 속한 허영과 사치를 위해 하나님이 주실 '복' 때문은 아닌지...
이 마지막 시대에 오직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하며 속사람을 성장시키는 여인이 있다면 참으로 귀하기만 하다. 그러나 필자의 눈에는 그리 흔치 않은 것 같다. "너희의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고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벧전 3:3-4).
스데반 황
목사도 평신도이다
마지막 때의 특징/ 오스왈드 챔버스
마지막 때의 특징
디모데후서 3:5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물질주의는 세상 끝이 올 때 힘을 잃을 것이다. 그러나 영성주의(Spiritualism)는 세상 끝에서 가장 강력한 힘을 나타내는 특징이 될 것이다. 모든 인류는 “보이지 않는 것”에 온 마음을 쏟게 될 것이다. 이때 이러한 영성주의 운동의 특징은 경건의 모양이 될 것이다. 즉, 겉으로 보기에 순결하며 많은 이로운 일들을 할 것이다. 따라서 택한 자들마저도 깨어있지 않으면 이러한 영성주의 운동에 속아넘어갈 것이다. 그러나 그 안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능력이 없으며 이는 십자가의 대속과 성령의 거듭나게 하는 역사가 없을 것이다.
세상 끝이 점점 다가오고 있다. 앞으로 우리는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더 고결한 도덕 운동과 거룩 운동을 보게 될 것이다. 더 유익을 주는 듯한 정부 체제, 인류에 유익을 주는 듯한 더 발전된 문명, 더 위대한 과학적 발견들과 지적 지식들, 특히 신체적인 건강과 개발은 마지막 때의 특징들이 될 것이다.
그러나, 갑자기 모든 것이 가루가 된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이 모든 인간의 ‘안녕’이 잿더미가 될 것이다.
이 시대의 영에 속지 않도록 하라. 주님의 재림을 바라며 기다리라. 롯의 아내처럼 세상의 안일에 물들거나 정들지 말라.
-오스왈드 챔버스
[2012-08-26] "지혜의 기도"
[2012-08-26] "주는 나의 참 친구"
현대교회를 장악한 거짓복음 / 아더 핑크
현대교회를 장악한 거짓복음
요즈음 보편적으로 인식되고 있는 사실은 기독교계 안에 영성이 쇠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건전한 교리가 급격하게 약해지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주님의 백성들은 복음이 여전히 널리 전해지고 있으며, 그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고 있다고 생각하며 위안을 갖습니다. 슬프게도 이들의 낙관적인 추측은 근거가 약하며 모래에 기초를 둔 것입니다.
만약 지금 선교 홀에서 전해지고 있는 메시지를 조사해 보거나, 일반대중 가운데 뿌려진 소책자를 면밀히 검토해 보거나, 옥외에서 전해지는 말씀을 주의해서 들어 보거나, 구령 캠페인에서 전해지는 설교나 강연을 분석해 보거나, 현대의 복음주의를 성경의 저울에 무게를달아보면, 요컨대, 참된 회심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 없으며, 죄인이 구원자(救主 : Saviour)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본질적인 것이 없으며,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변화된 삶의 열매가 없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결코 흠을 잡으려고 이 글을 쓰거나 남의 감정을 해치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완전함을 찾고 있는 것이 아니며, 완전함을 발견하지 못하기 때문에 불평하는 것도 아닙니다. 또한 다른 이들이 우리가 생각하는 대로 행동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들을 비평하는 것도 아닙니다.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은 훨씬 더 심각한 문제입니다. 이 시대의 "복음주의"는 철저하게 표면적일 뿐만 아니라 근본적으로 결함이 있습니다. 오늘날의 복음주의는 죄인을 그리스도께로 나오도록 호소하는 기초가 전혀 없습니다. 오늘날 복음주의 안에는 하나님의 긍휼이 하나님의 거룩보다
훨씬 더 크며, 하나님의 사랑이 하나님의 진노보다 훨씬 더 크다는 균형을 잃은 슬픈 양상이 있을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죄를 알게 하기 위하여 주신 것들이 치명적으로 빠져 있습니다.
비난받아 마땅할 자기를 드러내는 멋진 찬양, 유머 있는 익살, 재미있는 일화 등은 도입되었지만, 오직 복음만이 효과적으로 비출 수 있는 어두운 배경은 의도적으로 삭제되었습니다. 그러나 정말로 심각한 것은 이러한 것이 부정적인 면의 한쪽에 불과하다는 점입니다.
더욱 심한 것은 복음이 현대의 싸구려 복음전도자들에 의해 값싸게 팔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들이 전하는 메시지의 내용은 단지 죄인의 눈에 먼지를 날리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의 혼은 전혀 의심받지 않고 사용되는 마귀의 마취제로 잠에 빠져 있습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정통" 설교에서 전해지는 "메시지"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자들은 치명적으로 속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길이 사람에게는 옳은 길로 보일지라도, 하나님께서 주권적인 은혜의 기적으로 간섭하지 않을 경우, 그 길을 따르는 자는 결국 그 끝이 사망의 길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자신들이 하늘(천국)을 향해 가는 중이라고 확신하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후에 지옥에서 깨어날 때 참혹한 환멸을 갖게 될 것입니다!
복음이란 무엇인가요? 하나님을 대적하는 반역자를 사악함 가운데서 편하게 만드는 하늘로부터 전해진 좋은 소식인가요? 미친 듯이 쾌락을 추구하는 젊은 사람들에게 "믿기만" 하면 장차 두려워 할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확신을 주고자 주어진 것인가요? 혹자는 대부분의 "복음전도자들"이 복음을 제시하는 방식에 - 오히려 왜곡시킨 방식에 - 비추어 그렇게 생각할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우리가 "회심한 자들"의 삶을 바라 볼 때, 더욱 그러할 것입니다.
어느 정도 영적 분별이 있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사랑하셔서 하나님의 아들이 자신들을 위해 죽으셨으며, 단지 "그리스도를 개인적인 구주로 받아들임"으로써 모든 죄(과거, 현재, 미래)를 완전히 용서받았다고 확신하는 것은 돼지 앞에 진주를 던지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반드시 깨달아야 합니다.
복음은 별개의 것이 아닙니다. 복음에 앞서 계시된 하나님의 율법과 무관한 것이 아닙니다. 복음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공의를 완화시켰다거나 그분의 거룩의 표준을 낮추셨다고 공표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와는 정반대로, 복음을 성경적으로 설명할 때 복음은 하나님의 공의와 단호함과 그분께서 죄를 절대적으로 혐오하신다는 것에 관한 가장 확실한 실증과 가장명확한 증거를 보여줍니다.
슬프게도 육체의 자랑은 수많은 자격 없는 자들로 하여금 그들보다 훨씬 지혜로운 자들이 지나가기를 두려워하는 곳을 뛰어들도록 방임합니다. 현재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비참한 상황을 초래한 원인은 이러한 자격 없는 자들이 늘고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들과 모임들이 물질적이고 세상적인 이유는 이러한 "회심자"들로 가득 채워졌기 때문입니다. 독자들이여, 복음은 결코 그러한 것이 아닙니다. 복음은 결코 죄들을 비추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은 자기 백성들의 범법으로 인한, 구속을 성취하기 위하여 자신의 사랑하는 아들을 치신 하나님의 무시무시한 공의의 검을 보여줍니다.
복음은 율법을 무효로 하기는커녕 오히려 율법의 저주를 견디어내시는 구원자(구주)를 보여줍니다. 갈보리는 엄숙하고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죄에 대한 하나님의 증오를 시간 안에서와 영원 안에서 계속 줄 것입니다.
당신은 세속적인 사람들에게 가서, 그들이 우상에 집착하고 그 마음이 여전히 죄를 사랑함에도 불구하고 지금 그리스도를 단지 개인적인 구주로 받아들이기만 하면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말함으로 복음이 존귀하게 되거나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신다고 생각합니까?
만약 그렇게 한다면, 그들에게 거짓말을 하는 것이며, 복음을 왜곡시키고, 그리스도를 모욕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음란한 것으로 변개시키는 것입니다.
틀림없이 몇몇 독자들은 앞에 기술된 우리의 "거칠고" "비평적인" 말에 반대하며 다음과 같이 물을 것입니다. "영감을 받은 베드로 사도가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분명히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고 말하지 않았던가요? 그렇다면 오늘날 동일하게 죄인들에게 말하는 것이 틀렸단 말인가요? 우리가 그렇게 하는 데에는 신성한 근거를 가지고 있지 않은가요?"
그러한 말씀이 성경에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한 말씀이 성경에 있기 때문에 훈련받지 않은 많은 표면적인 사람들이 모두 그 말씀을 그대로 말하는 것을 옳다고 단정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도행전 16:31이 결코 어중이 떠중이 군중들에게 전해진 것이 아니라 특정개인에게 전해졌다는 사실을 지적하고자 합니다. 그 말씀은 아무에게나 전해진 메시지가 아니라 복음이 최초 전해졌던 자들과 같은 성품을 가진 자에게 전해진 특별한 말씀이라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성경의 구절들은 절대로 왜곡되어서 안 되며, 본문에 따라 고찰하고, 해석하고, 적용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기도하듯이 숙고하고, 주의 깊게 명상하며, 시간을 드려서 연구해야 합니다. 오늘날과 같은 급변하는 시대가 만든 이러한 겉만 번지르르한 가치 없는 메시지를 전하는 것은 이러한 점에서 잘못된 것입니다.
사도행전 16:31을 보십시오. 무엇을 발견할 수 있습니까? 사도와 그의 동료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라고 말한 때가 언제이며 누구에게 말했는가요? 복음의 말씀이 진실로 전해진 자들의 특성을 뚜렷하게 그리고 완벽하게 묘사하는 일곱 가지 대답이 있습니다. 이들 일곱 가지 항목들을 간단히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독자들은 이 항목들을 주의 깊게 숙고하시기 바랍니다.
첫째, 그 말씀을 들은 사람은 바로 전에 기적을 일으킨 하나님의 권능을 목격했습니다.
"이에 갑자기 큰 지진이 나서 감옥의 기초가 흔들리고 즉시 모든 문이 열리며 각 사람의 결박이 풀린지라"(행16:26).
둘째, 그 결과로 그 사람은 매우 동요되어 스스로 자기 생명을 포기하려 했습니다.
"간수가 잠에서 깨어 옥문들이 열린 것을 보고 죄수들이 도망친 줄 생각하고, 검을 뽑아 자결하려 하거늘..."(27절).
셋째, 그는 경위를 알고 싶었습니다.
"간수가 등불을 달라 한 후..."(29절).
넷째, 자기 만족을 누리며 살던 그의 삶이 산산이 부서졌습니다.
"...뛰어 들어가 떨면서..."(29절).
다섯째, 그는 하나님 앞에서 합당한 태도를 취하였습니다.
"...바울과 실라 앞에 와 엎드리고..."(29절).
여섯째, 그는 하나님의 종에게 존경과 경의를 보였습니다.
"그들을 데리고 나와..."(30절).
일곱째, 자신의 혼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고 물었습니다.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
우리가 기꺼이 배우고자 한다면 우리를 가르치는 확실한 것이 있습니다. 그 간수는 "단순히" 믿기만 하라는 권면을 받은 경솔하고 부주의하고 무사태평한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전능하신 역사가 자기 안에 이미 역사했다는 명백한 증거를 보여주는 자입니다.
그의 혼은 깨어 있었습니다(27절). 그 간수의 경우, 그의 잃어버린 상태를 깊이 느끼도록 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의 잃어버린 상태를 분명하게 느꼈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사도들이 반드시 회개하도록 설득하는 것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그의 완전한 태도는 그가 진정으로 회개한 자임을 보여줍니다. 자신들의 타락한 상태에 완전히 눈이 멀어 있고 하나님께 대하여 완전히 죽어있는 자에게 간수에게 전해진 말씀을 적용하는 것은 방금 물에서 나와 후각이 없는 자의 코에 후자극제(嗅刺戟劑 : 냄새로서 각성, 자극시키는 약)를 갖다대는 것보다 더 어리석은 것입니다.
독자들은 이 글의 비평을 읽고 사도행전을 주의 깊게 통독하며, 과연 사도가 어중이떠중이 청중이나 우상을 숭배하는 이교도들에게 연설을 할 때 "단순히"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라고 말한 경우가 단 한 번이라도 있는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세상이 구약 성경을 받아들이기 전에는 신약 성경에 대하여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던 것처럼, 그리고 세례 요한이 그리스도에 앞서서 회개로 부르기 전에는 유대인들이 그리스도의 사역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던 것처럼, 구원받지 못한 자들의 마음에 율법이 적용되기 전까지는 복음을 받아들이기에 적절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율법으로는 죄를 알게되기" 때문입니다(롬 3:20). 미리 경작하지 않았거나 일구지 않은 땅에 씨를 뿌리는 것은 시간을 허비하는 것입니다!
온통 죄를 짓는 일에 몰두하는 자에게 그리스도의 대속을 소개하는 것은 개에게 거룩한 것을 주는 것입니다. 회심하지 않은 자는 반드시 그가 인격적인 관계를 가져야 할 분의 성품과 자신에 대한 그분의 권리와 의로운 요구와, 그가 극악무도하게 그분을 무시하고 자기 길을 가고 있다는 사실에 대하여 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슬프게도 그리스도의 구원의 본질이 오늘날의 "복음전도자"들에 의해 잘못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는 죄에서 구원해 주시는 구원자 대신에 지옥에서 구원해 주시는 구원자를 전합니다. 바로 이 점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치명적으로 속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수많은 사람들이 자기 육욕과 세속적인 마음으로부터 구원받고자 하는 갈망이 조금도 없이 불호수만 피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신약 성경에서 그리스도에 대해 맨 처음 언급하는 곳은 "그녀가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그의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다가오는 진노로부터가 아니라) 그 죄들에서 구원할 것임이라"입니다(마 1:21).
죄의 엄청난 가증함에 관하여 깨닫는 자, 양심에 죄의무거운 짐을 느끼는 자, 그리하여 죄를 지긋지긋하게 싫어하는 자, 죄의 무서운 지배로부터벗어나고 싶어 하는 자에게는 그리스도께서 구원자가 되시지만, 다른 이에게는 구원자가 되시지 않습니다.
만약 그리스도께서 여전히 죄를 사랑하는 자들을 "지옥으로부터 구원하신다면"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의 사악함을 묵과하며, 하나님을 대적하여 그들을 편드는 죄의 사역자가 될 것입니다. 이 거룩한 분을 그같이 고소하는 것은 얼마나 끔찍한 신성모독인가요?
만약 독자가 "그리스도께서 나를 구원하실 때, 나는 죄의 가증함을 알지 못했고, 죄의식으로 복종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면, 우리는 즉시 이렇게 대답합니다. "당신은 결코 구원받은적이 없거나, 당신이 이전에 구원받았다고 생각했을 때 실제로는 구원받지 않았습니다".
참으로 그리스도인이 은혜 안에서 자라감에 따라 죄가 무엇인지를 -<하나님께 대한 반역> - 더욱 분명하게 깨닫고, 더욱 더 죄를 미워하고 죄에 대하여 슬퍼하게 됩니다. 그러나 양심이 결코 성령에 의해 찔린바 된 적이 없는 자와 그 마음이 하나님 앞에서 회개한 적이 없는자도 구원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떠한 사실의 영역에서도 존재하지 않는 것을 상상하는 것과 같습니다.
"온전한 자에게는 의사가 필요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필요하니라"(마 9:12). 진정으로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위대한 의사에게서 치료받기를 구하는 자만이 죄로 병든 자입니다. 그러한 자만이 하나님의 이름을 모욕하는 죄의 행위와 혼을 더럽히는 죄의 오염으로부터 구원받기를 간절히 바라는 자입니다.
그리스도의 구원이 죄로부터의 구원이요, 죄를 사랑하는 것으로부터의 구원이요, 죄의 지배로부터의 구원이요, 죄의 교활함과 죄의 형벌로부터의 구원이기 때문에, 복음전도자의 가장 중요한 임무와 주된 사역은 죄에 관하여 선포하고, 죄의 열매가 아닌 죄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정의하고, 죄 안에 있는 무한한 극악성을 보여주며, 마음속에서 죄의 다양한 역사를 찾아내고, 영원한 형벌이 바로 죄의 공로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아아, 복음전도자가 죄에 관하여 선포하는 것, 단지 죄에 관하여 상투적으로 몇가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관점에서 죄가 무엇인가를 선포하는 것은 그를 유명하게 만들지 않고 청중들의 관심을 끌지도 않을 것입니다. 분명 그러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칭찬을 얻는 것보다 사람의 칭찬을 사랑하는 자와, 구령(救靈)보다 자기 봉급에 더 가치를 두는 자는 그에 알맞은 임기웅변의 조치를 취하며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말씀의 선포는 사람들을 쫓아내는 것이다!"
이에 대한 우리의 대답은 "신실한 말씀을 선포함으로 사람들을 쫓아내는 것이 부정하게 육체와 영합하여 성령을 쫓아내는 것보다 훨씬 더 낫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복음전도자들은 그리스도의 구원이란 용어를 잘못 전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복음전도자들이 전하는 내용은 "구원은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며 값없이 선물로 받는 것이며,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을 위하여 모든 것을 이루셨기 때문에 아무 것도 남은 것이 없고, 단지 그리스도의 피의 무한한 공로를 믿고 신뢰하기만 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개념이 지금 "정통" 기독교계에 널리 유행하고 있고, 그들의 귀가 멍하도록 자주 듣고 있으며, 그들의 마음에 깊이 뿌리를내리고 있어서, 이제 누군가가 이의를 제기하고, 그것이 부적절하고 한쪽으로 치우쳐서 사람을 미혹하며 잘못된 것 이라고 공개적으로 비난하면, 그는 즉시 이단이라는 낙인을 찍히고 행위 구원을 가르침으로 그리스도의 완성된 사역을 손상시킨다는 비난을 받습니다.
구원은 은혜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구원은 오직 은혜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타락한 피조물이 하나님께 공로를 인정받거나 은혜를 얻을 만한 일을 아무 것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혜는 거룩을 희생하면서 까지 역사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의 거룩은 결코 죄와 타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한 구원은 값없는 선물로서, 오직 빈손으로 받아야 하며, 여전히 세상을 굳게 쥔 손으로는 결코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죄인을 위하여 모든 것을 이루셨다"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결코 배를 채우지 못하는 돼지 먹이인 곡식 껍질로 죄인의 배를 채우시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죄인들을 먼 나라에서 돌아서게 하셔서 일어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서 자기 죄들을 인정하게 하시지 않습니다. 이러한 것들은 죄인 스스로가 반드시 해야 할 행동입니다. 참으로 이러한 것들을 행함으로 구원을 받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또한 탕자가 계속해서 아버지에게서 떨어져 죄악 가운데 있는 동안은 아버지의 입맞춤과 반지를 받을 수 없는 것 같이, 탕자가 이러한 것들을 행하지 않고는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구원에 이르기 위해서는 "믿는 것" 이상의 어떤 것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께 대한 반역으로 단단해진 마음은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가질 수 없습니다. 먼저 반드시 그 마음이 부서져야 합니다. 성경은 "너희도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그와 같이 멸망하리라"고 말합니다(눅 13:3). 회개도 믿음과 똑같이 구원에 필수적입니다.
그렇습니다. 회개 없는 구원은 없습니다. "그 후에 회개하지도, 믿으려 하지도 아니하였음이니라."(마 21:32). 모든 순서는 분명히 그리스도께서 정하셨습니다. "너희는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 1:15)
회개는 죄를 슬퍼하는 것입니다. 회개는 마음으로 죄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회개는 죄를 버리고자 마음으로 결심하는 것입니다. 참된 회개가 있는 곳에 은혜가 자유로이 역사합니다. 왜냐하면 거룩의 요구는 죄를 버릴 때 만족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전도자는 반드시 다음과 같이 외쳐야 합니다. "사악한 자는 자기 길을 버리고 불의한 자는 자기 생각을 버리고 (아담 안에서 떠났던)주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분께서 그를 긍휼히 여기시리라"(사 55:7).
복음전도자의 책무는 그의 청중들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병기를 버리도록 요구하여, 그리스도를 통하여 긍휼을 얻도록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구원의 길에 대한 정의가 잘못 내려져있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현대의 "복음전도자"들은 죄인이 지옥을 면하며 확실히 하늘(천국)을 가기 위해서는 단지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받아들이기만 하면 된다고 회중을 안심시키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가르침은 죄인을 완전히 잘못 인도하는 것입니다. 누구도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배척하면서 동시에 구주로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복음 선포자가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자는 또한 주님으로서 그분께 완전히 복종해야 한다'고 부언하기는 하지만, 회심자가 그와 같이 하지 않더라도 하늘이 확실하게 보장된다고 주장함으로써 즉시 그러한 말을 쓸모 없게 만듭니다. 그와 같은 주장은 마귀의 거짓말 가운데 하나입니다. 영적으로 눈먼 자들만이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권위를 무시하거나 그분의 멍에를 거절하는 자도 구원하실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독자들이여, 그것이 은혜가 아니라 수치인 이유는 그리스도를 불법을 장려하시는 분으로 뒤집어씌우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주님(Lord)의 직분으로 하나님의 영예를 유지하시고, 하나님의 통치를 도우시며, 하나님의 법을 집행하고 계십니다.
만약 독자들이 두 개의호칭이 등장하는 누가복음 1:46,47, 사도행전 5:31, 베드로후서 1:11, 2:20, 3:2, 3:18을 본다면, 항상 "구주와 주님"이 아니라 "주님과 구주"임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왕권에 복종한 적이 없고, 그분을 자신의 마음과 삶 가운데서 왕위에 앉힌 적이 없으면서도 여전히 그분을 자신의 구주로 믿는다고 생각하는 자들은 속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그들을 환상에서 깨어나게 해 주시지 않는다면, 그들은 오른 손에 거짓을 쥐고 영존하는 타오르는 불 속으로 떨어질 것입니다(사 44:20). 그리스도는 "자신을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창시자"가 되십니다(히 5:9).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주님 되심에 복종하지 않는 자들은 그분께 대해 "우리는 이 사람이 우리를 다스리는 것을 원치 아니한다"라는 태도를 취하는 것입니다(눅 19:14).
독자들이여, 잠깐 멈추고 정직하게 다음의 질문을 직시하기 바랍니다.
"당신은 그분의 뜻에 복종하고 있습니까? 당신은 진정으로 그분의 명령을 지키려고 노력하고 있습니까?"
슬프게도 오늘날 하나님의 "구원의 길"은 거의 알려지지 않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구원의 본질은 거의 보편적으로 오해되고 있으며, ‘하나님의 구원’이란 용어는 모든 방면에서 잘못 전해지고 있습니다.
지금 선포되고 있는 "복음"은 십중팔구 진리를 벗어났으며, 수많은 사람들이 하늘(천국)을 향하고 있다고 확신하지만, 사실은 가능한 빨리 지옥으로 서둘러 가고 있습니다.
기독교계 안에 이러한 사태는 심지어 "비관론자"와 "기우가 심한 사람"이 생각하는 것보다도 훨씬 더 나쁩니다. 우리는 대언자가 아니며, 결코 대언서의 예언을 고찰하는데 깊이 빠지지 않을 것입니다. 필자보다 더 지혜로운 사람들이 자주 그렇게 행함으로 스스로 어리석은 자가 되었습니다. 솔직히 말하건대 우리는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알지 못합니다. 영국에서조차 종교적인 상황은 150년 전보다 훨씬 더 나쁩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음의 사실을 심히 두려워합니다.
하나님께서 진정한 부흥을 주시지 않는다면, 머지 않아 곧 "어둠이 땅을 덮을 것이며 짙은 어둠이 백성들을 덮을 것입니다"(사 60:2). 왜냐하면 참된 복음의 빛이 급속히 사라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판단컨대 현대의 "복음주의"는 모든 "시대의 표적들" 가운데서 가장 심각한 것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아더 핑크, 1886-1952)